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철
드라이아이스 외
육체에 대한 사용설명서가 떨어져나갔다
바람에 물결치는 종잇장들을 건져 올리고 싶었다 다리를 다친 사람이 일어서면 의구를 들고
비스듬히
다가가 장기를 만졌다 단단한 혀가 말리는 소리, 가슴이 쭈그러드는 소리, 일그러진 광대뼈가 부서지는 소리
덤불처럼 머리를 박고
새가 되었다
사이렌 같은 나사가 곡선주로를 도는 중이었고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질수록 통증이 깊어지고 있었다 불빛에 출구를 베인 열꽃은 공기 속에서 무게를 더해갔다
생각이 길어지면서 두개골에 상처가 났던 어린 환자와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던 여자가 남겨둔 간절함의 무게를 재보고 싶어졌다
가만히 있어도
꽃대는 무게를 견디지 못해 흘러내렸고 식은 바람이 스쳐간 풀잎은 아픈 곳을 말할 수 없다며 한곳으로만 쌓여갔다
오랫동안 불빛이 쏟아져도 생각이 젖지 않는 일련번호에서 누락된 주소랑 마주보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너는 무겁다고 우기니 나는 울 수밖에
그러면서도
우리는
피지 못하고 져버린 꽃잎처럼
시월을 건너온 달의 계곡에서 우물같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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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하는 나무
커다란 그림자가 지나갔다
굳은 표정으로, 해미에서 왔다고 누군가 일러주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서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랫동안 안 사람같이 허리가 굽었다
긴 날을 걸어서 그런지 아직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보이는 대로 걷는 사람이라서 바라보는 눈이 익었다
여기까지 온 것도 부족해 북으로 향했다
가는 사람은 늘 하나였고
그는 의연하게 해미를 출발해서 셀 수 없는 발걸음으로 이동했다 고난을 즐겨서 그런지 슬플 줄 몰랐고 해미는 멀어져 있었다
지난날을 기억하려고 해도
막막해서
움직이는 등에 눈을 오래 두었다 그 사람은 발자국마다 해미라 찍었다 읍성 안에 있는 큰 나무를 상상해보게 되었다
그 큰 나무 밑에
한 사람이 머물러있었다
이사철|2015년 《시와소금》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어디 꽃피고 새우는 날만 있으랴』, 『눈의 저쪽』, 『멜랑코리 사피엔스』, 『청킹 맨션』과 최초의 한글・점자 시집 『꽃눈의 여명』이 있다. 현재 시와소금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