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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향기로 임하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는 거리감이 멀지만, 요즘 이 나라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최고(最高)의 향과 신맛을 자랑하는 커피 예가체프 덕분이다. 아마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루살렘을 순례한 이 나라 여왕 간다게의 국고 관리 내시의 에피소드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행 8:27-39).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던 에디오피아 사람은 전도자 빌립에게 의문 나는 점을 물었고, 대답을 들은 후 세례받기를 결심하였다.
에티오피아는 구스로도 알려져 있다. 이미 창세기에 처음 등장한 이래 성경은 40여 차례 같은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스’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에 1:1)에서 보듯, 세상에서 가장 먼 나라로 통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주전 1천 년 전에 솔로몬을 방문한 여왕의 나라 ‘스바’(왕상 10:1)도 자신의 나라임을 주장한다.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동쪽 끝에 위치한 에티오피아는 ‘푸른 다리의 땅’으로 불리며, 그리스어로는 ‘그슬은 얼굴’을 뜻한다.
일찍이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에티오피아는 신예루살렘으로 불렸다. 특히 라리벨라 암굴교회는 세계문화유산 1호로 등록될 만큼 유서 깊다. 현재 인구의 절반은 정교회 그리스도인으로,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경우 75%가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믿는다. 더 정확한 이름은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The Ethiopian Orthodox Tewahedo Church)인데, ‘테와히도’는 ‘하나의, 통일된’이란 뜻이다. 동양정교회(Oriental Orthodoxy Church)에 속한 4대 교회(시리아 정교회, 곱트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중 하나이다.
에디오피아 교회의 십자가 사랑은 최고(最古)의 커피 발견국이란 자랑만큼 유명하다. 십자가 중에 가장 아름다운 전통을 가진 나라로 에티오피아를 손꼽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십자가 문양과 관련한 도록이 따로 있을 정도다. 십자가 모양에 대한 고유한 디자인은 뚜렷한 계보가 있으며, 다양한 갈래에 대한 연구가 존재한다. 무엇보다 정교하고 섬세한 은공예 수제품은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이 빚어낸 눈부신 경건 예술이다.
‘빛 십자가’는 에티오피아 정교회 십자가의 이름이다. 마치 천지에서 꽃이 피어나듯 생명력을 뽐내고, 사방으로 빛을 발산하듯 거룩함을 드러낸다. 퍼져나가는 빛을 표현한 것은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현현(epiphany)을 느끼게 한다.‘빛 십자가’ 전통은 북아프리카 교회들, 특히 곱트교회와 특징을 공유한다. 십자가 사방 끝마다 세 갈래 모양으로 나누어 삼위일체를 장식한 것은 곱트교회에서 파생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오랫동안 이집트 콥트정교회의 일부로 존재하였다. 7세기에 아랍 이슬람 세력의 정복 전쟁으로 이웃 그리스도교 교회들과 교류가 거의 끊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예루살렘에 있는 에티오피아 수사들을 통해 바깥 그리스도교 세계와 접촉을 유지하였다. 그럼에도 빛 십자가에서 보듯,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고유한 경건 문화와 신앙 유산을 간직해 왔다.
특징적인 것은 행렬용 십자가(Processional Cross)이다. 기치(旗幟) 용도로 높이 들기 위해 십자가 아래에 기둥을 끼우도록 고안되었다. 절기와 전례 의식에서 십자가가 다양하게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행렬용 십자가의 경우, 양면에서 볼 수 있도록 양편에 모두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액자 형태의 경우는 성화상을 보호하기 위해 여닫도록 하였다. 이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커다란 둥근 눈과 짙은 빛의 얼굴색을 한 에티오피아 사람의 모습이다.
빛 십자가에 담긴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전통은 지극히 독보적이고, 고유하다. 십자가에는 에티오피아 내시가 수레에서 타고 읽었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53:7-8)은 십자가의 영성을 느끼게 한다. 빌립은 그의 궁금증에 대해 풀어주면서 예수 복음을 전하였다. 도살자에게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가 바로 세상의 구세주시라는 것이다.
에티오피아 사람을 대표하는 간다게 내시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행 8:34). 우리 시대는 오래도록 물음을 잃어버렸다.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더 이상 진지하게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지난 2천 년 동안 에티오피아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빛과 향기를 통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해 왔다. 지금은 어둠 속에서 물음을 찾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