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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
선 우 휘
1
담배 연기가 좀처럼 빠지지 않고 안개처럼 자욱해진 방 안에 연달아 뿜어내는 연기가 그치지 않고 피어올랐다. 낡은 포터블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연방 오리엔탈 곡만 틀어내고 있다. 이 다방에는 선거를 앞두고 부쩍 손님이 늘었다.
한구석에 자리잡은 걸(傑)은 호주머니에서 담배꽁초를 끄집어내어 불을 붙이고 연신 입구를 내다보았다. 레지가 찬 것을 가져다 저편 손님에게 주고 돌아가는 길에 걸을 힐끔 보고는 그대로 지나가버렸다.
걸은 이런 시선쯤에 무감각해진 지 오랬다. 그는 시선을 천장에 달린 먼지 앉은 전등에 보내고는 주먹으로 턱을 고였다. 눈올을 감았다. 퍽 시장했다. 연기를 뿜어올리며 무엇을 망연히 생각했다. 별다른 신통한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조각 떠오르는 기억의 토막을 이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금방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멍하니 허탈한 것처럼 되는 것이다. 눈을 떴다.
어느새 들어온 길주(吉周)와 학구(學求)의 허름한 차림이 걸의 눈동자에 비 쳤다.
“담배 한 대.”
의자에 앉기도 바쁘게 내민 길주의 손에 양담배를 꺼내 쥐여준 학구는 카운터를 향해 손짓을 했다. 마담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냥갑을 들어 레지에게 주었다.
칙, 하고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인 학구는 그대로 돌아가는 레지의 등 뒤에 한마디 붙였다.
“야야 체네아이, 오늘은 돈 있다야. 차 석 잔.”
샐쭉해진 레지가 고개만 돌리고 물었다.
“뭐 드세요?”
“아무거나 가조람,”
"커피요?¨
"그래.”
길주가 걸을 보고 손으로 잔을 들어 마시는 시늉을 했다.
“쭉! 걸아, 오늘은 한잔 있다. 이 새끼가 좀 생겼대.”
흐뭇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엄지손가락으로 학구를 가리켰다. 학구는 턱 의자에 묻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쳤다. 걸은 학구보고 물었다.
“너 취직된.”
“비슷하디.”
“뭐인데.”
길주가 그 대답을 가로맡았다.
“이래두 야가 이젠 × × 공장 감독이랜다.”
“뭘 하능 건데.”
“벨게 아니디, 시시한 새끼덜 까부시문 된 대나.”
학구가 힐끔 길주를 보고 탓했다.
“야야 이 새끼, 말조심하라우, 내가 어깬 줄 알아.”
이 낯색을 달리하며 담배를 비벼껐다.
“야 학구, 그따우문 집어티우라우, 주먹을 내두르능 건 조심해, 틸 놈을 티야디 알디두 못하구 티랜다구 티문 어드캐.”
“아니야 걸아, 길주새끼가 괜히 하는 소리디, 이 새끼 넌 말조심하라우.”
학구는 팔꿉을 들어 길주를 겨누었다.
“야야야, 아니다 아니야. 근데 이 새끼가 돈닢이 생겠다구 크게 나오누나, 별수 있나 술 한잔 먹을라문 취소하야디, 취소.”
“새―끼.”
날라온 찻잔을 입에 가져가던 걸이 잔을 놓으면서 시선을 입구에 보냈다.
“야, 성기형님 오신다.”
길주와 학구는 잠깐 고개를 돌리더니 서로 쳐다보고 입을 비쭉했다.
“매일 와서 사누만.”
"그래두 야 마담은 외상차 잘 주더라.”
"큰일 나서, 누구 선거운동이나 하구 댕기디, 그것두 안하구 와 데리구 댕게.”
“뭐 한자리 안된다던?”
“한자리? 말마라. 데래 가주구 뭐이 한자리야, 글쎄 될 게 뭐이가, 이 다방에 나터령 한 군데 붙어 있었대문 또 모르디, 자 봐.”
하면서 학구는 손을 꼽았다.
“첨에 × 박사한테 붙었다가 그댐엔 × ×장군한테 붙었디. 또 그댐엔 × × ×씨, 또 그 댐엔 × × ×넝감, 그르니 될 게 뭐이가.”
“그건 그래, 그래두 봉수형님은 ×박사 따라댕기다가 국장 한자리 얻어 하디 않안, 또 죽은 병두형님은 그래두 님시 도지사나 한 번 했디.”
“거기다가 밤낮 머 낭심이 어드르쿠 결백이 뭐이니 하구, 그래 뭐이가 데리캐 촐촐해가지구 그래두 정티한다구, 헤, 말은 도티.”
“정티 뿌로카구나.”
“그거나 된대던, 정티 걸식병 환자디.”
"하하하……”
셋은 평북(平北) 시골서 공산당 본부를 습격하고 그길로 이남으로 뛰어나와 줄곧 성기병님올 따라다니며 수십 차나 경향 각지에서 공산당과 싸웠다.
걸의 바른손 등에는 당시 칼로 찔린 자국이 아직도 징그럽게 남아있었다. 그것은 일생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걸은 길주나 학구처럼 성기형님을 탓할 수 없었다. 물론 그를 믿고 따라다니던 친구들은 현재 보잘것없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성기형님 탓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분명히 알지는 못해도 성기형님이 하는 일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여태까지 따라다닌 것은 사실이다. 물론 잘됐다는 놈들이 번드르르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무엇인지 석연치 못한 것을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걸은 아직까지 이처럼 덜떨어진 자기의 꼴을 두고 누구를 원망해본 일이 없었다. 가끔 창피를 느낄 때는 있었으나 그럴 때도 걸은 그것이 오직 공산당놈들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좋지 못한 일의 근원은 ‘빨갱이’ 공산당놈들에게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 위에 걸은 그의 머리로써 그 밖의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를 몰랐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공산당이 없어진 지금에 와서 누구를 보고 주먹을 내둘러야 할는지, 그 주먹질의 대상을 잃어버린 일이었다.
다방을 나오면서 성기형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길주와 학구는 굽실 허리를 굽히고 지나갔으나 걸은,
“형님 나오셨습네까.”
