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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세기 12:10-20 제목 : 아브라함의 불안함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두세시간이면 끝나는 영화와 달리 TV 드라마는 몇십회, 일일드라마 같은 것은 100회 이상 길게 가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결론이나 결과를 보기 위한 것이라면 드라마는 결과나 결론보다도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를 어느 정도 보면 앞으로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사실 대부분 예측이 되지요. 결과를 알면서도 굳이 계속 보는 이유는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 속에 담긴 위기나 갈등 속에서 결단과 사랑과 인내로 헤쳐나가는 것을 보려는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결과는 언제나 확실하지요. 하지만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는 늘 불확실함과 불안함과 긴장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과정 중에 있는데 우리 믿음의 결과는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셨고, 그 증거로 부활의 역사까지 나타내셨지요. 그래서 결과는 확실합니다만 그 결과에 이르는 우리의 믿음의 과정은 수시로 불안합니다. 내 믿음이 완벽하지 못해서 불안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위기 상황과 사건들 때문에 불안하고, 내 인격이나 성품이 성숙되지 못해서, 내 지혜와 지식과 경험이 부실해서 불안하고 불확실하지요. 이 불안함과 불확실함은 우리를 고민스럽게 하고,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래서 이래야 할까 저래야 할까 방황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실수도 하고, 판단을 잘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악하고 죄악되고 부정한 방향을 선택해 버리기도 하지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이 그 믿음의 과정 속에 어떤 불안함이 있었고, 그 불안함 속에서 어떤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지를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확실한 약속이 있었지요. 본문 앞부분인 창세기 12:2절을 보면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시면서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 약속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한번만 주신 게 아니지요. 아브라함 생애동안 여러 차례 반복해서 주셨습니다. 창세기 13:16절 ‘내게 네 자손을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5:5절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17:6절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이렇게 여러 차례 약속하실만큼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했지요.
그러나 그 약속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그 불안함과 불확실한 현실 앞에서 고민스럽고 때로는 두려울 수 밖에 없었지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본토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왔고, 하나님은 이 땅을 너와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까지 하셨는데 정작 가나안 땅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브라함은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의 심한 기근을 만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결국 살기 위해 약속의 땅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남방 애굽으로 갔던 거죠. 애굽에 내려가니까 그렇지 않아도 낯선 외국인으로 타국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데 아리따운 아내의 미모가 그 불안함을 더했나 봅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서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람이 현실에 대한 불안함이 얼마나 컸는지 잘 보여주고 있지요.
그런데 불안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내 사래는 애굽의 왕 바로에게까지 불려가서 하마터면 바로의 아내가 될 뻔까지 했지요. 다행히 하나님께서 조치해주셔서 그런 비극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아브라함은 공개적인 책망과 큰 부끄러움을 당하고 맙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생애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지만 그 과정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었지요.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아브라함이 나이가 들어 노년이 되었는데도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고민 끝에 첩 하갈을 두어서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낳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은 약속의 후손이 될 수 없다고 못박으셨고, 그러다가 100세라는 늦은 나이에 정말 기적적으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자라 소년이 되었을 때 난데 없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거죠. 말도 되지 않는 이런 명령을 받았을 때에 아브라함은 얼마나 황당하고 두려웠겠습니까? 게다가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너희 후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셨지만 정작 아브라함 생애 동안에는 땅 한 평 가지지 못했고,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를 묻을 수 있는 무덤 정도만 겨우 가질 수 있었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기 본토를 떠나서 가나안 땅까지 왔지만 아브라함 평생에 뭐 하나 제대로 이루어진 것 없이 이런저런 불확실함과 불안함과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여건 속에서 살았던 겁니다. 이런 여건과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게 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지였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든 믿고 의지하려는 그 믿음 하나로 아브라함은 그 불안하고 염려스러운 모든 환경을 이겼다기보다는 견디며 살아낸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처럼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거나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실수와 잘못을 범하기도 했는데 아무리 믿음의 조상이어도 이 불안하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믿음만을 가지고 산다는 게 때로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의 신학자인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가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지요. ‘믿음은 단순한 확신이나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의심과 불안이 함께 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즉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믿음에는 언제나 의심이나 불안 같은 불확실성이 함께 공존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받아드리고 믿고 신뢰하며 살아가려고 때로는 몸부림 치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가장 이상적인 믿음은 불안과 의심이 없이 모든 것을 확신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적인 우리의 믿음은 오히려 불안과 의심 속에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을 향해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려는 결단이 곧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약 히브리서 11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에서 바라는 것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 이런 것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이거나 학술적으로 증명된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려 하고, 증명된 것만 받아드리려는 현실의 분위기 속에서는 믿음이라는 것이 수시로 불확실하거나 불안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믿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의 의지로 받아드렸지요. 그 믿음 안에서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바라는 것들을 허상이 아닌 실상으로 받아드렸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실한 증거로 받아드렸던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대로 되어질 것 같아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의 불안함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용기있게, 그리고 굳건한 믿음의 의지로 붙들고 따랐던 거죠. 이것이 곧 믿음이라고 히브리서 11장은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가셨던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지요.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스럽게 죽어가실 때에 예수님의 입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의 외침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신을 지니셨기에 이 고통스럽고 처참한 죽음에 이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잠시 불안함과 불확실함을 보이신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결국 하나님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난과 죽음,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 자체를 하나님께 맡기며 부탁하셨지요. 예수께서 나타내신 부활의 역사와 능력에는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굳건한 믿음의 의지가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믿고 의지하지만 가장 불안하고 위협적이고 불확실함 속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택하셨던 예수님의 이러한 굳건한 믿음의 의지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따랐던 우리 신앙의 선진들의 믿음을 우리도 따르기 원합니다. 주 성령님께서 참된 믿음의 길을 가려는 우리를 굳건히 붙잡아주시고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힘을 주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