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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12월14일(월) 흐림
오늘 삭발목욕일이다. 삭발목욕하고 누워서 좀 쉬다. 그리고 티베트의 쫑카파(Tsongkhapa, 1357~1419)대사와 그의 중관의 관점에 대해 사유하다. 그의 관점은 歸謬論證귀류논증, prasangika프라상기카이다. 그는 제법은 연기적 산물(緣起所生연기소생)이기에 자성이 없다고 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空sunyata라고 한다. ‘제법이 스스로 공성을 지니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학파는 Svatantrika자립논증파이다. 그는 이 학파의 교설을 논파하면서, 勝義諦paramatha,진실제ultimate reality는 공임을 밝혔다. 그런데 空은 무엇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주장할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말한다.
Emptiness is the simple absence of inherent existence, true existence, occult entities, inherent identities, etc., as having any role in the arising or existence of any object or phenomenon.
空性공성이란 내재적인 존재가 다만 없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가령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일으키거나 존재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참 존재’, ‘신비한 어떤 것’, ‘내재적인 실체’ 등등 이런 건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학파나 사람들이 무엇을 주장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연기된 것, 형성된 것, 만들어진 것임을 상기시켜서 스스로 오류에 빠졌음을 지적해줄 뿐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자기의 오류를 각성하도록 이끄는 논증을 일삼는 학파라 해서 귀류논증파라 한다. 상대방이 집착하고 있는 소견을 다만 비우도록 만들뿐 자기들의 주장하는 관점이란 게 없다는 것이다. 너희들 전부는 공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나도 공이니, 이만 입을 씻고 침묵으로 돌아가련다. 이것이 귀류논증파의 관점이다. 반면에 자립논증파는 자기들의 입각처는 공이라고 적극적으로 밝히는 학파를 말한다. 말하자면 공의 교리를 천하에 선전하는 파이다.
점심 먹고 쉬는 데 서울에서 지월거사와 허윤정이 내려왔다. 石橋석교 건너 찻집에서 산중약차 한 잔씩 마시고 연기암으로 포행가다. 細雨세우에 촉촉이 젖은 돌길을 밟으며 죽림 사이로 난 오솔길을 가다. 큰 물보라를 일으키며 세차게 내려가는 계곡물을 감상하기고 하고 앞발과 뒷발 사이의 침묵을 듣기도 하면서 연기암에 오르니 절은 텅 비어있다. 사람이야 어딘가에 없겠냐마는 절 도량이 주는 느낌이 뭔가가 빠져있는, 공허한 느낌이다. 다시 되짚어 내려오다. 허윤정에게 智湖지호-지혜의 연못/Wisdom Lake라는 법명을 주다. 본사 객방에서 잠시 앉았다가 그들은 서울로 올라가고 나는 내 자리로 내려온다.
