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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5. 19:45
http://blog.naver.com/wnsyd/40136460975
고구려와 왜와의 관계
- 광개토왕비의 내용을 중심으로 -
순서
1. 서언
2. 비문은 왜 만들어 졌는가?
3. 왜주도형의 한일관계사상
① 비석의 발견
② 사카와는 비문변조가 가능했는가?
③ 일본사학자들의 모순
④ 일본의 제국주의에 이용당하다.
4. 남북한 사학계의 한일관계사상
① 연구에 대한 필요성의 재고
② 정인보의 연구
③ 박시형의 연구
④ 이진희의 연구
5. 고구려인의 천하관
6. 결어
7. 광개토왕비문 신묘년조에 대한 다양한 해석
◎참고문헌◎
박진석, 『호태왕비와 고대 조일관계연구』, 서광학술자료사, 1993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한국고대사 산책』,역사비평사, 1999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대산출판사, 2000
연민수,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서건신 외 ,『광개토대왕릉비 연구 100년』, 학연문화사, 1996.
1. 서언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 부분의 원문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고구려는 4세기 후, 동북아의 강자로서 자신들만의 천하관을 만들어 나간다. 위대한 정복군주로 불리운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확장에 힘썼으며, 그가 죽은 후 장수왕은 그의 업적을 적어 놓은 거대한 기념비를 세운다. 이것이 광개토왕릉비 혹은 호태왕비로 불리우는 것이다. 이 비문에 적혀져 있는 1775자는 사료가 부족한 한국의 고대사에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되어 왔다. 알아볼 수 없는 150여 자는 역사속에 잠들어 있지만, 남아있는 글귀들은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보여줌으로써 특히 한․일간의 정치적 관계에 따라서 각기 다른 양태로 해석되어 왔다. 1600년 전의 어느 석공이 돌을 두드려서 만들었을 이 비석은 자세한 뒷이야기는 접어둔 채 고구려의 위대한 왕에 대한 칭송과 자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역사전개속에서 지금의 연구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 본문에서는 이 비문이 만들어 지게 된 배경에서부터 시작하여 무엇이 논란이고, 해석상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이 비문해석에 관한 나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광개토왕비의 신묘년조를 중심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2. 비문은 왜 그곳에 만들어 졌는가?
대체로 광개토왕비의 군사적 활동을 남기기 위한 비석이라는 것에 치중하여 다뤄온 감이 적지 않으나, 최근에는 광개토왕시대에 이르면 수묘인의 집락이 상호 뒤섞여 버려 제도상의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하고, 그 해결책으로서 광개토왕은 석비를 역대왕릉의 근처에 세우게 했다는 주장이 있고, 이에 이같은 석비는 왕릉 부근에 각각 집락을 형성하고 있던 수묘인들이 어디서부터 징발되었는가를 명기하여 착란을 저지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입비의 목적은 수묘․무훈을 포함하여 고구려국의 영원불명의 통치이념을 당대 현실의 사상적 기반위에서 총체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판단된다.
3. 왜주도형의 한일관계사상
① 비석의 발견
1884년 일본 참모본부의 요원 사카와(酒句景信)에 의해 전해진 광개토왕비문의 묵본에 의해 그 동안 관념적으로 머물러 왔던 일본의 대한관은 급거 학문적 체계를 갖추면서 근대일본의 대한사상(對韓史像)의 틀을 형성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른바 사카와본(酒句本)이라고 말하여지는 비의 묵본은 곧 참모본부의 편찬과로 옮겨져 해독작업이 진행되고, 묵본이 전래된 바로 그 해 12월 요코이(橫井忠直)가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輝考)」를 썼다. 본 논문은 미간행되었지만 사에키(住伯有淸)가 소개한 바에 의하면, “백제 ·신라가 일본의 신민이 되었던 일에 대해서 혹인은 의심할지 모르지만 이 비분은 그 나라 사람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고 바로 일본의 고대 역사와 일치한다. 즉 천고에 비할 바 없는 좋은 증거이고, 역시 유쾌한 일이 아닌가”라 하였다. 요코이에게 있어서 고대일본의 한반도지배는 유쾌한 일로 받아 들여졌고 따라서 광개토왕비는 천고에 비할 수 없는 증거로서 중시되었던 것이다. 「고구려고비고」는 후에 일부 수정되어 『회여록(會餘錄)』 5집에 「고구려고비문(高句麗古爾文)」(축소영인본), 「고구려비출토기(高句麗輝出±記)」,「각서참고(各書參考)」,「고구려고비석문(高句麗古陣釋文)」 등과 함께 5부로 구성된 광개토왕비 특집호로 간행되었다. 요코이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비문중에는 우리와 크게 관계된 것이 있다. 신묘에 도해하여 백잔․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몇 구절이 이것이다. 고래 한한사(漢韓史)에는 단지 우리가 변경을 약탈하고 통빙했음을 썼을 뿐이다. 백제 ·신라가 우리의 신민이었음을 쓰지 않은 것은 ‘국악(國惡)’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 비는 2국을 위해 꺼리거나 히는 일 없이 사실을 폭로했으니 1600여 년 후 그 공은 가히 위대하다 하겠다.