하고 공손히 인사를 하여 그 악수를 받았다. 쥐어진 손이 퍽 메마르고 찬 것을 느꼈다.
2
‘평북집’이란 판잣집에서 빈대떡을 뜯고 약주가 몇 잔 뱃속에 부어지자 셋의 마음은 똑같이 부풀어올랐다. 길주가 주인아주머니에게 큰소리를 쳤다.
“아즈마니, 오늘은 외상 아니우다. 넉넉히 가주구 왔수다. 걱정마우.”
“이 새낀 네가 내능 거 같구나.”
학구가 잔을 비워 길주에게 건넸다. 길주는 쭉 돌이켜고 잔을 탁 놓으며 ,
“야, 그른데 너덜 덕구 알디, 덕구 말이야. 적위대장(赤衛隊長) 하던 새끼, 그 새끼 지금 남대문시당에서 포목당사 하구 있더라, 그 새끼가.”
“그래애, 그 새끼 언제 왔대.”
“그 무식 한 새끼가 공산당한테 니용만 당하꾸는 쬐께나서 안주(安州) 탄광에 들어갔다가 눅이오(6·25) 딕 전에 도망테나왔대.”
“흐응, 내가 그 새끼 쬐께난 니유 알디. 그치가 적위대장 할 때 무슨 대회에서 연설을 하는데 실패했거덩. 뭐이라구 했나 하문, 여기 붉은 꽃, 푸른 꽃, 흰 꽃, 꽃이 많이 있수다. 이 꽃으루 꽃다발을 만들어서, 축 공산당·청우당·민주딩·이라구 하는 여러 가지 꽃으루 만등거올수다. 이 꽃다발올 우리덜이 바틸 사람은 누군가 하문 그것은 니승만 박사올시다, 했거덩. 하하하……”
“말이야 옳게 했디”
걸도 같이 따라 웃었다.
“그치 그래두 반갑다구 술 한잔 사더라.”
“살긴 괜티않대?”
“응, 네펜네꺼지 얻구 꽤 얌전해졌던데.”
“흐응, 사람새끼 달라딘 모양이디.”
학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근데 용식이 요전에 명동에서 봤더니 지금 대학교수 노릇 한대더라.”
“가는 본대 똑똑했디 않안.”'
“문석인 뭘 하디?”
“갼 지금 중령이다. 너 모르네. 공병대장이래. 요전에 한탁 잘 내더라.”
“그래, 갸가 그래두 사람이 괜티않티.”
“남현이는 시겟방 채리구 돈푼이나 모았대문서.”
“갸 새낀 술 한잔 벤벤히 안 살 거다.”
“구두쇠 아니가, 야.”
“그른데 그 너네 닢옛집 살던 고 쪼꼬망이 현실이 말이다. 고고 경감한테 시집가서 괜티 않게 디낸대더라.”
“고고 뺀뺀한 게 괜티않았디.”
걸은 현실의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현실의 사촌동생인 성희의 생각을 했다. 그리곤 성희의 가족과 함께 여현에서부터 삼팔선을 넘어오던 생각이 났다.
그때 열여섯 살 난 성희는 륙색을 메고 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과 함께 걸의 앞장으로 삼팔선을 넘었다. 어슬어슬해진 저녁에 숨을 죽이면서 삼팔선을 넘는 고개에 다다랐을 때 일행은 따발총을 든 소련병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성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색이 되고 성희는 동생을 부여안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걸은 무표정한 얼굴로 따발총을 든 소련병이 가까이 오자, 슬금슬금 다가서며 얘기를 붙이는 체하다 그대로 머리로 떠받아버렸다. 그리고 재빠르게 발로 따발총의 탄알판을 걷어차 떼어 던지고는 쓰러진 소련병의 얼굴을 몇 번 밟아놓고 그길로 단김에 삼팔선을 넘어 청단으로 내달았던 것이다.
논두렁에 결려 쓰러진 성희를 일으키던 때의 그 잔가락*으로 뛰던 숨결이 지금도 그대로 귀에 남아 있고 공포가 가득히 서려 있던 그 눈, 이마와 콧등에 내돋았던 그 땀방울이 아직도 그대로 눈에 선했다.
그 후 성희의 부친이 사업에 성공하고 여학교를 나온 성희가 여대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갔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머나 먼 옛날얘기다. 술에 흐려진 걸의 머릿속에 잠시 성희의 모습이 떠오르고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약주 두 병을 나눈 세 사람의 화제는 가장 보람있게 생각되는 공산당과 싸우던 때외 얘기에 꽃이 피었다.
막구가 전평(全評)을 습격하교 전화통으로 간부의 대가리를 후려갈기던 얘기를 했다.
"한잠 치구 받구 부시구 하는데, 아 MP가 들어왔네. 그걸 모르구 돌아서면서 딜이받았다가 끌려가서 혼났디 혼났어.”
길주가 소매를 걷으며 말을 받았다.
“현대일보(現代日報) 딜이틴 생각나, 박 뭐이란 주필인가 하는 치보구 따겠디, 너 이 새끼 글줄이나 쓴다구 가즛부리만 하구, 이북에 가봤어, 이북엘? 하구 따지문서 귀쌈(뺨)을 한 대 뎄더니 말 한마디 못하두만.”
길주는 빈 접시를 높이 들어 보이며 아주머니에게 안주를 찾았다.
“뭣덜 그르케 재미덜 났소.”
“머 땅게 아니우다. 우린 지금 빨갱이 티던 얘기 합무다.”
아주머니가 두툼한 빈대떡을 가져 왔다.
“고 빨갱이덜은 거저 티야디요, 테 깔리야디요.”
걸도 같이 얼려서 해주(海州) 습격을 가다 인민군을 만나 싸우던 이야기, 용산(龍山) 기관구를 들이치고 영등포 공장 적색노조(赤色勞組)를 습격 하던 이야기를 했다.
화제는 흘러서 5·10 선거 전에 지방에 파견되어 공산당과 싸운 얘기가 나왔다. 십여 명 친구가 육칠십 명을 상대로 앞문으로 나왔다가 뒷문으로 들어가고, 뒷문으로 나왔다가 앞문으로 들어갔다 하면서 많은 인원을 가장하고 싸우던 얘기 끝에, 그때 포위당해서 혼자 싸우다가 욕을 보게 되자 전신주에 머리를 떠받고 자결한 용수(龍壽)의 얘기가 나왔다.