2015년12월15일(화)흐림
남산스님 방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한국불교의 미래는 어둡다. 불교신도들의 신심은 갈수록 떨어진다. 스님들의 질적인 수준이 낮아진다. 출가자는 줄어들고 있다. 우리는 50대와 60대 초반의 중진 스님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단 내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가? 아무 역할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선원에서 수행할 수 있는 기회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그 외는 아무 권리도 역할도 없다. 各自圖生각자도생이다. 각자 알아서 살라는 것이다. 우리들 끼리 힘을 모을 어떤 모임이나 조직도 없다. 선원수좌회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수좌회의 기득권스님들의 이익단체에 불과할 뿐 종단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종단 내의 모든 정책결정에서 우리는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그리고 신도들에게서 적절한 보시와 존중을 받지도 못한다. 왜? 총무원 권력승들의 부패한 모습이 널리 알려져 스님들에게 대한 보시와 존경심이 땅바닥에 떨어졌으므로. 그리고 우리 같은 중진들은 제자를 둘 만한 여건이 안 된다. 왜? 큰 절이나 말사에 거주할 수 있는 안정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므로, 상좌가 생길 여건이 조성되지 않는다. 더구나 젊은 층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니 그들이 출가하려는 마음 내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으랴? 따라서 앞으로 10년 후면 스님 수가 급격히 감소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상좌가 없고 앞으로 생길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승가는 세대가 단절될 것이다. 총체적으로 판단해 보면 다음 세대의 불교가 어떻게 되리라는 일말의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들이야 어느 정도 스님생활 잘 하고 이 땅에서 사라지면 되겠지만, 다음 세대의 불교는 어떻게 될까? 다음 세대 스님들은 어떻게 살게 될까? 과연 한국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될까? 식어가는 화롯불처럼 불빛이 점점 희미해져 가다가 마침내 꺼지게 될까? 우리 같은 중진 스님들이야말로 다음 생에도 한국에 다시 태어나 불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원을 발해야 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불교가 융성한 남방불교권이나 티베트불교권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지 한국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만 그런가? 아마도 의식 있는 다른 스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한국불교의 미래는 암담하다. 한국에서 불교가 없어진다고 해도 누가 안타까워하고, 누가 걱정이라도 하겠는가? 모두다 손을 놓고 있다. 吾不關焉오불관언. 나와는 상관없는 배부른 이야기로 여긴다. 불교의 흥망성쇠도 중생의 업의 소치이니, 한국 사람들이 불교를 아끼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한국 땅에서 불교는 사라지리라. 그리고 이교도와 유사불교가 판을 치리라. 그런데 한국 불교만 사정이 이렇지 세계 다른 나라의 불교는 더욱 흥성할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빛은 동방에서 온다고 했는데 이제 그 빛이 동방에서 사라지려 한다. 우리는 저물어 가는 佛日불일(불교라는 해)을 바라본다.
2015년12월16일(수)때때로 눈
오전 정진 끝날 즈음 눈송이가 공간을 가득 채우며 날린다. 오늘 점심공양은 짜장면이다. 맛있게 먹고 선방으로 올라오니 곧 눈이 멎었다. 하늘은 다시 씻은 듯이 맑아진다. 저녁 먹으러 큰 절로 내려가려 하니 눈발이 천지에 가득하다. 변덕스런 눈이지만 즐겁지 아니한가. 눈송이는 살갗에 닿아 눈물이 된다. 왜, 무엇 때문에 나에게 달려와 눈물을 보이느냐? 네가 아직도 몸에 갇힌 신세로 살고 있지 않느냐고 운다. 사통팔달 툭 트인 공간가운데 한 덩어리 육신을 붙잡고 살아가니 꼭 풀잎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귀신(依草附木精靈)과 같지 아니한가? 망망대해 가운데 떠다니는 나무토막을 붙들고 큰 바다를 건너려는 짓과 같다. 나무토막을 놓아버려라, 바다에 푹 빠져라, 왜 꼭 어디에서 어디로 가려고 설치느냐, 그냥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푹 빠져버려라. 그러면 통째로 바다가 되어 살리라. 하늘에서 하얀 눈꽃이 피어나 바람에 날린다. 눈은 마음이 지어낸 개념이다. ‘눈인 것’과 ‘눈 아닌 것’의 구별이 어디서 생겨났는가? 무엇을 ‘눈’이라하는가? ‘눈’은 연기적 산물이다. 그럴만한 조건, 緣이 바탕이 되어 ‘눈’이란 현상이 생겨났다가 조건緣이 변하거나 사라지면 ‘눈’이란 현상은 없어진다. 그러기에 눈은 自性자성이 없다. 눈은 ‘꼭 눈이어야 하는 것’이 없다. 눈을 이루고 있는 불변하는 실체가 비었다. 그러나 눈이 눈으로 머무는 동안에는 눈으로 경험된다. 아, 눈이 나리네. 살바토르 아다모(Salvatore Adamo)의 노래가 눈에 날린다.
