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안 보태고 길을 가다가 100m 간격으로 볼 수 있는 교회의 교단교파가 "대한 예수교
장로회" 이다
장로교도 고신,합동,통합등 여러 교단교파로 나눠져 있는데 오늘은 어떻게 해서 이 교단교파가 형성되었고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어렸을적 본인이 다니는 교단교파가 어디인지 정확히 몰라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
현재 우리나라의 장로교는 크게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와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로 나눠진다.
기장은 단 하나의 교단교파으로 이루어져 있고 예장은 합동,고신,통합등의 교단교파로 이루어져 있다.
그 분열의 시작은 김재준목사님(자유주의 신학) 박형룡목사님(근본주의 신학)신학적인 성향 차이에
따라서 였다. 김재준목사님의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목회자 및 신학자들이 모인 교단이 기장이 되어
예장과 갈라지게 되었다.
한국 장로교의 역사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은 곧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이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인 서상륜 등은 비록 국외에서이긴 하지만 선교사가 입국을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쪽복음(한 개의 복음서 내용만 담은 성경책자)을 가지고 복음의 씨를 뿌려 교회의 터전을 닦았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 최초의 장로교인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이자 개신교회는 소래(송천・松川)교회가 황해도(1884년)에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 총신대학 양지 캠퍼스에는 소래교회를 복원하여 옛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고 느끼도록 하고 있다.
1884. 9. 22 미국 북장로교에서 의료 선교사 알렌(H.N.Alen)이 입국하여 의료 봉사로 복음 전도의 길을 열고 선교 활동을 한 이후,
1885. 4. 5 부활절에 마침내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G.Underwood)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부임 이후 얼마 안되어서 압록강에서 32명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는데, 이는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이 땅에 신앙을 고백하는 장로교인이 많이 존재했었음을 말해 준다.
초기에 설립된 장로교회들을 보면 소래교회, 서울의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 안동교회, 평양의 장대현교회 등이다.
이후 이들 교회는 크게 부흥하여 인근 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188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소속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경남 일대에서 선교 활동을 폈으며,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1893년에는 선교사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교회 설립이 본격화되고 교세가 증가하자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이 <장로회 선교 공의회-Presbyterian Mission Council>를 조직하여 선교 정책과 활동 방향을 의논하게 되었다.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함경도와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폈다.
1901년에 조선인 장로들도 참여하여 <조선 예수교장로회 공의회>로 재조직하였다.
1901. 5. 15에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 개교하였다.
이렇듯 제각기 진출한 4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 장로교회의 창설을 위해 서로 긴밀한 협력을 위하는 한편, 신학 교육, 문서 사업 등에서 연합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들은 장로교 공의회(Presbyterian Council)를 조직하여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다가 마침내 4개의 장로교회가 협동으로 연합 장로교신학교(평양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장로교회는 초창기로부터 보수주의 신학의 든든한 기초 위에서 성장해 왔다.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였던 평양 신학교의 성격은 설립자인 마포 삼열(Marfet Samuel) 박사의 희년 기념 연설 가운데 "나는 사도 바울이 결심하였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이외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는 말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1903년부터 일기 시작한 부흥의 기운은
1907년에 그 절정에 달하였는데, 이 놀라운 대부흥의 역사는 장로교회가 그 중심이었다. 그 후 장로교회는 신앙뿐만 아니라 그 세력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게 된다.
1907. 9. 17에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당시 교세가 노회를 조직할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노회를 조직하고 독립된 노회라는 의미에서 <미국 장로회 조선 독노회(獨老會)>라고 불리우게 되었으니 당시 4개의 각기 다른 장로교파가 분할 선교한 조선 장로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성립되었던 것이다.
교세는 예배처 984개처, 세례교인 17,890명, 원입교인 21,482명이고 선교사를 포함한 목사 47명, 장로 53명(어떤 자료에는 33명의 각파 장로교 선교사와 36명의 한국인 장로) 이였다.
제1회 창립 노회에서는 서상륜의 동생인 서경조, 한석진, 이기풍, 송린서, 방기창, 길선주, 양전백 등 평양 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에게 목사 안수를 하여 최초의 조선인 목사 7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이기풍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여 조선인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장로교회를 비롯한 교회들이 탄압을 받았다.
1911년 제 5회 노회에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노회 산하의 각 대리회(시찰회?)를 노회로 조직 편성하기 시작했다.
1911년 10월 8일부터 1912년 2월 15일 사이에 전라노회, 경기 충청노회, 황해노회, 함경노회, 경상노회, 남평안노회, 북평안노회 등 7개 노회가 조직되었다.
7개 중 4개가 북반도 지역에 있으며 특히 평안도에 2개 노회가 조직되었다는 사실은 북장로교가 먼저 들어와 열심히 선교활동을 한 결과이며, 그 중에도 평양 신학교를 중심으로한 평안도의 장로교 교세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시에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 울 정도였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초대 교회 사역자들의 열심, 그리고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과 국가 사회적 배경이 조화를 이루어 급속히 성장한 결과 독노회를 조직 한지 5년만인 1912년에 감격적인 총회의 조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12년 9년 1일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전국 7개 노회 총대 목사 96(선교사 44, 한국인 목사 52), 장로 125 계 221명이 모여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회장 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선출했다.
당시 교세는 교회수 2,054교회, 목사 128명, 장로 225명, 세레교인 53,008명, 교인 총수 127,228명이었다.
