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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말했다. 어떤 보석이 담겨 있는지는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소중한 것들이 담긴 공간을 바라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20세기 주요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현재까지 건축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이라는 현대 아파트의 개념을 건축하기도 했던 그는, 노년에 약 4평짜리 오두막 별장에서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 르코르뷔지에는 “집은 인간을 위한 기계”라는 말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집은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그의 철학을 나타낸다.
그러나 요즘은 집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집 때문에 살다가, 결국에는 집에 대한 희망마저도 비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누구나 원하는 집에 살 수 없을까? 가능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 살고 싶은 집에 대한 희망까지 빼앗겨 버린 사회는 이대로 괜찮은가?
어린 시절 집에 대한 기억
청소년 시절, 2년 남짓 동안 화장실이 밖에 있는 월셋집에 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래된 집에서의 경험은 강렬했다. 45㎡(약 13평)에 방 3칸과 좁은 마당이 있는, 기름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집이었다. 사업이 망해서도 아니고, 빚보증을 잘못 섰기 때문도 아니었다. 부모님의 오랜 소원이던 아파트 분양에 당첨되었기 때문이다. 계약금은 오랫동안 모아두었던 주택청약저축을 깨서 납부했지만, 약속된 기간까지 중도금을 내려면 당시 살고 있던 집의 전세보증금을 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분양 당첨 발표 때마다 신문 뒷면을 꼼꼼히 살펴서 본인 이름을 찾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번번이 찾을 수 없었던 부모님의 꿈은, 결혼한 지 22년이 되어서야 눈앞에 다가왔다. 물론 산더미 같은 은행 빚과 함께.
겨울이면 얼어버린 신발을 끌고 화장실에 가서 얼굴 씻는 것이 괴로웠다. 때마다 기름을 채워 넣고, LPG 가스통을 주문하는 것도 불편했다. 교복 입고 다닐 때라 하굣길에 혹시라도 누가 우리 집을 알게 될까 불안했다. 이 모든 것들은 새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불편이었다. 아파트가 건축되기 전, 철거가 완료되고 터를 닦을 때부터 우리 가족들은 우리 집이 올라갈 자리를 방문하곤 했다. 가파른 경사 꼭대기에 위치한 까닭에 힘들게 올라 텅 빈 땅을 바라보면서도 부모님은 행복해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했는지 의문이 생기지만, 부모님의 서사를 생각하면 한편 이해가 된다. 시골에서 상경해 밑천 없이 시작한 서울 생활은 서늘했을 것이다. 눈 뜨고 코 베일까 노심초사 하루하루 버티셨을 것이다. 작은 기술 하나 배워 근로기준법과 상관없이 살면서도 작은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섯 식구 마음 편히 다리 펴고 누울 수 있는 내 집 마련의 꿈이었을 것이다.
1992년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아버지가 당시 살고 있던 집의 임대인과 전화통화를 하셨다. 하루아침에 2천만 원을 올려달라는 임대인의 황당한 요구에, 억울하셨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내적갈등이, 목소리와 얼굴에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당시 어린이였던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기로 아버지는 갑작스럽고 황당한 요구에 화를 억누르고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며 보증금 인상을 철회해달라는 부탁을 해야 했고, 그마저도 통하지 않자 다른 집을 구할 시간이라도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이사를 했고, 마침내 이뤄낸 내 집 마련의 꿈이 눈앞에 있었기에 남루한 월셋집 생활도 다 함께 견뎠다. 원고를 핑계로 주민등록 초본을 살펴보니 내가 태어나고 18세까지 7번의 이사를 거치고 나서야 우리 집이 생겼다.
부모님은 아직은 썰렁한 집에 입주하자마자 출장 뷔페를 불러 친척, 친구, 친목회원 등을 초대해 집들이를 하셨다. 성대한 파티와 함께 등기부상으로는 우리 집이 되었지만, 온전히 우리 집이 아닌 탓에 고난의 행군은 계속되었다. 부모님은 매일 성실하게 일하시고 아껴 생활하는, 변함없는 삶을 사셨다. 글로 남기기 민망할 정도의 절약 생활의 면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서로 다른 집의 의미
2011년 기독시민단체에 입사하고 처음 맡았던 사업이 ‘전월세값동결운동’1이었다. “전월세 대란시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제목의 포럼을 열어 서민들의 주거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법을 모색하고, 전월세값을 동결하는 착한 임대인 사례를 찾아 공유하고, 교회와 성도들이 실천할 수 있는 가이드를 제안했다. 의미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임대인들의 선한 마음에 기댈 수밖에 없는 운동의 한계를 고민했다. 운동의 범주가 부동산을 소유한 교회 또는 집을 소유해서 임대하는 사람들에게 한정된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남았다.
기독시민단체에서 6년 동안 활동하고 2019년 공인중개사로 전직을 하고 나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예비신혼부부도 만났고, 안타까운 사정으로 평생 일궈온 집을 팔아야 하는 분도 있었다. 자꾸 오르는 전세보증금 때문에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분들도 계셨고, 이 동네는 왜 집값이 아직도 제자리냐며 동네 부동산이 똑바로 처신해야 한다는 으름장을 놓고 가신 분도 만났다.