“갼 참 돟은 아댔디.”
학구가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길주는 고개만 끄덕였다.
걸은 이북에서 용수의 집 이웃에 살았다. 같이 학교에 다니며 노닐고 싸우던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 낯선 시골 뒷산에 외로이 묻힌 그를 생각했다. 걸은 혼자 중얼거렸다.
“머이(묘)에 한번 가봐줘 야갔는데.”
길주가 잔을 들며 내뱉듯이 뇌까렸다.
“돈이나 생기문 술이나 한 병 사가지구 한번 가보자꾸나.”
학구는 그것을 곁눈으로 슬쩍 훑어보고 걸에게 말을 건넸다.
“야 걸아, 근데 그때 그 새끼가 지금 어디 있는디 너 아네.”
"누구 말이야.”
“그 있디 않니. 밤둥에 바딧바람으루 우리 있는 데 뛔와서 살레달라구 하던 치 말이야. 말두 잘 못하구 뺄갱이가 왔다구 싹싹 빌던 치 말이야. 국회의원잉 가 뭐잉가 됐디 와.”
걸은 잔을 어루만졌다. 가슴 깊이 숨어 있던 분노의 작은 불티가 조금씩 피어오르면서 굵다란 불길로 화하는 것을 억제하려고 했다.
밤중에 공산당원들의 습격을 받은 그 지방의 유지 김가(金哥)는 개구멍으로 빠져 나와 그들의 합숙소에 뛰어들어 이빨을 달각거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것이다.
걸의 일행은 단박 뛰어가서 삼십여 분의 대난투 끝에 그 가족을 구출했다. 그때 용수가 죽은 것이다. 장례는 크게 치를 수 있었다. 걸은 상한 손을 걸머지고 친구들을 대표해서 고투로 씌어진 조사를 읽었다. 그는 반도 못 읽고 흐느끼며
“이 새끼 용수야, 와 만제 죽어언.”
하고 통곡을 했다.
용수가 죽은 육 개윌 후 김가는 선거에 나아가 감투를 썼다. 험악하던 치안도 대제로 확보되어 평온해진 가운데 일행은 서울로 올라갈 보따리를 쌌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한번 용수의 무덤을 찾아가자고 했다. 돈이 필요했다. 결의 일행은 김가를 찾아가서 약간의 돈을 부탁했다.
안채에서 벌어진 주석이 잠시 조용해지더니 계씨라는 인물이 나와 김가는 어디 가고 없는데 용건이 무어냐고 물었다.
용건을 듣고 난 그자는 잠시 들어갔다 나오며 두 손을 모아 비벼댔다. 그리고 백씨가 없는 것을 사과 겸 역설하면서 안되긴 했지만 이것이라도 받아달라고 하며 약주 한 병을 내미는 것이었다. 걸의 얼굴에서
것이라도 맡아달라고 하며 약주 한 병을 내미는 것이었다. 걸의 얼굴에서 핏기가 걷어졌다.
“여보, 선생.”
그 목소리가 떨렸다.
“데 마루 밑에 있는 깜당 구두는 누구 거디요?”
“아아 저것은…….”
구자의 손에 든 술병이 잔가락으로 혼들렸다. 걸은 그자의 손에서 됫병을 낚아채자 그대로 안방마루를 향해 동댕이쳐버렸다.
“가자!”
그것은 벌써 칠 년의 세월이 흐른 옛날 일이다. 길주가 한잔 쭉 들이켜고 안주를 뜯었다.
“돟은 술 먹구 그따우 니야기 고만두자우.”
그것을 보고 학구가 냉소하는 조로 한마디 던졌다.
“너 뭐 그 새끼 니 얘기 하문 싫네.”
“싫긴 뭐이 싫어?”
“모르는 줄 아네 이 새끼야, 너 요젼에 그 새끼 아들하구 만난다문서.”
“야야, 그따우 소리 하디 말라우.”
그러한 길주의 태도가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또 술잔이 몇바퀴 돌아갔다. 그리고 누가 선창을 했는지 지난날 그들의 입으로 불리어진 일이 있는, 지금은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노래가 합창되었다.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이북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진 가운데 셋의 부르는 힘찬 노랫소리는 기실 어딘지 애처로웠다. 주인아주머니가 빈대떡 부치던 손을 쉬고 귀를 기울였다.
또 잔이 얼마간 돌았다.
갑자기 밖이 소란해지며 주인아주머니의 거센 사투리가 터져나왔다.
"이거 멀 이따우가 이서. 지짐 당수 한다구 사람을 어드캐 보능거야.”
“야, 이놈아 이래두 이북에선 갖출 거 다 갖추구 살았다아 이놈.”
길주가 만새끼처럽 벌떡 일어나 뛰어나갔다.
딱! 아이쿠!
그것으로 잠잠해지고 길주가 태연히 들어왔다.
“쌍놈우 새끼, 고몽 거 다아……”
주먹에 간장을 쑥 바르고 둘을 건너다보며 싱긋 웃었다.
“와 그래.”
“그 새끼가 돈두 안 내구 따따부따하문서 아주마니보구 반말질을 했대.”
셋은 함뿍 취해 일어섰다. 문앞 길섶에 젊은이가 꾸부리고 앉아 신음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그의 친구 같은 청년이 등을 문질러주다가 길주가 나서는 것을 보고 흠칠 놀라며 일어섰다. 그것을 보고 길주는 한쪽 어깨를 쓱 올려 보이며 입을 비쭉했다. 걸은 몇 걸음 발을 옮기다가 되돌아가서 길주의 소매를 끌었다.
“거 함부루 사람 티디 말라우.”
길주는 학구의 어깨에 기대 걸으면서 거의 혀가 굳어진 입으로 중얼거렸다.
“걸아, 네 말이, 옳다 옳아, 그른데, 내가 안 틸 걸 텐, 틸 놈을, 뎄디.”
“틸 놈이 무슨 틸 놈이야. 빨갱이두 아닌베 그르케까지 틸 건 뭐이야.”
