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共業)과 별업(別業)>
사람의 행동과 말과 생각,
곧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이라는
삼업(三業)에는 반드시 선ㆍ악의 과보가 따른다.
이것이 인과업보(因果業報)로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다.
그런데 부파불교시대의 아비달마를 집대성한
<구사론(俱舍論)>에서부터 ‘공업(共業)’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개인적으로 받는 업은 별업(別業)이고,
집단으로 받는 업은 공업(共業)이라 한다.
즉,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짓는 업을 공업이라 하는데,
사회의 집단적인 행위 혹은 사회분위기라든가 어떤 집단의
독특한 문화유형이나 그 집단의 가치, 통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예컨대, 국가 간의 전쟁이라든지,
이민자 집단을 차별하고 괴롭힌다든지,
외국인 노동자를 혹사하는 인종차별 따위가 대표적 공업이다.
그리고 사주팔자는 별업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헌데 같은 사주를 가진 자라도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사람과
부유한 고장에서 태어난 사람은 공업이 다르기 때문에
비록 사주가 같다 하더라도 성취의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개 같은 지역 같은 시기에 태어나면 공업에 휘말리기 쉽다.
우리 민족이 겪은 6ㆍ25 세대가 그렇다.
우리 민족이 함께 겪었기에 6ㆍ25는 당시
우리 민족에겐 공업이었던 것이다.
또 장마 때 한강에 흙탕물이 내려가고,
온갖 쓰레기가 쓸려 내려간다고 할 때,
이것은 어느 개인이 혼자서 저지른 것이 아니라
사회공동의 책임, 곧 공업인 것이다.
공업에 관한 것이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나온다.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저마다 마땅한 대로 받아쓰게 된다.”
여기서 ‘이런 것’이란 삼천대천세계가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실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그리고 공업에 대해 법정 스님은
‘공동으로 선ㆍ악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고ㆍ락의 과보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또 별업의 대표적인 것으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이 있다.
자기가 저지른 과보를 자기가 받는다는 말이다.
사람마다 지은 업이 다르므로 각자의 업인(業因)에 의해
과보도 달리 받게 된다.
그리고 같은 시기 같은 나라에 태어나도
개인적인 빈부귀천은 다를 수 있다. 이런 것이 별업이다.
그리고 아기가 병으로 고통스러워해도 어머니가 대신 해 줄 수가 없다.
개인의 쾌락이나 고통은 별업인 것이다.
이와 같이 공업은 사회적인 것이고, 별업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런데 업을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으로 나누기도 한다.
공업(共業)이란 행위의 주체가 여럿인 경우를 말하고
불공업은 혼자서 하는 경우를 말한다.
공업은 저마다 공동으로 선ㆍ악의 업을 짓고
공동으로 고ㆍ락(苦樂)의 인과응보를 받는 것이고,
이에 비해 불공업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갚음을 받을
개별적인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불공업(不共業)은 별업(別業)과 같은 말이다.
공업은 환경과 만나는 인연을 결정지어주는 업이며
불공업은 자신을 결정지어주는 업이다.
즉, 가족은 가족으로서 공업이 있기에 만난 것이고,
서울에 같이 사는 것은 서울 사람으로서 공업을 가졌기에
서울에서 같이 사는 것이다.
이렇게 공업은 자신의 탄생 또는 환경을 결정지어준다.
그리고 불공업은 자신의 육신을 결정지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불공업은 개개인의 얼굴 모양, 몸의 모양, 지능상태,
집안의 좋고 나쁨 등 다른 이들과 구별되게 하는 특별한 업이다.
그런데 업(業)이란 것은 자신의 환경과 육신만을 결정시켜 줄 뿐
자신의 의지까지도 결정지어주는 것은 아니다.
즉, 지금 자신의 환경과 육신 또는 모든 인연은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 결정됐다 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는 지금의 자신이 지금의 그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의지로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지어진 지금의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삶은 운명적인 삶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지어진
지금의 환경을 극복해낸다면 그 사람의 삶은 운명적인 삶이 아니라
얼마든지 개척되어질 수 있는 삶이다.
미래의 예언자, 다시 말하면 사주팔자나 점쟁이들이 말하는 대로
삶이 이루어진다면 그 사람의 삶은 별 볼일 없는 삶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공업중생(共業衆生)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혼자서는 잘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잘못하면 그 결과의 나쁜 영향이
그 잘한 사람에게도 돌아오게 된다는 말이다.
한 가정을 화목하게 하는 것은 가족 전체의 노력이 있어야 하고,
한 국가가 잘 되려면 그 국가 국민 전체가 다 잘해야 되듯이
엄밀히 말하면 공업이 아닌 것이 없지만,
굳이 그 책임 한계를 나눈다면 여럿이 함께 지는 것이 있고,
개인이 책임을 지는 것이 있듯이
공업은 공동책임, 불공업은 개인책임을 말한다.
공업(共業)은 단체 구성원이 함께 짓는 업이고,
불공업(不共業)은 개인의 업인데, 이 둘 사이에도
서로 얽혀서 과보를 받는 경우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① 공업(共業)으로 짓고 불공업(不共業)으로 받는 경우도 있다.