요컨대 광개토왕비라는 객관적 자료에 외해 일본의 백제 ·신라 2국에 대한 지배는 이제 부통의 사실로 굳어지고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비에 대해 예찬론까지 펴기에 이르렀다. 참모본부에 의해 주도된 비문 연구는 이후의 연구와 고대 한일관계사상의 틀을 형성시키는 기초를 이루었다.
② 사카와는 비문변조가 가능했는가?
참모본부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2년 후인 1878년에 설립된다. 『육군성 연혁사』에 기록된 창설 당초의 참모본부의 임무는 지리정지(地理政誌)를 상세히 하는 일과 지리정지의 조사연구가 조선으로부터 청국 연안에 미치는 일이었다. 참모본부가 설치된 이듬해부터 참모본부에서는 수십 명의 장교를 주재무관, 어학연수생의 명목으로 청국에 파견하여 스파이활동을 시키고 있었는데 사카와란 군인도 그러한 사명을 띠고 파견되었
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와 아울러 참모본부의 임무로서 중요한 것은 편찬과 역사연구였다.『참모 연혁지』에 의하면, “편찬과는 우리나라 및 외국의 지리정지에 관한 것, 아울러 각국의 병제, 내외 각지의 전사(戰史) 등을 유찬휘집(類纂彙集)하고, 혹은 본부장의 특병으로서 일종의 편찬에 종사하는 일”이라 되어 있듯이 편찬과는 장래 예상되는 전쟁에 대비하여 역사의 연구·편찬에 종사하는 일을 주임무로 하였다. 따라서 청국에 파견된 청년장교의 임무에는 역사연구와 관련된 자료수집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며 동시에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우수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 선발되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광개토왕비의 묵본을 최초로 일본에 갖고 온 사카와가 집안(輯安)에 간 것은 그가 상해, 북경, 천진 등 중국에 체재하던 중 당시 유통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묵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후 이를 얻기 위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1883년 8월 8일 우장(牛莊)에서 참모본부장 오오야마(大山嚴)에게 보낸 탄원서를 보면 압록강 줄기에서 만주 내부의 여러 요항지(要港地)가 조사대상에 포함되어 있어 이 곳에 우연히 들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묵본을 얻게 된 사정에 대해서는 「비문지유래기(博文之由來記)」에 의하면 “강박(銀追)해서 겨우 손에 넣었다”고 하듯이 사카와 자신이 묵본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현지인으로부터 입수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겠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과연 일개 위관급 장교로서 비문의 해석이 가능했을까인데, 파견된 자들에 대한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그에 의한 독점적인 해석이 불가능했으나, 일본 내부의 역사학자들과의 교류로 해석이 가능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재고해볼 수 있으며, 이로 유추해 보았을 때 비문변조의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 있으나 이에 대한 주장은 충분한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을 것이다.
③ 일본사학자들의 모순
◆ 建碑 목적과의 모순
호태왕비는 고구려 제19대 호태왕의 비이다. 만약 ‘통설’의 관점에 따르면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본래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여 저들의 신민으로 삼은 것으로 된다. 이것은 왜에 대해서는 커다란 고무와 격려로 될 수 있으나 고구려에 대해서는 도리어 큰 타격으로 되는 것이다. 보건대 이런 사실을 훈적비로서의 호태왕비문에 적어 넣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 來와 渡海가 중복되는 모순
‘통설’ 관점에 따르면 신묘년기사 가운데의 來와 渡海 사이에 엄중한 모순이 생긴다. 그것은 倭, 다시 바꾸어 말하면 오늘의 일본열도로부터 한반도에 오자면 반드시 바다를 건너와야 함으로 來가운데 이미 渡海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통설 관점에 따르면 渡海가 중복되는 바 渡海來한 후에 또 渡海하는 것으로 됨으로 문법상에서나 내용상에서 모두 엄중한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 백제 신라 및 왜의 실제와의 모순
‘통설’의 관점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는 이미 왜의 ‘신민’으로 전락되었으며 왜가 이 지역의 통치자로 군림한 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남진하는 가운데서 마땅히 역량을 집중하여 자기의 속민이었던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여 저들의 신민으로 삼은 왜를 타격해야 할 것이지 결코 피정복자인 배제를 타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문에 따르면 영락 6년(396년)에 고구려는 5만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하여 왜를 친 것이 아니라 백제를 쳐서 크게 승리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을 끄는 것은 이른바 정복자이며 실권자로서의 왜는 이 전쟁에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모두 통설 관점에 잠재해 있는 모순이다.