Tombe la neige 똥블라 네쥬
Tu ne viendras pas ce soir 뛰느 비앙드하 빠 쓰 쑤아흐
Tombe la neige 똥블라 네쥬
Et mon coeur s'habille de noir 에 몽껴흐 싸비드 누 아흐
Ce soyeux cortege 쓰 쑤아여 꼬흐테쥬
Tout en larmes blanches 뚜 떵 라흠 블렁슈
L'oiseau sur la branche 루아조 씌훌라 브헝슈
Pleure le sortilege 쁠러흐 르 소흐띨레쥬
눈이 내리네,
당신이 가버린 지금
눈이 내리네,
외로워지는 내 마음
비단 같은 행렬
온 세상은 하얀 눈물로 가득하고
가지 위에 앉은 새는
절망을 울부짖네.
2015년12월17일(목)맑음
새벽꿈에 공룡을 보았다. 포학한 것이 아닌 온화하게 보이는 공룡이 내 옆을 지나가는데 그 꼬리가 내 몸을 누르니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공룡이 내 앞으로 걸어 나가며 시야를 멀리 두고 서있다. 인터넷 해몽을 찾아보니 공룡은 용이라, 용꿈을 꾼 것이니 길몽이라 한다.
바람이 부니 온 산에 쌓였던 눈을 날려 보낸다. 눈보라가 하얀 파도 같이 일어난다. 앞산도 따라서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계여, 가벼워져 한 마리 학처럼 날아가라. 그래서 莊子가 一擧鵬搏萬里天일거붕박만리천이라 했다. 대붕 새가 한 번 날개 짓을 하니 만리 하늘을 날아간다고. 大鵬대붕은 세계에서 해탈한 존재가 노니는 자유로운 경지를 상징하는 말일 것이다. 나날이 가벼이 지나간다. 할 일이 없다. 저녁에 방선하고 돌아오니 반달이 지붕위에 걸렸다. 티베트 스님 카르마 디Karma D가 스리랑카 불교성지 순례 왔다가 서울에 잠깐 들렀다 간다고 메신저에 소식이 와있다.
2015년12월18일(금)맑음
옆방 스님이 예전에 합천 초계에 살았던 유학자 秋淵추연 권용현(權龍鉉, 1899~1988)선생을 모시고 한문 공부했던 이야기를 한다. 사서삼경과 당시, 고문진보를 배웠다한다. 그런데 언젠가 적정처에서 주역(周易) 계사(繫辭)를 3천독을 해보고 싶다는 원을 토로한다. 아쉽다. 주역 계사에 아무리 현묘한 도리가 깃들어 있다한들 욕계중생의 전변설일 뿐인데, 출가자가 그런 하찮은 원을 품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부처님 가르침을 구해도 모자랄 터인데 스님이 되어가지고 겨우 주역계사를 독송하고 싶다니, 어찌된 일인가? 외도의 학문이 아무리 현묘하고 수승하다해도 불자는 그것을 교양정도로 인정할지언정 찬탄하며 추종해서야 되겠는가?
지금 눈에 보이는 네 몸과 세상을 實실로 여기느냐, 幻환으로 보느냐? 여기에 대한 답이 가슴에서 흘러나와야한다. 진실로 그렇다. 몸과 세계를 환으로 본다는 말은 몸과 세계가 외계에 실재한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자성이 없는 無自性무자성 즉, 空性공성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몸과 세계에 묶여서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몸과 세계를 厭惡염오, 離欲이욕한다. 일체의 욕을 떠나야 한다. 말하자면 몸과 세계에 대한 정이 다 떨어졌다. 배신하고 떠난 여자를 다시는 돌아보지 않듯 아끼고 애착할 이유가 전혀 없다. 속 시원하고 홀가분하다. 몸과 세계여, 안녕. 너는 그냥 물속에 잠긴 달이야, 너는 허공 속에 핀 꽃이야. 있는 듯 하지만 만져보면 없어. 나의 몸과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水月空華수월공화처럼 본다 쳐도 다른 사람과 세상은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 역시 수월공화이지만 무반응하거나 냉담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무량심으로 포용하고 자비관을 닦으라. 안으로 자기를 향해서는 반야검을 들이대고 바깥으로 중생을 향해서는 자비를 비추라. 외유내강이다. 월타추담기춘풍 月墮秋潭起春風. 보름달이 가을 연못에 잠기니 봄바람이 일어난다.