첫 총회는 중국 산동성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명을 선교사로 파송하기도 하였다.
1919년 특별히 억압받는 민족의 고통 속에서 교회의 민족적 의지를 고창한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장로 교회는 더욱 극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이 운동이 있은 뒤에 조선인들이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외래 종교가 아니라 가장 애국적이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종교로 이해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1920년대와 30년대는 사경회와 부흥의 물결이 다시 일었다. 요한계시록 강해로 유명한 길선주 목사와 신유의 기사를 행사하며 전국을 순회한 김익두 목사가 이 시기에 활약하였고 해외 선교와 국내 전도활동, 농촌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해 왔다.
1924년에는 남선교회 전국 연합회와 청년회 전국 연합회의 전신인 <기독 청년 면려회 조선연합회 >가 창립되었고,
1928년에는 <조선 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신학적인 갈등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1932년부터 일기 시작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기독교 학교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보수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자라 왔으나, 점차 외국의 새로운 신학 사상과 방법론에 눈뜨고 귀국한 신진 신학자들에 의해 도전 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평양 신학교의 박형룡 박사는 당시의 교계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초기 50년 동안 정통 신학교의 고수에 성공하였으나 그 말단에 가서는 자유주의의 잠행적 운동의 침입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다른 교파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되는 자유신학 운동에 발맞추어 암암리에 정통신학 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인사들이 장로교회 안에 생겼던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고등비평과 성경의 유오(有誤)를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십자가 대속, 재림 등을 부인하는 것이다."
1934년에는 조선 예수교장로회 선교 50주년 희년 축하 예배를 거행하였다. 한편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러 분파 운동이 나타났다. 이단 사이비도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신학 노선의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1938. 9. 10 제27회 총회는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니 진리를 수호하는 주의 신실한 종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평양 장로회 신학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문을 닫았다.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은 검속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주기철목사 등 많은 분들이 순교하였으며 한상동, 주남선목사와 손명복, 조수옥전도사 등은 평양 형무소에서, 손양원목사는 청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뤘다.
1940. 4. 19 이러한 도전은 총회적으로는 신학적인 대립을 가져오게 되었고 여러 요소들과 함께 교회의 평화를 위협했다. 그 무렵 일제(日帝)의 신사참배 강요로 한국교회는 함께 어려운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평양 신학교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자진해서 무기 휴교에 들어간 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사참배 문제와 상관없이 서울 승동교회 안에 '조선 신학원'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조선 신학교는 해방 전후로 독무대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를 반대해서 옥에 갇혔던 목사들과 망명 중이던 교회 지도자들은 뜻을 같이하여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평양 신학교의 전통을 이어서 보수 신학교를 새로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43년에는 성경에서 구약과 요한계시록이 삭제되고 찬송가가 개편되었다. 그 해에 일제의 강압으로 교단명을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으로 개편되었다.
1945년 7월에는 감리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와 함께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으로 통합되었다.
1945. 8. 15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옥되었던 한상동 목사를 선두로 하는 경남 지역 인사들이 출옥한 후 신사참배를 한 인사들을 정죄하게 되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부산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교단을 분리하여 순수한 개혁주의 보수신학교를 세우기로 하였다.
1946년 고려 신학교가 태동하였다.
1947년 조선 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얻은 이후에 장로교 총회를 재건하였으나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38선 이북의 장로교회들은 공산당의 지배 하에서 박해를 받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6・25 전쟁으로 월남하는 기독교인들이 늘어났다. 이 때 이북에 있던 적지 않은 교회와 노회도 월남해 왔다. 이를 계기로 오늘날까지 이북 노회라 불리우는 피난한 노회가 존속되고 있다.
1948년 옥중 성도들이 부산의 '고려 신학교'를 중심으로 정식 교단을 창립하였으니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 총회>가 되었다.
그 후 '고려 신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박형룡 박사는 자유주의의 신학적 도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며, 정통 신학을 보수하기 위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남산에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조선 신학교(1940. 4. 19 개교)가 정규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1949. 1월에 합동 찬송가를 발행하였다.
1949. 4. 19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35회 총회에서는 장로회 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보수신학의 승리였다.
이처럼 교리적 순수성을 지킨 총회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와의 유대 관계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다시 한번 분립의 진통을 겪게 된다.
1951. 4. 조선신학교를 한국 신학대학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1952. 9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던 때에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 분립하여 오늘의 예장 고신측이 되었다.
1953. 6. 10 다시 교파 분열이 시작되어 김재준목사를 비롯한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된 조선신학교(한신대학)의 신신학이 문제가 되어 <대한 예수교장로회 호헌총회>를 조직, 분립하였으며
1954년 6월 제 39회 총회에서 <한국 기독교 장로회>가 분립하였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대회에 대한 상이한 견해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속한 선교사들에 대한 수용 찬반의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59년 전쟁이 끝난 뒤 제44회 총회에서 WCC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 되었기 때문에 탈퇴를 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상반된 입장이 점점 가시화되면서 총회는 결국 WCC를 지지하는 총회와 반대하는 총회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WCC를 지지하는 자들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통합총회'를 이룩했고, 통합측을 추종하는 교수와 학생들은 신학교를 분립하기에 이르렀다.
