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폭 병풍 속의 청량사 (2003.6.15 청량산산행기)

[오재원]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산 61번지 (870m)

청량산은 12개의 봉우리들로 둘러쳐진 병풍 같은 산이다. 장인봉, 외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금탑봉, 축융봉이 그 봉우리들이다. 이 바위병풍 속 정 중앙에 소담스레 안치된 보물이 청량사(淸凉寺)다. 신라 문무왕 3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라 한다.
이 절터는 풍수지리학상 길지 중의 길지로 꼽히는 명당터로 12개의 봉우리가 연꽃잎처럼 절터를 둘러싸고 있어 이 정 중앙의 절터는 연꽃의 수술자리가 된다고 한다. 산행을 하면서 보게 되는 무수한 나비들의 비상. 그 의문점의 해답이 될 수 있다.
청량사에는 진귀한 보물이 2개있다. 고려 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머물 때 친필로 쓴 유리보전(琉璃寶殿)의 현판글씨와 그 곳에 안치된 지불(紙佛)이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란 뜻으로 약사여래불은 모든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 해 주는 의왕(醫王)으로서 신앙되는 부처님이다. 이 약사여래불은 특이하게도 종이를 녹여 만든 귀중한 지불이다. 협시불(脇侍佛)인 문수, 지장보살과는 달리 단 한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고 하며 지금은 개금불사를 하여 보존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4가지 고통(四苦)을 말한다. 生 老 病 死. 이 중에서 生 老 死는 인간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영역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기적과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다. 그러나 病은 불치병을 제외하면 부분적으로 인간의지로 통제가능하다. 때론 병원에서 포기한 불치병이 마음의 혁명으로 기적적으로 낫기도 한다. 無病長壽는 모든 이의 바램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명당터에 자리 잡은 이 산사를 찾아 유리보전에 모셔진 약사여래불께 지극 정성으로 병의 치유와 소원성취의 영험을 기도했으리라.

일행은 주차장에서 아침밥을 해 먹고 산 진입로로 향했다. 전날 새벽에 비가 와 적당한 습기에 산행하기에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날씨였다. 진입로 근처에 도착하니 염불소리가 났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박세민스님 녹음테입 소리다. 이 바쁘고 귀찮은 대량생산 시대에 어느 절 할 것 없이 천편일률적으로 염불 녹음테입을 틀어댄다. 골짜기 구석구석에 확성기를 달아놓고 메아리치도록 틀어댄다. 우선, 나는 이 박세민스님의 염불소리는 너무 위풍당당하여 싫다. 시장바닥에서 메리야스 파는 “골라,골라! 한 장에 천원, 석 장에 이천원.”하는 장사꾼 소리 같아 싫다. 처량한 쓸쓸함이 없다. 마음고향 생각게 하는 원초성이 없다. 검박한 산승의 정서가 없다. 넘쳐흐르는 기교가 싫다. 염불은 때와 장소와 상황 그리고 염불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것이다. 나는 요즘 절에서 확성기로 흘리는 몰개성의 염불소리를 들으면 대량화 되어가는 종교에 마음이 씁쓸하다. 나는 대학교시절 영어공부도 하고, 때묻지 않은 산승의 염불소리도 녹음할 겸 일본출장 가는 선배에게 부탁하여 소니 워커맨을 샀다. 그리하여 단체로 사찰수련대회를 가거나 적막한 산사로 철야정진을 떠날 때 법문과 염불녹음용으로 이 워커맨을 들고 갔다. 내가 녹음한 염불중 백미는 전북 고창군 선운사 도솔암에 4박5일간 기도정진을 갔을 때 검은 테의 안경에 키가 훤칠한 젊은 산승이 지장보살좌상 앞에서 지장기도를 올리는 염불소리다. 절로 인생무상을 느끼도록 하는 처량함은 눈물을 자아낸다. 그리고 두 번째로 좋은 것은 우이동 보광사의 수좌, 황매스님의 천도재 의식 염불이다. 이 스님은 선승이라 염불을 거의 안 하는데 본인의 친척이 돌아가 직접 요령과 목탁을 잡고 염불한다는 정보를 듣고 달려가 녹음했다. 나는 이때 염불은 마음의 메아리임을 깨달았다. 역시 모든 의식이 쉰 상태에서 성성적적하게 참선하듯이 염불을 해야 되고 선객이 하니 더욱더 쓸쓸하기 그지없다. 이 심금을 파고드는 소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애석하게도 이 녹음은 테입으로 한 녹음이고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라는 단점이 있지만 개성적인 염불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요즘 대량생산된 시중 염불중에선 성공스님의 금강경 독송이 제일이고, 화암스님 염불, 영인스님 염불이 들을 만하다.