다양한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집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는 걸 느꼈다. 특히 어떤 사람에게 집은 사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넘어 노년을 책임져 줄 안전자산이었다. 30대에 남편이 돌아가시고 세탁소에 출근하시며 혼자 두 자녀를 키워내신 분이었는데, 이분은 오랫동안 근무했던 곳에서 70세가 넘으셨으니 이제 그만 쉬시라는 권유(?)를 받고 막 백수가 되신 분이셨다. 각자 가정을 꾸려 멀리 살고 있는 자녀들에게 혹시나 짐이 될까 걱정하시며, 갖고 계신 아파트에 월세 임차인을 찾아달라고 의뢰를 하셨다. 이분께 알맞은 임차인을 연결해드리고 이후로도 일상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런 분들께 집은 노년에 자립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관리비와 공과금을 낼 수 있고,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고, 군대에서 휴가 나온 손자에게 용돈을 줄 수 있고, 슬픈 일을 당한 이웃에게 위로의 마음을 담은 밥 한 끼 대접할 수 있게 해주는 꼭 필요한 생계수단이다.
‘넘사벽’이 된 서울의 집값
집. 누군가에게는 꿈이고, 밥줄이고, 마음의 안식이기도 한 이것은, 또 누군가에게는 ‘넘사벽’2이 되었다. 지난 9월 28일 KB국민은행 리브온에서 발표한 월간 〈KB주택가격동향〉조사결과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매매중위가격은 9억을 넘었다. (정확하게는 9억 2,582만 원이다.) 중위가격은 양 극단값의 영향을 받는 평균가격과 달리, 서울시 내 아파트 가격을 순서대로 나열했을 때의 가운데 값을 나타내는 말이다. 해당 보고서는 대출금액은 6억 4807만 원, 매월 상환하는 금액은 343.1만 원, 상환에 필요한 연 소득은 1억 2476.4만 원이라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3
9억 2,582만 원. 서울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아파트인데, 이 아파트를 사는데 필요한 금액은 이토록 낯설다. 게다가 대출금액과 대출상환을 위해 필요한 연간 소득 숫자를 확인하니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그들이 사는 세계는 더욱 거리가 느껴진다. 표본조사를 통해 산출되는 통계가 모든 정보를 적확하게 담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으로 느껴지는 서울의 집값은 ‘넘을 수 없는 벽’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특히 이제 막 경제활동을 시작한 청년들에게 ‘집’은 일찌감치 포기의 대상이 되었다. 주택가격과 함께 주거부담비용이 증가하면서, 주거환경을 낮은 수준으로 변경하거나 주거지역을 주요 활동지역과 거리가 먼 곳으로 이동하는 선택은 필연적이다. 국토교통부와 한국교통안전공사가 2019년 한 해 동안 수집된 교통카드 데이터를 기반으로 대중교통이용실태4를 조사 분석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서울과 수도권에서 하루 730만 명이 대중교통 이용하고 있는데, 이들의 출근 시간은 평균 1시간 27분 소요되며, 편도 이용에 2,162원 지출하고, 1.32회 환승을 한다. 물론, 이 데이터의 주인공들이 스스로 선택했다면 문제없다. 그러나 출퇴근을 해본 사람은 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다수가 사회경제적 압력을 견디다 어쩔 수 없이 ‘직주근접’을 포기하고 주거비용 부담이 덜한 서울 밖으로 밀려난 것이라면 매일 출퇴근하며 소모되는 개인들의 에너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평균 왕복 3시간이면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자녀를 직접 하원시켜 충분히 놀아 줄 수도 있고, 저녁을 천천히 먹고 동네 한 바퀴 산책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시간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는데(제14조), 우리가 느끼는 이 부자유함은 무엇일까? 과거의 방식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할수록 근로소득으로는 변화하는 세계에 앉을 자리조차 마련할 수 없는 현실을 깨닫게 되고, 주변은 비트코인과 주식, 부동산으로 근로소득으로 꿈꿀 수 없는 금액을 하루아침에 벌어들였다는 소문으로 혼란스러워진다. 지금은 자원도 풍부하고 기회가 넘치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원하는 곳에서 바라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왜 자꾸 좁아지는지 모르겠다.
4차산업혁명에 코로나19까지 세계는 빠르게 변하고 기술도 성큼성큼 앞서가서 인간의 노동 생산력을 벌써 저만치 앞질러 갔고, 피케티의 이론대로 돈이 돈을 버는 속도는 빠르게 커지는데, 자야 하고 쉬어야 하고 놀아야 사는 인간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이 일하는 시간, 심지어 잠자는 동안에도 어떤 부동산은 가만히 깔고 앉은 금전적 가치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올라 가버리니 말이다.
