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장안을 점령한 것은 장수태왕초기이다
安豐公閭根率騎詣上邽,與敕文討梁會。會走漢中。蓋吳複聚杏城,自號秦地王,假署山民,眾旋複振。於是遣永昌王仁、高涼王那督北道諸軍同討之
發定、冀、相三州兵二萬人屯長安南山諸穀,以防越逸。丙戌,發司、幽、定、冀四州十萬人築畿上塞圍,起上穀,西至於河,廣袤皆千里
북위서446년
안풍공 려근이 기병을 거느리고 상규에 도착했다. 양회를 토벌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회가 한중으로 도망하여 개오가 행성에 다시 모였다. 옛 진나라땅왕이라 하고 백성을 배치하고 외국군대로 하여금 흔들게 했다. 영창왕 인과 고량왕 나독을 북도제군동으로 삼아 토벌하게 했다.
정주 기주 상주 3주의 병력2만명을 장안 남쪽 산 여러 계곡에 주둔하게 하고 이로써 변방을 넘지 못하게 했다.사주 유주 정주 기주의 4주에서 10만명을 뽑아 수도부근에 요새를 둘러쌓다. 상곡에서 서쪽으로 황하에 닿았다. 넓이가 약 천리이다.
백과사전에도 개오는 445년 섬서성 행성에서 한족과 여러 북방부족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되어있다.그 군대가 고구려군이 아닐까 445년에는 우리가 배우기로 북위를 흔들나라는 섬서성에서는 유연밖에 없다. 그러나 유연은 초기부터 고구려의 속국내지는 하위관계의 동맹국이었으며 전성기에도 장안일대를 차지한 적이 없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1050 고구려최대영토와 유연최대영역의 경계
http://blog.daum.net/sabul358/18321813 청나라때 고지도
또한 북위의 방어편제를 보면 당시 북위의 영토경계를 알수 있다. 북위군은 장안남쪽의 여러 골짜기에 군대를 주둔시켰다고 한다. 즉 장안은 북위땅이 아니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1097 북위수도 평성은 장치시 심현
북위군은 수도인 평성이 북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그부근에서 요새를 쌓은 것이다. 천리나 된다고 하니 거의 장성수준일 것이다.
또한 황하서편에는 옛 전국시대 위장성을 토대로 방어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장안일대는 자신들의 땅이 아니니 어쩔수없이 장안 남쪽의 산악지형을 따라서 방어진을 친 것이다. 실제로 장안일대는 평지이지만 남쪽 수십km에는 산악지형이 위의 그림처럼 존재한다.
송나라고지도인 십오국풍지리지도에도 북위떄 장성을 기반으로 요나라를 방어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북위와 고구려의 경계는 바로 북위장성과 전국시대 위나라장성과 장안남쪽의 산악지대였던 것이다.
」世祖從之。永宗潰滅。車駕濟河,前驅告賊在渭北。世祖至洛水橋,賊已夜遁。詔問浩曰:「蓋吳在長安北九十裏。渭北地空,穀草不備。欲渡渭南西行,何如?」浩對曰:「蓋吳營去此六十裏,賊魁所在。
북위서
설영종이 패망했다. 거가가 황하를 건넜다.세조가 락수교에 도착하자 적이 밤에 도주했다. 개오가 장안북쪽 90리에 있습니다. 위수북쪽은 빈 땅인데 양식과 풀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위수남쪽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함이 어떠한지? 대답하길 개오의 군사주둔지는 60리거리입니다. 적의 괴수가 거기 있습니다.
또다른 증거가 있으니 바로 개오의 난을 진압하러 북위왕이 진격할때 위수북쪽은 빈땅이라서 지나지 못하고 위수남쪽을 건너 진격하려 한 것이다
위의 기록을 보니 한서에 쓰인 또다른 기록이 생각난다. 바로 진나라때의 영토인 운장을 한나라가 빈땅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즉 버렸다 혹은 내주었다라고 봐야한다. 그때는 부여가 유방이 항우와 싸울떄 기병을 보내주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땅을 떼주었을 것이다. 위의 위수북쪽이 빈땅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고구려가 점령했기에 지들 땅이 아니니 그냥 완곡하게 표현하여 빈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북위지리지에는 장안일대의 옹주를 지금 산서성서부로 옮겨버린다. 언제 고구려가 장안성일대를 점령했을까?
西虜寇長安,雍州刺史硃齡石諸軍陷沒,官軍舍而東。
송서
416년 장수태왕4년, 동진안제 13년, 백제전지황제 13년
서쪽오랑캐가 장안을 침공했다. 옹주자사 주령석의 모든 군대가 전멸당했다. 관군이 포기하고 동쪽으로 갔다.