1960. 12. 13 신학교 문제와 WCC 반대하는 자들은 승동교회에서 교단의 합동을 위하여 NAE(National Association Evangelism)와의 관련을 끊고 먼저 고신측 교단과 합동(合同)하여 <대한 예수교장로회(합동) 제45회 총회>로 하였다.
기념 사업으로 고신측에서 편집하여 온 새찬송가를 생명의 말씀사에서 발행하여 함께 사용하였다.
1961년 평양신학교의 전신을 지키던 장로회 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은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고려신학교와 합동하였다.
1961. 6. 21 대한예수교 성경장로회(현 대신측) 창립총회 개최. (발기인 김치선박사, 마두원선교사) 초대 총회장에 김치선 박사 피선.
1965년 지금의 사당동(서울특별시 관악구 사당동 산 31-3번지)에 총회 직영 신학교를 신축하여 이전하게 되었으며,
1967년에는 1959년 통합측의 이탈로 인하여 문교부로부터 학교법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교'(1975년 '총신대학'으로 1995년에는 '총신대학교'로 개명)로 설립인가를 받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장족의 발전을 하여 소위 장자적 총회로서의 명분을 유지하였다.
1975년 총회 내에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와 신학적 좌경화(모세모경의 편집설등)의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였고 이영수목사를 비롯한 몇몇에 의한 교단이 사조직화 되고 교단 신학교는 사유화되어 가는 문제가 확산되자 이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일기 시작하였다.
1979년 9월 제45회 총회(대구 동신교회당)는 시작 전부터 총신대학교의 신학적 좌경화와 교권주의의 횡포에 대한 지적이 있어 왔기 때문에 이를 예감한 교권주의자들의 사전 소집과 교회당 정문 및 출입문 완전 봉쇄로 입장하지 못한 채 자파 세력만으로 총회를 진행하여 임원 선거가 끝났다.
이렇게 해서 입장하지 못한 총대들이 개혁의 기치를 들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보수) 총회>가 탄생하고 방배동에서 총회 신학교를 별도로 운영하게 되었다.
1981년 박윤선박사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이 끝까지 합동측에 남아서 개혁운동을 펼쳤으나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분립하여 나와서 합동신학교를 설립하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를 구성하였다.
1983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보수) 총회와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는 신학과 신앙의 동질성을 인정하고 연합하여 새롭게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를 구성하였다.
장로교 예장 안에 고신, 합동, 통합이 있는데 먼저 고신이 분리된 계기를 알아보자.
비교적 신앙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의 문제를 계기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경남노회
주축의 목사님들이 신사참배를 하였던 목사님과의 갈등에 의해 분열되어 만든 교단교파가 고신이다.
신사참배의 모습이다. ㅠ.ㅠ
신사참배거부로 순교하신 목사님들 사진이다.
다음은 장로교의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대해 알아보자
합동측(예장) 목사인 박형룡목사님이 wcc(세계교회협의회)에 반대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고, 이는 wcc가
자유주의적 신학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wcc에 찬성하는 통합측과 반대하던 합동측은 결국
분리되고만 것이다.
이와 같이 합동과 고신은 소위 말하는 보수적 정통신학을 지향하고 있다. 통합은 합동과 고신에 비해 자유로와서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을 통합하여 적정하게 균형을 잡는 편이다. 그렇지만 예장의 자유주의 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크게는 이렇게 나누어진 장로교단을 보면서 안타깝기 그지없는 마음이 든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스승은 분명히
하나님과 이천년전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 힌 분뿐심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사람의 생각과 계획으로 이렇게 분열되었으니,
과정은 어떻든간에 이렇게 분열된 것은 분명 하나님과 예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시 한번 묵상해 보자. ^ㅡ^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가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함이로소이다(요17:22-23)"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엠2:14)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1부 장로교회의 역사
1.1. 종교개혁사(16세기)
1)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서방 중세 교회의 말기는 암울한 시대였다. 기독교는 외형적으로는 웅장하고 비대하였지만 본질의 문제에서는 내용이 결여되어 있었다. 실상은 하나의 종교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암흑기에 새로운 개혁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종교적인 운동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인문주의자들의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인문주의자들은 원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가치관을 확립하였다. 즉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 자체나 초대교부들의 믿음으로 회귀하자는 운동을 불러왔던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의 대륙과 영국에서도 시작되었다. 이들의 개혁은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세기 1000년간 가톨릭교회에 의해 잘못된 기독교를 바로 세우는 데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시작은 독일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독일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는 마틴 루터였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하기 위해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면죄부를 판매하여 성당 건축에 충당하려 하고 있었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온 한 수도승 테젤은 간교한 계략으로 사람들의 신앙심을 유발시켜 면죄부를 판매하였다. 그는 “돈이 헌금함 속에 ‘땡그랑’ 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분노한 루터는 마침내 면죄부의 죄악성을 적은 95개조의 항의문을 1517년에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에 붙였다. 사람들은 항의문을 읽고 복사하여 온 독일에 퍼뜨렸으며, 이는 곧 유럽 전역에 퍼졌다.
