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16m, 몸무게 45t
고기잡이배 곁으로 다가와 어린아이처럼 물장난
새끼에 젖 먹일 땐 미역 먹으며 몸보신
어머니 같은 한국 고래, 한국서 사라져
(전문게재)
▲ 오호츠크해에서 발견된 귀신고래의 유영.이사진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됐다.
과학자들은 고래를 6000만년 전쯤에는 네 발로 육지를 걸어다닌 포유동물로 추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고래의 크기가 작은 개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 고래는 2500만년 전에 주거와 먹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서식처를 바다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고래가 생존의 터전을 육지에서 바다로 선택한 것은 ‘존재의 방식’이었다. 지구 역사 45억 년 동안 가장 거대동물로 진화한 고래는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육지에 남은 공룡들은 깨끗이 멸종되었지만 바다로 돌아간 고래는 결국 지구의 빙하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해양학자들은 고래는 인류가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할 ‘미래과학’이라고 말한다. 작은 개만한 크기의 네 발 동물이었던 고래의 원조(메소니쿠스)가 바다생활에서 몸체 구조를 어류와 같이 변화시킨 생태적응능력, 사람과 비슷한 수명(심지어 북방긴수염고래는 200년이 넘는 긴 수명을 가졌다), 20∼30노트의 빠른 유영속도와 최고 3000m의 잠수능력, 빙하기를 이긴 경력 등은 바다를 개척하고 지혜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란 설명이다.
오호츠크해 근처서 100여마리 서식 한 고래학자는 또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하늘에서 지구를 보면 온통 바다다. 육지에 사람이 다니는 것은 식별할 수 없지만 바다에 고래가 유영하는 것은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외계인이 하늘에서 처음 지구를 본다면 지구의 주인을 당연히 고래로 알 것이다. 그러나 지구의 주인인 고래가 사람에 의해 멸종되고 있다.” 미래과학이고 지구의 주인격인 고래가 우리 바다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다.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포경(捕鯨) 모라토리엄(상업적 목적의 포경 금지) 이후 우리 바다에 고래가 늘어났다고 하지만 그것은 작은 크기인 밍크고래(길이 6∼7m)나 상괭이(1.5m) 참돌고래(1∼2m) 큰머리돌고래(4m) 정도이다. 이같은 소ㆍ중형 고래류는 최근 어민들과 어장을 위협할 정도로 많이 늘었다.
▲ 오호츠크해에서 발견된 귀신고래의 분기 모습. 이사진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됐다.
그러나 한반도 바다에서 살았던 대형고래들, 즉 대왕고래(길이 24∼26m, 체중 125t) 참고래(26m, 75t) 보리고래(15m 이상) 브라이드고래(14m) 혹등고래(16m, 40t) 북방긴수염고래(18m, 100t) 향고래(18m, 57t) 큰부리고래(11m, 12t) 등은 국립수산과학원의 고래자원 조사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과거 포경선 포수들은 이같은 대형고래들만 고래로 대접했었다. 그 중에서도 성격이 다정다감한 한국인의 심성과 많이 닮았다는 귀신고래(16m, 45t)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특히 귀신고래는 보통의 대형고래들이 먼바다에서 사는 것과 달리 해변 주변에 활동하는 연안성(沿岸性)을 갖고 있다. 어떤 때는 고기잡이배 곁으로 와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치기도 하고, 어부들이 고함을 치면 물 속으로 숨어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과거에 고래하면 귀신고래를 연상했다. 최근 이 귀신고래에 대해 국제적인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국제포경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울산에서 귀신고래를 주제로 한 과학위원회의 비공개 워크숍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바다의 우리 고래였던 귀신고래에 대해 정작 우리는 그 이름조차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종(種)의 생존 여부도 불투명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져 가고 있다.