전진이 동진을 침략한 비수전투에서 패한후 망한뒤 장안과 낙양은 후진이 차지했다. 낙양성은 동이족인 유유가 백제군의 도움으로 점령했고 장안성은 고구려군의 개입으로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1129백제가 낙양을 함락하고 난징을 점령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른 군대가 장안성을 점령한다. 바로 고구려 장수태왕즉위 4년째일때이다.서쪽오랑캐는 우선 색노라고 불리던 북위는 아니다. 하나라가 제일 유력하다.
赫連昌遣其弟平原公定率眾二萬向長安
昌引眾出城,大破之。事在《昌傳》。昌將麾下數百騎西南走,奔上邽。
426년 북위서
혁련창이 그 아우 평원공 정을 보내어 외국군대 2만으로 장안으로 향하게 했다.
창이 외국군대를 끌어들여 성밖으로 나왔으나 이를 대패시켰다. 창의 부하 수백기가 서남으로 도망했다.상규로 도주했다.
하나라는 북연과도 동맹한 적이 있다. 북연과 하나라는 공동으로 북위와 싸웠고 북위의 땅을 많이 빼앗았다. 그러나 북연은 고구려에 투항해 버리고 하나라는 서쪽의 토욕혼과 북량을 공격하다가 본토가 빈 것을 노린 북위의 기습으로 거의 멸망직전에 이르렀다.그렇다면 하나라가 426년까지는 장안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북위군에 맞서 하나라는 이상하게 외국군대까지 끌어들인다. 이 외국군대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赫連定遣其北平公韋代率眾一萬攻南安,城內大饑,人相食
북위서 431년
혁련정이 북평공 위대를 보내 외국군대 1만으로 남안을 공격하게 했다. 성이 크게 굶주렸다.
중국고금지명사전에는 남안이 천수라고 한다. 하나라는 북위를 공격하러 가던중 그들이 몇해전 복속시켰다던 토욕혼의 기습으로 전멸하면서 나라가 망했다. 그럼 하나라의 영토는 누가 차지했는가? 기록상으로는 북위가 차지해야 한다. 그런데 북위의 기록은 엉뚱하게 장안남쪽의 산악지대만 차지하고 있고 위수북쪽은 자기땅이 아니라고 한다.
1.하나라가 고구려,백제가 송나라를 세운 유유와 함께 후진을 멸망시키자 세력을 키워 장안일대를 점거하게 된다. 이때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이 두려워 북연처럼 보호국형태내지는 동맹국으로 존재하게 된다.
2.하나라가 호태왕사후의 혼란기를 틈타 북연과 함께 고구려의 영향력을 벗어나 북위와 독자적으로 전쟁을 벌여 이긴다.
3.하나라의 동맹국 북연이 쇠약해지고 고구려에 의지하자 호태왕에게 복속됐던 토욕혼과 북량등을 공격하면서 세력을 키우려 하나 그 빈틈을 북위가 공격하여 황하서쪽일부지방이 북위땅이 된다.
4.멸망직전에 처하자 고구려군을 끌어들여 북위에 대항하려 한다. 하나라가 431년 북위에게 멸망당하고 436년 북연도 멸망당하자 그제서야 고구려군과 북위군이 436년 룡우를 경계로 만나게 된다 하나라의 땅은 대부분 고구려에 점령된 것으로 보인다.
북위군은 반란이 있거나 하나라의 잔당을 토벌할때 장안과 위수북쪽을 피해서 남쪽으로 이동했다.그곳이 이미 고구려에 장악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1085 섬서성 포성의 고구려성 유적
섬서성포성즉 전국시대 위장성근처에서 고구려성유적이 발견된 것은 바로 그곳이 북위와 고구려의 접경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군은 문자태왕때까지 장안성일대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돌궐이 문자태왕말기에 일어나면서 고구려는 황하서쪽을 거의 다 내주었다. 그러나 연개소문때 고구려는 평량이북까지 수복했다. 그러나 장안성은 다시 회복하지 못하다가 고구려의 후손인 금나라에 의해 수복되었다.
장안일대는 넓은 평지와 방어하기 좋은 곳이다. 처음 이곳에 나라를 세운 단군은 이곳을 버리고 동쪽으로 이동했는데 그 이유를 최근에야 알것 같다. 이곳이 지진대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당나라기록을 살펴보니 거의 몇해에 한번씩 지진이 발생하는 곳이다. 그래서 단군이 산서성 평양 ,하북성 광부고성,하북성 보정고성,하북성 문안현 광릉성등으로 여러차례 옮긴 것이 아닐까
고구려인들은 이 성을 한성이라 불렀을 것이다. 지금도 한성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