2) 츠빙글리와 스위스 북부 취리히의 종교개혁
스위스의 북부 지역은 독일과 근접한 지역으로 독일의 언어와 관습에 젖어 있었다. 이런 지역적인 관계로 인해 이곳에서 종교개혁자 중 한 사람인 울리히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점화하게 된 것이다. 교부들과 후스, 그리고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은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였으며, 취리히에서 설교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을 전파하였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여러 가지로 루터와 일치하였으나 성만찬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이 문제에 대한 두 사람의 연합을 위해 독일의 한 제후였던 헤센의 필립 공은 1529년 말부르크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교리적인 차이를 내세우기보다 두 사람 다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접근하려 하였다. 당시 츠빙글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비텐베르크 사람들(루터의 추종자들)과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츠빙글리와의 교리적 차이점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츠빙글리를 향해 “당신은 나와 다른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단절했다. 친구로는 인정하지만 형제교회로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의 개혁주의자들은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라는 개신교 단체를 결성한다.
3) 칼빈과 스위스 남부 제네바의 종교개혁
스위스 북부 취리히에 울리히 츠빙글리가 있었다면, 스위스 남부 제네바의 개혁자는 존 칼빈이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는 루터가 세상을 떠난 이후였기에 서유럽의 개혁자들도 칼빈에게 찾아와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제네바는 개혁의 중심도시로 부상하게 되었다.
4) 급진주의의 종교개혁
루터, 츠빙글리, 칼빈의 종교개혁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은 보다 급진적인 주장을 하면서 극단적인 종교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들은 역사적인 기독교의 정체성을 부인하였다. 기존교회의 모든 전통과 제도는 물론이고, 세례의 효력까지도 의심하면서 엄격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구원에 있어서도 완벽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자들은 여러 그룹의 종교적인 집단들로 나타났으며,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재세례파는 그 기원이 확실하지 않지만 취리히의 개혁자인 츠빙글리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 주장의 공통점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재세례파는 모두 유아세례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어릴 때 받은 유아세례는 무효이고 성인세례를 다시 받아야 참 신앙인이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이들을 재세례파라 불렀다. 둘째, 이들은 참 신앙은 기존교회나 기독교인들과는 무관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현재의 기독교인과 교회는 모두 명목상의 기독교인 혹은 교회이며, 진정한 교회는 참 교인들만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셋째, 이들은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성령의 주관적인 내적 경험에 예속시켰다. 성령이 모든 것을 하기 때문에 외적 말씀의 형식 논리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넷째, 이들은 시민정부를 부인하는 무정부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서는 정부의 요구에 공적으로 맹세하는 것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군대에 종사하는 것도 거부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극단적인 사상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후에 네덜란드의 메노 시몬스에 의해 그 정신이 재정립되어 메노나이트라는 종파로 발전하였다.
재세례파 가운데서 무력을 동원하여 혁명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자들도 있었다. 토마스 뮌처가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운동은 독일의 농민들의 반란과 합세되어 뮌처는 혁명의 주도적인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에 의해 농민전쟁이 진압되면서 뮌처도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의 혁명 사상은 오늘날도 기독교 국가에서 무력을 통해 개혁을 주도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기도 한다.
5) 영국의 종교개혁
대륙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을 때 영국은 헨리 8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의 간섭을 싫어했기 때문에 영국에서 개신교가 활동하는 데 간접적으로 유익을 주었다고 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개신교의 교리를 수용하지는 않았다. 이미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 교수들은 루터의 교리를 받아들여 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을 정도로 영국에서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헨리 8세는 이들의 논쟁 중 오히려 개신교의 입장을 반대하는 편에서 공격했기 때문에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였다. 헨리 8세와 개신교의 관계는 그와 교황의 정치적인 관계와 연관되어 있었다.
헨리 8세는 동생 아더가 죽은 후에 그의 아내인 캐서린을 아내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교황의 허락을 받는 데 성공하였다. 헨리는 캐서린에게서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낳아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태어난 두 아들은 그만 죽고 말았다. 이에 헨리는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이혼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교황은 허락 대신에 유보하는 방향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분노한 헨리는 교황의 결정이 있기도 전에 앤불린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헨리는 스스로를 영국교회의 수장으로 선포하였다. 교황권력의 끄나풀이었던 수많은 수도원들을 폐쇄시켰고, 교회의 새로운 법령과 국법을 의회를 통해 통과시켰다. 이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인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개신교에 호의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교리에 있어서는 여전히 가톨릭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이를 어기는 개신교도들을 무참히 처형하였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에서보다 훨씬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루터나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6)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스코틀랜드는 이미 16세기 이전에 롤라드(위클리프의 추종자들)가 순교함으로 개혁의 싹이 움터 있었다. 그리고 1433년에는 보헤미아 출신의 폴 크로가 개혁을 외치면서 성 앤드류 성당에서 화형당해 순교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개혁은 비텐베르크와 마르부르크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해밀턴이 루터 교리를 설교하다 1528년 화형당하면서부터 서서히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해밀턴 이후 위셔트를 거쳐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어낸 이는 존 낙스였다. 스코틀랜드는 낙스의 후계자로 제네바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멜빌을 중심으로 개혁을 지속하였으며, 특히 장로교회의 완성을 이룩하였다.