1966년 이후 자취 감춰 울산은 고래와 인연이 많은 도시이다. 이곳 선사인(先史人)들이 그린 바위그림인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에 50여마리의 고래 그림이 새겨져 있다. 바다 가까운 땅에서는 5000여년 전 고래뼈 화석도 심심찮게 발굴되고 있다. 이는 예로부터 울산 앞바다에 고래가 많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무엇보다도 고래잡이로 유명했던 울산의 장생포항은 1986년 포경이 중단되기 전까지는 우리 나라 최대의 포경항이었다. 고래잡이로 경기가 좋아 ‘개도 고래고기를 물고 다녔다’는 항구였다. 그 덕에 12가지 맛이 있다는 고래고기는 누구나 즐겨 찾는 ‘울산의 맛’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지금 고래고기는 포경 중단으로 서민들에게는 오히려 비싼 음식이 되어 있다. 현재 울산에서 팔리고 있는 고래고기는 대부분 연안어장 그물에 걸려 죽거나(혼획), 바다에서 죽어서 해안으로 떠밀려온(좌초) 고래들이다. 고래고기 식당들이 즐비하다보니 세계적 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매년 울산으로 조사원을 보내 식당에서 팔리고 있는 고래고기의 정확한 출처를 조사하고 있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데 울산에 ‘극경회유해면(克鯨回遊海面)’이라는 천연기념물이 있다. 극경회유해면은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126호로 지정됐다. 고래가 아닌 회유해면, 즉 고래가 돌아오던 바다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극경’은 귀신고래를 두고 일본인들이 ‘고쿠쿠지라’라고 부르는 일본이름이다. 우리는 그 이름의 한자를 차용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도쿄를 동경(東京)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이등박문(伊藤博文)으로 쓰는 것처럼 우리 이름을 가진 귀신고래가 창씨개명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 고래를 아주 오래 전부터 귀신고래라 부르고 있다. 포경선이 추적하면 귀신처럼 날쌔게 도망을 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귀신고래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때는 난데없이 일본이름인 극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부는 1962년에 귀신고래가 회유해 오가던 울산 앞바다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놓았지만 정작 우리는 1966년까지 귀신고래를 잡았다. 그 부끄러운 기록은 1967년에 발간된 문교부 한국동식물도감에 남아있다. 도감에 따르면 1966년까지 귀신고래를 잡은 통계가 나와 있고, 이를 증명하듯 포경어업협동조합의 자료에도 1966년까지 귀신고래의 포획 통계가 나와 있다. 그 이후에는 잡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 바다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일. 우리에게는 우리 바다에서 살았던 귀신고래 전신 사진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 미국의 고래학자며 탐험가인 앤드루스(Roy C. Andrews)가 1911년 겨울에 포경선에 의해 장생포에 잡혀온 귀신고래의 꼬리 부분을 찍은 흑백사진 한 장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환경부의 천연기념물 도감에도, 국립수산진흥원의 한반도 연안 고래도감에도 귀신고래는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만 남아 있다.
한반도 연해는 19C까지 고래 낙원 그렇다면 사진 한 장 없이 귀신처럼 사라진 귀신고래는 어떤 고래인가? 귀신고래는 동해 북부와 오호츠크해의 수심 얕은 연안에서 여름을 보내고 늦가을부터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해 11∼12월경 울산 앞바다를 지나 남해, 서해 멀리 동중국해에서 번식을 하고 다음해 3∼5월경 다시 울산 앞바다를 지나 북상 회유하던 고래였다. 귀신고래는 전체가 회색이며 배 부분은 약간 옅은 회색이다. 그래서 귀신고래는 영어명으로 Gray Whale, 회색고래라 불리고 있다. 먹이로 연안 가까운 바다 밑을 파서 갑각류를 먹다보니 몸에는 흰색 상처가 많고 굴 껍데기, 조개삿갓, 따개비 등이 많이 붙어 있다.
▲ 국립수산과학원이 그림으로 복원한 귀신고래 모습.
길이는 최대 16m, 체중은 45t. 최대수명은 70년쯤 되며 임신기간은 13개월 반. 약 2∼3년에 한 번씩 출산을 한다. 출생 직후의 새끼 크기는 4.5∼5m. 어미가 7개월 정도 젖을 먹인다. 울산의 포경선 포수들이 기억하는 귀신고래의 가장 큰 특성은 지극한 모성애였다. 대형고래였지만 연안성이 강해 가까운 바다에서 귀신고래를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늘 귀신처럼 도망갔으나, 새끼가 있을 경우엔 반대로 포경선을 공격했다고 한다. 귀신고래가 제 새끼들을 보호할 때의 모습이 마치 우리들의 어머니가 자식이 위험할 때 자신의 온몸으로 감싸안는 것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또 울산사람들은 고래가 사람에게 미역 먹는 것을 가르쳤다고 믿고 있다. 어린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기 전에 울산 연안에서 미역을 뜯어먹는 귀신고래의 모습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다. 미역을 먹고 나면 젖 같은 뿌연 액체가 귀신고래 주변에 떠다니곤 했다는 것이다.
