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세간이라 하는데..
그 말은 불교 수행자들이 수행하는 공간을 출세간이라 부르는 것과 구분하기 위해서이고..
중용은 우리가 세상[세간]에서 살아갈 때 바르게 사는 반석이 아닐 수 없다.
하여 중용은 세상의 진리[속제]와 통한다.
그에 반해 중도는 석가모니 수행자가 부처님이 되신 길이고, 제자들이 목표를 향할 때 필요한 길이니..
그것을 출세간의 진리[진제]라 한다.
당신이 세간에 머물고 있다면 출세간 중도가 아닌 세간 중도인 중용을 배우고 익히는 건 자연스럽다.
아마 어느 나라에서도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일본 정치에서는 사용하려나?..
우리 정치판에서는 보수파와 진보파 그리고 중도파 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여와 야.. 이도 저도 아닌 자들이 스스로를 중도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중도는 존재 세계에서 법 세계로 넘어가는 길인데..
어찌 가장 존재스런 탐욕과 모략이 넘치는 정치판에서 중도라는 말을 가벼이 사용할까?.
그것은 이른 봄에 피는 샤프란을 보며 국화꽃이라고 하는 격이 아닌가?.
성철큰스님께서는 중도로 근본불교에서 선불교, 염불 불교인 현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꿰뚫고 설한 법문이..
<백일법문>으로 엮어 세상에 나와..
한글을 아는 불자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백일법문>이 책으로 나오는데 가장 많은 땀을 흘린 분이 바로 보리사 회주이신 원영 큰스님이시다.
성철스님의 중도 설명인 쌍차쌍조(雙遮雙照)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쌍차(雙遮)라는 것은 이 양변이 서로를 막아서 서로를 숨기는 것, 즉 서로의 소멸을 말한다. 쌍조(雙照)라는 것은 그 반대로 이 양변이 서로 비추어서 이것은 저것을, 저것은 이것을, 서로를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쌍차(雙遮)란 양변을 완전히 떠나니 구름이 걷혔다는 말이고, 쌍조(雙照)란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말이니 결국 해가 드러나 비친다는 말이다. 광명이 나타날 때 청정하여 청정과 광명이 서로 둘이 아니니 이를 차조동시(遮照同時)라 한다.
성철 스님은 쌍차쌍조(雙遮雙照)를 통해 갈등과 모순, 대립과 투쟁으로 점철된 현실을 통섭(通攝) 내지 원융(圓融)시키고자 했던 것이며, 그것은 극단적인 흑백논리를 초월해 모든 것을 포용하고 화해시키고자 했던 일종의 중도 구원론이었다. 이와 같이 쌍차쌍조(雙遮雙照) 즉, 양 극단을 여의고, 서로 비춰보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이 바로 중도(中道)인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 펌
정치 세계에서도 중도란 말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니 중도라는 말이 멋있게 보이니..
'중도 정치'를 주장하는 자들이.. 실천은 다르면서 말로만 떠드는 게 정치인이라 하듯.. 나올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곧 극단적 대립을 일삼는 여와 야를 비판하며 고개를 저는 국민을 보며..
여와 야 둘 다 부정하고, 둘의 장점을 뽑아 새 정치를 이끌겠다는 자신을
중도 정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비유를 하신적이 있다.
삼층 집을 짓겠다고 건설사(?^^)에 맡겼는데.. 이들이 이층 집만 짓는 게 아니라 지하부터 파내고 일층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삼층집만 원하고 있었는데.. 해서 건설사 사장을 불러 언성을 높였다.
"내가 삼층 집을 지으라 했지 언제 지하와 일층집을 지으라고 했소?"
여기는 중도를 말하는 데.. 중도라는 삼층 집을 알기 위해서 먼저 지하와 일층집을 먼저 봐야겠기에 하는 말이다.
불교는 근본불교 시대가 있고
상좌부불교(소승불교) 시대,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선불교와 염불불교로 이어져 온다.
