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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의 아들 이회 李薈 (1567년 ~ 1625년)
(이순신장군의 자녀 : 5남 2녀)
본부인 방씨 회, 열, 면 / 회와 열은 아버지 이순신과 함께 수군으로 싸웠다.
서자 훈, 신 두명의 딸
이순신은 상주방씨와 사이에 아들로 회(薈), 열(열, 첫이름은 蔚), 면(?)을 두고 딸 하나를 두었다.
이순신의 아내인 방수진(方守震?)/(방군수진)은 무관 출신으로 보성 군수를 역임한 방진의 딸인데, 대단한 여장부 기질이 있었던 모양. 어린 시절 방씨 집에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방진이 활을 쏘며 저항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수진이 베틀에 쓰는 대나무 가지더미를 바닥에 쏟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버지!! 여기 화살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쳐 화살이 많이 남아 있다고 속여서 도적들이 도망갔다는 야사가 있다.
딸은 인근에 살던 홍가신의 아들 홍비와 혼인하였다.
또한 류성룡의 글에 따르면, 사위인 홍비가 체구가 작아서 마음에 차지 않다며 집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집안 노비들을 거느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집안을 유지하며, 대단히 성격이 강해서 집안 사람들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참으로 장수(將帥)의 집안에는 장수의 아내가 있다"며 감탄했다. 방씨가 사위를 박대한 이유로 단순히 사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이 사위의 아버지는 이순신의 친구인 홍가신이다. 그런데 홍비는 이 결혼이 재혼이었다. 홍비의 첫 번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이순신의 딸과 재혼한 것. 첩으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혼한 것이므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조선 시대에 재취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게 당시 풍습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방수진이 사위를 박대함으로써 홍가신 집안에게 항의 표시를 했다는 해석이다.
류성룡은 저서인 《징비록》의 평가에서, 모두가 이순신 장군을 영웅적이고 위엄 있는 인물이고 장수로 생각하지만, 장수로서 위엄 있는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글을 읽는 단아한 선비 같다고 하였다.
가족에 대해 자상한 부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있다. 이순신의 두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각각 4명과 2명의 자식을 남기고 비교적 일찍 죽었는데, 이순신은 이 6명의 조카를 친자식 못지 않게 잘 키워냈다. 특히 정읍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에 이들 조카들을 데려가면 파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조선은 유교 사상 덕에, 기본적으로 세금 = 백성의 부담으로 보고, 최대한 세금을 적게 걷어 필요한 데만 쓰는 식의 굉장한 긴축 재정을 강요받는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행정관이 가솔들을 데려와 먹여 살리는 것은 충분히 탄핵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다. 이른바 남솔(濫率)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가솔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카들이 부모가 모두 죽어 천애고아라 의지할 곳이 나뿐인데, 어찌 두고 가는가? 차라리 파직당할지언정 조카들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눈치 안 보고 조카들을 다 부임지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가 정읍 현감으로 있는 동안 가족들이 보여준 처신은 정읍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이 조카들의 혼례를 다 치러낸 후에야 자신의 친자식의 혼례를 했을 정도.
맏아들 회는 전란 중에 이순신의 막하에서 종군하여 노량해전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끝까지 싸운 인물이다.
후에 선무원종공신이 되고 임실현감을 지냈다.
둘째 열은 형조정랑을 지내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셋째 면은 인물이 출중하여 이순신이 매우 아끼던 아들이었는데, 명량해전 직후인 1597년 10월 아산에 침입한 일본군과 싸우다가 스물한 살의 나이로 죽었다.
『난중일기』 10월 14일자 일기에 그날의 아픈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순신은 아들의 부음을 받던 날 꿈에 말을 타고 가다가 냇물에 떨어졌는데, 면이 끌어안는 듯한 형상을 보고 깼다.
그날 저녁에 집안에서 온 편지를 받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그 편지 겉면에 둘째 열이 쓴 ‘통곡慟哭’ 두 글자를 보고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는 목 놓아 통곡하였다.
그러고는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라며 슬피 울었다.
그 후로도 막내아들을 생각하며 남모르게 눈물 흘렸던 날들을 『난중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면은 후일 정조 때 이조참의를 증직받았는데 그 묘소가 현충사 안에 있다.
