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恩惠)란 무엇을 말하는가
<말선34-168> 은혜(恩惠)를 받기 전(前)에는 세상(世上)이 아름다운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은혜(恩惠)를 받고 나면 세상(世上)이 전부(全部)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은혜(恩惠)의 경지(慶地)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전부(全部) 사탄같이 않고 걸어다녀도 구름 위(位)를 부웅 날아다니는 것 같다.
<말선34-144> 일을 잘하기 위해서 은혜(恩惠)를 주었는데도 불구(不久)하고 그 일을 하지 못하면 도리어 은혜(恩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恩惠)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자기(自己)가 은혜(恩惠)받은 것으로 소화(消化)해 가지고 세계(世界)를 위하여 자기(自己) 생명(生命)을 걸고 일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感謝)하게 되면 은혜(恩惠)는 그 사람에게로 옮겨지는 것이다.
<말선18-135> 통일교회(統一敎會)는 신령역사(神靈役事)로 기반(基盤)을 닦고, 진리(眞理)로써 실체(實體)를 세워야 합니다. 은혜(恩惠)받았던 사람이 뒤에 더 클 클 해하는 것은, 신령(神靈)은 있으나 진리(眞理)에 의(依)한 실체(實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선146-147> 오늘날 통일교회(統一敎會 교인(敎人)들이 원리(原理) 말씀을 듣고 말씀이 어떻다고 하면서 은혜(恩惠)를 보따리 채 풀어놓고 함부로 얘기하는데 그러다가는 오히려 걸려 넘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도 죽고 선생님(先生任)도 죽는 결과(結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적(敵)이 무엇이고 원수(怨讐)가 누구인가를 확실(確實)히 알아야 됩니다.
<말선40-73>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責任) 없이 말하게 되면 기운(氣運)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았으면 그 말씀을 믿어야 됩니다. 말씀의 내용(內容)이 자기(自己) 자신(自身)인데도 불구(不久)하고 자기(自己)가 어떠한 대상적(對象的)인 내용(內容)을 이루어 놓지 않고 느끼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말씀이 나갈 때 그냥 나가지 않고 반드시 자기(自己)가 가진 선(善)의 량(量)을 끌고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명문가(名門家)에서는 자식(子息)을 교육(敎育)시킬 때 아침에는 될 수 있는데로 함부(咸富)로 말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말선43-297> 하늘의 은사(恩賜)는 왔다가 절대(絶對) 그냥 돌아가지 않습니다. 자석(磁石)과 같아서 어떤 집에 은사(恩賜)가 왔다 가게 되면 거기서 붙을 수 있는 것은 전부(全部) 붙혀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끝 날에 게으른 자(者)의 것을 빼앗아 부지런한 자(者)에게 준다고 한 것을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힘(力)을 쓰려고 해도 힘(力)이 나지 않습니다. 이미 봄날과 같은 시기(時期)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올라가도 운세(運勢)가 뻗어갈 수 있는 봄이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름과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올텐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접붙이는 방법(方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혼자는 늦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선42-253> 신령생활(神靈生活)에서 고갈(苦渴)을 느낄 때는 지도자(指導者)를 찾아가서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자기(自己) 자신(自身)의 모든 문제(問題)를 제시(提示)하고 그의 대신자(代身者)로 따라가는 자세(姿勢)를 가져야 합니다. 그다음의 방법(方法)은 자기(自己)가 가고 있는 자리 이상(以上)의 비참(悲慘)한 자리를 스스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말선30-147> 나이 많은 사람들이 뜻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육신(肉身)이 노쇠(老衰)하면 생리작용(生理作用)에 있어서도 제약(制約)을 많이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을 무엇으로 보강(補强)해야 되느냐? 그것은 새로운 출발(出發)을 해야 됩니다. 새로운 출발(出發)을 하려면 매일(每日) 같이 새로운 것을 발견(發見)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發見)하는 사람은 절대(絶對)로 낙오자(落伍者)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이 많이 먹은 사람들은 피곤하겠지만 지금까지 관례적(慣例的)인 것에 대(對)해 반대(反對)의 입장(立場)에 서게 되면 거기서 하나님이 같이하시게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선43-290> 은혜(恩惠)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개개인((箇箇人)이 오고 가는 길에서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과도 인연(因緣)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와 원수(怨讐)가 될지도 모르고 나에게 복(福)을 갖다 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사람과 내가 그렇게 만났다는 사실(事實)은 우연(偶然)한 일이 아닌것이다. 더욱이 나를 중심삼고 인연(因緣)지어 만날 수 있기까지에는 그 배후(背後)에는 역사적(歷史的)인 수고(愁苦)가 깃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例)를 들어 김씨(金氏)와 박씨(朴氏) 두 사람이 있는데 박씨(朴氏)가 어느 때에 김씨(金氏)에게 은혜(恩惠)를 입고 그 은혜(恩惠)를 갚으려고 하다가 갚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시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은혜(恩惠)를 갚아야 하겠습니까? 박씨(朴氏)의 후손(後孫)은 김씨(金氏)의 후손(後孫)에게 자기(自己) 선조(先祖)가 하지 못한 것을 갚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立場)에서 박씨(朴氏)의 후손(後孫)인 자신(自身)은 모르지만 영계(靈界)에 가 있는 선(善)한 선조(先祖)가 후손(後孫)의 마음을 움직여 가지고 그 김씨(金氏)의 직계(直系) 후손(後孫)과 만날 수 있는 인연(因緣)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나게 되면 박씨의 후손(後孫)은 과거(過去)에 선조(先祖)가 입었던 은혜(恩惠)를 갚아주어야 됩니다.
