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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봉화 정자.영남종택 답사
이장희 추천 0 조회 65 14.07.29 20: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봉화 정자답사기①]

 선비의 삶과 철학, 그곳에 정자가 있었네

유홍준이 세상에 알려지기 원하지 않은 봉화의 전통마을
 

정자(亭子)는 '경치가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하여 지은 집,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건축물'을 말한다. 사전적 의미가 그러하듯, 정자는 언뜻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지어 여흥을 즐기기 위한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선비들의 쉼터이자 정치 토론의 장이었던 정자는 그 자체로 빼어난 건축물은 아니지만, 선비들의 철학, 그들이 그리던 이상세계를 표현하여 형이상학적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갖고 있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정자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연 붕괴되거나 자연 재해로 소실되어 왔다. 또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정자 주위의 풍경이 변하여 동네 한 모퉁이에서 사람의 온기를 잃고 퇴락된 채 방치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지방을 돌다보면 주위 경관과 잘 어울려 모습만으로 값어치가 있는 정자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정자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은 경북 봉화라고 한다. 현재 확인된 곳만 98개이고, 사라진 정자까지 합하면 약 170여 곳에 이른다고 하니 이만하면 '정자의 고장'이라고 할만하다. 게다가 봉화 정자는 여느 지방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자건립의 목적이 풍류인 데 반해, 봉화는 학문, 후학양성이 목적이 경우가 많고, 경관이 수려한 곳보다는 가내(家內)에 위치한다. 또한 강학과 기숙을 위한 공간인 온돌을 두는 경우가 많다. 하여 건축구조 상 벽과 방이 있고, 폐쇄적인 경우가 많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씨는 봉화를 두고 '외지인의 상처를 받지 않고 옛 이끼까지 곱게 간직한 살아 있는 민속촌"이라고 표현하고 '봉화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들은 봉화의 전통마을이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며 답사는 포기한다고 쓴 적이 있다. 그만큼 때묻지 않은 봉화를 방문하기로 한 어느 봄날은 구름 한 점 찾기 힘들 정도로 눈이 부셨다.

 

어서 오세요, 도암정

 

36번 국도를 따라 봉화에 들어가면 도암정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관광표지판에는 계서당(이몽룡 생가) 9km, 워낭소리 촬영지 2km라는 문구만 있어 바로 근처에 있는 도암정을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도암정은 들러보지 않고는 아쉬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아름다운 도암정의 모습. 의외로 연못의 크기가 커서 연꽃이 만개하는 여름에는 장관을 연출할 것 같다.
ⓒ 김재현
도암정

 

도암정은 경북 효 시범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정자 앞 너른 연못에는 인공섬, 당주가 있다. 연꽃이 있어 7-8월에 만개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정자 오른편에는 커다란 단지바위가 있는데, 바위경관과 도암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단지바위는 매우 커서 어른 키를 훌쩍 뛰어넘는다. 커다란 바위 셋이 형제처럼 모여 있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게 느껴진다.

 

  
빛바랜 도암정의 내부모습, 천정에 붙어있는 건 정자를 언제 지었고, 지은 이유가 무엇인지 적은 중건기이다. 오른쪽은 도암정 옆 자리잡고 있는 단지바위
ⓒ 김재현
도암정

 

도암정은 봉화 정자의 특징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양쪽에 방이 있고, 그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자리잡고 있다. 대청마루 천장에는 빛바랜 현판이 지키고 있었으며 정자가 지어진 동기를 적은 중건기가 붙어 있었다. 도암정을 자세히 둘러보니 곳곳에 낡은 흔적이 눈에 띈다. 하지만 마루에 흩어져 있던 바둑판은, 정자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존재가 아닌 아직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경암헌 고택의 모습. 경암헌 고택을 보러 따라올라가던 길에 나를 반기는 닭의 모습.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처음 보는 광경이 마냥 신기했다.
ⓒ 김재현
경암헌고택

 

도암정를 지나 효 시범마을에 들어서면 멀지 않은 곳에 경암헌 고택이 있다. 경암헌 고택을 중심으로 아직도 옛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옛 선조들이 살아온 흔적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서울에서 온 낯선 이를 보고 경계하는 누렁이의 모습이나 마을 길을 따라 유유히 걷는 닭의 모습을 보며 왜 유홍준씨가 '그 자체로 민속촌'이라 평했는지 실감하였다.