이름이 달라진다는 것은 기존에 있는 것과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게 아닌가..
중도라는 말은 석가세존께서 처음으로 설하셨지만.. 시간과 환경이라는 조건에서 각 불교는 자기들 뜻을 가미해 사용한다.
처음 세존께서는 중도를 존재 세계인 윤회하는 유전문 세계에서 열반인 환멸문으로 넘어가는 방법과 이해로
아니! 유전문을 넘어가 만나는 마지막 발걸음[행, 진행형]으로 가르치셨다.
나는 그 때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옛 선인(仙人)의 길과 옛 선인의 지름길과 옛 선인의 길의 자취를 얻었다. 옛 선인은 이 자취를 좇아갔으니 나도 이제 따라가자.'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광야(曠野)를 헤매며 거친 들판을 헤치면서 길을 찾다가 문득 옛 사람이 다니던 길을 만난 경우와 같다.
그는 곧 그 길을 따라 점점 앞으로 나아가다가 옛 성읍(城邑)과 옛날의 왕궁(王宮)·동산·목욕하던 못·수풀의 청정함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왕에게 가서 고하여 이 사실을 왕이 알게 하리라.'
이렇게 생각한 그는 곧 찾아가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이여. 꼭 아셔야만 합니다. 제가 광야를 헤매며 거친 들판을 헤치고 길을 찾다가 문득 옛 사람이 다니던 길을 발견하였고,
저는 곧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제가 그 길을 따라 갔더니 거기에는 옛 성읍과 옛 왕궁·동산·목욕하던 못·수풀·물 등 청정한 경지를 보게 되었는데, 대왕께서 가셔서 살만한 곳이었습니다.'
왕은 곧 그곳으로 가 살았고, 그곳은 풍성하고 즐겁고 안온하여 인민들이 불꽃처럼 성하게 모여들었다.
이제 나도 그와 같이 옛 선인의 길, 옛 선인의 지름길, 옛 선인의 자취, 옛 선인이 갔던 곳을 얻었고, 나도 그 길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것은 8성도(聖道)를 일컫는 말이니, 즉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방편]·정념·정정이 그것이니라.
나는 그 길을 따라
늙음·병듦·죽음[老病死]과
늙음·병듦·죽음의 발생[老病死集]과·
늙음·병듦·죽음의 소멸[老病死滅]과
늙음·병듦·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老病死滅道跡]을 보았다.
또 태어남·존재·취함·애욕·접촉·6입처·명색·식도 마찬가지며, 행과 행의 발생,
행의 소멸, 행의 소멸에 이르는 길까지도 다 보았다.
나는 이 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고,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및 다른 외도의 사문 바라문과 재가 출가자들을 위해 설법하였으며,
그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들은 법을 듣고는 바로 따르고 믿고 즐거워하면서 법의 훌륭함을 알았다.
그래서 범행(梵行)이 더하고 넓어져 많은 유익함을 주기 위해 열어 보이고 나타내 드날렸느니라."
<잡. 287. 성읍경(城邑經)> 중
이와같은 중도를 상좌부에서는 말하자면 존재 세계에 무게를 더 두어 윤회하는 세계에서 바라다보는 길로 가르쳤다.
<구사론>이나 <창정도론>에 12처는 존재인 6근6경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에 대한 부정.. 부처님 재발견으로 부처님을 바로 알자는 <금강경>, <반야심경> 등의 반야부 불자들이 나와
'중도는 공' 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을 일반인이 이해하기 너무 어려우니 공을 실체화(?)시킨 유식학이 나와
<법화경>, <화엄경>을 세상에 알린다.
우리가 절에 가면 흔히 듣는 말이 '부처님'과 함께 '불보살'이란 말이다.
불보살의 의미는 말하자면 공을 실체화시킨 게 된다.
대승불교 운동을 보살불교 하듯
대승불교 운동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희망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하자는 운동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공 세계이지만.. 우리는 공이 아닌 존재로 알고 있다.
