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세계사'? 전부 알 필요 없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못 외우겠어요!
역사 공부를 좋아하는 분들은 해당 사항이 없지만, 고민은 역시 '역사' 하면, 머리가 아픈 분들에게 쏠리게 마련이다. '역사'에 고개를 젓는 이유는 대부분 '머리가 아파서'다. 외울 것이 많다는 것이다. 관직, 이름, 연도 등등. 공감한다. 역사 공부를 업으로 삼고는 있는 필자도 그러한데, 일반 독자들은 어떠하겠는가.
나는 학과 강의든 특강이든 맨 먼저 꼭 공지하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말하는 연도는 나중에 반드시 확인하고 인용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난 이상하게 연도나 사람 이름을 외우지 못한다. 30년 넘게 역사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실로 내가 기억하는 사건의 발생연도는 몇 개 되지 않는다. 나는 주자(朱子 송나라 주희(朱熹))라는 학자를 존경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 분의 생몰(生沒) 연도가 기억하기 좋기 때문이다. 1130~1200.(주자 당대에는 이 서기(西紀) 연도가 사용되지 않았다. 연도 역시 인식의 방편이다.)
오죽하면 매 학기 시작할 때면 맨 먼저 하는 일이 사진 달린 출석부를 출력하여 매일 서너 번씩 이름을 소리 내어 낭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달은 해야 5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한다. 내 기억력이 나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런 기억력을 가지고도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물론 손이 고생하긴 한다. 글을 쓸 때면 늘 연표나 인명사전을 뒤적여 확인해야 안심이 되므로 불편하고 효율성이 떨어진다.
물론 여전히 박람강기(博覽强記), 널리 읽고 기억을 잘하는 것이 역사 공부를 할 때 매력적인 장점임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필자의 경우를 너무 일반화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상 역사공부나 취미는 '외워야 한다'는 통념은 과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런 의심에는 근거가 없는 게 아니다.
'모든' 역사라는 신화
이렇게 생각해보자. 시장에 있는 모든 물건을 알아야 내가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체를 알아야 역사를 안다고 생각해오지 않았는가? 세계사를 배워야 인류의 역사를 아는 것이고, 국사를 배워야 조선인의 역사를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각 대학 역사학과마다 고대부터 현대사까지 쭉 교수를 뽑아놓고, 각 시대마다 균등하게 쭉 상품(커리큘럼)을 늘어놓고 고객(학생)들에게 다 알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단언컨대, 이렇게 전체를 아는 역사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보 같은 짓이다. 이름하여 전체론적 오류(holist fallacy). 역사가의 증거는 항상 불완전하고, 관점은 항상 제한되게 마련이다. 역사학도는 '모든' 주제나 사건이 아니라, '어떤' 주제나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 인간의 역사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 또는 관심을 아예 전체론적 오류로 만들어버린 대표적인 학자는 내가 보기에 헤겔이다. 그의 1822~1831년 역사 강의를 묶은 <역사철학 강의> 서론을 보자.
"식물의 배아가 그 속에 나무의 전체 성질, 과실의 맛과 형태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의 최초 발자취 역시 이미 역사 전체를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동방 제국의 사람들은 정신(das Geist) 또는 인간이, 그 자체로서 자유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다만 한 사람만의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자유는 단순한 자의 횡포, 둔감 또는 단순한 하나의 자연적 우연, 또는 자의에 불과한 열정이다. 따라서 이 한 사람은 전제군주이지 자유로운 성인은 아니다.
자유의 의식이 최초로 생긴 것은 그리스인에게서이고, 따라서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또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던 데 불과하다. 인간 자체가 자유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이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인은 노예를 소유했고 그들의 생활 전체 및 그들의 빛나는 자유의 유지는 노예제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게르만 여러 민족이 비로소 그리스도교 영향을 받고서야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유이고, 정신의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는 의식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 요컨대 세계사란 자유의 의식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 진보를 그 필연성에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역사철학 강의>(김종호 옮김, 삼성출판사 펴냄, 1990) 서론 중.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을 조금 수정하였다.)
'어떤' 사실만 알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