 

거북과 연못, 그리고 청암정

 

  
돌거북 위에 자리한 청암정의 모습
ⓒ 김재현
청암정

 

도암정에서 머지 않은 곳에는 닭실마을이 있다. 봉화의 마을 중에서는 봉화읍의 닭실마을이 가장 알려져 있다. 안동 권씨의 집성촌인 닭실 마을은 닭이 알을 품은 산세(금계포란)에 자리잡아 자연에 푹 파묻힌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닭실마을 안쪽에 위치한 청암정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을 것이다. <바람의 화원> 포스터를 여기서 찍었으며, <음란 서생> <스캔들>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청암정을 배경으로 하였다.

 

  
바람의 화원 포스터와 포스터 촬영지였던 돌다리의 모습이 보인다. 돌다리는 현존하는 돌다리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 해당제작자/김재현
청암정

 

청암정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지을 당시에는 연못 없이 바위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정자를 지은 해부터 가물기 시작했다고 한다. 애가 타던 마을 사람들은 도사를 모셔 그 이유를 물어봤다. 도사 왈, 거북은 원래 물의 동물인데 그런 거북 위에 정자를 짓고 군불을 때니 거북이 노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부랴부랴 거북 주위에 연못을 파 물을 채웠고, 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냥 아름다워보이는 정자에 군불을 때다니. 이런 궁금증은 청암정의 주인이자, 안동 권씨의 종손 권용철 선생의 설명으로 눈 녹듯 사라진다. 봉화는 가장 추운 겨울을 나는 지역 중 하나이다. 청암정도 여흥을 즐기기 위한 공간이 아니고 후학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기 위해선 사방이 트인 정자는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청암정은 삼면이 틔어 있는 정자이기 때문에 군불을 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설명을 듣고 청암정을 바라보니 확실히 일반 정자와 다른 모양새를 띠고 있다. 하지만 '학교'를 이렇게 아름답게 짓다니, 옛 선조들의 미학과 철학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청암정 학도들은 공부할 기분이 났을는지 모르겠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만 건너도 선계(仙界)로 들어가는 기분인데, 청암정 학도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저절로 웃음이 난다.

 

옛 선비들의 기숙학교, 석천정사

 

닭실마을 옆 석천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또 하나의 정자가 있다. 바로 석천정사이다. 권용철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엄밀히 따지자면 '정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자와는 다른 것이라고 한다. 청암정이 통학학교였다면, 석천정사는 일종의 '기숙학교'라는 설명이다. 마을에서 나와 석천계곡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물 흐르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온다.

 

 
석천계곡의 기암괴석과 곳곳에 숨겨져있는 옛 선비들의 흔적. 왼쪽은 비룡포
ⓒ 김재현
석천정사

 

석천계곡에는 기암괴석이 많다. 그래서 석천계곡에는 도깨비들이 많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한번은 도깨비 울음소리가 너무 무서워 석천정사에서 기숙하던 학생들이 밤에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고명한 선비가 찾아와 바위에 붉게 글씨를 썼다. 여기는 신성한 곳이니 도깨비들은 썩 물러가라는 내용이었다. 글씨를 바위에 조각한 이 후부터는 도깨비들이 사라져 학생들이 편히 공부할 수 있었단다.

 

 
석천계곡에 남아있는 전설의 일부. 글씨에서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 김재현
석천정

 

석천정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직도 선비가 썼다는 붉은 글씨가 남아 있다. 바위에 조각된 글씨에서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정말 도깨비들이 얼씬도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체중인 석천정사의 외관.
ⓒ 김재현
석천정사

 

석천정사는 지금 해체복원 작업 중이다. 전통 건축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체하는 현장도 흔치 않은 경험이니 한번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멀리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현장으로 조심스레 들어가보니 건물 기둥을 제외하고 지붕, 마루 등을 해체한 상태였다. 정자 터 뒷편에는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던 기둥들이 고이 모아져 있었다.

 

정사 터에서 군불을 지폈던 아궁이의 모습이 보인다. 석천정사는 기숙학교였기 때문에 취사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있었다는데 그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궁이 옆에 물을 내다버릴 수 있는 조그만 수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쯤 부엌이 있었겠구나하고 추측은 할 수 있었다.

