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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 신작 소설 정박사" 후편
그때 정 박사와 고등학교 시절 친우였던 김재익이 미국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막 귀국했다. 정 박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검정고시를 거처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고, 김 박사는 2학년 때 검정고시를 기 쳐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두 사람 모두 천재, 수재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이었다.
진로를 놓고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정 박사는 김재익을 만나 상담했다. 자초지종 정 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김재익은 한참 생각을 정2 한 후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는 게 좋겠네. 지금 한국의 과학 행정은 정 박사 같이
미국 유명 대학에서 첨단과학기술을 연마한 신진 기예를 받아들일 수준이
안 되네.
자네 앞이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일제 때 교육을 받은 구세대 학자들이
과학 행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자네 같은 양화가 도태되는 것이지.
미국의 수준과 한국의 수준이 어떻게 같겠는가.”
상황의 본질과 핵심을 보는 김재익의 분석은 예리했다. 김재익의 말을
경청하던 정 박사는 내심 찬탄했다. 맞아! 그거야!
"지금 대세가 그러하니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네. 개인적으로 재능과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어떻게 대세를 이기고 꺾을 수 있나. 그러니 대세에 적응하면서 장기적으로 자기의 뚫을 펼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보네."
김재익의 대안 제시는 현실적이었다. 김재익의 말이 이어졌다.
잘되었네. 마침 코넬에서 좋은 제안이 왔다니. 역시 자네는 본국에서 보다도 미국에서 더 알아주는 세계적 과학자가 되었네. 혹시 아는가. 과학자인 자네와 경제학을 공부한 내가 힘을 합쳐 자네와 나의 꿈인 과학기술 입국을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올는지."
김재익의 충고를 받아들여 정 박사는 얼마 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뉴욕주 중부 인구 3만의 소도시 이타카시 동쪽에 있는 코넬대학은 1865년에 설립된 미국 최상위 명문 사립대학이다. 8개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 학부 재학생 1만 6천. 대학원생 8천 명의 연구 중심대학이다.
6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광대한 포레스트 공원 내 비비호 북쪽 연안에 자리 잡은 대학 캠퍼스는 울창한 삼립 속에 안겨 있다. 수해의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삼림은 넓게 펼쳐져 있다.
폭 포수가 쏟아지는 계곡 산책로로 들어서면 적막감이 느껴진다
정 박사는 이 대학 과학기술사회연구소에서 과학기술의 역사와 철학, 과학기술의 사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연구하게 됐다. 이 연구소 소장 롱 교수는 원폭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나 핵무기의 파괴력을 목격한 후 '평화를 위한 원자력'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롱 교수는 과학자들의 책임과 사명을
강조했다.
이 연구소에서의 연찬은 핵융합을 주전공으로 실험실에서 연구에 매진해 온 정 박사에게 역사와 사회의식을 갖게 했고 과학기술을 바탕의 로 산업과 경제를 진흥시켜야 한다는 소신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코넬대학 생활이 정 박사에게 보람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대학 캠퍼스의 한적한 산책로를 한가롭게 거닐면서 사색하고 명상하는 것이었다. 오후면 좁은 연구실을 나와 넓은 캠퍼스의 원시림 술을 자유롭게 산책하면서 대자연 속에서 인간사의 명리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깨닫곤 했다.
그리고 크게는 태양계와 은하계. 작게는 원자와 소립자. 이 자연 속의 삼라만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구조를 밝혀내고 어떤 운동법칙으로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탐구하는 물리학자로서 겸허하게 연구에 정진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곤 했다.
한국의 과학원에도 코넬대학의 과학기술사회연구소와 같은 연구소 설치가
필요하다는 건의가 받아들여져 한국과학원에 과학기술사회 연구실이 설치됐고 정 박사가 귀국, 그 실장을 맡게 됐다.
이 연구실에 과학자 수학자뿐 아니라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이 된 김재익이 참여해 경제발전 전략을 함께 논의했다. 정 박사가 코넬대학으로 가기 전 김재익이 과학자 정 박사와 경제학자인 자기가 힘을 합쳐 과학기술 입국 정책을 세워 보자는 말이 실현된 셈이다.