7) 위그노와 프랑스의 종교개혁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에 헨리 8세라는 반개혁 통치자가 있었다면, 이와 비슷한 인물이 프랑스에도 있었다. 그는 바로 프란시스 1세였다. 프란시스 1세는 개신교 교리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터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자들이 프랑스에서도 점차 증가하자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을 화형에 처했다. 1545년까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고 22개의 개신교 지지 도시와 마을들이 파괴되었다. 1547년 프란시스가 죽자 그의 아들인 헨리 2세가 왕위에 올랐고 그는 그의 부친보다 더 심하게 개신교도들을 핍박하였다. 이때 많은 개신교도들이 박해를 피하여 스위스의 제네바 등지로 이주하였다. 이렇게 제네바에 피신해 온 개혁자들은 칼빈에게서 훈련을 받고, 위협을 무릅쓰고 입국하여 책자와 전도지를 프랑스에 배포하였다. 이러한 개혁자들의 운동에 대해 프랑스 왕은 심한 반대를 했다. 서적을 판매하는 행위와 종교적인 문제를 토론하는 것을 금하고, 국경지대에서 프랑스로 들어오는 화물에 대한 검색을 강화하였다. 1559년 헨리 2세가 사망하자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위그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은 고위 귀족층은 아니었고 대부분이 하위 귀족, 상인, 그리고 중하층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에 위그노들은 성 바돌로매의 대학살 사건과 위그노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8) 개혁교회와 네덜란드의 종교개혁
낮은 땅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지역에는 16세기 초 삼백만 명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곳도 다른 서유럽 지역과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패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일찍이 르네상스의 영향이 밀려왔다. 이곳은 르네상스 최고의 지도자였던 에라스무스가 탄생한 곳이었고 개혁의 선구자들이었던 공동생활형제단과 그 단체의 지도자였던 그루트가 일찍이 이곳에서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루트는 존 위클리프와 동시대인으로 공동생활형제단을 통해 교회 안에 머물면서 온건하고 관용적인 방법으로 이미 개혁을 위한 토양을 길렀다. 이런 풍토에다 독일의 라인 강으로부터 루터의 신앙과 교리가 전해졌다. 그리고 후에는 칼빈의 사상이 들어와 루터의 사상보다 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7세기 초에는 칼빈의 가르침을 교리적으로 부인하는 알미니우스의 등장으로 신교 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그 결과 도르트 회의에서 93개조에 달하는 도르트 신조를 작성하였다. 이 신조는 칼빈주의자들이 표방하는 개혁교회에서 오늘날도 신조로 삼고 있는 고백서이다.
1.2. 근대교회사(17-19세기)
1) 영국의 청교도
영국 성공회는 개신교가 아니었으며, 헨리 8세가 신봉하는 믿음도 가톨릭 그 자체였다. 영국 성공회가 공식적으로 로마에서 분리가 된 것은 1559년이다. 잉글랜드 의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믿음의 옹호자(에미리트)로 인식하여 수장령을 채택하고 반대로 개신교적인 법을 폐지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선택한 길은 ‘중도’라고 불리는 것으로, 잉글랜드에 혼재하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서로를 부정하고 배제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길을 택한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엘리자베스의 교회 정책은 두 개의 의회법령(1559)을 기초로 세워졌다. 엘리자베스는 수장령을 만들어 자신이 영국교회 최고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공동기도문을 수정하고 여러 정책을 수립하였으나, 양쪽에서는 서로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특히 개신교 쪽에서 좀 더 과감한 변화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들을 청교도(Puritan)라고 불렀는데, 원래의 의미는 ‘빗자루로 잘못된 것들을 쓸어버린다’는 뜻이다. 이들은 영국 종교개혁이 불완전한 종교개혁이었다고 이해하여, 영국 성공회의 로마 가톨릭적인 잔재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은 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제임스 1세 왕으로 세워졌다. 제임스 1세는 성공회 계파에 강력한 지지를 보냈고, 또한 왕권신수설을 기리기 위해 국왕의 절대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개신교 여러 파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되었지만, 한편 흠정역 성경의 출판을 지시하는 등 종교적인 공헌도 컸다. 제임스는 왕이 되면서 의회를 해산시키고 청교도에게 영국 성공회를 믿으라는 등 독재정치를 하였다. 이에 1620년 청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자유를 찾기 위해 북아메리카 신대륙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2) 독일 경건주의 운동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 발달된 교리논쟁은 개신교의 정체성을 다지기 위한 중간 노력이었다. 이러한 교리적 발달은 이성주의의 합리적인 사고 논리와 병행하여 신앙을 신학화하고 논리화하는 정통주의(Orthodox)를 잉태시켰다. 이는 중세의 스콜라주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 이때의 신앙은 순수한 교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설교를 규칙적으로 청종하며, 성례의식에 엄격하게 참여하면, 참된 신앙인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형태는 매너리즘을 야기시켰고, 종교생활의 형식화를 초래하여 죽은 정통주의에 얽매이는 모순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이러한 신앙의 모습에 만족치 못한 사람들이 경건주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신앙의 교리적인 고백보다는 경험과 감정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금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경건주의의 시작은 필립 스페너(1635-1705)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666년 프랑크푸르트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의 영적 고갈 상태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개혁을 시도하였다. 스페너는 당시 신앙의 부패현상을 여러 가지로 지적하였다. 기독교의 악은 정부의 교회 간섭, 성직자들의 삶의 부패, 이론적이며 신학적인 논쟁, 평신도들의 무절제한 생활 등이라고 하였다. 스페너는 신조 중심의 교회를 성경연구와 경건생활 중심의 교회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경건주의 운동의 3대 지도자는 스페너, 프랑케, 진젠도르프이다. 할레 대학은 프랑크에 의해 경건운동 중심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프랑크는 매년 200명의 목사 후보생들을 교육시키며 경건주의 신앙을 지도하였다. 특별히 할레 대학의 유명한 점은 선교에 대한 열정이었다. 프로테스탄트가 선교에 눈을 뜨기 전, 프랑케와 그의 동료들은 선교에 대한 사명감으로 충만하여 대학에서 선교사들을 훈련시켜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들이 18세기 근대 선교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슈페너와 프랑크의 뒤를 이어 경건주의의 활동을 계승할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괄목할 만한 결과 중의 하나는 진젠도르프 백작의 지도하에 있었던 모라비안 형제단이 생겨난 것이다.
