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9일 주일예배설교
(사순절 첫째 주일)
예레미야 7:8-11/ 마가복음 11:12-20
성전폐쇄
2025년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사순절(四旬節)은 40일 기간이라는 아주 단순한 의미인데, 그리스어 “테살코스테”, 즉 “사십일 동안의 시기”라는 말을 옮겼습니다. 영어로 Lent, 독일어계에서는 Lenz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빛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그 이름의 기원이 태양 빛이 점점 많이 비추는 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절기는 초대교회 때부터 부활절을 기다리는 참회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참회의 상징으로 금식과 금욕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모티브는 당연히 예수님의 광야금식기도 40일간이었고, 40이라는 숫자는 노아의 홍수기간이기도하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금식하며 계명을 받은 40일이기도 하며,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부활절까지 일요일을 제외하면 지난 3월 6일(수)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고대교회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저녁 한 끼만 먹었다고 합니다. 중세 때에 수도사들은 주중에는 절대금식하고, 주일 하루는 식사를 허용했고, 일반 신도들에게는 육식을 금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달걀과 유제품도 금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육류만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사순절이 되면 금식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기독교 환경운동 단체 중에는 “탄소금식”을 강조하는 곳도 있습니다.
사순절 첫째 주일 본문으로 저는 예수의 성전정화 이야기를 선택했습니다. 가능하면 예수님의 성전입성 후에 벌어진 일들을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에 묵상해보려고 생각합니다. 성전정화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고, 공관복음서는 서로 매우 유사합니다. 아마도 마가의 자료가 그 기초일 것입니다. 그 근거는 성전정화 속에 인용된 두 군데의 구약성경 이사야서(56:7)와 예레미야서(7:11)가 공관복음서에 똑같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가복음으로 성전정화 사선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또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지나가다가 마주친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저주하는 바람에 나무가 말라버린 이야기가 붙어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무화과나무이야기가 성전정화 사건 뒤에 나오는데 비하여, 마가복음에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고 말라버리는 이야기 중간에 성전정화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 정도의 차이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생각하기에 따라서 마가의 배열 보다는 마태의 배열이 더 정교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다른 본문들 에서도 이렇게 한 이야기 사이에 다른 이야기를 끼워 넣는 방식의 서술이 발견 된다는 점에서, 마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두 사건의 연관성 속에서 “성전정화”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와 달리 마가는 11장 13절에서 “그 때는 무화과가 열릴 철이 아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대략 계산해 본 분들의 말이 3,4월에 해당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얼핏 생각해도 부활절 전주에 일어난 일이니까요. 그러니 열매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앞뒤에 아무런 설명이 붙어있지 않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그 사건 하나 만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마가복음이 성전정화 사건 뒤에 기록한 예수의 어록과 연결을 지으려고 해도, 아무 잘못 없는 무화과가 당한 “참변”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갖 납득하기 어려운 “의도적”인 해설이 난무하기 마련입니다. “때가 아닌데도, 만약에 주님이 당장 달라고 하면 척 꺼내드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로 신자들을 현혹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지금 들어가실 “예루살렘성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때가 아니라는 말로 변명하더라도,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다운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라버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것은 “성전정화”가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 “성전폐쇄”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의 한 마디가 예루살렘 성전을 폐쇄 시킬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은 열매 맺을 때가 아니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지 못할 정도로 타락한 성전, 이제는 그만 문을 폐쇄해야 마땅한 성전이 되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기대한 예루살렘 성전의 역할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과격한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15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동을 정리하면, (1)팔고 사는 사람들을 내 쫓았다. (2)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엎었다. (3)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 (4)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 나르는 행위를 금하였다. 이 네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합법적인 일들입니다. 성전세를 유대화폐로 내게 하고, 흠 없는 제물을 바치려면, 모두 필요한 일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근본적인 의식을 치르는데, 꼭 필요한 일이고, 더구나 이런 매매행위가 일어나는 공간이 이방인의 뜰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환전상들과 제물상들은 환전료와 제물 값을 비싸게 올려 받아 착취를 하고, 성전관리들에게 상납을 하여 제사를 드리러온 백성을 착복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 것을 다 아는 백성들이 그래도 제사 드리러 찾아와서 돈을 바꾸고 제물을 사는데, 예수님은 왜 분개하며 그 일에 끼어들었을까요?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그 때 대제사장이 가야바(재위 18-36년)라는 점입니다. 장인인 안나스 이후 아들들과 사위 총 5명이 주후 63년까지 대제사장 직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재위기간이 5년 미만, 평균 4년 정도인데 비하여 가야바는 무려 18년 동안을 대제사장으로 살았습니다. 그 의미는 로마제국과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총독 빌라도와도 정치적으로 매우 끈끈한 관계였는데, 이는 다른 총독에 비해 오래 다스린 빌라도의 경우와도 일치합니다. 빌라도 역시 10년간 총독을 지냈습니다.
그러니 성전 뜰에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상을 뒤엎고 상인들을 내 쫓으신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본분을 망각하였다는 질타입니다. 성전과 대제사장은 “제사”만 잘 드리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이스라엘 백성 안에 살아있도록 해야 한다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최고 통치자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주도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 단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현실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권력보존과 연장을 위하여, 지배세력인 로마총독과의 정치적인 관계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성전에 올라와서 “제사를 바치는 것”만 잘 하도록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꾸짖는 두 군데의 구약본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사야 56장 7절, “내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는 이사야 56장은 포로귀환 후 성전 건축을 하고 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지도자들의 부패와 죄악을 꾸짖는 본문 속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56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공의를 행하여라.”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 7장 11절은 더 더욱 분명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절에서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라.”고 세 번이나 주님의 성전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말로만 믿는 신앙을 크게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라는 말과 연결시켜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온갖 죄악을 범한 자가 성전에 들어와 숨으면서, “여기는 주님의 성전이니 안전할 거야!”라고 말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악행을 그만둘 생각 없이, 하나님의 집 안에 숨기만 하면 되겠느냐? 하나님이 절대로 가만 두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주님의 말 속에 담긴 뜻은 예루살렘 성전은 “범죄자의 소굴”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제사를 드리는 일이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하나님의 집, 성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없애버릴 궁리를 하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할 때에 백성들이 환호성을 올리면서 왕의 입성처럼 반응한 이야기도 사실은 상징입니다. 나귀 탄 왕의 입성으로 권세가들을 풍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뒤 엎으신 것도, 성전이 성전답지 못하니 차라리 문을 닫으라고 풍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폐쇄”를 외치는 예수님의 풍자가 오늘 우리에게는 남의 일 같지 않으니 참 속상합니다. 생각해보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닙니다. 지난 2000년간도 그리고 한국 개신교 역사 130년 동안도 주님은 똑같이 외쳐오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너희는 지금 전혀 무익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희는 모두 도둑질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고 말한다.”(렘7:8-10)
예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십자가 죽음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사순절 동안 우리가 듣고 참회해야 할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공의로운 삶이 신앙의 근본임을 잊지 않았는지 깊이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손 모으고 기도드릴 때에 해야 할 첫 번째의 것은, 신앙을 우리의 잘못을 덮어주기만 하는 도피처로만 삼지 않았는지 참회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불의를 행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정직하게 대하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것입니다. 힘없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어떻게 대하며 살았는지 반성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 신앙의 외적인 모임인 교회가 주님의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고 따르는 우리의 내면을 성숙하게 하는 모임과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순절 첫째 주일 우리의 금식은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을 잘 가꾸어가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