이 같은 팀워크가 만들어진 데는 김재익을 경제기획국장으로 발탁했고,
이미 과학원 설립 과정에서 정 박사의 능력을 지켜본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배려와 지원이 있었다.
과학원과 경제기획원이 호흡을 맞춰 한창 일하고 있을 때 정 박사와 김재일
에게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졌다. 재미 한국인 과학자 이휘소 박사가 교통사고로 별세했다는 뉴스였다 정 박사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다.
10여 년 전 오페하이머 박사가 주관한 프린스턴대 고등연구원 세미나에 매주 한국인 학자로는 단둘이 참석해서 오페하이머의 강의를 듣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30세의 이 박사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수였다.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해 바로 파격적으로 이 대학 교수가 된 소립자물리학의 세계적 학자였다.
소립자물리학은, 원자는 원자핵으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핵은 일정 개수의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구성돼 있는데 이것들보다 더 기본적인 입자. 만물의 가장 기본적인 입자 소립자와 소립자의 운동을 연구하는 물리학이다.
소립자 연구로 중국인 최초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양전닝이 뉴욕주립대학교
석좌교수로 가면서 이 박사를 초빙해 이 박사도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뉴욕주립대학교로 옮겼을 만큼 사제의 관계가 깊었다. 그래서 이 박사도
소립자 연구로 머잖아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것이란 촉망을 받고 있었다.
이 박사와 정 박사는 개인적으로 각별한 사이였다. 이 박사는 정 박사 형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가까운 친우였다. 이 박사는 경기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소아과 산부인과 개업의였던 이 박사 어머니가 프린스턴에 오면 정 박사
집에서 이 박사 식구와 정 박사 식구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정 박사 부인이 담근 김치를 이 박사 어머니와 이 박사가 맛있게 먹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박사는 말레이시아계 화교 출신 의사와 결혼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런 이 박사가 갑자기 유명을 달리했다니 정 박사로서는 비통하기 짝이 없었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나라의 인재가 비명횡사했다는 것이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자신이 선망하고 따르고자 했던 따뜻한 성품의 선배를 졸지에 잃은 무상함으로 정 박사는 가슴이 아팠다. 과학기술 입국을 지향했던 정 박사와 달리 이
박사는 오로지 물리학 연구에만 몰입한 순수한 과학자였다.
이 박사의 목숨을 앗아 간 교통사고 경위를 보면 사고는 그야말로 우연히
발생한 것이었다.
1977년 6월 16일 12시경. 시카고대학 물리학과 교수 겸 페르미 국립 가속기연구소 이론물리학 연구부장 이 박사는 콜로라도주 아스펜에서 열리는 연구소의 여름 연구 심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로 시카고 서쪽 교외 글렌엘린 자택을 떠났다.
운전은 자신이 하고 뒷좌석에는 부인 매리언과 아들 딸이 타고 있었다. 일가족이 함께 탄 것은 이 박사가 심의회에 참석하는 한편 로키산맥 산중 작은 도시 아스펜에서 가족이 함께 휴양하기 위해서였다.
오후 1시 20분. 이 박사 승용차는 시카고 서남쪽 약 200km 떨어진 일리노이주 케와니 부근 80번 고속도로를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고속 도로에는
통행 차량이 많지 않아 한산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오던 대형 트레일러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난 후 바로 폭 20m의 중앙분리 잔디밭을 넘어와 이 박사 승용차 운전석을 강타했다. 1시 22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충돌사고였다.
이 참사로 이 박사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42세. 뒷좌석에 탄 부인과 자녀는 다행히 큰 부상이 없었다. 사고 현장을 조사한 일리노이주 경찰 당국 기록에 따르면, 트레일러에 펑크가 나 중심을 잃고 오른쪽으로 꺾였다가 왼쪽으로 꺾인 후 중앙분리 잔디밭을 넘어 이 박사 승용차와 부딧쳤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사고가 일어날 수 있을까? 왜 하필 그 시각에 트레일러에 펑크가 났으며, 왜 하필 그 순간 이 박사 승용차가 그곳을 달리다가 비운을 맞은 것일까? 정 박사는 우연히 일어난 이 사고에 그저 어안이 병 벙했다.
