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4일 주일오후 설교말씀
새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왕하 5:1-14)
저는 지난주 요엘서 말씀을 증거하다가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욜2:21) 이 말씀이 저에게 와 닿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암울하고 어두운 시기이지만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가면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실줄 믿으며 새 일을 행하실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보면 두 주인공이 나옵니다. 나아만 장군과 어린소녀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현실적으로 아무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던 자들입니다. 나아만이 아무리 부요하고 권세가 있어도 자기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치유될 수 없는 병에 걸렸으니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가엾은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나라에서 살다가 거대한 아람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사로잡혀서 한평생을 시중이나 드는 절망적인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관적이고 소망 없는 두 사람의 상황을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련한 소녀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줄기 빛과 같은 소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그것은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섬기는 주인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선지자가 내가 살던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소녀가 믿음이 없었다면 평생 소망도 없는 비련한 인생을 살다가 끝났을 것입니다. 또한 나아만도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문드러진 얼굴과, 상한 마음, 절망적인 상태에서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이들은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소망의 끈을 붙잡습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린 소녀는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믿음과 신앙의 뿌리가 내려진 어린 심령들이 왜 귀한 줄 아십니까?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커서 세상에 빠져도 그 구원의 때가 되면 반드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즘 교회 안의 아이들을 바라보면 사고가 많고 말썽도 자주 일으킵니다. 얼마 전에는 소예배실에서 축구하다가 밥통 2개와 커피자판기를 박살내었고 지난주에는 김치냉장고 위에 올라가 두 아이가 뛰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교회 안에 있는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아이도 일찍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절망 가운데 소망의 하나님을 붙잡았고 결국 그의 신앙의 뿌리는 나아만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살리고, 치유가 되고,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만약 그 어린아이가 믿음이 없었다면 아무 역사나 소망도 없이 절망 가운데 끝나는 인생이 되어졌을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아이의 말이 나아만에게 복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할 때나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람의 상황에 맞는 교제를 해야 합니다. 나아만은 지위가 높고 부요했어도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서 믿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눌려있고 절망적인 부분을 말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에게 열린 문이 되어집니다. 만일 그 아이가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면 부요해집니다, 지위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라고 나아만에게 말했다면 그가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요?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겁니다. 그에게 있어서 열린문은 물질이나 권세가 아닌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살았던 사마리아의 선지자가 주인님의 질병을 해결할 수 있다 말을 듣고 나아만은 구원을 끈을 붙잡았습니다.
절망적인 현실이었지만 이 어린아이가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믿음을 보시고 새 일을 해나가십니다.
잘못된 나아만의 생각
나아만이 치료받기 위해 많은 선물을 가지고 이스라엘 왕에게 찾아 갔습니다. 사마리아 왕은 전쟁을 하려는 줄 알고 두려워 떱니다. 엘리사가 그 소리를 듣고 왕에게 걱정하지 말고 나아만 일행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가게 되는데 나아만은 뜻하지 않게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엘리사라는 사람이 코빼기도 안비치고 종을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소리만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영접하지도 않고 얼굴도 안비치고, 물 한잔도 대접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아만을 무시하려고요? 나아만에게 복수하려고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나아만이 이해 못할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와 의도하심이 있습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잘못된 관념과 의심을 바뀌어야 됨을 알고 있습니다.
엘리사 앞에 설 때가지 나아만은 엘리사가 치유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은 엘리사가 존중히 자기를 영접한 후 선물을 받고 자기를 위해 열심히 아픈 곳에 손을 얹고 치유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행동에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무시하는 줄 압니다.
또한 자신의 나라에 있는 강은 요단강보다 더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바로 나아만의 잘못된 생각과 관념과 의식을 먼저 내려놓게 했습니다. 여러분? 치유는 하나님이 하시나요, 엘리사가 하시나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치유하시지 엘리사 자신이 치유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요단강에 무슨 나병을 치료하는 성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요단강에 치유성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자기 나라에 더 깨끗하고 좋은 강이 있다고 합니다. 강물이 치료하는 줄 압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만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새일을 행하십니다. 내 믿음 잘 저울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행스럽게도 같이 갔던 그의 종들이 나아만이 갖고 있던 잘못된 생각들을 내려놓게 합니다.
우리 또한 그동안 삶의 의식 속에 있었던 자기의 이론, 경험으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항상 내 경험이 앞서고 내 생각이 옳다는 많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의 사람들이 나아만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해줄 때 나아만은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사람의 생각을 내려놓고 결단을 갖고 움직여야 합니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할 때 그는 계급장을 달고 호화로운 마차에 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가 실제로 나를 믿고 치유받기를 원한다면 네가 갖고 있는 입고 있는 세상의 옷을 다 벗으라 명했습니다. 나아만이 옷을 하나씩 벗을수록 온몸의 냄새와 흉한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을까요. 그런데 그런 감정조차도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한번 씻어도 아무 상황이 없었을지도 몰라요. 두 번 씻어도... 그러나 일곱 번 씻고 나왔을 때 순식간에 하나님께서 그 중심을 하나님이 보시고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저는 암울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이때 하나님이 일하시기 좋을 때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이 어떻게 해 나가실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이 엄청난 영적자산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나를 통하여 새 일을 행하시고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아만과 어린소녀도 절망적인 상황속이지만 믿음의 본질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새 일을 행하시고 놀라운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여러분 현실적으로 볼 때 암울하고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