 

현장에 기웃거리고 있으니, 인부 아저씨 한 명이 위험하니 어서 나오라 손짓하신다. 녹슨 못이 많아 큰일난다는 것이다. 마을을 뒤로 하고 공사현장에서 빠져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아직 둘러볼 정자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 내일은 아침 일찍 출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봉화에 정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선비들이 공부를 하며 심신을 수련하던 특별한 공간이라는 설명은,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저에게도 마음의 쉼터가 되어줄 것이란 믿음을 주었습니다.

 

...............................

 

"영남 전통마을 순례 떠납니다"


[알림] 국토학교(교장 박태순) 5월 답사 안내

 

     우리 땅의 소울(soul)과 스피릿(spirit)을 찾아 떠나는 국토학교(교장 박태순. 소설가). 지난 4월 개교 답사 <남한강 뱃길 따라, 영남대로 옛길 따라 (관련기사 ☞고구려 정복길 따라, 조선 선비 유학길 따라)> 를 감동적으로 마치고 5월 답사 <영남 전통마을 순례>를 다음과 같이 마련합니다.

5월 넷째 주말인 23-24일의 1박2일, 교장 선생님의 <길 위의 명강의>로 열리는 국토학교에 여러분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5월 23일(토요일)

08:00 서울에서 출발(서울 강남 압구정 현대백화점 옆 주차장, 유진여행사 경기76아 9111)

 

<배경설명 : 양백지간 인문환경과 씨족마을들>

태백산과 소백산의 양백(兩白)에서 산줄기와 물줄기를 받아내는 경북 북부 산악지역을 양백지간이라 한다. 영주, 봉화, 영양, 청송, 안동, 의성, 예천 일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양백지간이란 표현에는 교통 불편한 경제적 낙후지역이라는 의미는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낙토(樂土)와 길지(吉地)의 인문환경 속에서 서원과 서당과 사당과 재실 중심의 유교 향촌사회를 이루어 대물림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는 자부를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안동대학교의 조사에 따르면 안동시에는 종택(宗宅) 곧 '종갓집'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 3백여 군데나 된다. 이 중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을 가진 종택들이 30여 집안이다. 안동향교의 조사로는 서원이 26개소이고 서당 2개소, 사우(祠宇)가 7개소이다.

정약용은 <택리지>의 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장원과 농장이 아름답기로는 오직 영남(嶺南)이 최고이다. 가문마다 각각 조상을 추대하여 한 터전을 점유하여 일가들이 모여 살아 흩어지지 않는다. 가령 진성 이씨는 퇴계(이황)를 추대하여 도산을 점유하였고, 풍산 유씨는 서애(유성룡)를 추대하여 하회를 점유하였고, 의성 김씨는 학봉(김성일)을 추대하여 내앞[川前]을 점유하였고, 안동 권씨는 충재(권벌, 權?)를 추대하여 닭실[酉谷]을 점유하였다."

영남 향촌사회는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 사대부문화의 온상지를 이루게 되는데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문화에 무조건 포섭되지는 않았다.

16세기에 이르러 사화들이 거듭되고 있었음에도 재야의 유림-사림-산림들은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사대부정치를 표방하여 마침내 훈구파들을 역사로부터 완전히 퇴장시키는 과업을 달성한다. 이황을 필두로 하는 영남사림(동인-남인 당색)과 이를 이어받는 기호사림(서인-노론 당색)이 어떻게 이런 역할을 해낼 수 있었는지, 특히 죽령 이남의 양백지간 문화지리학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0:00-10:30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구단양)
퇴계 친필 석비 답사 : 복도별업(復道別業), 탁오대(濯吾臺)

 

이황은 1548년 정월에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가 같은 해 10월에는 풍기군수로 옮기게 되는데 그의 친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단양은 워낙 척박하고 낙후된 지역이어서 이황은 관개 수리 사업을 일으키는데 이를 '복도별업'이라 했다. 수로를 제대로 복원하여 농업 진흥을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훈구파들의 문란한 정치를 혁파시켜 올바른 도를 회복시키는 별도의 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으로 새겨볼 수도 있다.

단양천은 도락산에서 발원하여 상선암-중선암-하선암 및 사인암을 거쳐 남한강 본류에 합류되고 죽령천은 소백산 죽령 지경에서 발원하여 남한강 본류로 흘러드는데 이황은 수리 사업을 완수한 다음 '탁오대'라는 친필의 석비를 세우기도 했다. 단양 수몰민회관에 이 석비들이 남아 있다.