누가 그 우연을 만든 것일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신의 의지로 그렇게 된 것일까? 사람에게 타고난 운명이 있는 것인가? 불교 에서 말하는 대로 이 박사가 무슨 업보를 받은 것인가?
세상은 필연과 우연이 섞어 엮어져 돌아가는 것인가? 필연에 대해서는 인간이 대비할 수 있지만 예측 불가능한 우연에 대해서는 이휘소 박사같은 천재 과학자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정 박사는 인생의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박사 시신은 그가 살던 글렌엘린의 공원 묘역에 묻혔지만, 돌연한 그의
죽음은 세간에 많은 억측과 풍문을 남겼다. 이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계획에 비밀리에 참여하고 있는 정보를 입수한 미국 정보
당국이 사고를 위장, 살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됐다.
심지어는 박 대통령의 배려로 이 박사 시신이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고 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돼 허무맹랑한 픽션을 그대로 믿고 현 충원을 찾아오는 추모 시민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소문들은 사실과 달랐다. 무엇보다도 이 박사는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동조하거나 협력하지 않았다고 이 박사를 잘 아는 과학 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 박사는 오히려 박 대통령의 유신 통치와 핵무기 개발 계획을 비판하는
편이었다.
1971년 정 박사가 추진하던 '물리학 여름학교' 행사에 이 박사를 초청하려
했으나 이 박사는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면서 참가를 거절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정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의 과학 발전을 돕고 싶지만,
위수령 발동과 학생운동 탄압등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하는 처사에 실망
했다.'며 행사에 오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는 것이다.
존경하는 선배를 잃은 아픔을 이겨 내면서 과학원 과학기술사회연구실 프로
젝트를 수행하고 있던 정 박사에게 이번에는 본인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불행하게도 열 살 난 아들이 만성 신장염 진단을 받고 신 장 이식 수술을
받아야 했다.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시 버지니아의료센 터의 한국계 신장 이식 전문가 이형모 박사의 수술을 받기로 했다.
비탄 속에 나날을 보내던 부인이 '내 신장을 내놓겠다. '고 나섰으나 남성의 신장을 이식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의사의 의견에 따라 정 박사 왼쪽 신장을 아들에게 이식하는 수술을 했다.
다섯 시간이 걸리는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정 박사는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그러나 아들은 정 박사가 보유하고 있던 C형 간염이 전염돼 3개월 이상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정 박사는 아들의 건강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회한이 뼈에 사무쳤다. 아들의 치료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신의 가호로 아들이 완쾌하도록 기도했다. 정 박사의 정성과 온 가족의 기도로 아들의 병세는 호전되기 시작했다.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인 정 박사는 창조주로서의 신, 인류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신을 믿었다. 구약성서 창세기 첫 장에 나오는 대로 '태초에 신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믿었다. 또 신이 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으로 믿었다. 신이 만드신 이 우주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깊은 신앙을 갖고 있다.
아들의 건강이 확실하게 좋아져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게 됐다. 한쪽 신장을 떼 준 정 박사도 예전처럼 활동할 수 있었다. 부인의 고통도 나았고, 두 딸도 대학과 고등학교를 다녀 집 안에 다시 화기와 평온이 찾아왔다.
이때 엄청난 수술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정 박사는 워싱턴 가까이에 있는 미국 정부기관인 미국과학재단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에너지 분야 책임자로 수없이 들어오는 연구 제안서를 평가해 연구비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여기서도 정 박사의 업무처리 능력이 인 정되어 최우수상을 받고 승진까지
했다. 정 박사는 이런 행운이 고난을 겪고 있는 자기를 구원해 준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었다.
미국과학재단에서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고 있을 때 서울의 김재익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때 김재익은 전두환 정권의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고 있었다. 훤칠한 키, 해맑은 얼굴, 번쩍이는 안경 너머 맑은 눈동자 잔잔한 미소의
김재익 얼굴이 정 박사 눈앞에 나타났다.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정 박사 얼마나 고생이 많은가. 멀리 있으니 아무런 도움도 못 주고."
