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4경 역사유적 청풍문화재단지 #2
만사형통 관통석
무병장수 천년만년 거북바위
변함없는 사랑나무 연리지 안내도
연리지와 연리목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라고 한다.
두몸이 한몸이 된다하여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과 흔히 비유하였다. 알기쉽게 '사랑나무' 라고도 부른다.
나무가지가 서로 이어지면 연리지,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이다.
연리목은 가끔 볼 수 있으나 가지가 붙은 연리지는 매우 희귀하다.
가지는 다른 나무와 맞 닿을기회가 적을 뿐만 아니라 맞닿더라도 바람에 흔들려버려 좀처럼 붙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 전설상의 새와 나무인 비익조와 연리목에서 유래된 비익이라는 새는
암수의 눈과 날개가 각각 하나이기 때문에 항상 나란히 한몸이 되어서 난다하며
연리라는 나무는 두 그루의 나무이지만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나무결이 상통한다는데서 남녀간의 깊은 정분을 뜻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당나라 6대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을 그린 장한가에서
하늘에서는 비익조(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연리지)가 된다 라고 읊었다.
제천 청풍 금병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풍부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건물로 청풍은 삼국시대에 사열이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때 청풍현이라 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지군사가 되고, 조선 세조 때 군이 되었다.
현종 초에 도호부로 되었으며, 고종32년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국역의 통폐합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이 건물은 숙종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후 숙종 31년(1705)에 부사 이희조가 중건하고, 영조2년(1726)에 부사 박필문이 중수하고, 권돈인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6칸, 측면3칸의 팔작집이다.
앞마당에는 청백리처럼 보이는 사또로 부터 심문을 당하는 죄인들의 모습을 생동감 넘치는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일명 명월정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부사(府使)가 동헌 대청마루에 높게 앉아 업무를 보고 있다.
응청각((凝淸閣, 충북유형문화재 제90호)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한벽루의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이황 (1501~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때 '응청각'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인조15년(1637)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다. 고종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중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토석축의 담으로 벽을 막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건물 좌측에 목조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고려 때 관아의 연회 장소로 건축된 청풍 한벽루 (보물528호) 표시석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4년 (1317)에 청풍현이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다.
1972년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하였다.
이 루는 석축토단의 자연석 주초석 위에 기둥이 배가 부른 엔타시스 수법을 쓴 층 아래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에 주심포계 양식이다.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식 익랑 (대문간에 붙여 지은 방)을 달았다.
누각 안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 우암 송시열과 김수증의 편액, 추사 김정희가 쓴 '청풍 한벽루' 현판이 걸려 있었다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며 밖에 한벽루 정면 현판은 조선 후기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 친필의 한벽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수몰전 한벽루의 사진
옛 도호부 시대의 부사나 군수의 송덕비, 선정비, 열녀문, 공덕비 등이 세워져 있는 청풍문화재단지의 비석군
청풍문화재단지 조성 당시 고대사회의 장례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선사시대 무덤인 지석묘 5점과 문인석 6점,
조선시대 군수나 부사의 공덕비, 송덕비, 선정비 등 비지정문화재 32점을 옮겨 놓았으며
1997년 제천향교에서 비석 10점을 추가로 옮겨 이곳에 배치함으로써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한강변의 비석문화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악어바위
황금 두꺼비바위
고인돌과 성혈(星穴)
본 고인돌(支石墓)은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청풍면 황석리 지역에서 옮겨온 남방식 고인돌로
특히, 중앙에 배치된 고인돌은 하늘의 별자리로 보이는 성혈(星穴)이 새겨져 있어서 특이하다.
약 2500여년의 세월을 거치며 풍화작용에 의해 다른 별자리는 마모되어 알 수 없지만
북두칠성(큰곰지리)과 북극성(작은곰자리) 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청풍명월(淸風明月) 비석
양반고장의 온화한 심성과 청풍명월의 고장을 상징하는 높이 8m, 돌레 85Cm의 제천 수산면 화강석에 새긴 ‘청풍명월’ 비석이다.
김중명(金重明)과 호랑이
청풍김씨 김중명은 인조 을유년 무과에 올라 선전관으로 발탁되었는데 과거에 급제한 후 부친 산소 성묘길에 묘 뒤에 숨어 있던 큰 범을 만나게 되었다.
따라온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중명이 말에서 내려 고함을 지르며 곧장 나아가
발로 호랑이를 차서 죽여 버리니 그 용맹에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제천 후산리 고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었던 민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말기에 지어진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으로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을 향하고 있다.
대청의 우측에 2칸 크기의 건너방과, 툇마루를 높이 하고 그 밑에 함실 아궁이를 두고 있다.
대청은 좌측으로 웃방이 있고 웃방에서 동쪽으로 꺾어 대청의 좌측으로 후퇴를 후보하여 제사방으로 꾸미고있다.
전체적인 내부의 배치가 특이하다.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천 도화리 고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이 집은 본래 청풍면 도화리에 있었던 민가로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ㄷ자형의 우진각 기와집으로 중앙에는 3칸 크기의 대청을 이루고,
좌측 간살은 방, 부엌, 광으로, 우측 간살은 방2칸과 2칸 크기의 부엌으로 되어 있다.
둥근 통나무 굴뚝과 부엌 살자창옆의 관솔을 피워 어둠을 밝히는 시설은 태백산맥 일대의 산간지대 민가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본래 이전하기전의 흔적으로 보아 앞쪽에는 바깥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튼 ㅁ자형의 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황석리 고가 (충북 유형문화재 제84호)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황석리 164번지에 있었던 민가로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 지금의 자리로옮겨 복원한것이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겹머리 기와집이며,
조산말기의 건축물로 좌측(서쪽)으로부터 부엌, 안방, 웃방을 나란히하고 끝에 사랑방을 두었다.
아방과 웃방 앞에는 길게 툇마루를 두고, 사랑방 퇴는 부엌으로 구성하였다.
툇마루와 사랑부엌 사이의 퇴주(각주) 이름이 특이하다.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초가집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초가집인 문간채와 일자형의 안채, 기와를 올린 화장실 등 3동으로 되어 있다.
안채의 부엌 앞에는 작은 뒤주를 두었는데 곡물이나 먹거리 등을 저장한 공간으로 보인다.
3칸의 방을 한 공간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방과 방 사이에 문을 달아 놓은 것이 특징이다.
조선말기의 건축물로 좌측(서쪽)으로 부터 부엌, 안방, 웃방을 나란히 하고 끝에 사랑방을 두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시골의 양반집 모습을 살펴볼수 있다.
12:20 시간상의 일정으로 청풍문화단지내의 망월산성(望月山城), 망월루(望月樓)와 관수정(觀水亭) 탐방을 생략하고
비봉산케이블카 물태리역 인근 '밥상위의 보약 한첩' 식당에서 중식시간을 갖는다.
오늘의 중식메뉴는 수수떡갈비+더덕구이를 포함한 1인당 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