“그래그래, 네 말이 옳아, 빨갱일 티야디, 티야디. 빨갱이 빨갱이 이 놈우 빨갱이 나오나라아.”
그러고는 혼자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는 것 이었다.
최후에 야단났다 망치 들고 나가자
생사람을 때랬더니 야단났구나
나가나 들어가나 마찬가지 다
이리 티고 데리 티고 모주리 티자아
소련혁명 당시 동궁(冬宮) 습격 때 불리었다는 노래를 해방 직후 이북에서 흔히 공산당을 두고 야유하는 뜻으로 부른 것이다.
걸은 학구에게 길주를 맡기고 그길로 예의 다방에 들렀다. 취기를 좀 날리고야 삼촌 집에 기어들어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열시가 넘었는지 다방에는 손님이 없고 나무통에 꽂힌 향나무 그늘 밑에 성기형님이 외로이 앉아 있었다. 걸이 굽실하고 인사를 하자 성기형님은 나지막한 소리로 가까이 와서 앉으라고 했다.
성기형님과 마주 앉으니 별안간 머리가 핑 돌았다. 그리고 무엇인지 성기형 님에게 얘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형님 안됐수다, 이르케 술을 테먹구. 학구가 취직해서 돈이 생겠다구 먹자구 해서 한잔 먹었수다. 어드카갔소. 그르케 됐수다레.”
“……근데 형님, 우린 형님을 믿습무다. 우리덜이야 뮐 모르디 않소. 우린 거저 형님만을 믿구 있수다. 하래기만 하문 무엇이구 다 하디요.”
"……그른데 형님, 우린 뭘 하문 돟겠소? 뭘 하야 될디 모르갔수다, 모르갔시요."
“…… 빨리 교향에 가구 싶수다. 빨갱이덜 테부시야 되디 않소. 티두룩만 해주시구레."
걸은 이미 성기명님을 의식하지 않고 술의 힘을 얻어 혼자 지껄이고 있는 것이었다.
“학구두 취직 했다구 합두다만 나는 시원하게 네기디 않습무다. 길주 니야기는 공당에서 시시한 놈덜 까부신다구 합두다. 근데 주먹을 내두를 데야 따루 있디 않갔소? 빨갱이 아닌 사람 티능 건 난 찬성 안합무다.”
“……빨갱이 아니구두 나쁜 놈덜이 있긴 합두다. 틸 놈두 있긴 합두다. 그른데 형님.”
걸의 취한 눈동자가 멀거니 성기형님을 쳐다보았으나 그 시선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성기형님은 그저 말없이 앉아서 걸을 건너다볼 뿐이었다.
“빨갱이부텀 테 없애야 하디 않소? 국제정세니 UN이니 난 모르갔수다. 거저 빨리 그 새끼덜 까구만 싶수다레.”
“……형님, 난 원수를 갚우야 하디 않소? 나 이남으루 온 댐에 우리 아바지 잡아다 가두와서 죽게 한 놈덜 난 그대루 둘 수 없수다. 형님, 이리케 오래 가문 이북에 두구 온 동생새끼 빨갱이 다 되디 않갔소.”
걸의 얼굴에 괴로운 표정이 흐르며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형님, 성기형님, 빨갱이 티두룩 해주우. 그때터럼 해봅수다.”
“……니박사한테 형님이 가서 니야기하문 되디 않소? 우린 아직두 주먹이 든든하우다.”
걸은 주먹을 들어 탕 탁자를 두들겼다. 레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성기형님은 돌부처 모양 앉아 있었다.
“요전에 돈수형님이 자기 있는 농당에 오라구 합두다. 이젠 가긴 가야갔수다. 삼춘 밥 얻어먹기두 이젠 안되갔시요. 이젠 땅을 파갔수다. 땅을 파갔시요. 내가 먹을 거만은 내가 만들갔시요. 근데 콩이 될 디 팍(팥)이 될딘 모르갔수다.”
“……그른데 난 딴 아덜터렁 쪼꼼두 형님 원망하딘 않습무다.”
탁자에 놓인 성기형님의 두 손이 잠시 파르르 떨렸다. 눈에도 이상한 광채가 돌았다.
“형님……”
성기형님이 불쑥 일어섰다. 걸도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어느새 걸의 눈동자가 제대로 자리잡혔다. 와락 성기형님의 손을 붙들었다.
“형님, 와 그루, 화났소?”
성기형님이 가만히 그것을 뿌리쳤다.
“몹시 취했구만. 이전 집으루 가디.”
그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걸은 잠시 멀거니 서서 걸어나가는 성기형님의 축 늘어진 두 어깨에 시선을 보내다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언뜻 정신이 들어서 허등지둥 그 뒤를 따랐다.
“형님, 용사하시우. 난 그릉 게 아니우다. 술 테먹구 안됐수다, 형니임.”
문을 열고 어두운 행길에 나섰을 때 성기형님은 벌써 오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3
이튿날 걸은 아침 일찍이 시장으로 나갔다. 삼촌이 차려놓은 라디오 수선가게의 문을 열고 차분차분 물건을 늘어놓았다. 전부 꾸리면 걸 혼자서도 쉽사리 메고 성큼성큼 겉을 수 있는 정도의 물건이지만 그것이 삼촌네 네 식구와 걸을 먹여살리는 밑천이었다.
조금 더 있으면 열네 살 난 조카 옥순이가 그 앞에 양담배 같은 물건을 늘어놓게 된다. 그것도 적잖은 수입이었다. 가게를 벌인 사람들이 차츰 모여오고, 평북 가투리가 터져나오면서 이 시장 한구석에는 늠름한 활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걸은 손재간이 없어서 라디오 수선을 거들 엄두도 못 냈다. 그러나 가끔 이 구석에 어깨들이 수작을 걸어올 때면 걸은 그들 앞에 턱 나서서 벌어진 가슴을 내밀었다. 그러면 그만이었다. 걸의 날파람*은 대단한 것이었고, 특히 그 대갈받침 (헤딩)은 정평이 있었다.