단양 적성산성은 서기 540년대 무렵 죽령을 넘어온 신라군이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고 쌓은 성이었고, 단양 신라 적성비는 1979년에 발굴되어 국보 198호로 지정을 받았다. 원단양(구단양)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어 아래가 물에 잠기고 여기에 중앙고속도로 건설로 적성산성을 동강내어 위가 길바닥이 되는 흉측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지만 단양천과 죽령천에 어린 문화지리학마저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사인암과 삼선암 그리고 저수령 고갯길의 생태환경이 되살아나고 있는 중이다.

 

11:00-12:00 죽령 옛길 트래킹 2.5km (편도, 내리막길)

 

중앙고속도로 완공으로 죽령터널이 개통되면서 1시간 이상 걸리던 죽령 고갯길(5번국도)을 넘는 차량들이 드물게 되었다. 여기에 영주시는 해발 696m의 고갯마루에서 희방사 입구가 되는 옛 쇠다리(수철교) 주막거리까지 죽령 옛길 자연관찰로를 복원해 놓았다.

죽령 옛길의 잔운대-촉영대 쪽에는 퇴계 이황과 그의 형 온계 이해의 전별 시비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 영주시 문화관광- 테마여행- 죽령옛길 개념도 활용
http://tour.yeongju.go.kr/pages/sub.jsp?menuIdx=73)

 


죽령옛길 자연관찰로


 

12:30-13:30 점심식사 (풍기 인삼시장 삼계탕)

14:00-14:30 영주 무섬마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 마을이라는 뜻인데 행정지명으로는 '수도리(水島里)'라 표기한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3면을 휘돌아 흐르고, 동쪽 모래톱 위에 마을이 똬리를 틀어 들어앉았다. 풍수지리상으로는 매화꽃 모양이 되는 매화낙지,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 형국이라 하여 길지(吉地) 중의 길지로 꼽힌다.

17세기 중반에 반남 박씨(潘南朴氏)인 박수가 처음으로 들어와 입향조가 되고,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 김씨(宣城金氏) 가문이 영조 때 다시 무섬에 들어왔다. 이로부터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가 함께 세거(世居)해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 있다. 마을 전체가 고택과 정자로 이루어져 있고, 안동 하회마을과 지형적으로도 비슷해 천혜의 자연조건을 자랑한다. 문화재도 많아 해우당 고택(海遇堂古宅), 김규진 가옥(金圭鎭家屋), 김위진 가옥(金渭鎭家屋), 만죽재 고택(晩竹齋古宅) 등 9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와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주변의 참고할 곳> 안동 풍천 가일마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풍산읍에서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의 풍광 좋은 곡창지대에 가일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안동 권씨 복야공파의 600 여년 세거지(世居地)를 이루어 오는데 입향조(入鄕祖)는 권항(權恒)이라는 인물이었다(1403-1461). 그의 손자 권주(權柱)는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진출하였으나 1504년에 갑자사화의 피해를 입는다. 권주의 네 아들도 박해를 받는데 장남인 권질은 후일 자신의 딸을 이황의 재취부인이 되게 했다. 이 마을에 있는 병곡종택은 권주의 생가를 후일 개축한 것이었고, 시습재를 비롯하여 다수의 전통문화유산들을 갈무리해온다. 한말에는 의병활동이 일어나고 8.15 해방 직후에는 '안동의 모스크바'라 불리기도 했던 사연도 있었다. 하회마을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만 집성촌의 특성을 잘 지켜오고 있는 대표적인 양백지간의 동족마을이다.

 

15:00-16:20 도산서원, 퇴계종택

 

안동시 예안면과 도산면 일대는 1976년의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면서 주변 환경이 훼손되었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도산서원의 복원사업은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왔다. 하지만 문화역사 순례지여야 하는 도산서원보다는 국민관광단지가 되어 있는 주변 환경의 어지러움이 있다. '정신문화의 수도'를 내세우는 안동시이기는 하지만 전통문화와 산업문명 사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갈등 해소의 대책이라든가 문화관광정책의 눈높이에 대한 반성을 아까워하고 있다.

도산서원 일대의 문화경관 조성은 전통과 근대의 계승 관계보다는 단절 관계를 표현해주고 있는 듯하지만 서원 자체의 건축구조보다는 낙동강-도산-청량산의 자연환경-인문환경-역사환경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찌할꼬.