또 통설 관점에 따르면 신묘년기사는 마땅히 신묘년(영락 1년)에 크게 기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비문에는 그것이 도리어 영락 5년과 6년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기년체 서술형식으로 쓰여진 비문의 이 부분과 모순된다.
통설에 따르면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는 이미 왜의 ‘신민’으로 변했기 때문에 근본상 자주와 독립을 운운할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392년부터 395년까지의 사이에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는 선후하여 5차례의 대규모 전쟁이 일어났다. 이런 전쟁은 비록 모두 백제의 실패로 끝났으나, 이것은 백제가 왜의 신민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당당한 주권국가였다는 것을 잘 증명해 준다.
또 통설에 따르면 기원 391년 이후에 왜가 신라를 침략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 395년 5월에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하였으나 신라사람들의 영용한 투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시체를 남기고 패퇴하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의 왜는 틀림없이 여러 소국 가운데의 하나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호태왕비문에 나오는 왜도 결코 하나의 통일국가인 것이 아니라 여러 소국 중의 하나였을 것은 의문할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정황에서 더구나 고대 항해기술이 극히 낮은 조건하에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여 저들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④ 일본의 제국주의에 이용당하다.
한편 이보다 앞서 182년 참모본부 편찬과에서는 「임나고(任那考)」를 편찬, 신공황후에 의한 삼한정벌과 내관가 설치, 신공기 49년 가야7국평정기사와 홈명기 23년조의 분주에 기록된 가야 제국의 이름을 들어 이 곳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여러 한국을 통제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참모본부에 의한 이러한 연구가 철저하게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음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참모본부의 위촉을 받아 「일한고대사의 이면」을 집필한 사카와個川權)는 그의 자서(自序)에서 한사(韓史)의 기재가 “항상 우리를 원수로 보고”, “그 위정자가 일부러 자국의 옛 위치를 높이고 국민의 존내비를 양성”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였다 하고 그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이 책을 쓴다고 집필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에 있어서 『고사기』『일본서기』와 같은 일본의 고사(古史)는 모두가 사실이고 이들 고사가 전하는 고대일본의 한반도지배가 한사에 없는 것을 위정자의 고의라고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상황애서 광개토왕비문의 출현은 그에게는 천군만마의 원군이었고, 신묘년 기사에 대해 “이는 현존 한사로 하여금 일언지하에 할 발을 잃게 해 버린 것”이라고 평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한편으로는 14년 갑진조의 ‘倭冠橫敗新殺無數’ 기록은 고의로 일본군을 소약무력’하게 나타낸 것이고 당시 일본군이 본 피해는 낙후선 1,2척’에 불과하다며, ‘왜퇴(倭退)’라는 표현도 “전략상으로 보아 필연적인 현상”이라는 기이하리 만큼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어쩌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는 당연한 인식이었다고 보인다. 시라토리(白鳥庫吉)의 다음과 같은 소견은 광개토왕비가 얼마만큼 정치적 도구로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이 비문은 당시에 있어서 가장 신용할 만한 역사상의 유물이다. 이에 의해 일본이 조선의 남부를 지배했던 일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은 삼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는데 북부의 고구려와는 반대의 지위에 서 있었다. 고구려라고 말하면 홉사 지금의 러시아와 같은 관계이고 일본이 반도의 남부에 세력을 얻으려고 한다면 고구려가 이를 좌절시키려 한다. 그 관계는 마치 지금의 조선을 충분히 제어하는 데에는 북의 러시아를 토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일본은 조선에서 세력을 얻고자하는 희망 때문에 중국과 싸우고 지금은 러시아와 싸우는 것처럼 정치상의 관계에서 일본은 고구려와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이 고구려에 패하고서부터 일본세력이 떨치지 못하게 된 것이므로 이번 전쟁에서도 꼭 러시아에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시라토리에게 있어 비문의 왜는 일본이었고 왜병은 곧 황군이었던 것이다. 1500년이라는 시간차를 뛰어넘어 고대와 근대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시라토리의 사고는 고대로부터의 교훈이었고 그것은 다름 아닌 현실의 한반도 침략을 위한 교훈이었던 것이다. 광개토왕비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드디어 비석의 일본반출계획으로 이어진다. 『집안현 향토지』에 의하면 광서(光總) 33년 5월부의 집안현 지사 오광국(吳光國)이 봉천제학사소포(奉天提學使小浦)에 보낸 문서 중에서, 일본군 제57연대장 오자와(小澤德平)가 가끔 광개토왕비를 보러 와서 비석을 구입하여 일본박물관에 진열하려 했던 기록이 보인다. 