그런데 겉은 이즈음에 와서 기가 죽은 사람처럼 생기를 잃어갔다. 냅뜰성*이 없어지고 꿍꿍 안으로 감아들기만 했다. 삼촌이 걱정하여 어디 몸이 편찮으냐 하였으나 걸 자신도 그렇게 맥이 풀리는 연유를 알아낼 수 없었다. 옆에 약방을 내고 있는 삼촌 친구가 그것은 비타민 부족일 것이라고 악을 주었으나 한 병을 다 먹어도 전연 효과가 없었다.
오정 가까이 걸은 이리저리 시장터를 헤매었다. 물감장사를 하는 삼봉이도 만나고 양복장사를 하는 택일이도 만났다. 경기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모두 땀을 빨빨 흘리면서 일하고 있는 것이 기특했다. 삼봉이는 제법 색시도 얻고 딸자식까지 보고는 성격마저 아주 달라진 것 같았다. 우는 어린것을 안고 달래는 것을 보면 아무리 해도 이 친구가 전에 기관구 파업 선동자들 소굴을 선두에서 들이치던 친구같이 생각되질 않았다.
가게에 돌아온 걸을 보고 삼촌이 눈짓을 했다. 옥순이가 양담배를 몽땅 떼이고 순경을 따라가면서 울고불고 야단이라는 것이다. 걸은 사람들을 헤치며 순경 일행을 따랐다. 가까이 다가서며 걸은 비스듬히 순경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빙긋이 웃었다. 정복에 정모를 눌러쓴 순경은 바로 한때 같이 쏘다니며 주먹을 휘두르던 다름아닌 덕배였다. 걸은 덕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획 돌아보는 사나운 얼굴이 금방 흩어지면서 옛 친구 그대로의 얼굴로 변했다.
저녁에 학구와 걸은 덕배를 털었다. 길주는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순댓국을 놓고 소주를 부어넣으면 순경도 다를 것이 없었다.
“덕배야, 너 뭐 그렁 거 하구 댕기네? 양담배 당수 거퉁 거 얼마나 된다구 떼구 야단이가.”
“할 수 있네? 하래문 하야디, 근데 그를 땐 좀 멩펜 살피구 감추두룩 하람.”
“요댐 엔 좀 알레달라우. 거 어디 옥순이낸 보간, 고고 고래두 이북에선 없능 거 없이 크디 않안? 근데 지금은 녀학교두 못 가디 않네.”
학구가 한마디 했다.
“덕배야, 너 잡을래문 좀 큰 거나 잡으람. 겨우 먹구살라구 피난민 당수하는 거나 떼구 엎멘.”
“나두 모로디. 경제덕으무 그르카야 된대디 않니.”
“경제구 뮈이구 머구삽으야 되디 않네.”
“……”
“너 수지 맞디?”
“무슨 수지야?”
“거 뭐 그르디 마. 다 알구 있능걸.”
“이 새끼 아직두 넌 아가리가 티껍구나(더럽구나).”
덕배는 일이 있다고 하면서 먼저 일어나 계산을 끝내고는 오백 환을 더 놓고 나갔다.
“야, 너 멋있게 해서 출세해라. 어디 덕 좀 보자아.”
덕배가 나간 후 걸은 어제저녁 다방에서의 얘기를 했다.
“내가 아무래두 취해서 실수항 게 틀림 없어. 괜히 들으갔다 그르케 됐구만.”
“야, 그까짓 거 뭘 걱정하네. 그거 사실 아니가야? 너나 나나 성기형님 따라댕겨서 된 게 뭐이가?”
“뭐 되구 안되구 성기형님두 뭐 잘된 게 있네? 그 형님 뭐 먹딘 않았디야.”
“아니, 먹어두 괜티않디. 뭐이가 그래? 안 먹으문 다른 새끼가 테먹는 판 아니가야.”
“그래두 그거야 어디.”
“안되긴 뭐이 안돼. 성기형님두 그 네배당에 댕기문서 예수 믿능게 탈이디 뭐이가. 네배당 댕기는 사람은 약해디거덩. 하누님두 돟디만 사람새끼가 그래 하누님 하는 일 할래니 될 거 뭐이던.”
“그것두 그르티.”
“네배당 댕기멘서두 먹는 놈은 잘 먹는다야. 그른데 이건 어드캐 된 건디 말이 안되거덩. 너 그 김가놈 봐라.”
“김가놈?”
“어지께 니야기하디 않던. 그 용수 머이 보레 갈랠 때 나오디두 않구 술만 한 병 보내던 새끼 말이야.”
“……”
“그 새끼 내가 들었는데 국회의원 하면서 돈 뫄가지구 지금은 무슨 회사 사장인가 하문서 대단하대데. 그르구 거기다 배때기가 불러서 무슨 정티운동 한대나. 글쎄 그따우 새끼가 잘되는 판이래두 그래.”
걸은 소주를 쭉 들이켜고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거 참 와 그르케 될까?”
걸은 멍하니 밖을 내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다. 그것은 모를 것이 하도 많다는 생각이었다.
“어지께 밤두 내가 좀 말하다가 고만뒀디만 길주새끼가 요좀에 그 김가 아들새끼하구 때때루 만나는 모양이야. 술이나 생기는 모양이거덩. 아새끼 그르케 되문 동내치(거지)나 다를 거 뭐이가.”
어두운 밤길을 집으로 돌아가는 걸과 학구의 발걸음이 약간 비틀거렸다.
“야 걸아, 이젠 조꼼만 먹어두 비틀거리게 됐으니 다 틀랬다 틀랬어.”
막구가 혼자 한탄을 했다.
을지로 삼가까지 걸어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껄껄 트림을 하고 섰던 학구가 갑자기 북 하고 걸의 허리를 쳤다.
“야 데거 봐. 데거 데거 요르케 들어맞누나 요르케.”
저편에서 신사 차림을 한 인물을 싸고 사오 명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자동차 라이트가 그 인물의 얼굴을 비췄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데 새끼 알디? 김가 아니가야, 김가. 그 새끼야 바루. 그루구 그 옆이 아들새끼구, 또 그 뒤에 길주새끼가 오디 않네. 새끼. 내 말이 맞았디.”
일행이 가까이 밀려오자 학구가 쓱 그 앞으로 나서며 퉁명스럽게 인사를 걸 었다.
