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창군(福昌君) 김수녕(金壽寧)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수녕은 자(字)가 이수(頤臾)이고, 호(號)가 양소당(養素堂)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절충 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의 아들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왔으며, 7세(歲)에 속문(屬文)에 능하니 당시에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외조부(外祖父)인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다른 날 마땅히 세상에 크게 날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경태(景泰) 계유년인 나이 18세가 되던 해 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가을에 문과(文科)에 제1인으로 뽑혀서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을 제수(除授)받았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ㆍ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역임하였다. 당시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가 함길도(咸吉道)ㆍ평안도(平安道)ㆍ강원도(江原道)ㆍ황해도(黃海道)ㆍ충청도(忠淸道) 5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어서,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천순(天順) 신사년에 한명회가 그를 보내어 변방(邊方)의 일을 아뢰었는데, 임금을 면대하여 말하는 것이 심히 자세하므로, 세조(世祖)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비록 천리(千里)를 격(隔)하였지만 한명회와 더불어 면대해 말하는 것과 같도다.”
하고, 특별히 1자급(資級)을 더하였다. 임오년에 세조(世祖)가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서 예문관(藝文館)의 여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옛날의 제왕(帝王)의 득실(得失)을 논란하게 하였는데, 김수녕이 경사(經史)를 증거하면서 시비(是非)를 변석(辨析)하니 문득 말할 때마다 임금이 감동하여 들었고, 또 명하여 자급을 더하게 하였으며,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으나 일 때문에 파면당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 병술년에 다시 좌승지(左承旨)로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임명되어서 형조 참의ㆍ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무자년에 관계(官階)가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경인년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다. 세조(世祖)와 예종(睿宗)의 두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참찬(參撰)하였는데, 당시 좋은 사재(史才)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신묘년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복창군(福昌君)에 봉(封)해져서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ㆍ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다가 이 해에 다시 복창군에 임명되었다
.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38세였다. 문도(文悼)라고 시호(諡號)하니 두루 묻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중년(中年)에 일찍이 죽은 것을 도(悼)라고 한다. 김수녕은 천자(天資)가 명민(明敏)하고 학문이 해박(該博)하며, 문장(文章)을 짓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고 간고(簡古)하며, 필(筆)을 잡으면 바로 성취하여 전인(前人)의 말을 답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글로 써 둔 것이 없어서, 이 때문에 시문(詩文)으로서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적다. 바깥으로는 온화(溫和)하고 안으로는 강직(剛直)하여서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달관(達官)이나 귀요(貴要)라 하더라도 종일토록 마주 대(對)하여 일찍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할 수가 없었으나, 만약 그 적당한 사람일 때에는 비록 위포(韋布)의 선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신발을 끌고 나아가 맞아들였다.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항상 녹(祿)만을 받아서 먹었는데, 남의 집을 빌어 살면서도 종신토록 처세함이 둥글고 넓었으며, 작은 연고를 가슴에 끼어두지 아니하였다.
다만 익살이 많아 큰 소리를 치니 군자(君子)의 근묵(謹默)하는 위용(偉容)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그의 단점으로 여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