"이식 수술이 잘돼 아들이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고. 나도 건강해서
미국과학재단에서 일하고 있네.'
'아들이 다시 학교에 다닐 만큼 건강이 좋아졌다니 정말로 반가운 소식이네. 그리고 과학재단에서 일한다니 역시 자네 실력과 열성은 미국이 더 알아주는구먼."
국사로 다망하실 텐데 이렇게 전화 주셔서 크게 위로를 받네. 김 박사 덕담에 목이 메네. 고맙네."
이렇게 대화를 나눈 후 얼마 지나서 김 박사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아들의 건강이 정상으로 회복되었으니 이제 정 박사가 귀국해서 한국의 원자력발전을 위해 일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선진국 미국에서 열심히 배워 조국의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신념을 가진 정 박사는 귀국, 한 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을 맡게 됐다.
원자력발전 기술 담당 회사인 한국전력기술에서 정 박사는 원전의 기술 자립과 한국형 표준원전 설계사업을 추진했다. 기술이 없어 외국 회사에 일을 맡기고 외국 기술자들로부터 일을 배워야 했던 종속형을 기술 자주형으로 개혁하기 위해서 원전 전문가들을 양성했다.
한국 형 표준원전은 뒷보다 안전성이 높은 경수로 방식으로 개발했다
1983년 10월 초, 정 박사는 중국원자력학회 총회에 참석, 연설하기 위해 출국하기에 앞서 김재익 수석을 만나 오찬을 함께했다. 김재익은 정 박사가 한국형 표준원전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기대가 크다며 중국에 가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과학계 인사들을 많이 만나라고 당부했다.
수교 전의 중국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이다.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중국 총회와 워크숍을 마치고 진시황 능이 있는 시안으로 갈 준비 를 하고
있을 때 중국 관계자가 전해 준 신문을 보고 정 박사는 경악했다.
청천벽력이었다. 1983년 10월 9일 전두활 대통령의 버마 방문을 수 행한
정부 고위직 14명과 취재기자 등 모두 17명이 아웅 산 장군 묘소에서
폭발물이 터져 그 자리에서 순직했다는 것이다.
경제부총리 대통령비서실장 외무장관 경제수석비서관 등이 참변을 당했다.
정 박사가 두 번 세 번 눈을 크게 뜨고 신문을 뚫어지게 보아도 사망자
명단에 김재익의 이름이 나와 있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자기도 모르게,"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고 절규했다. 불과 며칠 전 만났던 김재익의 순진하게 웃는 얼굴이 떠 올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 박사는 나머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급거 귀국. 바로 서울 신반포
아파트 김 수석 댁을 찾아갔다. 노모는 아들의 비보를 듣고 몸져누웠고 부인이 시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었다. 대학생인 아들과 수녀인 두 누나 가 조문객들을 맞고 있었다.
지란지교의 친구요. 과학과 경제학이 힘을 합쳐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과학기술 입국의 뜻을 같이했던 지기지우를 잃은 슬픔에 억장이 무너진
정 박사는 할 말을 잃고 영정 앞에서 오열할 뿐 이었다.
고인들은 국민장으로 거행된 영결식 후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될 다.
버마 당국의 수사로 폭발 사건은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북 한의
테러 행위로 밝혀졌다. 그러나 대통령은 무사했다. 세상에선 이를 두고
'왕운'이라고 했고 '천운'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이날 10시 30분 묘소에 도착. 참배할 일정이었다. 버마 외 무장관이 대통령을 모시고 묘소로 가도록 의전이 돼 있어 대통령은 숙 소인 영빈관에서 외무장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영빈관으로 가는 도중에 외무장관의 차에 고장이 생겨 외무장관은
영빈관에 4분 정도 늦게 도착했고 대통령도 늦게 영빈관을 출발했다.
대통령이 묘소로 가는 도중 이미 폭발 사건은 일어났다.
대통령 도착 전 10시 28분 묘소 나팔수의 진혼곡 연주가 묘소 일대에 울려
퍼지자 대통령이 도착, 참배하는 것으로 오인한 북한 공작원이 원격 조종
폭발 물 장치 버튼을 누른 것이다. 나팔수의 취주는 예행연습으로 했다는
것 이다.