“아, 김선생님 아니십네까? 오래간만입네다.”
김가가 언뜻 서서 힐끗 쳐다보고 잠시 멍하니 섰더니 흠칠하고는 그대로 지나가려고 했다. 길주는 비질비실 길 저편으로 몸을 피했다. 그와 반대로 어깨 비슷한 청년이 쓱 앞으로 나서며 김가와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것을 보자 걸은 확 가슴에 치솟는 뜨거운 덩어리를 느꼈다.
“뭐야 이거 다. 김가야, 인사 받으람. 되디못하게. 길주야, 넌 어케된 거가? 데따우 따라댕 기구.”
두 청년이 힐끔 고개를 돌려 길주를 보았다. 길주는 하는 수 없이 엉금엉금 걸의 앞에 와서 애원하듯이 변명을 했다.
“야 걸아, 오해하디 말라우. 거 멀 그르네, 말하문 다 알디 앙칸.”
길주는 손짓으로 두 청년을 보내고는 걸과 학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생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말하갔어. 그르케 알아달라우.”
하고는 연신 김가가 간 쪽을 돌아보았다. 학구가 주먹을 어깨 위에서 흔들었다.
“이 새끼야 가아.”
길주는 언뜻 방어태세를 취하려다가 그대로 슬렁슬렁 김가가 간 쪽으로 뒷결걸을 쳐서 어둠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학구가 거기다 대고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걸은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다레 와 데리케 됀?”
4
이튿날 걸은 예의 다방에서 오랜만에 상경한 돈수형님을 만났다. 반가웠다. 그제와 어제 일로 더욱 산란해진 마음에 포근히 감싸주는 것을 느끼는 때문이었다.
“형님, 나 메칠 있다 농당으루 가갔수다. 뭐 여기 있이야 눙꼴사나웅 거밖에 보이야디요.”
돈수형님은 빙긋이 웃었다.
“뭐이 그렇게 눈꼴사나운가?”
“뭐 다 씨원티 않수다. 성기형님은 이젠 틀링 거 같습두다. 뭐 하능 게 있이 야디요.”
걸은 이틀 동안에 일어난 학구니 길주니 김가의 얘기를 했다.
“대한민국에야 이젠 빨갱인 없디 않소? 공당에 무슨 시시한 새끼가 있갔소? 형님은 내가 그때 괜한 사람 빨갱이라구 해서 그른 줄 알구 뎄다가 벵신 만둥 거 잘 알디 않소?”
“학구가 뭐 덮어놓구 사람을 티구 대니지야 않갔지, 학구는 어딘지 마음이 착하고 바른 데가 있으니까.”
“그른데 길주새끼는 와 그를까요?”
“글쎄 무슨 사정이 있는 게로구만.”
“사정이구 뭐이구 그 김가하구 같이 댕길 사정이 있을 거 뭐이얘요? 형님, 나는 와 그른디 길주새끼가 그 옆에 붙어가능 걸 봤더니 갑자기 김가놈이 미워딥두다. 참 미워 죽갔습두다. 글쎄 김가 같응거 따라댕길 거 뭐이얘요.”
“김가건 누구건 무작정하구 따라다녀서는 안되지. 길주야 그렇진 않겠지만 남의 앞잽이가 돼서 용돈이나 얻어쓰면서 공연한 사람들 치구 다녀서야 안되지. 절대 안되는 일이지.”
돈수형님의 말끝이 떨려 나왔다. 걸은 미처 그 말뜻을 새기지 못해 잠깐 괴로운 표정을 했다.
“요좀엔 암만 생각해두 모를 일이 많았시요. 학구가 그릅두다. 한데, 피난민덜은 담배 팔아먹다가두 떼우구 녹아나는데, 글쎄 김가 같응 건 돈 벌구 잘됐시야 됩네까 어디.”
“글쎄 돈은 벌겠지만 그것이 잘되는 것인지 못되는 것인진 두구 봐야 알 일이지.”
걸의 표정이 또 난처해졌다.
“어지께 밤은 김가를 테갈기구 싶은 생각이 듭두다. 한데 꾹 참구 고만뒀디요.”
차가 오자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쓴 커피를 마시면서 돈수형님은 걸과 또 걸 또래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런 직정(直情)은 다른 데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날 표범처럼 뛰던 그들 모습을 생각했다. 주먹만 내어두르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믿었던 어리석은 꿈이 깨어지고 지금 이처럼 산란해진 마음을 여기 보는 것이다. 시대의 상황이 불가피하게 요구했던 필요악의 에너지가 지금 타성을 벗어나려고 꿈틀거리는 몸부림을 느끼는 것이다.
“걸인 육이오 때 특수부대에 참가했었지.”
“예.”
“그때 어떻던가? 차고 받고 때리는 것처럼 되지는 않지?”
걸은 얼굴을 붉히며 히뭇이* 웃었다.
“안되갔습두다. 주먹 보다는 총알이 더 빠르디 않소.”
돈수형님의 걸에 대한 제일과가 시작된 셈이었다.
비정 (非情)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어느 때나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일이다. 그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돈수형님은 얘기의 뜻을 새기지 못해 간간이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걸의 멍이 든 이마를 보았다. 몹시 벽에 부딪힌 일이 있어 그 기능의 일부를 상실한 걸의 머리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돈수형님은 일종의 전율을 느꼈다. 멀리서 깨끗한 한 표를 떠들어대는 스피커 소리가 들려왔다.
돈수형님과 헤어진 걸은 망연히 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널따란 공지 한구석에 사람돌이 모여 있었다. 자동차 위에 사십 세가량 되는 신사가 목청을 듣우어 육성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걸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수고 그 흉에 끼어들어갔다.
“……여러분의 깨끗한 한 표가 새로운 생활을 보장하는 관건이 될 것이고……."
“……진정한 우리의 지도자가 과연 누구인가를 식별하는 여러분의 명철한 판단력이……”
연사의 얼굴은 차차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일부 권력충이 아니고 전 국민이 모두 잘살 수 있는 진정한 균등사회가……"
“……우리는 이대로 방관하고 있을 것인가……아니다.”