진젠도르프는 자신의 영토인 베르텔스토르프에 30년 전쟁 이후 신앙 때문에 피난생활로 전전 긍긍하던 존 후스의 후예들인 모라비아의 피난민들을 위해 촌락을 만들어 이들이 안주하게 도와주었다. 이 촌락의 이름은 유명한 헤른후트였다. 진젠도르프는 그의 이상에 따라 이들의 신앙훈련을 강하게 시켰다. 바로 이러한 운동을 통해 오늘날의 모라비안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모라비안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열정적인 선교 열기였다. 진젠도르프의 헤른후트는 세계 선교활동의 근거지가 되어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모라비안들은 종국에 진젠도르프와 분리하여 독립교회를 형성하였고 오늘날의 모라비안 교회가 탄생했다. 경건주의는 독일에 생동하는 신앙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경건주의 운동이 미친 부정적인 요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공로 사상에 치우쳤고, 세상에 대한 금욕적인 태도, 경건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신앙적인 질타, 그리고 신앙에서 지적 요소의 경멸 등을 불러왔다.
3) 영국 복음주의 부흥운동
독일에서 정통주의와 이성주의에 반하여 순수한 신앙의 경건운동이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교회의 영적 고갈을 모색하기 위한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중심인물은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그리고 조지 휫필드였다. 이들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성경공부와 신앙생활의 규칙적인 모임을 갖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기상하여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며, 정기적으로 감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등 규칙적인 생활방식(method)에 따라 신앙생활을 했다. 이들의 모임을 ‘신성한 모임’(Holy Club)이라 불렀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본 따서 후에 ‘감리교’(Methodist)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직역하면, 규율주의자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들이 시작한 복음주의 부흥운동에는 세 갈래가 존재하였다. 웨슬리가 주도하는 감리교, 휫필드가 주도하는 칼빈주의 감리교, 그리고 전통적인 앵글리칸교회 계통의 복음주의이다.
4) 18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
미국에는 17세기 동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유럽 대륙과 영국에서 이주해 와서 살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유럽과 영국의 신앙 형태를 미국 땅에서 그대로 유지하면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결국 미국에는 다양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미국 이민 초기의 한 정착지였던 뉴잉글랜드에는 루터교, 칼빈주의파, 장로교파, 독립파, 퀘이커파, 로마 가톨릭파, 중생파(New Born), 형제파(Dunkers), 신광파(New Lights), 계약파(Covernanters), 브라운파(Brownist), 분리파(Seceders) 등 각종 교파와 종파들이 정착하였다. 이런 교파들이 교회를 형성하고 사는 동안 이들에게 신앙의 영속적인 영향을 준 운동은 바로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이었다.
18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은 독일의 경건주의와 영국의 복음주의적 각성과 유사하다. 1734년에서 1735년 사이에, 대각성 운동이 뉴잉글랜드에 도착하여, 메사추세츠의 노스햄프턴을 휩쓸었다. 특히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이고 회중교회의 목사인 죠나단 에드워즈가 대표적이다. 1차 대각성 운동이 미국교회에 준 결과는, ‘미국식 칼빈주의’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청교도의 신앙을 계승하면서, 구파(온건파 Old Side)와 신파(부흥파 New Side)의 입장을 통합한 새로운 칼빈주의 - 죠나단 에드워드 식 칼빈주의 - 가 등장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기초한 청교도들의 칼빈주의 유산에, 유럽의 개혁파 경건주의를 흡수하여 칼빈주의 부흥운동을 전개함으로 칼빈주의와 부흥운동의 조화 가능성을 보여준 점에서 의의가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에서 칼빈주의 철학인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론을 골자로 한 칼빈주의 신학을 대성시켰으며, 부흥회를 지나친 정서적 폭발이라고 불신하는 자들을 향해서 부흥회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부흥회를 절대화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경계하는 자세로 각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했고, 18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우두머리가 ‘알미니우스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칼빈주의를 확고하게 정리, 집대성하였다. 그는 1758년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직에 올랐으나, 1개월 만에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5) 19세기 미국교회와 근본주의
19세기 미국에는 열정적인 복음주의자들의 교회 부흥을 위한 몸부림이 있었다. 하지만 근대 문명이 몰고 온 지식의 보급, 특히 과학지식의 발달과 인본주의의 대두, 그리고 신학적 자유주의의 위협으로 인해 전통적인 신앙이 큰 도전을 받기도 했다. 새로운 성경 연구 방법은 전통적인 성경의 견해를 무너뜨렸고, 창세기의 기사 등도 막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진 일부 교수들과 교인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제창하고 보수를 다짐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 일을 위해 록키 산이나 나이아가라에서 여러 차례의 집회가 있었다. 1895년 이들은 드디어 나이아가라에서 회의를 갖고 ‘다섯 가지 근본주의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근본주의라는 새로운 신앙의 사조를 창출하였다. 이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나선 사람은 장로교회의 메이첸(1881-1937) 교수였고, 자유주의 입장에 서서 이를 저지하려는 대표적인 사람은 침례교의 포스딕이었다. 메이첸 교수는 또한 프린스턴의 자유주의를 반대하여 웨스트민스터를 설립하는 공을 세웠다.