오광국의 거부에 의해 이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반출을 시도하려 했던 참모본부의 의도는 자명하다. 고대의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영광을 일본국민에게 주입, 현실의 침략정책을 합리화하고 나아가 국민적 결집을 꾀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참모본부에 있어 광개토왕비는 한국침략을 합리화 ·정당화하는 ‘천고에 비할 수 없는 자료`였던 것이다. 나카츠카(中牙明)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당시의 역사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한국사와 한일관계사에 대한 구체적인 침략정책과 병행해서-아니 침략정책 그 일환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행해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침략정책의 도구로서의 역사연구는 굴절된 대한사상(對韓史像), 한일관계사상을형성하는 기반을 이루었다. 당시 『남연서(南淵書)』라는 위서가 출현한 것도 학문적 ·사회적 풍토하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1922년 곤도(權機成聊)가 교주(校住)하여 발행한 것으로 그 중에는 남연청안(南淵淸安)이 견수사의 1인으로서 중국에 갔다가 귀국 도중에 일부러 집안에 들러 광개토왕비의 비문을 필사해 갖고 왔다고 하는, 한 자의 결함도 없는 그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사카와본의 결자 부분을 왜에 유리하게 보입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패전 후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학문이 자유로워진 강단사학에서도 황국사관에 의한 일본 근대사학의 체질은 완전히 불식되지는 않는다. 금일 한일관계사의 통설적 지위를 점하고 있는 스에마츠(末松保和)의 「임나흥망사광사」에서도 신묘년조의 결자 부분을 임나 혹은 가라로 보입하면서 이 해 왜(일본)는 백잔(백제) ·임나(혹은 가라) ·신라에 미치는 광대한 지역에 병을 내어서 이들 제국과 고구려와의 종속관계를 타파하고 새로이 왜에 신속시켰다”라고 주장한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남선경영론의 연장선에서의 해석이다.
이는 광개토왕비라고 하는 금석자료 하나에 의해서 한일관계의 모든 역사상이 결정지어지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고대 일본열도의 내부 상황이라든가, 출병 목적, 지배체제의 구축에 따른 제반 조건의 구비 정도 등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오로지 왜의 일방적 논리만이 주장되고 있을 뿐 상대의 입장은 전혀 무시되고 있다. 왜의 행위결과에 의해 그 전단계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약속만이 있을 뿐이다. 즉 4세기 후반대에 기내의 대화(大和)정권이 일본열도를 통일했다는 논리는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4세기 말 대화정권이 한반도에 출병하여 그 남부의 제국을 복속시키고 북방의 고구려까지 공격해 들어갔을 정도라면 당연히 일본열도의 내부적 통일은 완성되어 있었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적 퉁일→한반도 출병→지배체제의 구축이라는 도식은 나카츠카(中牙明)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민적 상식’이었던 것이다.
일제에 의한 재발견으로 호태왕비는 일본의 제국주의정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일제시기 조선의 사학자들은 연구에 참여하기가 힘든 상황에서 일본사학자들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빌려주는 댓가를 치루게 되었다. 한편 초기의 연구성과가 정치사와 연결이 됨으로써 후대의 연구도 정치사와 무관하지 않게 진행되었다는 점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대일관계를 전망하는데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준다.
광개토왕비에 의해 구축된 고대일본의 한반도남부지배설은 일본 고대국가 형성사의 설명 체계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는 근대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에 투영되어 침략의 합리화에 일조했고, 나아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우월의식, 역으로 말하면 한국에 대한 멸시풍조를 낳는 왜곡된 대한사상을 배태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 근대사학의 흐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김석형에 의해 분국론이 등장하고 이진희에 의해 비문변조설이 제기되면서 광개토왕비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재검토의 분위기가 확산되는 197O년대에 들어서였다.
4. 남북한 사학계의 한일관계사상
① 연구에 대한 필요성의 재고
국내에 광개토비문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구한말의 『황성신문』으로 짐작된다. 광무 9년(1905) 1O월 31일자 논설 「고구려광개토왕비병서기(高句閔廣開士王陣銘殺記)」와 다음 날 11월 1일부터 6일까지 5회에 걸쳐 게재된 논설 「고구려광개토왕비명부주해(高句麗廣開土王輝銘附註解)」(이하 「주해」)가 그것이다. 이형구에 의하면 당시 『황성산문』의 논설위원으로 있었던 신채호의 글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주해」에 실린 신묘년 기사의 해석을 보면 이렇다.
이는 정토(往討)하여 토지를 넓힌 공을 기록한 것이니, (백잔)은 백제요(속민은) 속방을 말함이요 신묘는 즉 백제 진사왕 7년이오, 신라 내물왕 36년, 그런데 사서에는 왜병의 내공(來攻)을 말하지 아니하고, 일본사서에 의한즉 백제 침류왕이 졸하고 자(子) 아화는 어려 숙부 진사가 찬탈한고로 기각(紀角)을 보내 침책(優責)하되 국인이 진사를 살해하고 아화를 세웠다 하니 이는 명년 임진의 일이라. 백제사에도 임진 11월에는 진사가 홍하고 아화가 입(立)하니 그러나 그 내공의 유무는 보이지 아니함이오.