(현대어 표기)

퇴계의 시조에 나오는 표현 그대로이다. 퇴계 예던 길 앞에 있거늘 아니 예고 어찌할꼬. 도산9곡의 한시와 도산12곡의 한글 시조들을 통해 이황은 자신이 어떻게 이상적인 '유교산수'를 완성시켰는지 노래하여 읊어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도산의 풍광을 음미할 수 있다. 이웃에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17:00-19:00 '퇴계 예던 길' 산책
19:00-21:00 강변 회식 및 나눔모임

 

안동시는 도산면 토계리에서 가송리를 거쳐 청량산에 이르기까지 '퇴계 예던 길'을 조성 중이지만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강변 산책로의 경관 보존 대책이 요청된다.

도산면 분천리에 있던 농암 이현보의 종택은 수몰지역이 되어 직계 후손이 가송리로 이건하여 분강촌을 조성하였는데 낙동강 전망의 풍광이 좋은 산언덕에 세워져 있다. 이건시킨 종택에는 후손들이 주거하고 있지만 안채를 제외한 사랑채라든가 분강서원 등은 홈스테이로서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농암종택에서 단천리 전망대까지 낙동강변 퇴계 예던 길을 산책하고 강변 회식도 갖는다.

 

21:00 가송회관(다인실) 취침

5월 24일(일요일)

06:00 기상
07:00 아침식사
08:00 청량산으로 출발

08:30-11:30 청량산 오산당 및 청량사 트레킹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주자(漁舟子·어부) 알까 하노라."

청량산 육육봉은 66봉 아니라 12봉을 가리킨다. 10대의 소년시절에 이황은 이 산에서 글공부를 하던 집을 '오산당(吾山堂)'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청량산은 퇴계에게 '나의 산'이었다. 원효, 의상, 김생, 최치원의 사적들이 청량산의 청량사 일대에 간직되어 있지만 이황의 제자들은 줄기찬 청량산 유산록을 통해 이 산을 이황의 명산으로 만들어놓는다.

 

12:00-13:00 점심식사

13:30-14:20 닭실마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충재 권벌의 고택이 있는 마을로 금계포란 형의 명당자리라 하여 닭실마을이라 한다. 한국 촌락 공간구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연구 대상이 되며 청암정의 조경이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충재기념관에는 권벌의 유품들과 서적들이 보관되고 있으며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한과는 더욱 명성을 얻고 있다.

 

15:00-15:40 소수서원, 선비촌

소백산 북쪽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과 소백산 남쪽 순흥에 유배된 삼촌 금성대군이 모의하여 세조에 반항하려 한다는 밀고로 특히 순흥 고을이 없어지면서 순흥 안씨들은 몰살당하고 영남 유림들은 핍박을 받는다. 고려시대의 인물 안향을 내세워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소수서원이라 이름을 바꾸어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되게 한 것은 영남 사림들의 일대 문예부흥운동이었다. 훈구파들의 세습 세도정치를 몰아내려는 근거지를 이로부터 마련해 나갈 수 있게 하였다.

 

<주변의 참고할 곳> 죽계구곡, 초암사, 달밭골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1549년 3월에 소백산 유람에 나서서 '유소백산록'을 쓰는데 죽계천을 따라 국망봉으로 오르면서 경치 좋은 아홉 군데의 명칭을 스스로 붙여주기도 한다.

 

15:40 서울로 출발

 

<5월 답사의 키워드 : 산은 책이다>

 

퇴계 이황 : '책 읽기는 산 유람과 같다(讀書如遊山)'

讀書人說遊山似 사람들이 말하기를 책 읽기가 산 유람과 흡사하다 했는데
今見遊山似讀書 나이 들수록 산의 유람이 책 읽기와 같다는 걸 일깨우네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을 다하여 봉우리에 오르면 스스로 내려오는 법
淺深得處摠由渠 얕고 깊음의 경치를 살피는 것 모두가 자기에게 달려있네
坐看雲起因知妙 조용히 앉아 구름이 어찌 일어나는지 오묘함을 터득하고
行到源頭始覺初 산행의 행보가 정상에 이르매 비로소 원초를 깨닫네

 

<참고 자료>

'이문구 김주영 안동회합과 고향문학'
(박태순 : '나의 국토 나의 산하' 제1권 442페이지∼)

'그대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제목과 테마의 소설들이 20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전개돼 왔는데 미국작가 토머스 울프보다는 한국문인들의 작품이 더 절박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런 모티브의 서사담론은 전통과 근대의 화해보다는 이반과 갈등의 테마를 추구하게 된다.

