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새로운 도주선, 새로운 철학
들뢰즈는 자신의 미시정치를 설명하기 위해 "절편성(Segmentar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일상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지만, “절편성”을 말 그대로 해석해 본다면 “조각조각 잘려있음”을 지칭하는 것이다. 구분 없이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든 하나하나 식별되도록 쪼개져 있을 때 그 조각들을 절편이라고 하고, 그렇게 조각조작 나뉘어져 있는 생김새를 절편성이라고 한다. 일상적인 용어로 대체해 본다면, ‘나뉨’, ‘구획되어짐’이라고 옮겨 볼 수도 있겠다. 즉 절편성은 구간으로 나누어짐을 말한다.
질 들뢰즈(좌), 펠릭스 가타리(우)
원래 이 용어는 원시사회를 논의하기 위해 인류학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이었다. 그들은 원시사회가 고정된 중앙 국가도 없었고, 그와 유사한 포괄적인 권력도 없었으며, 전문화된 정치 제도도 없었으므로, 원시사회가 매우 ‘유연한 절편성(supple segmentarity)’을 갖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원시사회는 하나의 구조로 확정되거나 수렴되는 일이 없었다. 이를테면 원시적 절편성(primitive segmentarity)은 일종의 다성적 코드(polyvocal code)의 절편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원시사회는 다양한 목소리를 갖는 다양한 사회-조각들로 나뉘어 있어서 어떤 하나로만 구조화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한 것은 원시사회가 현대사회와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현대사회는 국가를 중심으로 매우 중앙집권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도 현대사회는 원시사회와 달리 너무나 강하게 구획 지워져 있고, 또한 구획 안에서는 너무나 강하게 중앙집권적이라고 알고 있다. 국가를 보라. 국가는 온갖 경계들의 대표적 산물이 아니던가. 트럼프가 멕시코-미국 국경에 벽을 쌓겠다고 했을 때, 그는 오히려 현대적인 국가의 모습을 제대로 복원하려는 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현대 국가도 이런 절편성과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고 뜻밖의 주장을 펼친다. 들뢰즈는 현대국가들이 그처럼 중앙집권적이므로 원시사회보다 덜 절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혹시 환형동물(절편성)과 중추 신경계(반-절편성)라는 거짓된 배경과 인식에 기초한 것이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즉 우리들이 갖고 있는 착각이 그런 대립(원시사회 대 현대사회)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들뢰즈는 중앙집권적이라고 알려진 뇌조차도 더 절편화된 벌레(more segmented worm)라면서 중앙집권적인 것과 절편적인 것 사이의 통념적인 대립관을 반박한다.
현대의 기술 관료주의는 세부적으로 나뉜 분업과정을 통해서 진행된다. 칸막이로 구획된 사무실의 현대적 모습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 그림이다. 그러나 그것도 절편성 측면에서는 원시사회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다만 들뢰즈는 중앙집권적인 것과 절편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폐기하고, 절편성의 두 유형으로 구분하기를 제안한다. 원시적이고 유연한 절편성(supple segmentarity)과 현대적이고 견고한 절편성(rigid segmentarity).
들뢰즈가 이렇게 바라보는 것의 의의는 중앙집중적인 국가체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데 있다. 들뢰즈는 이 두개의 절편성이 서로 뒤얽혀 있다는 의견을 제출한다. 그 둘은 구분되기는 하지만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inseparable), 하나가 다른 하나와 함께, 하나가 다른 하나의 안에 뒤얽혀 있다는 것이다(they overlap, they are entangled). 즉 그것들은 시간적으로 딱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회에나 원시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뒤섞여 있다는 말이다.
"유연한 절편성을 원시인들만의 특전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유연한 절편성은 우리 내부에 살아 있는 야만성의 잔존이 아니라, 전적으로 현행적인 어떤 기능(contemporary function)이며 견고한 절편성과 분리할 수 없다. 유연한 절편화란 견고한 절편성과 분리할 수 없는 철저하게 현대적인 하나의 기능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회와 모든 개인은 두 절편성에 의해, 즉 그램분자적인(molar) 절편성과 분자적인(molecular) 절편성에 의해 가로질러진다."(406)
예컨대 성이나 계급 같은 절대 불변일 것 같은 이항 대립들을 보자. 물론 겉보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생물학적으로 완벽히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우리는 그런 구분에 의해 생활을 한다. 목욕탕도 따로 쓰고, 옷도 다르게 입고, 심지어 말투나 태도도 다르게 교육받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남자인 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필요와 상황에 따라 내 안에 있는 여자의 특성을 활성화하여 대응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더 살갑고, 더 정다운 태도로 상대에게 친밀함을 내보이며 내 안의 매력을 이끌어낸다든지, 좀 더 모성적인 몸짓을 통해 엄마와 같은 보호자로서 등장하여 상대를 대해준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또 상대방인 여자 내부에 있는 남성적 면모를 자극하여 좀 더 강한 움직임을 유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기존의 남·여 구분이 거시적 차원에서 유지될 때에야 가능한 전략들이다. 다시 말하면 거시사회적으로는 남자, 여자라는 구분이 있어야 미시적인 차원에서 그런 전략들이 실행될 수 있다. 만일 남, 여라는 식별이 부재한 지대라면 애초부터 남, 여의 성질을 활성화한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거시적인 구분 속에서 남자이지만 여성이, 여자이지만 남성이 미시적으로 활성화되어야 오히려 남자와 여자의 정체성이 유지된다. 만일 남자가 남성으로서의 거시적 특성만을 고집하게 되면 오히려 남자로서의 특성이 그 고집으로 쉽게 파괴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로서의 강한 힘이 필요할 때와 여자로서의 부드러운 힘이 필요할 때는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서 모든 정치는 거시정치인 동시에 미시정치인 셈이다.