나중에 참사의 상보를 신문에서 읽고 정 박사는 버마 외무장관의 차에 고장이 나 대통령이 묘소에 늦게 도착한 것이며 나팔수가 미리 나팔을 분 것이 마치 대통령을 살리기 위한 보이지 않는 손의 교묘한 조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운과 불행. 모든 인간사는 이미 정해 진 운명이라는 운명론을 믿어야
하는가, 물리학자 정 박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뜻밖의 사고로 존경하는 이휘소 선배를 잃은 데 이어 절친한 친우이자
동지였던 김재익이 유명을 달리하자 항상 활력이 넘쳤던 정 박사이지만
외로워지고 의기소침해졌다. 우울하게 하루를 보내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아인슈타인의 가르침이 떠올라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ㅡ 나에게 신은 장엄한 우주이고 신비스러운 자연법칙이다. 그 신은 인간
사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인간의 운명과 행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ㅡ 나의 가장 깊은 영적 체험은 우주의 미지를 탐구하고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는 과학의 힘에 대한 경외이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라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간의 행-불행은 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들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영적 체험이 바로 '과학의 힘에 대한 경외'라고 한 것은 과학이
곧 자신의 종교라는 위대한 물리학자의 신념을 말한 것이라할 것이다.
정 박사는 아인슈타인의 글을 몇 번이고 되풀이 읽은 후 슬픔과 우울을
떨쳐 버리고 물리학자로서 다시 역동적으로 활동하기로 마음을 다졌다.
1989년 50세 되던 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 의장 선거에 도전 당선됐다. 한국인 최초 국제기구의 수장이 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 때 과학기술처 장관이 돼 특기할 민 한 업적
을 남겼다. 두 번째 장관 재직 중 맨 먼저 고등과학원(KIAS)을 설립했다.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처럼 기초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 에 전념할 수 있는 연구소를 서울 홍릉에 세웠다. 물리학 등 기초 과학 국내외 최우수 학자들이 노벨상에 도전하는 연구를 하도록 지원했다.
미래 무한 청정 에너지원'인 핵융합을 연구하는 사업단을 발족시켰다. 이 사업단 출신 한국의 핵융합 전문가들이 주축이 돼 바로 한국.미국.일본∙중국:인도:러시아∙유럽연합 공동으로 프랑스에 건설기간 30년의 거대한 국제핵융합실험로를 건설하고 있다. 섭씨 1억 도의 '인공태양'을 만들고 있는것이다.
한국 표준형 원자로는 상업 운전을 끝내고 국내 발전소에서 안전하게 가동하고 있다. 안전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한국 표준형은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자력발전소 건설 국제 경쟁입찰에서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등을 물리치고 수주, 한국의 원전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과시했다.
이제 정 박사도 60세가 됐다. 미국의 선진과학 기술을 열심히 배워 조국의
낙후된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겠다고 유학길에 다짐했던 초지를
나름대로 성취했다고 자부했다.
핵융합 분야 세계적 학자로 인정받아 미국의 죄고 과학기술인 조직인 한림원 회원이 됐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처음으로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워싱턴 한림원 건물에 태극기가 처음 올라가 '과학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
공적으로 개인적으로 과학자로서의 업적과 명예가 자긍심을 가질만 했다.
정 박사는 이제 과학을 넘어 사회에 대한 사랑과 봉사 활동으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지어 주는 국제 해비타트
운동에 참여, 이 운동에 동참한 젊은이들과 함께 땀 흘려 집을 지었다.
첫 번째 집을 지어 신체장애 부부 가정이 입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어떤 학문적 성취보다도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큰
보람을 느꼈다. 땀을 흘려 집을 짓는 동안은 항상 머리를 떠나지 않는 아들
건강 걱정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이렇게 해비타트 운동에 헌신하고 있을 때 여러 사립대학에서 총장으로 초빙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중 설립자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캠퍼스가 충남 아산에 있는 호서대학교 총장직을 수락했다.