1.3. 한국장로교회사
한국 장로교 신학 형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던 선교사들을 출신 신학교 별로 분류하여 보면, 대부분 미국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 신학교,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 그리고 버지니아의 리취몬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출신들이다.
비록 한국 장로교 형성에 크게 공헌한 네 개의 장로회 선교회는 북장로교 선교회, 남장로교 선교회, 호주 장로교 선교회,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이지만, 선교 초기부터 한국 장로교는 북장로교 선교회(PCUSA)와 남장로교 선교회(PCUS)에서 파송 받은 매우 보수적인 개혁파 복음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 발전되었다. 위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 중에서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회가, 맥코믹, 프린스턴, 그리고 유니온 신학교 등을 졸업한, 가장 보수적인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했다. 맥코믹 신학교는 마포삼열, 소안론, 그리고 곽안련 선교사를 배출했고, 유니온 신학교는 이눌서와 구례인 선교사와 같은 조직신학자를,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는 라부열, 어드만, 함일돈과 같은 선교사들을 배출했다. 이들 선교사들은 평양 장로회 신학교의 설립자들이었고, 한국에 보수주의 신학을 정착시키는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이들 초기 개척자들의 신학적 입장은 청교도주의와 구학파 신학을 포함한 ‘정통 칼빈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은 개혁주의 전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충실했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 성장과정에서, 그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성경의 초자연적 특성을 강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들 개혁주의 선교사들은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이며, 성경은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적 또는 과학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어떤 방향에서도 잘못 인도하거나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초창기 서양 장로교 선교사들은 흔히 “극단의 보수주의자 또는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불리워졌고, 전혀 의심 없이 다섯 가지의 근본 교리들 -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역사적 재림-을 확신했다.
그러나 성경과 정통 칼빈주의 토대 위에 견고하게 세워진 한국장로교회에도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해 왔다. 선교의 문이 열린 1884년부터 성경의 권위와 무오사상 위에 확고하게 세워졌던 한국교회가 서양 자유주의의 무서운 도전을 받은 것은 1920년대부터의 현상이다. 그러나 장로교 보수주의에 대한 현대주의 도전은 1930년대, 장로교회가 정통주의 성경관에 대한 여러 가지 강력한 자유주의 도전을 맞을 때 그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 동안에 서양 현대주의와 자유주의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노출되었고, 그것은 특별히 한국 장로교내에서조차 널리 확산되었다.
성경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경험한 한국 장로교는 1934년과 1935년 사이에 두드러지게 성경의 권위와 정통신앙을 전투적으로 변호하는 반현대주의와 반자유주의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한국 장로교 보수주의의 변증적이고 수구적인 1930년대 신학 경향은 대체로 구 프린스턴 학파, 특별히 핫지-워필드-메이첸 전통에 굳게 서 있던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 평양 신학교의 영향력 있는 교수인 박형룡(1897-1979)은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메이첸 아래서 신학교육을 받은 그는 성경관에 있어서 타협할 줄 모르는 장로교 보수주의자로 특징되며 성경의 고등비평을 악마, 그리고 자유주의와 현대주의를 반기독교 운동과 동일하게 취급하려고 했다. 마치 메이첸의『기독교와 자유주의』가 20세기 초 미국에서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을 일으키는 데 절대적 공헌을 한 것처럼 박형룡의『현대신학 난제선평』은 반자유주의운동을 한국 장로교내에 발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형룡은 개신교 정통주의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리는 오직 성경만의 원리와 칭의 교리라 보고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정통주의 신학의 과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정통주의 신학의 특징은 성경을 영감된 그리고 “신앙과 본분에 대한 우리의 정확무오한 법칙”이라고 믿는 성경관이다. 프린스턴 정통주의 신학이 가장 훌륭한 성경적 신학체계이며 성경의 권위가 프린스턴 정통주의의 핵심이라고 믿었던 박형룡 박사는 프린스턴의 변증학적 방법으로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을 변호하는데 자신을 헌신했다.
장로교단이 원래 루터의 보수적 종교개혁과는 다른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에 반하여 보수적인, 즉 교리적으로 복음주의적 신학을 표방합니다. 그러나 "합동"측은 상당히 진보적 성향을 띄우는 교단입니다. 진보의 의미가 딱히 자유주의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존 교단과의 서로 교리적 이해의 틈을 메우지 못하고 분파되는 게 현실입니다. 대개의 교단의 분파(sect)의 원인은 교리적인 해석의 이해가 서로 상충되거나 사회적으로 그 원인이 내재합니다. 그러나 참혹하지만 교회 내의 알력에 의한 분파도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미국으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갔던 신앙의 선배(필그림 파더)들이 미국에서 시작한 장로교의 설립부터 분열의 역사를 연구한 저의 논문("Th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 : <그리스도와 복음에 입각한 기독교를 선포하기 위해서 필요한 교회는 이 세상의 분열에 초연해야 하고 지역적인 이해관계나 계급, 인종, 국가 등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전체의 공동이익과 아직 실현되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교회이어야 한다. 교파주의적인 교회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아무리 넓다 해도, 이러한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없다. 교회가 이러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으려면, 국가를 향한 교회의 충성심 때문에 교회의 국제적인 친교를 통한 통일이 침해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 이상 이덕휴의 신학포럼, 신학일반에 게제함)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교단 총회의 역사에서부터 현재까지 분파 된 교단, 그리고 교단별 학교를 정리함..
