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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바라보며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 생각난다. 머피의 법칙이란 미국 항공 기술사였던 ‘머피’ 라는 사람이 ‘충격 완화장치’를 위해 수 없이 많은 실험을 거듭하다 결국엔 완전히 실패해 버린 사건의 일화에서 비롯된 말 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잘못된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항상 잘못된 것이다(If anything can go wrong, it will)”.
이민 생활이 바로 그렇다. 한국에서 살기 힘들어 미국으로 이민 와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미국 생활이 생각보다 점점 어려워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열심히 일해서 살만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병이 들기도 한다. 집세와 물가는 인상만 되고 도저히 인하될 것 같지 않다.
미국 상 하 국회의원들은 이민 법안을 놓고 곧 통과될 것 같이 말하고 있지만 언제 사실상 그 법안이 통과되어 우리의 신분 문제가 해결될지
알 수 없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다가도 죄악에 사로잡혀 다시 무너지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다.
국제적인 상황도 다르지 않다. 2001년 9.11 테러사건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약 5년이 흘렀다.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과 알 케이다(Al-Qaeda) 조직을 제거하기 위해 아프카니스탄(Afghanistan)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오사마 빈 라덴은 찾지 못했다. 또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을 제거하고 그의 정권을 민주화 시키기 위해 이라크(Iraq)를 침공했다. 전쟁을 계속 진행 중이고 다행히 사담 후세인을 체포했지만 그를 사형 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사이 쓰나미(Tsunami)로 인해 동남아 에서만 28만 명이 죽었다. 이후 파키스탄에서는 짧은 지진이 있었는데 한번에 약 5만 명의 인명 피해를 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 ‘대포동 S’ 미사일을 발사해 전 세계가 술렁이고 있다.
조국 한국의 여러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의 삶 또한 풍전등화(風前燈火)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런 불안한 모습의 머피의 법칙은 한 번
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는 도미노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떻게 이것들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걸까? 그것은 역사적인 관점이 아닌 복음의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다시 재 조명 해야 한다. 사건을 볼 때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는 굉장히
중요하다.
역사적인 관점과 복음적인 관점은 천지차이다. 역사적인 관점이란,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 라고 사실만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적인 관점은 죽은 예수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믿을 때, 받아들일 때 그의 죽음은 나에게 새로운 힘과 능력이 되어 삶을 변화 시키고 인생을
새롭게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왜 우리의 복음의 근원이 되시며 우리의 삶을 새롭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일까?
본문을 통해 한마디로 해답을 주신다. 그것은 피 흘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한 구절만 이해하면 된다. 이
한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면 히브리서 전체를 이해 하는데 무척 도움이 될 것이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리라”(22절).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사함과 용서함에는 전재가 있는데 그것은 ‘피 흘림’ 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 받기 위해, 새로운 세계를 살기 위해 그냥 된 것이 아니라 피 흘림 이라는 대가를 분명히 지불했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15절). ‘죽으사’ 라는 단어는 ‘다나토사’ 라는 말과 같다. 이 뜻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죽음을 말한다.
우리가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죽는 완전한 대가를 지불을 의미한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맞이하는 위기상황들이나 국제사회의 문제들은 영적의 눈으로 볼 때 죽음의 증상들이다. 개인이 죽어가고 사회가 죽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죽어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인간에게는 없다.
이것은 피 흘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살이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복음의 관점으로 재 무장을 해야
한다.
B.C.49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로마는 원로원과 폼피우스(Pompeius)장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
변방에는 루비콘(Rubicon)강이 흘렀다. 루비콘 강은 로마제국 안에 있는 경계선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6.26 전쟁 일어나기 초기에
삼팔선 같은 것이다. 초기에 삼팔선은 누구든지 쉽게 넘어 다닐 수 있었다. 루비콘 강 역시 초기에는 같았다.