사회계급에 오면 이런 의존성은 더욱 강해진다. 개념적인 계급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명확히 구분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회에 실제 현상을 분석하면 계급은 "군중"과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계급이 군중들을 몇 가지로 잘라내고, 유동적인 양태를 하나로 결정화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군중은 들뢰즈의 표현대로 계급들로부터 새어나온다.
그러므로 견고한 관료주의 안에서도 유연한 절편화가 진행될 수 있다. 이 의미에서 카프카는 관료주의에 관한 최고 이론가이다. 그의 소설들은 어떻게 사무실들을 나누는 장벽들이 엄밀한 경계선이기를 그치고 분자적인 환경에 빠져드는지를 절묘하게 보여준다. "분자적인 환경"에 빠져들면 거시적인 시각으로는 도무지 식별이나 인지가 불가능한 요소들이 돌아다닐 수 있다.
프란츠 카프카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려면 어떤 국가 행정 기구를 넘겨받기보다, 오히려 사회의 모든 세포들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분자적인 환경을 구성함으로써 그 환경 속에서 돌아다니는 흐름을 수중에 넣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수 있다. 히틀러는 이 부분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런 흐름을 장악한 후에 자연스럽게 국가기구를 획득하였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자본주의국가들에게 히틀러는 스탈린보다 더욱 위험하게 여겨졌다. 자본주의 국가와 너무나도 동일한 것을 대상으로 권력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분자적인 것은 상상의 영역에나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크나큰 오류다. 이미 20세기 초 국가들은 나치즘을 통해서 그런 나이브한 생각이 얼마나 큰 문제를 야기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는다. 견고한 절편들 밑에 유연한 절편들이 생생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박근혜로 대표되는 세력은 이런 흐름을 누구보다 먼저 장악했기 때문에 국가기구를 획득할 수 있었고, 또한 이런 흐름에서 급격히 멀어졌기 때문에 국가기구를 내놓아야 했던 것일지 모르겠다. 그들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내의 수많은 분자들을 흐름 차원에서 장악하여 왔다. 그리고 그런 흐름 위에서 국가를 탈취하였던 것이다. 사실 브렉시트나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등장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언제나 이미 이런 흐름 위에서 구성되어 왔다. 오히려 지금의 사태들은 이 흐름의 실재성을 완벽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런 사태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잊을만하면 그 실재성을 드러내주어 놀라울 뿐.
우리는 두 가지 절편을 모두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어느 절편이 본성상 또는 필연적으로 더 좋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견고한 절편과 유연한 절편들은 서로 뒤섞여 있으면서 서로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려한다. 우리가 견고하다고 느끼는 절편들 사이로 흐름들은 새어나와서 일종의 변이를 일으키는데, 이 변이의 결과물이 언제나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정의의 편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이나 파시즘은 이런 변이의 흐름을 자신의 소유로 고정시키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흐름을 예리하게 쫓으며 선취하는 역량을 지녔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자본이나 파시즘에게서 이런 역량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이나 파시즘이 궁극적으로 골몰하게 되는 죽음과 허무를 피하면서 말이다. 그래야 흐름을 그들에게 빼앗기지 않는다. 그 전쟁만큼은 자본이나 파시즘과 같은 지대에서 수행할 수 있어야만, 그리고 그런 전쟁을 수행할 역량이 되어야만 우리들의 변이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문학적 지식이나 관념적인 관조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있는 그곳의 자본주의와 함께 실천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나는 요즘 내가 몸담고 있는 ‘금융’이라는 현상에 대해 완전히 다르게 접근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을 그저 자본주의의 핵심적 수단이라고만 생각하여 비난하기만 하는 인식에서 벗어나서, 그것 자체가 갖고 있는 전쟁기계적 성격들을 철저하게 이해해보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몸담았던 금융이야말로 역사 이래 가장 가벼운 신체를 가지고, 가장 오래도록 변이를 일으켜온 역설적인 추상기계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오랜 시간을 돌아서 나는 가장 큰 전쟁이 있어왔던 곳에 서 있다. 견고한 절편과 유연한 절편이 뒤섞인 이곳, 나는 이곳이 나의 새로운 도주선인 것 같다. 결국 나의 철학은 내가 있던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