이순신은 이때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울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난중일기》에서는 종 강막지(姜莫只)의 소금 창고에 "숨어서 울었다."고 나와 있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 보면 공이 이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졌다고 하는데, 이순신이 그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물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과 이면이 자신을 많이 닮아서 유독 귀여워하던 자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면은 명량해전 직후 이뤄진 보복성 침략 때문에 죽었으므로 비록 전투는 이겼으나 자신 때문에 자식이 죽었으니 자책감을 이루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셋째 아들 이면에 대해서는 후에 야사가 하나 전해 내려오는데, 죽은 면이 꿈 속에 다시 나타나 울며 "소자를 죽인 자가 근처에 있나이다."하고 사라졌다. 이순신이 꿈에서 깨고는 이상히 여겨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아산에서 전투를 벌였던 일본군 포로들을 끌어와 심문하니 과연 그 중에 면을 죽인 자가 있어 즉시 그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사 구분은 융통성이 없는 수준으로 엄격해서 아무리 상관이나 친인척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35세에 종8품 훈련원 봉사 시절에는 병조 정랑 서익이 원칙에 어긋나는 인사를 지시하자 칼같이 거절했다가 이듬해 종4품 수군 만호로 재직 중, 병조 정랑이었던 서익이 군기 경차관으로 와서 감찰로 트집을 잡아 파직되기도 했다. 같은 덕수이씨였던 율곡 이이가 이순신이 초급 군관 시절 한 번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당시 이율곡은 지금의 행정부 장관에 해당하는 이조판서로 지낼 무렵이었다(1년 뒤 병조판서가 됨). 당시 이런 장관급이 호의를 보인다면 출세길 열렸다며 튀어가고 현대에도 이런 고위 인사를 등에 업고 각종 청탁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순신은 "(율곡께서) 이조 판서로 있으신 동안은 인사권이 있으시니, 저는 만날 수 없습니다."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로비' 권고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는데 병조 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고 싶어 매파를 띄웠으나 단칼에 거절하기도 했다.
이같은 엄격함은 자신의 친인척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순신의 장남인 이회와 조카 이분, 이완, 이봉은 전쟁 내내 별다른 무관 관직조차 없이 일개 의병신분으로 참전했다. 조선 시대에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친인척끼리는 같은 임지에서 관직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상파제가 있었는데 이를 충실하게 지킨 것이다.
조카 이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야 무과에 급제하고 본격적으로 무관의 길을 걸었으며, 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의주성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종제 이훈과 함께 전사한다. 서자 이훈과 이신은 무과에 급제했는데 이신은 이괄의 난때 격전지였던 안현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하고, 이훈은 정묘호란때 이완과 함께 의주를 지키다 전사했다. 두 사람 모두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해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정유년에 아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삼남 이면까지 포함하면 다섯 아들 중 4명과 조카 3명이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전장에서 분골쇄신했다. 집안의 이단아(?) 차남 이예는 순수 문관으로 형조정랑을 역임했으며 사후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이순신은 상주방씨 외에 소실을 두었는데, 이분의 『행록』에는 서자로 훈(薰)과 신(藎), 서녀 둘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훈은 무과에 올라 이괄의 난 때 전사하여 뒷날 병조참의를 증직받았으며, 신도 무과에 올라 정묘호란 때 의주에서 사촌 형 이완과 함께 순절하였다.
三尺誓天삼척서천 山河動色산하동색
一揮掃蕩일휘소탕 血染山河혈염산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鑄得雙龍劍주득쌍룡검 千秋氣尙雄천추기상웅
盟山誓海意맹산서해의 忠憤古今同충분고금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차수약제 死即無憾사즉무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장남 이회 李薈 (1567년 ~ 1625년)
이순신을 따라 전쟁에 참전하면서 뚜렷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이순신과 여러 무장에 대한 뒷바라지를 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었으며, 이순신이 2품직으로 승진하면서 국법에 따라 음보를 통해 임실현감이 되었다. 참고로 이회 외에도 사촌 이완 등 이순신의 자식 및 조카들은 아버지 / 숙부인 이순신 아래에서 종군했지만, 아무런 관직이 없이 모두 의병 신분으로 활동했다. 조선의 국법 중 '상피제'라고 해서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친인척들은 같은 임지에서 벼슬을 할 수 없었는데 이순신은 이 상피제를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이완도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야 무과에 합격해서 공식적인 벼슬 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