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의사, 울지마! 톤즈,
아픈만큼 사랑한다.
아침에 본 동영상, 동남아 오지의 슈바이처로 불리었던 대구출신의 박누가(박병출) 선교사의 생애에 대한 내용이었다. 외과의사로 필리핀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향년 58세에 암으로 소천했다. 그는 암에 대한 가족력이 있어 8형제 중 2명이 이미 먼저 갔단다.
2004년 3월 카자흐스탄에서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의학은 사람이 만든 학문이고 치료는 하나님이 만든 작품 아닙니꺼. 맞지예. 살려 주이소.
이대로 데려가시면 안 됩니데이. 마 지금은 안 됩니더.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데이.”
그의 삶은 길지는 않았지만 불꽃같은 삶이었다. 외과 전문의로 남들보다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모르는 걸 가장 큰 병으로 여겼다. 그는 의사였지만, 치료는 하나님의 몫이라고 확신했던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이후 무려 14년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할 기회를 주셨고 마침내 데려가셨다.
박 선교사가 필리핀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한 건 1989년이었다. 그는 루손섬 바기오 북부의 산악지대를 사역지로 택했다. 바기오에서 12시간 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닿는 오지였다.
누구도 오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이 박 선교사를 붙잡았다. 그곳은 정부의 행정력도 제대로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다. 이후 필리핀을 거점으로 동남아시아 오지만 찾아다녔다. 죽어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대형버스를 이동병원으로 개조해 의료 사각지대에서 주술에 기대 사는 이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의사인데도 그는 병을 달고 살았다. 워낙 오지를 다니다 보니 장티푸스, 콜레라, 이질, 뎅기열, 간염 등이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급기야 1992년 췌장암에 걸렸지만, 다행히 초기여서 수술을 받고 완치됐다. 2004년에는 위암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낙심하지는 않았다.
‘치료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소신대로 수술을 받았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말기 암이 쉽게 치유될 리 없었다. 몸을 돌보지 않고 혹사하니 제대로 된 회복도 기대할 수 없었다.
2009년엔 간경화에 당뇨까지 더해졌다. 2016년 5월 위암은 결국 재발했다. 고통이 더해질수록 그는 더욱 겸손해졌다.
“아파 보니 환자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며 오히려 고마워했다. 박 선교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닭의 피를 치료제 삼아 죽어갔을 생명이 수천 명이었다.
그는 아플수록 더 큰 사랑을 나누었던 진정한 성자였다.
박 선교사는 2016년 위암 재발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소천했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에 불구하고 30여 년 동안 이어진 의료 봉사로 ‘필리핀의 한국인 슈바이처’라 불렸다.
'아파도 행복합니다.' 부와 명예를 버리고, 오로지 아픈 사람들을 위해 시작한 의료 봉사, 산속까지 찾아와 무료로 진료해 주는 이방인 의사를 위해 오지 사람들은 코코넛과 파파야로 마음을 대신했다.
복수가 차고 힘들어서 한국에 돌아와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다. 착하고 순수한 필리핀 사람들을 보며 그는 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난다. 아파보니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는 걸 또 한 번 느끼게 됐다는 누가 씨는 아파도 행복하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곳에서 작은 병원도 세우고, 버스도 마련해 오지마을 의료봉사를 다녔던 박 선교사, 필리핀 현지인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적은 돈이라도 생기면 빈민들에게 빵을 사서 나눠줬던, 물질보다 헌신과 은혜를 강조하는 박누가 선교사의 감동적인 삶이었다.
췌장암과 두번의 위암수술, 항암치료로 열이나고 온몸이 저려왔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의사라해도 남들처럼 많은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이 아니라, 일찌기 외국으로 선교활동을 떠나 버렸으니 생계유지를 위해 식당을 하고 두 아이를 키웠다. 조카도 감동하여 간호사가 되어 필리핀에서 그를 도왔다.
그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삶의 아름다운 불꽃이 튀기를 바랬고, '세상에 대한 미련보다는 남은 할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명색이 의사가 자신의 몸관리도 못하는게 부끄럽다'고도 하였다.
직장 다니며 학비대준 누나들에게 신세진걸 갚으려고 했는데 몸이 아파 미안해 했고, '1년을 더살게 해주는 것보다 병원선을 만드는 것이 더중요하다'고 하였다.
항암치료를 위해 어머니와 온 형제들이 힘을 다했다. 단백질이 풍부하다는 메뚜기와 미꾸라지를 잡아 먹이려는 등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인생은 소풍온것처럼, 아파도 툴툴 털고 일어서야 한다'던 자신의 말을 실천하지 못하고 끝내 먼곳으로 떠났다.
문득 오래전 직장을 다닐때 주말농장을 같이하던 어느 회원이 나의 온라인 사이트에 올렸던 글이 생각났다. '울지마! 톤즈', 부산출신 고 이태석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부산에는 두곳 위대한 의사의 기념관이 있다. 한곳은 초량의 고 장기려 박사님의 것이고, 또 한곳은 남부민동에 있는 고 이태석 신부의 흔적이다.
장기려 박사님은 부산복음병원(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을 설립하여 어려운 환자들을 무료 진료했고, 초대 원장, 제2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장 겸 병원장 등을 역임하셨으며, 1968년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셨다.
6.25때 북한에 가족을 두고 공산주의들을 피하여 월남하셨고, 끝까지 집한채 없이 청빈과 봉사하는 삶을 산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별명으로는 바보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작은 예수 등이다.
고 이태석 선교사 겸 의사는 아프리카 수단 남부(현재는 남수단)의 와랍 주에 있는 마을인 톤즈의 돈보스코 미션에서 교육 활동과 의료 활동을 펼치다가 2008년 11월 한국에 휴가차 입국하였을 때, 대장암 4기를 진단받아 톤즈로 돌아가지 못하고 2010년 1월 14일 암투병 끝에 선종하였다.
두사람의 기념관은 초량과 남부민동의 산복도로밑 비탈에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고생을 해봐야 남의 고통도 아는 것 같다.
한국의 슈바이처들, 고 장기려 박사님의 경우는 알 수가 없으나 이태석 신부나 박누가 선교사의 경우 어려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대러 살았으니 축복받아 마땅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정말 존경스럽고 고귀한 분들이다.
세상은 악령으로 인하여 망해가고 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말로서는 못할게 없는 것처럼 내대지만, 막상 자신에게 불리하면 뒷걸음을 치며 내뺀다. 그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정상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의 실상이다.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고 이태석 신부의 기념관을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글을 쓰려니 뭔가 마음에 걸렸다. 고 장기려 박사님 기념관은 오래전 다녀온바 있고, 고 이태석 신부의 생가(기념관)은 가보지 않았으나 내가 알만한 뻔한 위치에 있다는걸 알았으니 불편한 마음을 거두어야겠다.
위의 분들의 업적은 이미 수차례 방송된바 있으나 다시 들추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