이 글은 비문이 국내에 전해진 후 국내인에 의한 최초의 반응이자, 더욱이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한 민족수난기의 민족주의사학자의 발언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상기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① 비문은 정토의 공을 기록한 것,② 신묘년의 왜병 내공은 한국과 일본 사서 등에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신묘년에 왜가 도해하여 백제와 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같은 해의 기하 사서에 보이지 않는 고로 기사 자체에 문제
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인 발언을 파하고 간접적인 의문만을 표시한 것은 비문이 갖고 있던 사료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후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의 「광개토왕 왜구 척축府透)」에서 왜가 이와 같이 백제의 교화를 받아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나 천성이 침략을 즐겨 드디어 백제를 침요(優擾)하며 진사왕 말년에는 더욱 창궐하였다”라 하여 신묘년 기사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 채 왜의 문화적 후진성을 강조하고 침략행위를 극단적 언어로서 언급하였을 뿐이다. 이어 그는 “고구려가 북방 선비와의 전역이 있을 적마다 백제가 그 맹약을 파괴하고 왜병을 불러 고구려 신점령지를 침범하며, 또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 됨을 미워하여, 왜병으로서 이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대왕의 용병(用兵)이 신속하여 북으로 선비를 치는 틈에 매양 백제의 기선을 제하여 왜를 습파하여, 신라를 구원하여 임나가라에서 왜병을 대파하여,...407년 지금의 대동강의 수전에서 가장 기공(奇功)을 주(奏)하여 왜병 수만을 전멸하여 갑주 1만여 영(領)과 무수한 군자기기를 얻으니 왜가 이로부터 습복하여 다시 바다를 재도(再橫)하지 못하여 남방이 오랫동안 평온하더라...였다. 요컨대 왜를 백제의 종속적 존재로 간주하면서 왜병에 대한 고구려의 승전을 강조. 한반도 남부에 대한 안정보장이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라는 지역과 왜라고 하는 일본열도 지역을 양자 구분하여, 고구려가 왜의 침략을 격퇴하여 한반도를 구원했다는 논리이다. 탕시 일제강점기의 민족사학자의 현실적 인식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라 하겠다. 한편 신채호는 1914년 집안 방문시 고구려가 토지를 침탈한 자구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었다는 영자평(英子平)이란 만주소년의 말을 인용하여 “태왕의 선비정복의 대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까닭일 것이니라” 하였다. 선비라고 하는 북방민족에 대한 광개토왕의 전공은 고구려의 기상을 한껏 드높이는 것으로서 당시의 민족의식의 고취에 더할 나위 없는 증거이다. 전공이 ‘삭제’되었다는 민족사학자의 유감 섞인 말이다.
이러한 의식은 박은식에게도 나타난다. 1909년 『서북학회월보』에 실린「독고구려영락대왕묘비등본(諸高句麗永樂大王基佛勝本)」에 의하면, “무릇 역사는 국민의 정신이오 영웅은 국가의 원기라....그 국민이 문명할수록 역사를 더욱 존중히 하고 영웅을 더욱 숭배하나니 모두 그 역사를 존중함과 영웅을 숭배함이 즉 그 국을 사랑하는 사상이라. ……고구려 제17세 광개토왕은 18세에 등조하야 향년이 39세라 남정북벌에 소향개첩(所向皆提)하야 동방제국이 모두 이마를 조아려 납공하고 요하 이북 수천 리가 개입판도(皆入版圖)하였으니 만약 천가이수고(天假以壽考)하였으면 아골타와 성길사한(成吉思消)의 위명이 금국(金國)과 몽고에 부재하고, 고구려에 재(在)하였으리라. 오호라 그 묘비 일편이 압록강북 회인현에 재하야 치실아한만세(此實我韓萬世)에 최유력한 사료오 무상한 실품(實品)이어는……금 그 등본을 봉독함이 1자 1획이 개아조국혼(皆我祖國塊)이라. 동아 대륙을 향하여 일장대규(一場大叫)를 자불능기(自不能已)하노라” 하였다. 당시 민족사학자에게 있어 민족에 대한 의식은 고통받고 있는 민중에게 희망과 용기를, 그리고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 주는 일이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민족의 역사에서 민족적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와 민족을 지킨 영웅들을 찬양하고 소개하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박은식은 광개토왕비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행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비에 대한 인식은 광개토왕이란 영웅의 존재를 알리고 이 영웅의 업적을 통해 민족적 긍지와 단결,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연구자들은 식민지하의 열악한 상황속에서 비문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보다는 우리민족의 주체의식함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료의 확보가 더욱 시급했을 것이다. 이에 자세한 비문연구는 제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었고, 영웅의식의 확보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정인보를 비롯한 후대의 사가들에게 단서를 제공해주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실증적 비문연구에 문제제기를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② 정인보의 연구
광개토왕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정인보에 의해 최초로 이루어졌다.
