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리스도의 새 일꾼
[고후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내려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은혜와 진리를 내려 주셨다. 즉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케 하시고 새 역사를 우리에게 이루어 주셨다. 신약의 일꾼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는 긍휼하심을 입은 자이다. 그 특징은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들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는 죄가 아니라 모르는 죄를 말하고 있다. 세 번째는 속임으로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다섯 번째는 진리를 나타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 언약이란 무엇인지를 에례미야, 에스겔, 또 신약에서는 히브리서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새 언약이라는 것은 두 기둥을 가지고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심으로 다시 부활하신 것을 우리는 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는 사도의 자격을 가지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에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하려면 십자가 권한을 받으신 그 기둥이 세워져야 하는것이고 또한 바울의 전도의 주체인 “내가 너희 중에서 에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여노라” 아멘 우리는 이런 믿음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단단한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다. 그럴 때 바른 예배,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는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형식으로 때로는 우리의 마음과 달리 의무적으로 할 수 없이, 누구의 눈치를 보면서, 의리 때문에 교회를 다닐 때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예가 어떤 예배인지, 이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드리는 예배가 된다. 우리는 본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항상 말씀이 없으면 기도가 없으면 한 순간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밥이 된다. 따라서 늘 영적인 분별함을 가지려면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를 살아야 한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가시고 하나님의 보호안에서 내가 서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날마나 영적인 전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있는 것, 그 말씀으로 삶으로 살아나는 것은 내힘이 아니라 성령이 나에게 부어주시는 힘으로 살아간다. 매일 하루 하루를 이 한 순간을 온전히 살기위해 말씀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며 모든 훈련 과정 과정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길 소망합니다.
산 위와 산 아래
[막9:20-29]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오늘 말씀은 신약과 구약 성경의 여러 사건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변화산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산 위와 산 아래의 차이를 볼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나님의 진리도 전혀 풀리지가 않는 거예요. 그냥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이름의 신비를 알아야 되고 이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예수님이요. 예수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을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깊이 깨닫고 예수님을 깊이 연구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생활이 이루어져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시고 마지막 지앙에서 피를 문설주를 발라 이르사엘 집을 보호하셨다. 이스라엘 해방될 때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을 보여 주셨다. 이러한 신비와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고 신비 체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변화산에서의 신비는 세가지로 요약한다면 첫 번째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계시를 받았다. 예수님의 변형과 모세와 엘이야의 등장, 하나님의 음성으로 인해 예수님의 신성을 깨달았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율법과 선지서를 상징하며 성경의 성취를 보여주었다. 성경의 오묘함과 신비를 깨닫는 신앙이 중요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대화로 복음의 핵심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교회는 다니지만 성경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신앙생활은 성경 말씀에 열중하고 이를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진리이며 이를 깨닫지 못하면 인간에게는 진리가 없다. 고동과 질병, 불신과 실패로 가득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과 기도가 부족하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신앙은 많은 기적과 신비로 올 수가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
(23_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이사야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아멘!
오늘 선지자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주제에 대해 살펴본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아름다운 소식을 이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천국과 구원을 알리는 소식이다. 이 소식은 죄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해 살펴보면, 이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로서 하나님을 전파하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세상에서 아름다움은 일시적이며 변질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따라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신약에서는 아름다운 소식을 복음이라고 한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이며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장소가아니라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 예배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준다. 오늘 본문 말씀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첫 번째로 너는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 둘째는 힘써서 소리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 높여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외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며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이며,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오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다. 저 두만강을 넘어 올 수 있는 것은 나의 힘으로 온 것 같지만 하나님이 부르심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오늘 이 자리에서 훈련받고 있다. 학업과 교회에서 맡고 있는 사역과 말씀 훈련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때로는 지쳐서 힘들지만 이 모든 시간이 흘려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갈 때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져 가길 소망합니다.
(24) 나귀의 비밀
[마21:1-7]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아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 나귀는 성경에서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발람을 책망하는 내용과 사울이 왕이 되기 전 잃어버린 암나귀를 다니다가 사무엘을 만나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 이야기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나귀가 겸손과 순종의 상징임을 보여준다. 나귀의 특징은 귀가 크고 고집이 세고 음란함과 체력이 강함이 있다.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함을 상징하고 고집은 사람등의 완악함을 상징하며 음란함은 인간의 정욕을 상징하고, 체력의 강함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적응하고 견디는 특성을 가진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귀를 살펴본다면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 모습이 나온다. 이는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어린 양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우리가 나귀처럼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럼 나귀의 역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나귀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분을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지만, 이는 나귀가 아닌 예수님을 환영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만 전정한 영광을 받을 수 있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나귀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본받아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
오늘 말씀에 우리가 나귀처럼 귀가 커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담아 듣어 그 말씀을 전해야 하다. 우리는 늘 말씀이 끊어지면 죽어가는 영혼이다. 죽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 가운데 악이 가득하여 영적인 양식을 먹지 못하고 영원히 죽어가는 영혼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의 양식을 먹고 늘 영적으로 건강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데 힘을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