청중 가운데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새로운 평화적 통일방안을 수립함으로써 이 숨 막히는 현실을 타개하고…….”
걸은 예의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평화적? 싸우지 않고 가만히 하자는 뜻일 게다. 그러면 빨갱이들 하구 싸우지 않고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럴 수가 있나?’
“잠깐만.”
걸은 불쑥 손을 들고 한 걸음 나서며 연사의 얘기를 가로챘다.
“물어볼 말이 있수다. 평화덕 통일이랑 게 뭐입네까?”
모든 청중의 시선이 일제히 걸에게 쏠렸다. 연사는 약간 당황한 빛을 보였다.
“네, 그것은 무력통일이 봉착한 정세를 타개키 위한……UN의 감시하에…… 지금 국제정세는…….”
걸은 또 얘기를 가로막았다.
“국제정세는 모르갔수다. 근데 빨갱이덜하구 싸우디 않구 어드캐 조용히 통일이 되갔소오?”
그러자 걸의 옆에 섰던 청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연사를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저 새낀 빨갱이다.”
뒤따라 일제히 집어치우라고 고함을 질렀다. 연사보다 도리어 걸이 당황했다.
“아니 이거 와덜 떠들우? 니야길 들으야디.”
이번엔 걸의 얘기에 힘을 얻은 청중들이 청년들에게 항의 했다.
“떠들지 맙시다아.”
“얘기 듣구 봅시다아.”
청년들 손에서 돌멩이가 몇 개 날았다. 그리고 우욱 하고 걸의 옆을 지나 연사 있는 쪽으로 몰려가려고 했다. 순간 걸은 자기도 모르게 앞장을 선 청년의 다리를 걷어찼다. 청년은 보기 좋게 앞으로 거꾸러 졌다.
“말루 하디 와 그래.”
청년이 벌떡 일어서며 대뜸 주먹을 들어 걸을 후려갈겼다. 보다 빨리 걸이 허리를 낮추자 청년은 또 한 번 제 바람에 몸을 던져 모난 돌멩이에 머리를 쥐어박았다.
“뭐야 뭐야.”
"빨갱이야.”
"쳐라쳐라.”
청중은 멀찍이 피하고 자동차는 어느새 연사를 싣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빨갱이? 야 이 새끼뎔 봐라, 내가 빨갱이야? 어림두 없다야. 이 새끼덜, 도대테 와 덮어뇽구 뎀베드능 거야? 돌멩이는 와 팽개티능 거야?”
걸의 눈에 이상한 빛깔이 번득였다. 그것은 몇년 만에 비친 표범의 눈빛이었다.
두 명의 청년은 그 기세에 눌려 눈치만 보며 뱅뱅 걸의 두리*를 돌다가 거꾸러진 청년을 일으켜 끌고 군중들 가운데 뛰어들어갔다.
그중 한 명은 분명히 어제저녁 김가와 함께 가던 청년 같았다. 걸은 그들이 사라지는 저편 가게 옆에 얼씬 길주의 그림자를 본 듯했다.
“길주야.”
걸은 날쌔게 군중을 헤치고 달려갔다.
5
길주는 못 찾고 발길을 돌린 걸은 그대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새―끼덜, 유티한 수작을 하누만, 내가 빨갱이라구. 누군 줄 알아, 흥 어느 땐 줄 알아.’
‘고런 덩도루 누굴 티갔다구.’
우선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전신에 피어린 투지를 생각했다. 아직도 꺼지지 않은 힘의 불티를 확인한 기쁨이 있었다. 불덩어리가 되어 돌아다니던 지난날이 그립고 정다웠다.
제멋에 젖어 있던 걸은 갑자기 경사지는 마음을 느꼈다.
‘확실히 그것이 길주였을까? 그리고 연사를 힐난하던 청년들의 욕설, 뛰어들던 그 자세, 그것은 나와 학구와 길주와 또 그리고 친구들의 그 옛날의 모습과는?’
몸이 화끈 불같이 달아올랐다.
‘그를 리가 없디―그따우덜 하능 것과야 달랐디―무엇이?―그때야 어디 지금터렁 펜안했나, 결사덕이댔디――그루구 또? 빨갱이하구는 말이 안되거덩. 그르니까 티야디, 거줏부리만 하거덩 ―그루구? ―그치는 빨갱이 아니거덩, 말루 하야디―그루구, 그루구.’
더 풍요한 무엇이 있을 것 같은데 걸의 머리에는 좀처럼 떠오르지가 않았다.
’나는 몰라서 물어볼라구 항 건데, 그 새끼덜은 와 갑재기 덤벼들어 그 사람을 틸라구 했을까?’
그는 걸으면서 손바닥으로 자꾸 머리를 쳤다. 악기점 레코드가 숨찬 가락으로 마구 맘보곡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헤매었는지 결은 어느덧 명동 으슥한 페허 밑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해는 기운 지 오래고 저편 개수중인 건물이 우뚝 도깨비처럼 서 있었다.
‘그 새끼덜과는 다르디, 절대로 다르디. 같애서야 안되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직감(直感)에 그치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도 뚜렷이 따르는 논리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나는 바보가 되고 말았구나.’
돈수형님이 그리워졌다.
‘내일 당장 보따리를 싸가지구 돈수형님한텔 가야디.’
걸은 꼼짝도 않고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빛은 말끔히 자취를 감추고 가게가 보이는 처편에 전등불이 켜졌었다. 멀리 지나가는 전차와 자동차 소리가 이 어두운 폐허를 더욱 잠잠하게 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뜨르르’ 모아놓은 벽돌과 흙무더기가 미끄러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걸은 번쩍 정신을 거두었다. 본능적으로 어떤 위협을 느끼고 날카로운 눈초리를 주위에 부었다.
네댓 명의 그림자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발을 옮기며 말없이 가까이 다가왔다. 걸은 두어 걸음 물러서며, 앞선 그림자의 손에 쥐어진 번득이는 것을 보았다. 싸고 드는 그림자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 뒷놈이 혁대를 들고 또 다른 한 놈은 곤봉을 들었다.
그 외는 빈손 같았다. 먼저 치워야 할 놈은 선두와 혁대 든 놈이라고 걸은 작정했다.