보다 더 정확한 조사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분파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초대교회 시절부터 올라가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특히 종교개혁 이후 엄청난 분파가 거듭되었고 지금도 분파를 위한 모의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 신학원, 신학교 또는 신학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교단에서 운영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신학교와 교단의 분파가 열심히 분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설립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01년 시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를 모체로 1912년 창립되었습니다. 본 교단은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을 근본 이념으로 하여 웨스트민스터 신도 개요서와 대소요리 문답을 교리적 표준으로 삼고, 장로교 헌법의 정치원리를 가지며 교회의 성례전적 전통과 권위 및 질서를 지켜오고있습니다.
(2) 교육기관 교육기관으로는 총신대학교 및 대학원을 비롯하여 전국에 대신대학교, 칼빈대학교, 광주신학교, 대전신학교, 부산신학교, 서울신학교, 수원신학교, 인천신학교, 전북신학교, 청주신학교 등이 있습니다(아래 참조).
* 총회인준 신학교 학 교 명 총(학)장 전화번호 주소 대신대학교 박영희 053-811-1181 경북 경산시 백천동 137 칼빈대학교 이주영 02-715-3006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3가 134 광주신학교 백영규 062-232-6014 광주시 동구 동명1동 68-30 대전신학교 하정호 042-273-4111 대전시 동구 삼정동 98-61 부산신학교 임해식 051-415-2210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 4가 186 서울신학교 이종일 02-885-9500 서울시 관악구 봉천3동 1004 수원신학교 이규왕 031-247-8963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지동 286-3 인천신학교 김귀중 032-421-4004 인천시 남구 주안6동 913-17 전북신학교 문갑천 063-223-6802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3가 738-28 청주신학교 김준규 043-232-7232 충북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515-16
(3) 총회의 역사 1884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소래(송천.松川)교회가 황해도(1884년)에 세워지다. 1893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Presbyterian Council of Mission) 조직하다. 1901 장로교 신학교가 평양에 설립되다. 1907 9월 17일에는 38명의 각파 장로교 선교사와 40명의 한국인 장로들이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여 한국장로교 첫 노회(독노회)인 조선노회를 창설하고 그 자리에서 신학교 졸업생 7인이 목사 안수를 받다. 1912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조직하다. 1917 소안련선교사에 의해 성경통신과 설립(현재 성경통신대학)하다. 1918 신학지남 창간하다. 1949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개칭하다. 1959 WCC적 에큐메닉스 신학에 대한 이견으로 제44회 총회 비상 정회 후 (통합측 분립), WCC를 영구히 탈퇴하다. 1963 문교부에 본 총회 등록(사회단체등록증)하다.
(4) 교단과 분파(sect)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교단과 약어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에는 약 100개의 교단이 명시되어 있지만 장로교의 교단은 전국적으로 약 300여 분파(sect)가 난립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개 혁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 개혁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교회) 개혁선교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선교) 개혁장신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장신) 개혁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총회) 개혁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합동) 개혁합신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합신) 계 신 대한예수교장로회 (계신) 고 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 고려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개혁) 고려환원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환원) 고 신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고신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개혁) 고신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합동) 근 본 대한예수교장로회 (근본) 기독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개혁) 남 북 대한예수교장로회 (남북) 대 신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대한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대한총회) 대 신 측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총회) 대 한 대한예수교장로회 (대한총회) 독 노 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법 통 대한예수교장로회 (법통) 보 수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 보수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개혁) 보수정통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정통) 보 수 측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정통) 보수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통합) 보수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합동) 보수호헌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호헌) 복 음 대한예수교장로회 (복음) 로 고 스 대한예수교장로회 (로고스) 서울고신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고신) 선 교 대한예수교장로회 (선교) 성 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성경장로회) 성 합 대한예수교장로회 (성합) 순 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순장) 여 목 대한예수교장로회 (여목) 연 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연장) 연합여목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여목) 예 신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신) 예 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 예장공회 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 예장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총회) 예 정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정) 예 합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합동) 장 신 대한예수교장로회 (장신) 재 건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 정 립 대한예수교장로회 (정립) 정 통 대한예수교장로회 (정통) 정통총연 대한예수교장로회 (정통총연) 중 앙 대한예수교장로회 (중앙) 통 합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통합보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보수) 평 안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안) 평 화 대한예수교장로회 (평화) 피 어 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피어선) 합 동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합동개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신) 합동개혁A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합동개혁B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합동경성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경성) 합동경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경신) 합동동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동신) 합동보수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보수개혁) 합동보수진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보수진리) 합동복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복음) 합동선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선교) 합동선목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선목) 합동성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성회) 합동연합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연합) 합동예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선) 합동장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장신) 합동정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정신) 합동정통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정통) 합동중립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중립) 합동중앙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중앙) 합동중립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중립) 합동중앙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중앙) 합동진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