보살은 본래 공임이 틀림없음을 관하고 있지만.. 지금 여기서는 존재로 인정하면서 실천하는 이들이다.
보살행은 속은 다르지만.. 겉으로는 기독교인의 실천인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하려는 행동과 다름이 없다.
그러기에 특히 서민을 울리는 사회 문제에 참여하고, 성직자들과 동참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한다.
보살은 수행자이면서 사회 봉사자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그것이다.
그런데 수행[구보리]과 봉사[화중생]를 함께 하면서 부처님께서 바라는 아라한.. 아상이 없음을 깨쳐 고통을 멸하고 항상 평안한 상태를 유지함.. 이 되는 게 쉬운 일인가?.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게 쉬운 일이냐 말이다.
하여 대승불교 안에서 지금은 수행에만 전념하는 이들이 나오니..
수와 당 초에 등장하는 참선 수행자가 그들이다.
지금은 동안거 기간으로.. 100일 동안 절에 머물며 오로지 참선에만 열중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보살행을 열심히 하다보면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많이 상대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신 상태가 문제가 생기듯..
스스로도 모르게 아상에 잡히기 십상이라 한다.
그런 타이밍에 수행에만 전념한 수행자[이판승]의 도움이 꼭필요하다.
이런 구조를 모르는 제3자들은..
그들을 향해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운데.. 자기 하나 행복하겠다고 100일씩이나 절에만 마물고 있다며
손가락질하며 비아냥한다.
이판승인 수행자들이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그 책임은 수행자가 아닌 사판승과 보살들에게 있다고 본다.
보살들이 사회봉사를 열심히 제대로 하지 않으니.. 마치 불교는 사회 문제에는 나 몰라라 하는 종교로 보이는 게 아닌가!
21세기는 보살행이 마른 풀에 불붙듯 활화산이 폭발하듯.. 왕성하게 움직여야할 때임을 알아야만 한다.
보살행이 힘을 잃으면.. 15,6 세기 인도처럼 불교가 사라진 사회가 될 게 뻔하다.
보살행을 할 때 필요한 것은 출세간 중도가 아닌 세간 중도로 중용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럴 때 출세간 중도는 수행자인 이판승이 책임지고 있어야만 한다.
*이판승사판승이라 하는데.. 이판승은 수행에만 전념하는 숭려요, 사판승은 수행보다 절 관리와 전법 사회와 절을 연결하는 일을 수행한다.
이판사판이란 말은 승려로 보일 뿐 수행승인지 절 관리하는 승려인지 구분이 안된다는 것인데.. 사생결단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잡. 785. 광설팔성도경(廣說八聖道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바른 견해인가? 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漏]가 있고 취함[取]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성인과 출세간(出世間)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세간 중도) 어떤 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만일 그가 보시[施]가 있고 주장[說]이 있음을 보고,…
이 세상에 어떤 아라한이 있어 후생(後生)에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세간의 바른 견해요,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출세간 중도) 어떤 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괴로움을 괴로움이라 생각하고, 괴로움의 발생[集]·소멸[滅]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며,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하여, 번뇌가 없는 생각과 서로 호응하여,
법을 선택하고 분별하여 깨달아 앎을 구하고 지혜로 깨닫고 관찰한다.
이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바른 견해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 (생 략) ...
세간 중도는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견해로 보시를 행하고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좋은 세계란 죽어서 가는 천국이나 천당이 아니라.. 내일인 미래에도 여전히 있을 이 땅에
우리가 지은 선업의 결과로.. 있기를 바라는 희망의 나라를 의미한다.
이렇듯 불교는 미래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닌 지금 여기서 어떻게 행위를 하는지 그 결과로 생긴다는
연기 인과법으로 설명한다.
보살이라면 현실을 나 몰라라하며 못본 척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미래는 정해진 게 아닌 우리 행위로 결정되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일년에 한 번 밖에 없는 설날이련만..
벌써 몇 번을 맞이하였던가.^^
동님들 모두
해피 갑진 년으로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