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싱글즈] 서른, 우리 꼭 이렇게만 살아야 하나. [3] 2003.07.31-11: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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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로 시작되는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 가수가 남자여서 그런지 서른이라는 나이는 남자에게나 어울려 보였다. 나중에 여성 가수 이은미가 리메이크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무수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여고생도 나오고, 여대생도 나온다. 요즘에는 성공한 캐릭터 우먼도 곧잘 등장하고 심지어는 아줌마도 나왔다. 그래서 잊어버린다. 서른의 성공하지 못한 싱글 여성들의 삶을 말이다.
나이 서른쯤 되면 이성친구가 점점 사라진다. 결혼을 하면 결혼한 친구들끼리 어울리고, 설사 결혼을 하지 않았다 한들, 그 나이 때 남녀가 친구로 꾸준히 만나기란 쉽지 않다. 서른의 싱글 남성과 서른의 싱글 여성이 만나기 힘든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동안 잊고 지냈던, 과연 내 주위에 있었던가조차, 가물가물했던, 성공하지 못한 서른의 싱글 여성을 나는 너무나 오랜만에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영화 <싱글즈>는 그렇게 현실 속에서나 대중문화 속에서 잃어버린 여성의 삶을 복원했다.
<싱글즈>는 뜨거운 영화이다. 조용히 앉아서 보는 영화가 아니라 마구 소리지르며 마구 웃어대며, 야유와 함성을 질러대며 보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나난(장진영)과 동미(엄정화)가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직장상사와의 갈등, 곳곳에 숨어있는 성희롱, 그런 직장을 때려칠 수 없게 만드는 생계에 대한 위협, 그러면서 점차 상실되는 꿈, 등등 우리 시대의 서른을 바라보는 여성들은 나난과 동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동미가 직장상사의 넥타이를 붙잡고 내치는 장면에서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가끔 생각한다.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만 살아야 할까"
고등학교 때의 꿈, 대학 때의 꿈, 직장 초년생 때의 꿈,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서른 이전에 일에 성공하고, 결혼에 성공하기를 꿈꾼다. 서른이 다 된 시점에서 보면, 참으로 놀랍게도 일과 결혼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등학교 이후에는 다시는 없을 것만 같은 시험은 죽을 때까지 눈앞에 다가오고, 성인만 되면 나만의 세상이 될 줄 알았던 기대는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끊임없는 통제가 반복되고, 그 통제에 벗어나면, 생계를 거는 위험한 선택을 해야한다. 그러면서 왜소해지며, 결국 서른 즈음에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다.
나난에게는 "천만원 벌어주면 일할래 집에 있을래?"라고 물을 줄 아는 남자가 나타나고, 동미는 남편은 필요없는데, 키우고 싶은 아기가 나타난다. 서른의 선택이란 스물의 선택과는 달리 어찌보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찾는 것이다. 특히 결혼이라는 압박이 훨씬 더 큰 여성에게는 말이다.
그러면서 다시 묻는다.
"도대체 왜 우리가 이렇게만 살아야 할까"
영화는 결국 나난과 동미가 이상을 버리지 않는 것으로 결론내린다. 나난은 "천만원 벌어주면 일할래 집에 있을래?"라고 묻는 남자와 결별하고, 동미는 미혼모의 길을 택한다. 현실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나난은 자신있게 말한다.
"마흔쯤이면 무언가 이루어져있겠지. 서른, 다시 시작이다. 나난 파이팅!"
영화와 현실의 팽팽한 긴장감은 여기서 풀어진다. 나난과 동미는 영화 속의 현실로 날아가고, 관객은 다시 현실의 현실로 돌아오는데, 그게 사실 그렇게 불쾌하지 않다. 항상 영화는 그래왔고, 현실은 그래왔으니까, 이미 그것에조차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한 월간지의 기고 때문에, 어찌보면 억지로 보게 되었던 <싱글즈>는 그렇게 끝나고, 나는 밤늦게 현실의 싱글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20대 초반을 까르르 웃으며 보냈던 내 여성 동기들은 <싱글즈>를 어떻게 봤을까?
"싱글즈 봤어?"
"뭐?"
"싱글즈 봤어?"
"나 졸려. 내일 출근해야 돼"
그랬었다. 대중문화에서 잊혀졌던 서른의 성공하지 못한 싱글 여성의 삶, 영화 <싱글즈>를 볼 만한 여유조차 없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보니 서른의 성공하지 못한 싱글의 남성도 별반 다를게 없지 않을까. 원고 쓸 일이 없었다면 나라도 영화 보러 표 한 장 들고 혼자서 극장에 들어갔겠는가.
나난과 같은 나이였던 스물 아홉에 담배를 끊었고, 서른에 술을 끊으며 나도 마흔까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다시 시작한다.
"도대체 왜 우리가 이렇게만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은 이미 20대 때 너무 많이 던져보지 않았던가. 결론은 "이렇게만 살지 않겠다."로 이미 내리고 또 내렸다.
그렇게 묵묵히 일하다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그 강박 자체를 던져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남에게 평가받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삶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세상이 올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다 "천만원 벌어주면 일할래 집에 있을래?" 이렇게 물어줄 좋은 사람도 나타날 거라 믿는다. 그렇게 해서 각기 다른 성의 서른의 삶을 서로 이해하는 날도 있을 것이고, 꼭 그렇게 압박을 받으며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질문과 시험에 들지 않아도 되는 날도 올 것이다. 우리는 그런 날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의 답도 언제나 그랬듯이,
"집에서 일한다." 이다.
"파이팅!"
Comments
독자 (2003.07.31-17:38:27) X하하하...~
변희재님, 글 재밌게 잘 봤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십시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니까요...
결과에 대한 강박을 벗어던지고(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열심하고 충실히 하는 과정에 만족을 느낀다면,
그 자체로 행복해지고 결국 결과도 좋아지는 것이겠지요...?
소금인형 (2003.07.31-19:47:16) X방금 재밌게 가볍게 "싱글즈" 보고와서 글 씁니다.
나난의 마지막 대사 는 대충 이렇죠.
'서른 일,결혼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그래도 파이팅
서른 다시 시작이다. 마흔 쯤엔 무언가 이루어져 있겠지
아니면 말고'
마지막이 좋았어요.
'아니면 말고'
아하! 얼마나 현실적이고 실감나는 대사인가!
'아니면 말고'
그렇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걸.....^^;
사족 하나
30대 중반에 일,결혼 하나도 못 이룬 남성의 삶도
무쟈게 고달픕디다. 자의적 선택일지라도.
그래도 어떤가? 아니면 말고 일테지. 히히히.
희재 님 파이팅하고 열씨미 삽시다.
항상 몸도 마음도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