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隨筆 부문 최우수
군인의 향기 - (香氣에 醉하다)
신영인(육사 동문 자녀)
군인의 향기를 아세요?
전 그 향을 곳곳에서 잘 맡을 수 있습니다.
깨끗하게 빨아 빳빳하게 잘 다린 아빠의 오래된 군복에서,
밤늦게까지 근무를 서는 아빠에게 야식을 싸가지고 들른 아빠의 사무실에서,
안방 벽걸이에 걸려있는 아빠의 훈련복에서,
동생과 군인 놀이를 하며 써 본 아빠의 무거운 철모에서,
현관에 놓인 아빠의 묵직한 군화에서, 은근한 땀 냄새와 군복냄새,
화약 냄새가 섞여 나는 군용 지프차에서, 복지 회관에서, 방금 통과한 부대 정문에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 PX 안에서 그 향은 머물러 있습니다.
저 멀리서 집으로 걸어오시는 아빠의 군화소리에서도 그 향이 스치는 듯합니다.
전 늘 그 향을 쉽사리 지나치질 못 합니다.
길을 걷다가 잠깐 스치는 향에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야 맙니다.
때론 그것이 아빠의 냄새 같아 그 공기를 호흡해 보곤 합니다.
이 향이 더 정다울 때란 엄마가 아빠의 군복을 다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입니다.
당신은 그것들이 무슨 향기냐며 저를 우습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향기(香氣)의 사전적 의미는 ‘기분 좋은 냄새’랍니다.
저에게 있어 군인 향기는 정말 기분이 좋은 향이에요.
냄새라는 말은 그 단어 자체에서 왠지 부정적이고 기분 나쁜 향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아서,
제가 말하고 있는 그 군인 향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군인 냄새라고 말해버리면 정말이지 그것은 칙칙한 어떤 것이 되어버릴 것만 같으니까요.
생각하면 싱겁고 어이없는 노릇이지요. 별일입니다.
하고많은 냄새 중에서 왜 하필 군인 냄새일까요.
남들이 맡아보기에는 어찌 잘 맡아보려 해도 그저 군대 다녀온 남자친구를 꼭 껴안았을 때
스미어 나오는 어색한 땀 냄새 같다며 도통 좋지 않은 소리만 듣는 냄새입니다.
그러나 저에겐 그 은은한 향이 건강하고 어쩐지 그립습니다.
제가 그 향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어릴 때의 향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연에의, 고향에의, 유년에의 그리움 말이에요.
잃어 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지금은 그들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있는 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영원한 격리나 되는 것처럼 절실함으로 간절함으로 더해 가는 그리움.
그 향기는 제가 잊을 만하면 저를 그 곳 그 때로 데려가
제 그리움을 달래주는 것만 같습니다.
군인 향기는 아빠의 군인으로서의 삶의 냄새입니다.
군대는 아빠의 인생에 있어서 반도 넘는 시간을 함께해 왔습니다.
아빠 스스로가 택한 길, 그리고 동시에 아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
군인 향기는 아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향인 것만 같습니다.
그건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빠의 군복 냄새를 맡아서 그런 걸까요? 글쎄요.
전 아빠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단 한 번도 아빠가 존경스럽지 않은 날이 없어요.
아빠를 떠올리면 아빠의 냄새인 군인 향기도 같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아빠의 군복에서 그 향이 스미어 나오는 것은 군복, 제 혼자만의 힘이 아닐 것입니다.
그건 아빠의 군인으로서의 삶이 담긴 옷이니까요.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그런 옷이 그저 섬유 냄새만을 풍길 리 없으니까요.
군인 향기는 우리 삼남매에게 추억입니다.
퇴근하신 아빠께 ‘다녀오셨어요!’하면서 안길 때 아빠에게서 확 풍기는 향은
제 마음 깊숙한 곳에 항상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빠께서 훈련으로 한동안 집에 들어오시지 못할 때는 영락없이
그것을 향한 그리움에 빠지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벽걸이에 걸려있는 아버지의
여분의 군복에 얼굴을 묻고 그 향을 깊이 들이마십니다.
한번은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실 때, 울던 어린 막내 동생 옆에
아빠의 군복과 엄마의 원피스를 가지런히 놓아둔 적도 있었습니다.
그 향을 잔뜩 맡은 동생은 울음을 멈추었고요.
누나와 그 여동생, 그리고 그 여동생의 남동생에게 이어지는 이 향은 어쩌면 우리에게
외로움과 그리움에서 구원해 주는 명의(名醫)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군인 향기는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깨달음입니다.
사람들은 군인들이 하는 일을 잘 모릅니다.
그저 나라를 지키고 있구나 하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요.
군 보안교육을 제대로 받은 저도 마찬가지구요.
하지만 사람들은 주변사람들이 군대에 가면 그제 서야 알게 됩니다.
내 소중한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 나라를 지키러 가는구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잠시 헤어져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러 가는구나, 하구요.
그 때부터는 이전처럼 길에서 군인을 만나 군인 향기를 맡으면,
이전과는 다른 애정을 담은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는 겁니다.
그 사람이 정말 소중했구나 하는 깨달음과 그 소중한 사람이
나와 나라를 지켜주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군인향기를 통해 와 닿는 것입니다.
군인 향기는 군복무중인 군인들과 군을 제대한 군인에게 있어서는 낭만과 외로움,
그리고 군 시절의 추억일 것입니다.
군인 향기는 그들에게 어떤 기분을 가져다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틀림없이 남자들만의 낭만이겠지요.
남자들이 제일 많이 하는 얘기이자 여자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얘기가 바로
1위가 축구 얘기, 2위가 군대 얘기, 3위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라고들 농담 삼아 합니다.
그 정도로 군대 얘기를 많이 한다는 뜻이니
그 향을 맡으면 그들에게는 제일 먼저 군 시절의 추억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짐작하건데 그들이 그 향을 맡으면 군복을 빳빳하게 날이 서도록, 과장해서 말하면
그 날에 손이 벨 정도로 다리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오버랩(overlap)되겠지요.
엄마가 낡은 아빠의 군복을 다림질하시면서 이제 새 군복을 사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랜 세월에 빛바래고 닳아버린 아빠의 헌 군복.
그럼에도 그 향은 남아있어서 그것들은 나에게 여전히 소중한 것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꽤 소중한 것임을 그 자체가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봄입니다. 눈이 녹아 물이 되고 싹은 움터 꽃을 피웁니다.
매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이때의 내 일상에 새롭고 강렬한 삶의 의욕을 샘솟게 할 것 같은
사랑하는 사람의 향기. 그리하여 쳐진 어깨 추스르고 활기차게 생활 앞에 서고 싶습니다.
오늘따라 그들이 풍기는 향기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우연히 들른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에서 발견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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