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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20. 서른일곱번째주.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
신앙고백
찬송 55 하나님의 크신 사랑
기도 이원준 장로,하경숙 권사,조용림 권사,염성섭 장로,
성경말씀 요한복음 4:19~30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나이가 든다는 건
찬송 395 너 시험을 당해
광고 코로나 19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이 감염1,000배로 낮춰
서울에 교회 설립을 위해 기도(모범, 모델이 되는 교회)
종합건강검진은 10월 12일로 연기됨, 미용봉사(9/29,화)
찬송 205 예수 앞에 나오면
축도 아프니까 그만 하세요. 주님도 아프고, 나도 아프잖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용서할 일보다
용서받을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보고 싶은 사람보다
볼 수 없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던 슬픔을 순서대로 만나는 것이다.
세월은 말을 타고 가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마침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나이, 시인 김재진
그렇습니다.
제 친구들도 세상은 떠난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 권사님들은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는데 텔랜트 김용건씨가 하는 말입니다,
이제 시간이 없다.
우리 이원준 장로님도 나이 드시는 것이 서러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후회 없이 사셨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요즘은 어디를 가는 것도 두렵습니다.
식당에 가기라도 하면
텔레비전에서 영락 사랑제일교회 전광훈씨가 톱 뉴스거리입니다.
그러면 식당 직원, 손님들께서 이구동성으로
아이구~ 이놈의 교회들 때문에 나라가 이꼴이네.
아이구~ 저런 목사들 때문에 쯧쯧~
그러면 죄송스러워서 밥 먹다 말고 식당에서 얼른 빠져나옵니다.
어찌 사랑제일교회 전광훈씨 때문이겠습니까?
한국 교회의 병폐 일면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특히 우리 목사님들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그래도 엊그제 새벽 콩나물 밥집에 갔습니다.
그동안은 눈치를 살피느라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식당 아주머니께서 우리 목사님 오셨네! 큰소리로 반기는 겁니다.
그런데 부끄러웠습니다.
다른 손님들께서 고개를 돌려 목사인 저를 쳐다볼까 봐 그랬습니다.
이제 목사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19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절,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7절,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절,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우리는 이옥순 권사님께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마지막 임종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아드님, 집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숨을 몰아쉬고 계시는
우리 이옥순 권사님 침대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이마에 손을 얹고 권사님 불렀습니다.
감고 있던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생에 살아오면서
자식들 불효에도 전혀 원망 하나도 없이
묵묵히 사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란 이름이 거룩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란 이름은 전혀 거룩하지도 못하고
왜 이렇게 부끄러운 것일까?
가정마다 보이지 않는 가풍이 있습니다.
명문 가정일수록
어려운 일을 닥치면 다투다가도 힘을 모읍니다.
그런데 콩가루 집안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나 몰라.
그러면서 네 탓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명문 가족임에 틀림없습니다.
좋은 나라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세계에 소문났습니다.
좋은 나라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온 국민이 똘똘 뭉칩니다.
그리고 나보다 이웃을 더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에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합니다.
사마리아 사람하면
좋은 사람the Good Samaritan아니겠습니까?
명문 가문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는 버림받은 이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목사들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절,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절,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절,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절,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절, 가로되 자비를 베푼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강도 만난 사람에게 누가 진정한 이웃입니까?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도와준 경험 있습니까?
당시 제사장은 지금의 목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당시 레위인들도 하느님을 위해 성별 된 지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을 때에도,
레위인들만은 하나님께 대한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레위인이 강도 만나 사람을 피해간
비겁한 사람으로 변절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세상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알아주지도 않고 천대받았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 성심을 다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누가 본다고 잘하고
누가 보지 않는다고
얼렁뚱땅 지나쳐 버린다면 되겠습니까?
목사인 저도 그랬습니다.
대충대충 얼렁뚱땅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어제도 예배문을 작성하고 있는데
우리 전예순 권사님 며느리께 전화가 왔습니다.
왜? 어머니 식사도 잘하시는데 수액 처방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며칠 전부터 어머님께서 식사가 부실하셔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원장님은 어머니 식사를 잘하신다고 하느냐?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말하지 않고
제가 영양제값을 지불 했습니다.
어제 제가 임종 기도를 드린 이옥순 권사님 자녀들도
주사 한 방, 약 처방까지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부자 되겠습니까?
그리고 원장님이 대충대충 대답하시니 이런 오해가 생깁니다.
우리 선생님들도 보호자분들께 전화를 걸어
상담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양보호사, 간호사들이 담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오해들이 발생합니다.
목사인 저는
매일 아침 9시에 간호팀과 회의를 합니다.
한 분 한 분 면밀히 살피고 있습니다.
식사는 잘 했는지?