2015년12월19일(토)맑음
아침 7시 아직도 깜깜한데 마당 쓸러간다. 매주 토요일은 도량 청소하는 날. 결제하고 처음 도량 청소한다. 石橋석교를 지나 부도탑까지 내려갔다 돌아오다.
2915년12월20일(일)비
몸을 ‘나’인 것으로 알고, 외계를 실재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사견이다. 이런 고정관념이 떨어지지 않은 채 생각하는 모든 견해는 사견이다. 사견을 놓아버리고, 놓아버리는 것까지 놓아버려야 中이다. 中이란 양쪽으로 갈라진 견해가 모두 틀렸다는 걸 말한다. 가령 苦와 樂, 有와 無(斷과 常), 一과 異, 自作과 他作 등등. 中majjhima의 길pada을 가는 것을 中道중도라 한다. 중도, 한 생각이라도 붙잡으면 벌써 그르친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한 티끌도 붙잡지 않아 순결하고 여일하게 나아가라. 행자여. 雪野설야를 달리는 순록처럼. 그러나 저러나 눈이 올 듯한 날씨인데, 너무 푸근하여 비가 내린다. 오늘부터 동지기도에 들어간다. 각황전에서 입재하였다.
2015년12월21일(월)흐림, 간간히 가는 비
간간히 가는 비. 앞산은 운무에 싸여. 안개가 골골에서 피어올라. 만상이 하얀 백지위에 그림을 그리며 움직인다. 고요한 움직임. 움직이는 고요. 그림이 살아서 그려진다. 만법이 통 째로 굴러가는 데 무얼 하러 부분으로 조각내어 ‘내 몸’이니 아니니, 여기까지 ‘내 것’이요, 저기부터는 ‘다른 것, 남의 것’이라 분별하겠느냐. 조각난 것을 들고 전체를 담아내려니 자체모순이다. 전체는 어떤 하나로 환원(환원주의)되거나, 단일화(단일주의라는 邊見변견)시켜 말할 수 없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 적도 없고, 한 물건이 만법을 總攝총섭하는 것도 아니다. 흔히들 만법이 一心일심, 한 마음의 나타난 바(一心之所印)라 한다. 그러면 그 일심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원인도 이유도 없이 그저 本來본래부터 있어왔다고 하겠지. 그러나 본래라 말하기 시작하면 순환론적 오류에 빠진다. 그런데도 계속 고집한다면 그건 진리를 찾는 자가 취할 바가 아닌, 고지식한 놈의 우격다짐일 뿐이다. 그러니 무슨 특별한 한 가지를 가져와서 모든 현상을 일거에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 만사를 속편하게 해결하는 쉬운 방법 같지만 그건 결국 치명적인 오류와 자체모순으로 실패하고 만다. 중국에서 기원한 모든 철학이나 사유가 그렇다. 중국적인 사유는 모두 전변설 아니면 적취설이다. 중국적 사유는 도대체 緣起연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불교는 中觀중관을 진지하게 공부한 적이 없다. 이렇게 불교의 토대가 부실하니 격의불교, 삼교원융이니, 선, 돈오 등등과 같은 통속적으로 중국화된 불교가 횡행한다. 한자문화권의 불교는 부처님 그분과 가르침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았다. 모두 자기 나름대로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서 그걸 불교라 여기고 떠들었다. 번역은 정교한 오해라고 한 것처럼 중국불교는 오해된 불교이다. 옛날에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졌었고, 언어적 장벽이 높았기에 불교원전이 중국으로 직수입되어 바르게 번역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지금같이 세계화된 세상에서는 빠알리어와 산스끄리뜨어 경전을 한글로 바로 번역되어 될 수 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번역되어 나왔다. 그리고 중관학은 티베트장경에서 바로 번역하면 된다. 이 작업은 아직 요원하다. 한국 불교는 1700년 역사를 운위하는 것은 정직한 말이 아니다. 제대로 된 불교를 시작한지 얼마나 됐을까? 아니 시작이나 하기는 했을까? 우리가 과연 불교를 공부하기는 했을까? 우리가 불교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불교를 어느 정도 안다고 하는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제 까지 알던 불교는 모두 소문으로 들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 카더라’는. 그리고 제 생각으로 이리저리 짜 맞춘 보따리 장사 불교가 아니었던가? 보따리 장사 불교라니? 사람을 끌어들여 인기와 돈을 얻고 권력을 누리려는 장사꾼들이 불교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건 佛敎가 아니라 욕의 때가 묻은 不敎이다. 이 밤에 홀로 앉아 부처님께 송구한 마음이다. 나는 불교를 아는가? 나는 부처님을 아는가?