1955년 『백낙준박사 환갑기념 국학논충』(연세대학교)에 실린 한문으로 된 그의 유고 「광개토경평안호태왕롱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俊佛文釋略)」에서 신묘년조에 대하여 디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① 百殘新羅 於太王 煩碼屬民 ② 而倭則賞來優句麗 ③ 句麗亦聲婚海往優(倭) 交相攻 ④ 而百殘 乃通倭 爲不利於新羅 ⑤ 太王以爲 此 吾巨民也 曷敢爾哉 (괄호 안의 俊자는 인용자 보입)
이를 우리말로 의역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백잔·선리는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② 그런데 왜가 고구려에 침략해오자 ③ 고구려도 역시 바다를 건너가서 왜를 쳤다 ④ 백잔이 왜와 통하여 신라가 불리하게 되자 ⑤ 태왕은 이(신라)는 나의 신민인데, 어찌 감히 ⑥네가 그럴 수가 있는가
이러한 해석을 비문의 원문에 따라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以倭辛卯年來(侵高句麗) (高句麗)渡海
破(倭) 百殘[聯][侵]新羅 (百濟)以寫巨民
해석안의 최대의 포인트는 ‘도해파’의 주어를 종전의 통설인 왜가 아닌 고구려로 보는 것이다. 이는 신묘년조를 통설대로 읽을 경우 영락 6년조 기사에서 생기는 ① 고구려는 왜 왜를 토벌하지 않았는가 ② 고구려는 왜 같은 속민인 신라는 토벌하지 않고 백제만 토벌했는가 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전체로서는 고구려 중심적 해석이지만 왜상(峰像)에 대한 정인보의 인식은 명확히 나타나 있다. 침략자로서의 왜이기는 하지만 주역이 아니라 백제의 조역으로서의 왜의 이미지이다. 비문에 있어서의 왜상을 전혀 새롭게 그려낸 것이다. 민영규의 증언에 의하면, 정인보가 『동아일보』의 정간으로 못다한 이야기를 남이 알아보기 힘든 고문체 한문으로 요약해서 석략(釋略)을 성고한 것은 일제에 의한 민족말살정책이 강행되는 극한 상황에서였으며, 그 내용을 신묘년조와 영락9년과 1O년 앞 부분에 국한하여 삼국과 왜와의 역학관계에 주력한 것은 이러한 사연 때문이라 말한다. ‘도해파’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는 발상은 아마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정인보의 연구는 일제하의 광개토왕비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이자 그 동안 적극적인 해석을 주저해 왔던 신묘년조에 대한 통설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러한 독법은60년대 이후 남북한 사학계의 이 비문 연구의 조형(祖型)으로서 강한 영향을 미친다.
③ 박시형의 연구
북한의 박시형은 정인보의 해석안을 그대로 수용, 자설을 확대 발전시키고 있다. 박시형에 있어서의 왜란 백제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던 세력이고 396년 아신왕 때 왕자 전지를 왜국에 인질로 보낸 사건에 대해서도 대국의 신의를 과시하기 위해서 라든가 ‘대국이 자기 추종자에 대해서 실시한 관례’로서 국체관계를 규정, 백제의 왜국에 대한 우위성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김석형은 정인보설을 일부 수정, 고구려가 깨뜨린(破) 것은 왜가 아니라 백제이고 신민으로 삼은 것은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라는 것이다. 정인보설보다 더욱 강도 높은 고구려주도형 독법이다. 김석형의 이러한 독법은 1963년에 발표된 「삼한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에 대하여」의 발상에 기초한다. 이른바 ‘분국론(分國論)’이라고 불리는 그의 지론은 고대 한일관계사의 설명 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한반도 내의 본국과 본국의 이주민이 세운 일본열도 내의 분국을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규정하고, 비문의 왜도 북큐슈의 백제계통 세력으로서 고국을 위하여 동원된 사람으로 본다. 북한사회가 표방하고 있는 정치적 이념이라든가 사회적 풍토는 자연히 민족역사의 찬란함을 추구하게 되고 자국중심적인 역사연구를 낳았다. 비문의 왜의 이미지도 이러한 분위기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④ 이진희의 연구
한편 1972년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에 의해 일본 참모본부에 의한 석회도부작전, 이른바 비문변조설이 제기되어 충격적 파문을 일으켰다. 근년 잇따른 원석탁본의 출현에 의해 이진희설의 성립은 어렵게 되었지만, 탁본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강한 설득력을 갖고 내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분국론의 일정한 영향을 받고 있던 이진회 자신은 민족적 차별이 심한 일본사회에서 일본학계의 비문 해석 등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불신이 변조설에 이르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음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국내에서의 비문연구는 매우 늦어 해방 이후 1959년에 이병도가 「고구려의 전성」이란 글에서 광개토왕의 업적을 설명하면서 비문을 이용한 것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적극적인 해석은 유보하고 있다. 이후 70년대에 들어 천관우가 석회탁본인 구조선총독부 소장본에 의거하여 신묘년 기
