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해를 혈루증 앓는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5:21-34
본문에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외딸을 살리시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므로 고침을 받았다는 말씀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만 이해하면 소설과 같은 옛 이야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구속사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구속사적으로 이해해야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살리신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을 앓는 여인,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열두 살(42)과 ‘열두 해’(25)입니다. 우연히 ‘열두 살’과 ‘열두 해’가 아니라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열둘’(십이)이라는 숫자를 ‘일곱(칠)’과 같이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새예루살렘의 열두 진주문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야이로가 죽게 된 야이로의 열두 살 된 외딸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모시고 바쁘게 가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야이로에게 ‘당신의 딸이 죽었다’(35)고 하며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살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재산도 다 허비하여(26)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완전한 병자를 의미합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이 ‘열두 살’과 ‘열두 해’의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신학적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완전 타락한 죄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혈루증을 앓는 여인도 고쳐주셨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죄로 인하여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죽은 딸을 살려 달라는 야이로의 간구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 예수님에게 나아가 자신을 고쳐 달라고 간구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혈루증은 하혈하는 부인병으로 율법에는 부정하기 때문에 성전에도 올라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도 드릴 수 없습니다.(레 5:25-30) 어쩌면 그 여인은 음란한 행위로 생긴 병일 수도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병입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맹인도 지나가시는 예수님에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소리쳐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나병 환자들도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도 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많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병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27) ‘예수의 소문’은 그에게 복음입니다. 아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내가 예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28)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병이 낫게 된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병든 사람이 내 옷에 손을 대어도 낫게 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서 고침을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내가 예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병이 낫게 된다’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그러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그 여인에게만 생길 수 있는 믿음입니다.
혈루증으로 열두 해를 고통당하고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고통을 많이 당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겨내기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볼 수 없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낫게 된다는 그 여인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죽게 된 딸 위에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사 살게 해 달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야이로는 예수님에게로 달려와 발아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혈루증을 앓는 그 여인은 야이로와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믿음대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며 포기할 수 있습니다. 믿음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됩니다. 야고보는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2:14;17)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으로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 바쁘게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무리가 에워싸고 있다고 성경은 함께 기록하므로 그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강조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 앞을 지나가시는 시간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짧은 한순간입니다. 그 순간을 놓치면 예수님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고, 다시는 그러한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믿음은 물거품이 되고 그의 병은 영영 고침을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어렵고 높은 장벽이 있어도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믿고 하는 것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옳은 믿음입니다. 믿고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 같을지라도 노력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만 가면 자신의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이 있어서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성전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무엇을 말하며 구하지도 못하고, 한없는 눈문 만 흘리다가 돌아갔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오늘의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여인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민을 안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히 기도도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죄를 안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서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도 모르게 혼자 한밤중에 성전에 올라와서 울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울다가 돌아갈 때 그의 마음은 가볍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고통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용기가 없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는 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노력하면 높은 장벽도 넘을 수 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무리들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27) 우리는 그 여인이 어떻게 무리를 뚫고 들어갔는지를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하기 어려운 것을 열두 해를 앓는 여인이, 무리가 에워싸고 죽어가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 바쁘게 지나가시는 예수님 뒤로 가서 옷에 손을 대려고 무리를 뚫고 들어가는 그 모습은 상상할 수 없는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그러한 용기와 힘이 나올 수가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셨다고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여리고성도 믿음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장벽도 뚫고 들어가야 하는 능력있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 여인이 믿음대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 혈루 근원이 곧 말랐습니다.(29) 아무도 고칠 수 없는, 열두 해를 앓았던 혈루 근원이 말랐다는 말씀은 완전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의 믿음과 그의 행함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민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도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고(33)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셨습니다.’(32)
만약 이때 예수님께서 돌아보지 않으셨다면 그 여인은 고침을 받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돌아갔다면 병고침은 받았을지라고 그 다음에 받을 복은 받지 못하고 구원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이 일을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 여인은 마치 목자를 잃은 양처럼 열두 해를 혈루증이라는 가시덤불에 걸려서 가시에 찔리고 찢어져 많은 피를 흘리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 위해 무리들에게 밀리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밟히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3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딸아”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딸아’라고 부르신 것은 그 여인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잃은 딸을 찾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려고, 무리들 뜸에 끼여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넘어지고 자빠져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옷자락에 손을 대려고 하는 그 여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많은 병든 자들이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이처럼 다정하게 ‘딸아’, 또는 ‘아들아’라고 부른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이 여인에게만 ‘딸아’ 하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여인은 얼마나 기뻤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마치 목자 잃은 양이 목자를 만난 것처럼 기뻐하며 좋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만남은 곧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보려고 둘러 보시고’,(32) 여인은 ‘알고’(33),라는 말씀은 그 여인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성립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까지는 예수님과 전혀 관계가 없었던 그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만남이 아니라 죄인과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배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 여인은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인이 두려워하여 떨었다는 것은 몸에 전율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예수님과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내몸에 전륜이 일어나 두려워 떨게 됩니다. 내 마음이 두렵고 떨게 되는 것은 경건한 예배가 됩니다. 그게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에게로 와서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시고 평안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 여인은 그 후로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세상을 사는 동안 더 이상 병으로 앓는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살았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잠들어 그 영혼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천국에서 위를 받으며 영원한 평안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이 여인의 믿음처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시다. 그래서 오랫동안 괴롭히던 것도 고침을 받읍시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딸아, 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축복을 받고 집으로 돌아갑시다. 평안의 복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구원받고 천국에서 영원한 평안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