▲ 1911년 겨울 울산 장생포 항에 인양되는 귀신고래 사진.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귀신고래 사진이다.
이같은 귀신고래의 특성을 대하면 한국인이면 누구나 쉽게 ‘어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 고래였기에 귀신고래는 다른 고래에 비해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그림에도 새끼와 함께 있는 귀신고래의 그림이 있으니 귀신고래는 선사시대 이전부터 우리 한민족과 가장 친했던 바다동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울산 지역 외에는 귀신고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한반도 연해는 19세기 전반기까지 고래들의 낙원이었다. 모든 크고 작은 고래들이 우리 바다에서 자유롭고 안전하게 회유하며 한민족과 더불어 평화롭게 공존했다. 그 때까지 울산 바다는 ‘고래 바다’였다. 조선시대 학자 김종직은 신라 충신 박제상의 부인 망부석 설화의 현장인 치술령에 올라 울산바다를 바라보다가 고래가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가히 없는 고래바다(鯨海)’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고래 바다는 학살의 현장으로 변했다. 1848년 헌종 14년 봄, 미국의 포경선이 우리 바다로 진출하면서부터 무차별적인 고래 학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근대 포경으로 무장한 러시아와 일본도 뛰어들어 고래를 잡기 시작했다. 러일전쟁 후 한반도 연해를 독점한 일제는 우리 고래들의 씨를 말렸다. 일찍부터 귀신고래를 잡아온 일본인들은 우리 바다의 귀신고래까지 마구잡이로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는 1911년부터 1933년까지 우리 바다에서 1306마리의 귀신고래를 잡아버렸다.
일제가 남획… ‘씨’ 말려 세계적으로 귀신고래는 서북태평양 계군(系群)과 동부태평양 계군이 있다. 우리의 귀신고래는 동부태평양 계군이다. 한때는 모두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서북태평양 계군은 미국의 보호 노력으로 3만∼4만마리 정도 서식하고 있다. 동부태평양 계군인 귀신고래는 1967년 이후 한반도 해안에서는 멸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몇년 전부터 귀신고래가 러시아 오호츠크해에서 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져오고 있다.
▲ 선사인의 고래 그림이 남아있는 울산 반구대 암가고하.
오호츠크해에서 천연가스와 유전을 개발하고 있는 미국이 러시아 학자들과 함께 1994년부터 1998년까지 공동조사에 나서 사진식별로 69마리의 귀신고래를 확인했다. 이를 근거로 국제포경위원회 과학위원회는 러시아 오호츠크해에서 약 100여마리의 귀신고래가 여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호츠크해에 귀신고래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귀신고래를 기다리는 우리에게는 큰 희망이 아닐 수 없다. 그 귀신고래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한반도 회유로를 가지고 있거나, 회유로를 확보하는 우리들의 노력이 있을 때 옛날처럼 유유히 회유해 올 것이라는 가능성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귀신고래가 회유해 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현재 국제포경위원회는 고래를 ‘환경으로부터 도전 받고 있는 상징적인 동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반(反)포경을 주장하는 미국과, 오랜 조사 결과로 ‘포경 금지가 해양 생태계를 파괴한다’며 포경 재개를 주장하는 일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사실 한국의 포경 중단이 장기화되고 있는 것도 이들 강대국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옛말 그대로 ‘고래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래 보호나 포경 재개가 아니라 귀신고래를 하루 빨리 ‘회유해면’으로 돌아오게 하는 연구와 노력이다. 오호츠크해 귀신고래 소식이 전해졌지만 우리 나라에서 누구도 그 현장을 다녀오지 못했다. 귀신고래가 회유해올 때 그 해면이 우리의 진정한 천연기념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