“너덜 뭐이가? 와 이르나 말을 해라.”
“……”
“나는 빨갱이 아니면 안 싸우는 주의다.”
“……”
“너덜 빨갱이가.”
“……”
“빨갱이야?”
“이 자식!”
고함과 함께 휙 하고 소리를 내며 단도날이 걸의 옆구리를 스쳐갔다. 걸의 걷어찬 구듯발이 그 얼굴에서 터졌다. 피익 하고 혁대가 독사 모양 꼬리를 들어 걸의 바른 어깨를 쳤다. 걸의 몸뚱어리가 막대기처럼 서서 날자 그자는 자빠지면서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걸의 뒷덜미에 곤봉이 떨어졌다. 걸은 탁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발길과 곤봉이 쏟아져내렸다.
“하― 악.”
짐승 같은 소리가 걸의 입에서 터지자 곤봉을 든 놈이 한 바퀴 공중에서 돌고 철썩 땅에 떨어졌다. 걸은 다시 벽을 등지고 어깨를 들먹거리며 거칠게 숨을 내뿜으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말없이 대치하고 틈을 엿보는 시간이 흘렀다. 씨걱씨걱 숨소리만이 들렸다.
벽돌장이 날아왔다. 걸의 눈에 맞보이는 그림자가 자꾸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가슴은 타고 몸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우욱 하고 그림자가 무더기로 몰려들었다. 한 놈을 받아넘기면서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일어서려는 걸의 가슴과 어깨와 허리와 머리에 사정없이 주먹과 구두가 날아왔다. 머리에서 앵 하는 싸이렌 같은 소리가 나면서 정신이 흐려졌다.
‘마지막이다.’
하는 절망과 함께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용수처럼!
분노와 원한과 설움이 한꺼번에 머리를 뒤흔들어놓았다.
“용수야아.”
걸의 날카로운 비명이 어둠 속을 비껴갔다.
그때였다.
아까부터 폐허 뒤에서 끙끙 신음소리를 지르고 있던 한 그림자가 표범처럼 달려들었다. 배후로부터의 불의의 습격에 폭행자들은 비명을 울렸다. 순식간에 두 명이 거꾸러졌다. 그림자는 한 놈의 먹살을 비틀어잡고 벽에다가 쥐어박았다.
걸은 혼미한 속에서 벽돌장을 걷어차는 구두 소리와 뼈와 뼈가 맞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 자식 배반했구나.”
이런 소리가 들렸다. 또 쿵 하고 무거운 몸뚱어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쳐다보는 눈에 어렴풋이 우뚝 선 그림자가 보였다.
“배반? 이른 배반이문 백 번이래두 하디.”
거친 숨결과 함께 이런 소리가 들렸다. 귀익은 목소리였다. 우르르 벽돌장과 흙덩이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당황한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우뚝 솟은 그림자만이 걸의 암으로 다가왔다. 걸은 전신의 힘을 모아 반신을 일으키려고 했다.
“걸아.”
“누구야.”
“나야, 길주야.”
“길주? 네 새끼가, 이 새끼 잘 만났다.”
걸은 와락 달려들며 머리로 가슴을 떠받았다. 길주는 뒤로 쓰러졌다. 길주의 머리 위에 주먹이 쏟아졌다. 길주는 그것을 피하며 걸을 걷어찼다. 동시에 일어선 둘은 붙자마자 또 쓰러졌다. 엎치락뒤치락 서로 얼싸안고 땅 위를 굴러갔다.
무엇 때문에 걷어차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얼싸안고 돌아가는 것인지, 그저 이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이 똑같이 두 사람의 가슴을 뒤끓게 했다.
걸이 밑에 깔렸다.
“이 새끼, 너 김가 거 테먹어서 아직두 꽤 쓰누나.”
걸이 응 하고 힘을 주자 길주가 옆으로 쓰러졌다. 서로 멱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말없이 꼼짝 안했다. 걸이 먼저 손을 놓았다. 길주가 따라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 누운 채 한참 서로 건너보았다. 같이 일어섰다. 걸이 비틀하고 몸이 기우는 것을 길주가 붙들었다.
“아프네?”
“괜티 않아.”
걸은 다시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아서 떨어진 옷소매로 피와 땀과 흙이 엉 킨 얼굴을 묻혀 냈다. 길주가 그 옆에 주저앉으며 손으로 얼굴의 땀을 문질러냈다. 한참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걸은 머리를 무릎 사이에 처박았다.
가슴에는 지금 차디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이었다. 끝없는 허무가 전신에 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완전무결한 무의미가 그를 감싸고 있는 것이었다.
그대로 쪼그리고 앉았던 걸은 차츰 머리와 가슴과 허리와 다리에 맹렬히 쑤셔드는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깃덩이가 지금 이 폐허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것ㅡ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단지 이 한 가지뿐이었다.
길주가 일어서며 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야, 펭북집에나 가서 한잔하자.”
걸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돈으루?”
“내게 좀 있디.”
“뭐? 김가새끼한테 받응 거.”
“그르믄 멜 해. 도죽질한 돈 테멍능 건 일없어.”
“야야, 빨갱이 같은 소리 관둬.”
“있는 돈 팽개티간? 말 말구 가자.”
“이 꼴 하구 어딜 가?”
“괜티않아. 그 아즈마니한테 가서 입성 (옷)이나 대레달래잠.”
목이 타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둘은 서로 얼싸안다시피 부축하고 마치 상한 짐승처럼 어슬렁어슬렁 어두운 길을 걸어나갔다.
저편에 사람들이 오가는 화려한 거리가 보이고, 악기점의 노랫소리에 뒤섞여 악을 쓰고 있는 선거운동의 스피커 소리가 들려왔다.
『사상계』 41호(1956. 12): 『불꽃』 (민음사 1996)
선우 휘
선우휘(鮮于煇)는 192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경성사범 학교를 졸업했다.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대령으로 예편한 뒤 『한국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1955년 단편 「귀신」을 『신세계』 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대표작 「테러리스트」 「불꼿」 에서 잘 나타나는데, 8·15해방과 분단,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살피면서 이데올로기와 행동적 휴머니즘의 문제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진지하게 추구하였다. 1986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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