저녁에 동지 팥죽을 끓일 때 넣을 새알을 빚었다. 대중 울력이다. 一陽일양이 初動초동하여 地雷復지뢰복이라. 주역에서는 동지를 지뢰복 ䷗ 괘(卦)로 표현한다. 위에는 곤(坤)괘이고, 아래에는 뇌(雷)괘이다. 위에는 땅이고 아래에는 우레가 있는 형국이다. 땅 밑 깊은 곳에서 우레가 움직이고 있다. 육효(六爻)로 보면 위의 5개는 전부 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맨 밑바닥에 한 가닥 양이 있다. 천지가 온통 칠 흙 같은 밤 부싯돌을 때려 불을 일으켜라. 광대한 어둠 속에서 반짝 불똥이 튄다. 이게 지뢰복 괘이다.
기뻐하라. 운세가 바닥을 친다. 낮고 낮아져서 더 낮은 곳이 없어졌다. 이제 부터는 떨어질 낮은 곳이 없으니 올라갈 길만 남았다. 부활이다. 새 출발이다.
2015년12월22일(화)맑음
나이가 아무리 먹어도 철이 들지 않으면 항상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수행한다고 뭐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다. 나이만 먹은 어떤 스님들을 보고 느낀 생각이다. 수행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고 수행을 한다. 이건 탐진치를 그대로 둔 채 외양으로만 좌선한다고 앉아있는 것이다. 안으로 썩은 상처를 그대로 둔 채 겉으로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는 짓이다. 자기 스스로 상처 난 곳을 알아보고 손을 쓰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낫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어떤 간 큰 스님은 탐욕과 교만에 배가 부풀려진 개구리마냥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냐면서 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도 하고, 법계가 眞心진심뿐이라면서 껄껄껄 너털웃음을 짓는다.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여 벌어진 엄청난 착각이다. 도대체 진지하게 공부를 하지 않는다. 초등학생이 겨우 공부를 시작하여 몇 년 배우고는 ‘근데, 결론이 뭐지? 핵심은 뭐지? 가장 빨리 가는 지름길은 뭐지? 단기 속성 과정은 없나?’라고 꼼수를 부린다. 그런 학생이 많이 나오니까 그에 영합하는 어떤 스승은 ‘불법을 한마디로 말하면....’하고 주절거린다. 뭐, 특별한 비결을 알려주기라도 할 듯이. 불법의 비결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 마음에서 탐진치 삼독심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알아차릴 것이 요구될 뿐, 그 외의 비결은 없는데도 딴 데에서 무엇을 찾고 있다. 그런 사람이 하는 짓은 모두 욕의 몸부림이지 수행이 아니다. 똥을 싸서 뭉개는 일이지 똥 밖으로 나오려는 사람이 아니다. 똥을 뒤집어쓰고는 똥 덩이를 들고 ‘이 주장자 도리를 아느냐?’고 소리친다. ‘이 손가락을 누가 움직였나, 네가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한 것도 아니니, 누가 이 손가락을 움직이나? 빨리 답을 찾아 가지고 오너라!’ 이런 말을 하는 품세를 보라. 천하의 불법이 모두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건 똥 싸는 소리다. 그건 불교와 아무 관계가 없는 귀신 방귀 끼는 소리다. 이런 것들이 광대한 불법세계의 변방에 치우친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다. 그 밖에 末流말류 外道외도가 얼마나 설치고 있는지 말할 수조차 없다.