부모 조상이 짓고, 개별 자손이 받는다.
회사원들이 금연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과장이 혼자서 사장에게 불려가 꾸중을 듣는 것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② 공업(共業)으로 짓고 공동(共業)으로 받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공업으로 한반도의 남북 분단을 긋고,
우리 모두가 고통을 받고 있다. 대중 스님이 공업으로
절 도량을 늘 깨끗하게 해서, 대중 스님이
공동으로 칭찬을 받는 것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③ 불공업(不共業)으로 짓고 공업(共業)으로 받는 경우도 있다.
이완용이 저지른 업(불공업)으로 인해 많은 후속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한 학생이 강력범죄를 저질러 형사처벌을 받아 그 소문이 퍼지면,
그 학교 학생 전체의 명예가 훼손된다.
한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국가와 국민의 명예가 드날리게 된다.
④ 불공업(不共業)으로 짓고 불공업으로 받는 경우도 있다.
혼자서 교통 위반을 하고, 혼자서 범칙금을 낸다.
혼자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자기 건강을 자기가 지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혼자서 책임져야 되는 불공업은 물론이고
공동책임을 지는 공업에도 선업을 짓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업이란 중생(衆生)들 각자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ㆍ악 행위의 과보(果報)를 말함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뜻하지 않은 사고가 날 때면
공업(共業)이라는 말이 대두된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돼 있지 않아도,
즉 자기가 업을 짓지 않았어도 공업이라는 결과를
자기도 모르게 함께 받게 되기도 한다.
자기는 불조심을 철저히 했지만 이웃 사람이 부주의해서
마을 전체가 불바다가 됐다면 억울하지만 공업을 뒤집어쓰게 된다.
이러한 공업의 문제가 중요한 의제로 논의되는 것은 이 사회가
서로 연기(緣起)된 상호의존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의존은 상호보완이라는 좋은 면도 있지만
다른 일면에서는 대립하는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사회가 누군가의 희생에 바탕 해 있는
불평등(不平等)한 세계의 일면을 상정할 수 있다.
한쪽에 얻은 이득이 있으면, 그만큼 그 반대로 누군가는
불이익의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무리 ‘불공업’이 개인적인 업보라고 설명을 해도
어차피 개인은 사회라는 큰 틀에 속해 있으므로
‘공업’이라는 공통적인 사회적 업, 즉
‘모두’가 받는 인과(因果)를 피할 수가 없다.
우리 사회는 개인과 공중이 상호 연관돼있다.
우리가 공업을 지으면 현상적으로 대중의 고통이
나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언젠가는 나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고통과
불평등의 사회구조를 모르는 체 외면하면 어느 순간
그 사회구조가 우리에게 고통의 과보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따라서 될수록 좋은 공업을 짓기 위해
사회복지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업설은 개인적인 불공업(不共業)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공업(共業)을 강조함으로써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지지대 역할을 한다.
특히 공업은 자연환경까지를 규정한다고 하는 바,
오늘날 환경 문제에 대한 인간의 공동 노력을 일깨워준다.
따라서 불교의 업설은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올바를 지향을 제시해준다고 하겠다.
가이아(Gaia)의 가설이란
지구상의 모든 구성요소들이 서로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며,
물리적ㆍ화학적 환경을 생명현상에 적합한 상태로 유지하는
최적조건을 유지하려고 언제나 자기제어기능을 갖추고
자기 스스로 조정하고 스스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지지자들이 증가해 현재는 지구가 생물과 무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서 자가조절(self-regulating) 기능으로
환경을 조절해 존속돼 왔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인류는 이제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구의
다른 생물권을 무자비하게 착취한 암적 존재였다.
따라서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하는 이와 같은
가이아 이론이 주는 암시는
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사상의 가르침이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불가결의 사상임을 가리키고 있다.
공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업을 저지르는 주체가 오히려 권력자일 경우가 많다.
그들은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환경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다.
지구의 허파라고 하는 아마존강 유역을 마구 파헤친다고
비난의 소리가 높자, 되레 브라질 대통령은
아마존은 세계의 것이 아니라 브라질의 영토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또한 최근(2019년)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경제보복을 감행할 때,
그 주체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수상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아직 결정적인 제재를 가하지도 않고,
그 준비동작을 취했을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같이 일어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일제불매운동과
일본 여행자제 등으로 일본의 급소인 지방경제에 먼저 일격을 가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 불매운동의 중심에 있는 기업들은
국내 철수까지 고려할 정도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되자
아베는 크게 놀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키나와 지방의 타격이 특히 심하다고 한다.
업은 아베 총리가 저질렀는데 그 과보는 공업으로 나타나서
오키나와 현을 비롯한 일본의 지자체가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 원인(遠因)은
오키나와 현민이 지난 선거에서 아베를 선출하는데
한몫을 한 바로 그 공업이었다.
이와 같이 정업(定業, 결정된 업)은 쉽게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오키나와 현의 주민들이
천업(天業, 천지가 천하를 다스리는 일)을 돌파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 언론을 통해서 아베 총리의 이번 한국 경제보복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국인 관광객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참회의 활동을 통해 천업을 돌파하는 것이
더 이상의 공업을 면할 길이 될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