청량사 가는 길은 대빗으로 쓸어놓은 듯 정갈했다. 이 길로 그 옛날 무수한 도인과 신도 그리고 안빈낙도의 유학자들이 걸었으리라. 이른 아침 하얗게 깔린 운무로 12폭의 병풍은 실체를 드러내질 않았다. 중턱에서 일행을 맞이한 건 청량정사와 초막산방(산꾼의 집). 퇴계 이황은 도산서당을 지을 때, 이곳 청량산과 현재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을 만큼 청량산을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그의 이런 망설임은 정사에 걸려있는 오산당(吾山堂, 나의 산집)이라는 편액에서도 읽을 수 있으며 퇴계는 '청량산가'에서 "청량산 6.6봉을 아는 이는 나와 흰 기러기 뿐이며 어부가 알까 하노라"라고 노래하여 속세를 등진 이 곳 비경에 애착을 드러내기도 했다. 퇴계는 이 청량정사에서 ‘도산십이곡’을 썼으며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지도했다 한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초막산방은 그야말로 ‘산꾼의 집’으로 공짜로 9가지의 약초가 들어갔다는 차를 마실 수 있으며 이 집을 지키는 초로의 산꾼이 만들어 놓은 각종 공예품과 글, 그림을 즐길 수 있다. 산에 완전히 미쳐버리면 이렇게 된다. 산을 지키는 무당으로.
그 다음 중턱에서 일행을 맞이한 건 김생굴. 명필 김생이 서도를 연마했다는 굴이다. 절벽바위로 지붕을 삼아 기둥과 바닥만 축조하면 집이 될 만하였다.
일행은 자소봉 정상으로 향했다. 그대로 깔딱이다. 줄 줄 줄 시원하다. 이 땀. 운무는 어느새 걷혀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절경이다. 청량산은 정말 중국의 계림의 산세 같다. 둥글둥글 거침없이 솟아버린 봉우리. 자소봉에서 일행은 한참동안 머물러 사진 찍고 밑에 풍광 구경하고 안주에 소주 한잔씩 돌리고 부부동반으로 온 신입회원들 소개식도 있었다. 아줌마 3명이 여고동창생들이란다. 아내 친구들이니 남편끼리도 자연스레 친구가 되는 법. 이들 3커플은 정말 친하다. 보기에 좋다. 한 커플은 부산에서 전날에 승용차로 산 입구까지 와 맹꽁이를 기다렸단다. 산에서 자주 뵙기를 기대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청량산의 메인모델은 역시 청량사다. 청량사를 중심으로 12폭 병풍 주위를 한바퀴 도는 것이다. 청량산에서 등산은 청량사를 향한 기도다. 신도는 108배하고 산꾼은 다리로 기도한다. 마음을 이렇게 먹으면 등산은 훌륭한 기도가 되는 것이다. 일행은 청량사 앞마당에 도착하여 아름다운 절터를 감상했다.
그리고 하산하여 도로 밑 계곡에서 흐르는 물에 맨발 담그고 소주반주하며 사식을 까먹었다. 트림 나오도록 포식하고 버스를 타니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회마을 관광하려고 했는데 안 하길 잘했다. 사람들이 얼마 안 와 널널한 버스 안에서 다리 쭉 뻗고 깊은 잠에 빠졌다.
버스는 서울로 향하고.... Bye, Bye!! See you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