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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해외 독립운동가
이범윤·이위종·안중근 장군과 ‘동의회’ 조직의 핵심 인물
1909년 안중근 장군·이강과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모의
하얼빈 의거 후 권업신문 창간 한인들 ‘독립의지 고취’에 앞장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고택 전경. 사진 제공=박종인 사진작가 |
광복 72년의 새해가 밝았다. 국내외에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며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떳떳하게 광복을
맞을 수 있었다. 선열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일이 곧 애국의 길이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잊혀진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가 바로 최재형이다.
노비의 아들에서 글로벌 청년으로
최재형은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근과 굶주림을 참을 수 없어 9세에 아버지 최홍백을 따라 연해주로 이주했다. 최재형은
한인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형수의 심한 구박으로 11세에 가출한다. 포시에트 바닷가에 허기져 쓰러진 최재형을 구해준
사람은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돌며 무역을 하는 러시아 선장이었다. 어린 최재형은 선장 부부의 극진한 사랑으로 11세부터 17세까지 6년 동안
세계를 돌며 상술을 배우고 세계를 익힌다.
특히 선장 부인은 최재형에게 러시아어와 중국어, 세계의 문화와 교양까지 특별한 사랑으로
교육한다. 청소년 시기 최재형에게 6년간의 항해는 노비의 아들 최재형을 글로벌 청년으로 환골탈태하게
한다.
한인사회의 등불, 위상 점점 높아져
동방정책을 펴기 시작한 러시아는
극동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그로 인해 각종 도로 공사, 건축 공사, 식료품·공산품 생산까지 일자리가 급증했다. 한인들은 노동을 제공하지만,
러시아 인부에 비해 열악한 대우를 받았다. 이때 최재형이 통사(통역)로 일을 시작하면서 한인들의 억울함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기록을 보면
최재형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대했다고 한다. 자신의 신분이 노비 출신이니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테고, 차별 없이
도와주었으니 한인들은 최재형의 초상화를 걸어놓을 정도로 존경하면서 난로라는 뜻으로 최재형을 ‘페치카’라고 불렀다.
이후 최재형은
군납회사를 차려 군인들을 상대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유창한 언어로 한인들에게 알맞은 일을 알선해주고, 삶이 윤택해지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다.
한인들은 최재형을 믿고 일을 하면서 점차 가난에서 벗어났다. 최재형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 한인마을의 노야(촌장)를 거쳐 드디어 얀치혜 남도소의
도헌(군수)에 올랐다.
최재형 선생이 받은 건국공로 훈장증. |
최재형 선생이 추서 받은 훈장. |
러시아 한인마을에 소학교 32개 세워
최재형은 러시아 사회에서 신망받는 행정가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한인 대표로 초청돼 예복을 하사받는다. 최재형은 한인들의 교육에 힘써 한인마을에 32개의 소학교를 세웠고, 그가 세운
한인학교는 러시아에서 우수학교로 지정되기도 했다. 최재형은 자신의 월급을 은행에 넣어두고, 그 이자로 소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유학 보냈다.
유학을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와 소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안중근 장군 하얼빈 의거 지원
러일전쟁
후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3명을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최재형은 간도관리사 이범윤과 이위종, 안중근 장군과 함께 독립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군자금으로 1만3000루블을
흔쾌히 내놓았다.
러시아 공사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에게 1만 루블을 들려 최재형에게 보낸다. 동의회에선 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회장 이위종, 부회장 엄인섭, 서기 백규삼, 우영장 안중근이 핵심 인물이었다.
1909년 최재형은 안중근 장군, 이강과
함께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모의하고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장군이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砲殺)하게 된다.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의거 이후, 대동공보가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되자 최재형은 대양보 사장을 맡지만,
여의치 않아 권업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고 권업신문을 창간했다. 권업(勸業)이라는 말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가기 위해 일자리를 알선한다는
의미였지만, 실제로는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고취하는 내용을 주로 실었다.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
특히 최재형은 1919년 전로한족대표자 대회에서 이동휘와 함께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대한국민의회에서도
외교부장에 임명됐다. 또 상해임시정부를 조직할 때도 최재형은 재무총장에 발탁되지만 수락하지 않았다. 1920년 4월 4일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에서 ‘4월참변’을 일으킨다. 이때 러시아 장군들과 함께 많은 독립운동가가 붙잡혀 총살을 당했는데 최재형도 4월 7일 일본의
총탄에 순국했다.
최재형 선생은 기업가, 한인들의 페치카(난로), 한인들의 교육자, 독립운동가, 언론가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위인(偉人)이다.
<문영숙 안중근 홍보대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