이 대학은 '게임소프트웨어학과'가 설치되어 있는 등 어느 대학보다도 벤처의 미래를 보고 학생들에게 과학기술을 통한 벤처 정신을 길균 주고 있어 정 박사의 뜻에 맞았다.
설립자의 양해로 정 박사는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해비타트 운동도 계속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하루 바삐 지냈다.
2001년 1월, 정 박사는 총장실에서 새해 대학교 경영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미국에서 온 며느리 전화였다.
'아버님. 말씀드리기 죄송스러운데. 아범 신장이 나빠져 다시 수술해야
한다고 합니다."
며느리의 말끝이 흐려지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잘 알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 최선을 다하자. 내가 바로 미국으로 가마."
전화를 끊은 정 박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마음이 산란해졌다.
20여 년 전 신장 이식 수술을 받은 아들의 건강이 괜찮아 학업도 마치고
결혼도 한 아들이다. 그런데 신장이 다시 나빠져 또 수술해야 한다니
'아무래도' 불길한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내려앉았다.
정 박사가 서둘러 미국 이식 수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재 수술이
끝난 뒤였다. 굳은 얼굴로 병실에 들어서자, 며느리가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예상 밖으로 아들의 용태는 좋아 보였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학교 일이야, 해비타트 운동이야 바쁘실 텐데 안 오셔도 괜찮은데. 집 없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많이 지어 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아들의 손을 잡고 정 박사는 우선 마음을 놓았다
"네 건강 상태가 이만큼 좋아 기쁘다. 아무쪼록 마음을 굳세게 먹고
이 어려움을 이겨 내야 한다."
정박사는 기도를 올렸다. 의사는 수술이 잘됐다며 일주일 후면 퇴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정 박사는 희망을 안고 귀국, 학교 일과 해비타트 운동에 전념했다
3월, 대학 입학식을 마친 후 교수들과 즐겁게 다과를 나누고 있을 때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들 병세가 나빠져 의식을 잃었대요.' 정 박사의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미국으로 가는 도중 정 박사는 내내 눈물을 홈쳤다. 열 살 때 신장 이식
수술을 받도록 건강이 안 좋게 태어난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들은 며느리와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힘을 주어 아들의 손을 잡았고, 아들은
아버지를 마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의사의 말에 따라 아들의 생명 연장 장치를 정 박사의 손으로
풀었다. 아들은 평안한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 박사는 울부짓는
며느리와 부인. 딸들을 끌어안고 아들을 잃은 아픔의 눈물을 흘렸다.
정 박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린 나이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 슬픔 속에서도 공부에
열중해 그해 치러진 제1회 국가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했다.
대학 2학년 때는 초등학교 교장이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별세 후 과외교사를 하면서 집안 생계비와 학비를 벌면서 공부했다,
이런 역경을 일찍 겪고 이겨 낸 정 박사는 슬픈 일이 닥쳤을 때 주저 앉지
않고 그런 때일수록 굳센 마음으로 이겨 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살아왔다.
아들의 장례를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른 정 박사는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신은 인간 세계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의 가슴에 꽃과 같이 아름다운 사랑과 철석
같이 굳은 의지를 심어 주셨다.
인간의 사랑과 의지는 골 신의 사랑이요, 신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아름다운 사랑과 굳센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 신이 만드신 우주의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나 살아가는 날까지 신이 내 가슴에 심어 주신 사랑과 의지로 과학과 대학과 해비타트 운동에 헌신하리라. 그것이 짧은 생애를 살다 간 아들에게
보상하는 것이 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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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편은 정근모 박사(1939~ )의 전기를 소설로 쓴 것이다.
소년 시절부터 천재로 알려진 정 박사가 어떤 시련을 겪으면서
원자력과 핵융합 분야 세계적 권위가 되었는지 그 일생을 살펴보았다.
정 박사가 주창하는 '과학기술 입국'이 우리나라 국시가 되기를 바란다.
* 장성원| 2018년 “국제문예”로 등단.
소설집 영원한 약속. 장편소설 풍상.
제15.16대 국회의원,
동아일보 동경 특파원. 경제부장, 논설위원. 편집국 부국장 등 역임.
손소희문학상 수상.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