사의 ‘내도해파(燦寢海破)’의 破’를 ‘故’로 다시 해독하고, 왜를 백제의 조역으로 하고, ‘이위신민(以薦巨民)’의 주체를 백제로 하는 정인보 ·박시형설을 일부 원용하는 독법을 취했다. 이어 정두희, 김영만, 서영수 등에 의한 고구려주도형의 독법과 이형구에 의한 위작왜자설(嗚作隆字說)의 등장 등 다양한 신설이 제기되었는데, 전체로서의 입논은 정인보설을 기본으로 하고 이진희의 비문변조설의 영향을 받은 연구로 보아 대과 없을 것이다. 국내연구의 이러한 경향은 신묘년 기사를 통설(일본학계)대로 읽는다면 역사적 사설과 배치된다는 상황논리와 신묘년조 뒤에 나오는 영락 6년조의 고구려의 백제정토 기사와 연결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의문에서 나왔다고 보인다. 이러한 대세론적인 연구경향은 상대적으로 왜에 대한 평가절하를 낳아 백제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왜라는 한일관계사상이 만들어졌다. 당연 왜의 독자성이라던가 왜의 입장에서의 논리전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초기의 일본 관학파의 비문연구가 그러하듯이 국내의 연구도 일방적인 자국중심의 논리로 전개되어 갔다. 말하자면 지역성이 낳은 비문연구의 하나의 한계라고 보여진다.
정인보와 박시형 그리고 이진희의 연구에서의 왜에 대한 설정은 식민지시기의 일본사학자들의 눈에 비친 한반도 남반부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미진했으며, 자료부족으로 인한 한계점을 노출하였다. 양대 민족주의 사학자의 대립은 사료의 객관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반세기의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벋어나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5. 고구려인의 천하관
비가 세워진 5세기 초,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대륙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특히 북중국에서는 주변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 연이어 들어섰다가 멸망을 거듭했고, 요동․요서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건 선비족도 쇠퇴하였다. 남쪽의 신라는 아직 힘이 미약하였고, 가야는 작은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바다 멀리 일본 열도에서도 통일왕조가 성립하기 전이었으므로 고구려의 유일한 적수는 백제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는 대승리를 거두고 60여성을 차지하였다. 나아가 신라에 침입한 왜를 쫓아내고 신라를 휘하에 거느렸으며, 북으로 거란 ․숙신․동부여를 복속시켰다. 이렇게 고구려는 주변의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러 발돋움하였다. 이에 고구려인은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주변 나라를 고구려에 신속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비문 속에서 고구려인은 광개토왕의 정복을 만천하의 백성을 풍요롭게 살도록 하는 조치로 예찬하고 있다.
6. 결어
지금까지 광개토왕비에 대한 종합적인 문제제기가 있었다. 지금까지도 일본사학자와 남․북한 사학자간의 대립은 결말을 보지 못한 상태이다. 어쩌면 제 2의 광개토왕비가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의 역사는 끝없는 대립의 양상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사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았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하여 왜가 백제․신라․가야를 위시한 남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사료의 제한성과 그 제한성안에서의 모순점으로 인하여 그 타당성이 극히 희박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도 문제가 제기된다. 고구려 자국의 역사를 서술한 비문이라는 점에서 객관성이 배제되었음은 많은 역사적 사료를 검토해 보았을 때 충분히 검증이 가능하다. 삼국사기가 중국의 중화사상에 뜻을 두고 저술되었다면 광개토왕비 역시 고구려의 천하관에 중점을 두고 제작되었을 것이다.
한 비문의 자료만으로 검토를 한다는 자체가 무리수가 있겠지만, 추측의 측면에서 4세기 당시의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를 일본과 긴밀한 사이에 있는 국가로 인식했으며 수시로 마찰이 있어왔으므로 백제와의 전쟁을 비문에 남기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천하관을 가지고 있던 고구려로서 자신이 속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백제를 상상속에서 속국화시킬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이에 백제․왜 연합군과의 다툼은 왜와의 다툼으로 표현이 되었으며, 확대 해석시에는 고구려가 말갈족으로 중국을 공격하듯 왜가 적진의 선봉에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백제가 왜세력의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가 왜로써 느낄 가능성과 임나일본부의 반대 측면에서 한반도 남부의 백제나 가야가 일본에 식민지를 두었다는 가설은 자료의 불충분과 민족주의적 가치가 첨가될 위험성이 있어 배제하도록 하겠다.