누구든지 강을 건널 수 있었고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변방에는 줄리어스 시져(Julius Caesar)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로마의 원로원과 폼피우스는 내심 그를 경계했다. 그래서 만일 시저가 제국 내에 있는 경계선 루비콘강을 건너 온다면 로마를 침략해 황제가 되려 하는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줄리어스 시져가 강을 건너는 도하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별로 큰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을 접한 원로원과
폼피우스는 시져가 흑심을 품었다고 결론을 내린 후 시져와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전쟁은 시져의 승리였다. 결국 시져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신학자들은 보통 십자가의 사건을 “루비콘 강을 건넜다”라고 표현한다. 당대의 기록을 보면 십자가의 사건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곳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들은 많았다. 로마의 땅은 굉장히 넓었다. 유대 땅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났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일은 로마의 역사에 묻혀 질만한 작은 사건 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구원을 받고 개인이 구원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로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부활 하셨고 부활의 역사는 로마를 통해서 로마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로마는 죽어 사라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같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십자가의 두 강도 얘기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똑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한 사람은 낙원으로
갔고 다른 한 사람은 지옥에 갔다.
스텐리 존스(Stanley Johnson)는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인도의 살아있는 혼 이라
불리었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함께 공개토론을 한 적이 있다. 간디는 인도의 위대한 성현
이었다. 그의 비 폭력 사상은 인도와 전 세계를 강타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텐리 존스가 그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간디는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적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한 사람의 도덕 선생으로만 믿었던
때문이었다. 위대한 도덕 선생으로만 이해했을 때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 나를
위한 복음 이라는 확신 이라는 복음의 관점을 갖고 살 때 새로운 삶과 역사는 시작된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해야 하는 두
번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 원인을 우리가 저지른 죄에서 찾는다. 말씀을 잘 읽지 않은
일,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일, 혹은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에서 원인을 찾기 쉽다.
이런 생각을 보통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한다. 어떤 결과가 있었을 때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믿고 그 원인을 치료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원인이 우리가 저지른 죄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는 한 단계 높은 차원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죄는 이미 대가를 치렀다는 점이다. 우리가 붙잡고 해결하고 싶어하는 그 죄를 이미 해결한 자가 있다.
그것은 피 흘림이다. 죄를 붙잡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피 흘림을 붙잡았을 때 사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 6).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확증해 주셨다. 이 말씀은 이미 우리들을 용서하셨다는 뜻이다.
과거의 저지른 모든 죄와 현재 짓고 있는 죄까지 용서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도 이미 용서함 받았다고 선포하신다.
우리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용서함 받은 죄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붙잡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인생을 조금만 살아봐도 죄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 땅의 모든 위기와 죽음의 현상들을 죄와 싸워서 해결할 수 없다.
사무엘 상 17장을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얘기가 나온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과 익숙하게 다룰 수 있었던 물 맷돌로
골리앗의 정수리를 쳐서 쓰러트렸다.
그러나 골리앗을 죽였던 것은 다윗의 물 맷돌이 아니라 골리앗이 차고 있던 칼 이었다. 다윗은 그 칼을 빼서 골리앗의 목을 쳤다. 신앙의 역사에는 피 흘림이 있다. 사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 피 흘림이 있었다. 그러나 이 피 흘림은 다시 사망을 죽였다.
오늘 우리에게는 위기가 닥친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역설을 붙잡으면 위기를 이기고 그것보다 더 큰 기회가 다가온다. 우리에게
가장 큰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붙잡은 믿음이다.
‘딤채’ 는 김치 냉장고를 뜻하는 단어다. ‘딤채’ 는 조선시대 중종
때 쓰던 단어였다. 김치의 옛 단어다. 후에 딤채는 변화되어 ‘김치’로 표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딤채, 즉 김치 냉장고를 개발할 때 가장
많이 신경을 준 부분이 있다.
그것은 김치 원조의 맛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김치 원조의 맛은 겨울에 김장 독에 담긴 온도였고 그것을 유지하는 기술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이렇듯 김치 냉장고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도 원래의 것, 원조의 줄기를 찾아 정성을 들인다. 신앙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것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길은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아니라 본질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이런 복음의 관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우리 삶은 머피의 법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법칙으로 지배 받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