소변, 대변은 잘 누셨는지?
잠은 잘 잤는지?
그냥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한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절대 영양제 팔아서 먹고 살지도 않습니다.
어찌 되었건 사마리아 사람들 근본이 착한 사람이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하다고 모두가 잘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의 팔자?가 사납습니다.
미인 이어서 그랬는지?
마음씨가 고와서 그랬는지?
타고나기를 천박했는지?
한 남자와만 살지 못하고 5명씩이나 함께 산 여인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항상 가슴이 철렁철렁 괴로웠습니다.
16절입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7절,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맞습니다.
우리들의 신랑은 예수님 한 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지금의 남편은 남편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가짜 남편들 때문에 속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매일 산책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인생이 무엇일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 쓰잘데기도 없는 욕심 때문에
우리 인생이 얼마나 멍들었습니까?
결국,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지지 않았습니까?
지금 대한민국에 굶어 죽는 사람 있습니까?
목사인 저는 좋은 차 타고 다니면서도
아직까지도
버리지 못한 관성 때문에 몸도 마음도 아파 죽겠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먹는 약이 10알이 넘습니다.
그래서 산책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하루에 하나씩만 버리면 참 좋겠다.
오늘은 미움을 버리고
내일은 불평을 버리고
모레는 교만을 버리고
글피는 이기심을 버리고
버릴 줄 아는 것이 나이가 드는 성숙함 아닌가?
사마리아 여인도 성숙해지고 있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19절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땐 선지자라 불렀습니다.
29절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리고 이제 사마리아 여인 눈앞에 서 있는 그가
그리스도라 믿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성숙해지기까지 예수께서는 성심을 다해 들어주고
응답해주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한 생명을 구원시키는 일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고
우리가 성숙해진다는 건
믿지 못했던 일들까지 믿게 되는 것입니다.
속는 것
속아 주는 것조차도 믿음입니다.
이것이 나이가 든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인내와 기다림과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
오를수록 힘이 들지만 시야는 넓어진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성숙해진다는 말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부부와 같은 것이다.
살아갈수록 익어가는 과일과 같고 친구와 같은 것이다.
임성춘 시인이 쓴 시도 있습니다.
늙어 가는 것이 서러운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게 더 서럽다.
내 나이 쉰 살
그 절반은 잠을 잤고
그 절반은 노동을 했으며
그 절반은 술을 마셨고
그 절반은 사랑을 했다.
어느 밤
뒤척이다 일어나
내 쉰 살을 반추하며
거꾸로 세어 본다
쉰, 마흔아홉, 마흔여덟, 마흔일곱...
아직 절반도 못 세었는데
눈물이 난다.
내 나이 쉰 살
변하지 않은 건 생겨날 때 가져온
울어도 울어도 마르지 않는
눈물샘뿐이다. /쉰 살 즈음에
27절입니다.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
우리가 살다 보면 꼭 이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꼬투리만 잡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이런 관성 때문에 괴롭습니다.
그리고 많이 후회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속삭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건 큰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상종하는 것조차도 용납되지 않았는데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가쉽gossip 거리입니다.
우리도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고 싶지 않습니까?
목사인 저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오해 때문에 자살하기도 합니다.
요즘 인터넷이 얼마나 시끌벅적합니까?
누가 어떻고.
누가 어쨓네.
이렇게 아무 근거도 없이 까벌리고
아니면 말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아들 군대 휴가 문제가
우리 국민이 겪고 있는 코로나19 등
국난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국회의원들이라고는 허구한 날 난리법석입니다.
이사야 53장 7절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떤 오해가 있을지라도
일일이 변명하지 않아도
묵묵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POWER입니다.
우리 집에 대추나무를 심었습니다,
대추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대추가 영글어 가는데도
수천 번의 천둥번개를 맞는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익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일파티란 시를 읽어 드립니다.
싱싱한 고래 한 마리 내 허리에 살았네
그때 스무 살 나는 푸른 고래였지
서른 살 나는 첼로였다네
적당히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잘 길든 사내의 등어리를 긁듯이
그렇게 나를 긁으면 안개라고 할까
매캐한 담배 냄새 같은 첼로였다네
마흔 살 땐 장송곡을 틀었을 거야
검은 드레스에 검은 장미도 꽂았을 거야
서양 여자들처럼 언덕을 넘어갔지
이유는 모르겠어
장하고 조금 목이 메었어
쉰 살이 되면 나는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어
오히려 가볍겠지
사랑에 못 박히는 것조차
바람결에 맡기고
모든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반은 없는
쉰 살의 생일파티는 어떻게 할까
기도는 공짜지만 제일 큰 이익을 가져온다 하니
청승맞게 꿇어앉아 기도나 할까 / 시인 문정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