이 절망을 단숨에 해결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이 절망 앞에서 ‘세금폭탄’ ‘징벌적 과세’라는 말처럼 사실을 비틀어 가치판단을 왜곡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현실을 바로 보고 개인 차원의 노력이든 제도와 정책 등의 사회적 차원의 개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세금폭탄’을 맞은 주택은 전체 주택의 1.6%5에 불과하고, 이 세금은 ‘폭탄’이 아니라 자유를 누리는 ‘책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데, 무엇 때문에 상위 1.6%의 부동산을 소유한 이들의 분노에 동일시하면서 왜곡된 분노를 쏟아내야 하는지 의문이다. 부동산은 물리적 한계가 명확한 자원이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도록 무한증식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따라서 집을 100개 가질 자유를 원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100개 자산의 해당하는 세금으로 지는 것이다. 이것이 한정된 자원을 권위적으로 배분하기로 약속한 방식이다. 개인의 자유로 누군가의 자유가 제한받고 위협받는다면 그 자유는 사회적 약속을 통해 제한하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 사회의 운영원리 아닌가.
‘영끌’ 시대에 꿈꾸는 나의 집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저축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매월 몇 십만 원 모아서 저축한다고 해서 미래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코딩도 배우고 영어 공부도 하고 인문학적 소양도 기르면서 왕복 3시간 출퇴근을 해야 하고 몸 관리도 하면서 사회적 관계 맺기도 해야 하는데 생활비를 아껴 저축하면서 가능성 없는 미래에 저당 잡힌 인생을 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성실하게 일해서 꼬박꼬박 저축하면 기회가 왔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유력한 공모주에 단 몇 주라도 받기 위해 마이너스 통장을 열고, 집을 사려면 ‘영혼까지 끌어모아야 하는’ 시대다.
누구나 자유롭고 싶어한다. 행복한 오늘을 상상하고, 안전한 미래를 바란다. 누가 우리에게서 그 꿈을 실현할 기회를 빼앗아 갔을까? 그동안 우리 사회가 빨리빨리 바쁘게 살아가며 가치보다 돈을 좇고, 옳은 것보다 편한 것을 선택하고, 사람보다 효율을 찾았던 과거가 축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력’ 대신에 ‘자본력’을 키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배우며 살아온 사회적 경험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기존 질서를 붕괴시켜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대단한 욕심은 없다. 이미 실패한 경제시스템을 도입하자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묻고 싶었다.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노년을 걱정 없이 다른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립해서 지낼 수 있다면 어떨까?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내가 나고 자란 동네에서 오랜 친구들과 함께 여전히 단골집에서 일상을 이야기하며 늙어갈 수 있다면 어떨까?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출근하기 위해 코로나19 뚫고 2센티미터 근접거리 유지한 채로 1시간 27분 동안 견디지 않아도 되는 곳에 살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되 성실하게 일하면서 원하는 집을 소유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아이들이 ‘이백충’(한달에 200만원 이하의 소득으로 사는 벌레 같은 사람), ‘빌거’(빌라에서 사는 거지), ‘엘사’(LH, 즉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지은 주택에서 사는 사람) 등의라는 아픈 말 대신에 ‘나팔꽃’ ‘터무늬’ ‘함께’ 같은 아름다운 말들을 배울 수 있는 동네에 집을 산다면 어떨까? 어릴 때 살던 집을 내 이름으로 사서 우리 식구들의 필요와 취향에 맞게 고쳐 살다가 대대손손 그 집에서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어떨까? 너무 많은 대출을 얻지 않고도 두 식구면 충분한 방 2개짜리 아파트를 사서, 화이트 앤 우드 콘셉트로 꾸미고, 친구들을 불러 차 한 잔 할 수 있는 집을 사면 어떨까?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좋은 땅을 골라서 사생활을 지킬 수 있는 적당한 거리이지만 부침개 부쳤다고 소리치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집을 짓고 그동안 모아온 책들로 공동 도서관을 만들고 텃밭에서 기른 채소들을 밥상을 차리고 심심함을 만끽하다가 나른한 오후에 맛있는 커피 한 잔 나누고 퇴근 후엔 시원한 음료 한잔 꼴깍 할 수 있는 집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면 어떨까?
내가 살고 싶은 집은, 이런 집이다. 상상만 해도 이렇게 좋은데, 현실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주
1 ‘전월세 대란시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볼 것인가’ 포럼 자료집(2011. 4. 26.)
2 넘사벽은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의 줄임말로,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격차를 줄이거나 뛰어넘 을 수 없는 상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자신의 무력감을 표현하기 위해 잘난 상대방을 두드러지게 과장해 보이는 경 우 사용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넘사벽 (대중문화사전, 2009., 김기란, 최기호)〕
3 KB국민은행 리브온 2020. 9월 〈[월간] KB주택가격동향〉 조사결과, 통계표 98쪽.
4 국토통부 교통카드 데이터 기반 대중교통 이용 실태분석: 하루 수도권 730만 명이 1,845만 건의 대중교통 이용.
5 국토교통부 〈주택시장 안정 보완대책〉 관련 주요 제기사항에 대한 설명.
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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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집. 누군가에게는 꿈이고 밥줄이고 마음의 안식이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넘사벽이다ㅜ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노년을 걱정없이 다른 가족에게 짐이 되지않고 자립해서 지낼 수 있다면 좋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