은혜(恩惠)를 갚아주면 어떻게 되느냐? 여기에서 김씨(金氏)가 선(善)하고 은혜(恩惠)를 갚은 박씨(朴氏)가 선(善)하더라도 선(善)의 기준(基準)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김씨(金氏)가 100만큼 선(善)한 입장(立場)에 섰고, 박씨(朴氏)가 50만큼의 선(善)한 입장(立場)에 섰다면 김씨(金氏)의 은혜(恩惠)를 입은 박씨(朴氏)가 자기(自己) 후손(後孫)을 통(通)해 김씨(金氏)나 그의 후손(後孫)에게 그 은혜(恩惠)를 갚게 될 때, 그 김씨(金氏)는 은혜(恩惠)를 갚아주는 것을 응당(應當)한 댓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고맙고 감사(感謝)하는 마음으로 받게 된다면 여기에서 두 사람의 선(善)의 기준(基準)은 서로 상대적(相對的)인 관계(關係)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50의 기준(基準)이 100의 기준(基準)과 상대적(相對的) 위치(位置)를 취(取)하며 나타나기 때문에 거기에서 하나가 되어가지고 맹세(盟誓)한다면 같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즉 동등(同等)한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선43-278> 크나큰 은사(恩賜)를 받은 사람을 얼핏 보면, 복(福) 대신(代身) 고통(苦痛)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책임(責任)을 많이진 사람을 보면 편안(便安)한 것 같지만 절대 편안치 않다. 여러분이나 내가 통일교회(統一敎會)에 안 들어왔다면 모르지만 통일교회(統一敎會)에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날에는 아들딸이 못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통일교회(統一敎會)에 다니다가 나간 사람들이 잘 되나 두고 보라구요. 흔들흔들해 가지고 잘 되나 보라는 것입니다. 씨알맹이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통일교회(統一敎會)는 무서운 곳입니다. 일면(一面)은 무서운 곳이고 일면(一面)은 그 반대(反對)입니다. 그러면 무서운 면(面)을 제거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수고(愁苦)해야 됩니다. 이것을 막는 방법(方法)은 수고(愁苦)밖에 없습니다.
<말선45-29> 은혜(恩惠)의 자리에는 하나님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먼저 참석(參席)할 수 있다 그것은 타락(墮落)한 이 세상(世上)을 사탄이 먼저 출발(出發)했기 때문입니다.
<말선43-299> 선생님(先生任)이 여러분에게 가끔 맹세(盟誓)를 시키는 이유(理由)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여러분에게 선생님(先生任)과 같은 입장(立場)에 설 수 있는 특권(特權)인 은사(恩賜)를 부여(附與)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선43-291> 그렇기 때문에 맹세(盟誓)한다는 것은 아무 권위(權威)가 없는 것 같지만 주체(主體)의 권위(權威)를 가지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말선43-307> 은혜(恩惠)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 의(依)한 수고(愁苦)의 댓가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공짜로 받아서는 오히려 화(禍)를 입는 터전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선71-280.> 통일교회(統一敎會)에 들어 와 가지고 일아달라고 하면 알아주면 알아줄수록 망(亡)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워놓고 생매장(生埋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말선20-43> 은혜(恩惠)는 반드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거쳐야 오는 것입니다. 때가 되기 전(前)에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면 인간(人間)에 대(對)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물질(物質)로도 대신(代身) 세울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道)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선행(善行)해야 합니다. 그것은 탕감노정(蕩減路程)을 미리 걷기 위한 것입니다.
<말선18-39> 식구(食口)들 가운데도 가인 아벨의 두 가지 형(型)이 있기 때문에 가인 입장(立場)에서 아벨을 비판(批判)하면 은혜(恩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식구(食口)들이 은혜(恩惠)를 잃게 되는 것은 초창기(草創期)부터 선생님(先生任)을 중심(中心)으로 활동(活動)했던 선배(先輩) 식구(食口)들을 비판(批判)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以上) 발전(發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길을 가는 사람은 뜻 길을 다 가기 전(前)에는 남을 비판(批判)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선43-107> 여러분이 나혼자만 기뻐하겠다고 하다가는 그 기쁨을 다 놓쳐버립니다. 역사(役事)와 관계(關係)맺는 기쁨은 역사(役事)가 나에게서 떠나가게 될 때에는 그 기쁨도 거두어 갑니다.
<말선42-194> 오늘날 통일교회(統一敎會)가 가는 길은 가고 난 후(後)에는 행복(幸福)할 수 있지만 가는 과정(過程)에서는 행복(幸福)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는 과정(過程)이 비참(悲慘)하면 비참(悲慘)할수록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出發)이 되는 것이다.
<말선42-100> 이스라엘 역사(歷史)를 보면 은혜(恩惠)가 있은 후(後)에는 반드시 시험(試驗)이 있었다. 시험(試驗)이 있으면 반드시 은혜(恩惠)가 있다는 것이다. 시험(試驗)은 시험(試驗)으로 시작(始作)해서 시험(試驗)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례적(比例的)으로 은사(恩賜)와 맞먹는 시련(試鍊) 기간(期間)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은혜(恩惠)가 크면 클수록 시련기간(試鍊期間)은 깁니다. 이 시련기간(試鍊期間)을 극복(克復)하고서야 기쁠 수 있는 은사(恩賜)의 때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自然的)인 현상(現狀)입니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고, 낯이오면 밤이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높았으면 낮아지는 것이 원칙(原則)이기 때문에 좋았다고 반드시 좋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을 거두어 가지고 다시 슬픔을 맞이한 후(後)에야 비로소 하나의 터전이 닦아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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