소설만 아니라 서정시편들도 줄기차게 생산돼 왔는데 '서울길'과 '고향길'에 관한 애틋한 정조들이었다. 60년대 문학 세대에게 특히 현저하였는데 소설 쪽으로 보자면 김승옥의 '무진기행' 계열과 이문구의 '관촌수필' 계통이 있다. 시문학으로는 신경림의 '농무'의 신명과 설움, 김지하의 '불귀(不歸)'의 아픔 등을 노래하는 탈 귀거래문학이 있어왔다.

1972년 봄에 이문구는 연작소설 '관촌수필' 제1편을 발표한다. 그의 충남 보령 고향에서 유년기에 겪었던 가문몰락에 관한 사연들을 영화의 플래시백 수법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분단이데올로기가 예민하던 시절이어서 주위 문인들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국토탐험'이라는 제목으로 <월간 세대>에 기행문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우울해 하고만 있는 이문구를 호출하여 '스페셜 국토기행'의 아이템을 구상해보려 하게 되었다. 그해 5월 초순에 이문구는 나의 동행 요청에 응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안동의 양반고을을 취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고향이란 무엇이겠는가' 하고 그에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안동은 특히나 '애향심'이 강한 고장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고장이 아니었던가. 실향민 비슷하게 살아가는 처지의 위인들에게는 그 향토 풍속지가 각별하게 눈이 밟히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되찾아낼 수 없는 사물들과 사람들에 관한 시간여행'이라는 내용의 답변을 들었던 듯하다. 다시 찾았던 그의 보령 고향은 너무도 변해버려서 공간에 관한 그리움은 곧 시들해지더라는 것이었다.

고향은 결국 국토의 공간구성 보다는 시간구성에 관한 '타임머신 상상력'일 것일까. 문학인의 '고향문학'이란 결국 '고향타령'의 후렴인 것이라고 이문구는 시들하게 덧붙이기도 했다. 무서운 속력으로 사회는 달라져 가기만 하여 10년에 강산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1년에도 1개월에도 국토산하의 표정이 뒤바뀌는 이러한 세태에서 고향 읊조리는 자는 느림보인생이 될 밖에 없는 이치라는 것이었다. 세상 변화의 속도에 자기를 맞추지 못하는 푸념이 곧 고향타령이고 아울러 고향문학이 되는 것일까.

안동에는 이문구의 서라벌 예대 동창이 두 명 귀향하여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고등학교 국어교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엽연초조합의 주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1년 전(1971)에 '휴면기'라는 작품으로 문단에 갓 입성한 소설가 김주영이 바로 그 '주사'였다.

김주영의 본디 고향은 청송이었거니와 안동과 영양 일대는 담배 농사의 특산지대였고 흙벽의 담배건조창은 이 고장의 정겨운 농촌 풍경화를 이루고 있었다. 김주영은 엽연초 수매를 위해 두메마을들을 찾아다니면서 실제로는 이 고장 특유의 장돌뱅이 세계를 파들어가고 있었다.

다음 해인 73년에 그는 자신의 문학사업을 위해 상경하여 '객주'의 소설문학을 일으켜 세우게 된다. 나는 기본적으로 도시문학이거니와 농민문학과 객주문학의 안동회합은 70년대 문학에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말 교육의 살아있는 교과서라 할 이오덕씨의 농촌아동문학을 이문구가 1973년의 <한국문학> 창간호에 소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안동탐방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낙동강 방죽의 느티나무 아래 정자집에서 모시 적삼의 엽연초조합 주사와 함께 음풍명월하며 잉어의 맛을 음미하던 호쾌한 회식의 추억도 아슴하게 떠오른다. 지금도 낙동강 잉어를 생식할 수 있을까.

양반고을의 '접빈사(손님 대접)'는 정중하면서도 지극하여 자동차를 용케도 구해왔다. 우리는 도산서원부터 찾아갔는데 예안이 장날이어서 입때껏 상투 틀고 갓 쓴 노인들이 활보하는 장마당의 토산품들을 경이롭게 살펴보던 기억이 난다. 안동댐은 1971년 4월에 착공하여 1976년 10월에 준공되지만 예안이 몽땅 수몰지역이 되어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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