결국 4세기의 고구려는 어떠한 존재인지 불확실하지만 왜라는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은 6세기까지 존재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데 있어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광개토왕릉이 한․일관계사상의 형성에 끼친 영향은 상상외로 크다. 이는 고대사라는 한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근대의 한일관계사상 특히 일본의 대한 사상(對韓史像)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참모본부의 주도로 진행된 초기의 비문연구는 일부 왜와 관련된 기사만에 주목, 고대 통일국가로서의 강한 왜의 이미지가 그려지면서 고대일본의 한반도에의 진출 ·지배라는 도식적 연구로 일관, 근대의 한반도침략에 대해 역사적 정당성의 합리화에 일조를 해 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민족적 우월성으로 발전, 대한 경시 ·멸시관의 풍조를 낳았다. 일본 근대사학이 만들어 낸 왜곡된 대한사상이다. 황국사관에 대해 학문적 메스가 가해지기 시작한 1945년 이후에도 이러한 일본의 근대사학의 체질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채 지금도 일본의 고대국가상, 고대일본의 대한(對韓) 우위성 사관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한편 구한말 「황성신문』에 의해 국내에 소개된 이 비문은 민족주의사학자들의 눈에 띄었으나 왜와 관련된 기사보다는 광개토왕이란 영웅을 소개하는 데에 관심이 모아졌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신묘년 기사와 같은 왜 관련 기사를 적극적으로 취급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비문연구는 자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보인다. 이후 정인보에 의해 제기된 고구려주도형 독법은 비문연구의 기폭제가 되고 여기에 비문변조설이라는 파문이 일면서 남북한 사학자를 비롯한 일본의 연구자들은 광개토왕비문을 비롯하여 고대 한일관계사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일방적인 자국중심의 사상에서 벗어나 점차 연구의 객관화를 시도해 가고 있다.
광개토왕비문은 4,5 세기의 고구려라는 국가의 역사적 체험을 당시 지배층의 역사인식을 가미시켜 기술한 문장이다. 즉 이 비문은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유교적 정치사상에 입각한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고구려적 세계질서라고 하는 틀 속에서 주변 제국을 차등적으로 자리매김하여 역사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왜도 고구려 측의 관념과 현실 속에서 복합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의 남방에 대한 영토의식은 신묘년 기사와 같은 강렬한 왜의 이미지를 출현시켰다. 이는 왜를 고구려적 세계질서의 파괴자로서 위치시켜 고구려의 남방에 대한 정토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려는 고구려인의 역사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신묘년 기사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내용은 작가의 부족으로 인하여 『고대한일관계사』의 보론 부분내용을 대부분 수용하였으며, 『한국고대사 산책』의 일부 부분을 첨가하고, 작가의 의견과 기타 참고문헌 내용을 보충하는 형태로 제작되었음을 밝힌다.
7. 광개토왕비문 신묘년조에 대한 다양한 해석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未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 王破, 百殘□□□羅, 以爲臣民
백잔․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아직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그리고 왜(倭)는 신묘년(391)부터 무엄하게 건너왔기 때문에 왕께서 백잔과 왜는 공파하고 신라는 신민으로 삼았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백잔과 신라는 원래 고구려왕의 속민이고 유래조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는 신묘라는 년부터 이래(이 시대), □(海)를 건너서 백잔을 격파하고,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아 버렸다.
百殘․新羅, 舊是(高句麗)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 □□, □羅, 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본래 모두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며 줄곧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그런데 왜인들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를 타파하고 그들을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병신육년에 호태왕은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이 신묘년 기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그 첫째는 ‘왜가 신묘년에 와서 사(泗)를 건넜기 때문에 (고구려가 왜를) 쳐부수었다.’이고, 그 둘째는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가) 사(泗)를 건너 (왜를) 쳐부수었다.’이다. 이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면 그 다음의 해석은 고구려가 ‘백잔,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가 될 것이다. 그리고 ‘왜가 신묘년에 와서 사(泗)를 건너 패하므로 (또는 건너버리므로), 백제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 왔기 때문에 우리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가서 그것들을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는 (왜를 끌여들여서) 신라를 침략하고 그것을 저의 신민으로 삼았다.
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 □□□羅 以爲臣民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을 격파하고 □□□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東□新羅以 爲臣民
백잔과 신라는 옛적에는 속민이였고 그전부터 조공을 바쳐오던 것인데 (백제의 책동으로)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 왕은) 패수를 건너가서 백잔을 치고 동쪽으로 신라를 (초유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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