Not coveting a single thing is the greatest gift you can give to the universe.
한 물건도 탐내지 않은 것이 네가 우주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Practice means asking with your whole being the question “What can I do right now for the Buddha way?”
수행이란 네 존재전체로 ‘지금 붓다의 길을 어떻게 행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It isn’t enough to hit the bull’s-eye once. Last year’s perfect marks are useless. You’ve got to hit the bull’s-eye right now.
과녁을 한 번 맞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작년에 얻은 완벽한 점수는 쓸모없다. 지금 당장 너는 과녁을 맞혀야 한다.
2015년12월23일(수)흐림
오늘 보살계 포살하는 날. 각황전에서 대중이 모여 보살계 포살을 한다. 10중 대계와 48경구계를 합송하다. 오후 정진을 쉬다. 도향스님과 포행하는 길에 티베트 불교 Gelugpa겔룩파의 강원14년 과정에 대해 묻다. 도향스님과는 2002년 보드가야에서 만나 도반의 인연을 맺었었다. 스님은 그후 티베트어를 배우기 위해 라싸 대학에 다녔고, 인도 남부 문곳Mundgod에 있는 데풍Drepung대학에 다니면서 힘들었던 중관학의 과정을 이수했다. 좋은 도반을 갖는다는 것은 기쁘고 희유한 일이다. 한 쪽 바다에만 맴돌던 배가 새로운 대양을 만난 것과 같다. 더 넓고 큰 바다로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티베트 정통 불교의 큰 바다가 열려온다.
2015년12월24일(목)흐림
삭발목욕일이다. 建海건해스님(36세, 승랍9년, 노현스님 상좌)이 삭발해주고 雲性운성스님(본사 화엄사, 53세, 승랍9년)이 등을 밀어준다. 구름의 숲 위로 피어오른다.
靑谷煙霧白, 청곡연무백 푸른 골에 하얀 안개 서리고
雲起山神覺; 운기산신각 구름 일어나니 산신이 깨어난다.
방에 돌아와 누웠더니 문아보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단송거사와 함께 화엄사로 출발한다고.
점심시간에 무설과 소향, 단송과 문아, 두 부부가 모두 법당 앞에 모였다. 공양을 하고 객실에서 차 한 잔을 나눈 후, 緣起庵연기암으로 포행가다. 대 숲 지나 돌길을 밟으며 안나푸르나를 다녀온 감상을 듣다. 세계란 나에 의해 인식된 것이기에, 널리 깊이 두루 다니면 인식된 경계가 다양하고 풍요로워진다. 모든 경험은 세련되어 精髓정수를 향해 진화해간다. 그 최종 결과는 무엇인가? 無形想, 無願, 無限, 無爲이다. 글쎄, 말로 하니 이렇지, 아는 사람은 직관적으로 안다. 사람에 따라서는 히말라야 설산이나, 망망대해, 혹은 암흑으로 밀봉된 동굴, 천 길 낭떠러지, 천년 고목, 거대한 붉은 바위, 광막한 사막, 도도히 쇄도하는 장강대하...이런 풍광들이 영적인 경계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경계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입문자이며, 영적인 순례의 길을 떠난 자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띄지 않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無想, 無願, 空으로 입문하기도 한다. 의식이 안으로나 수렴되거나, 바깥으로 확장되거나 간에 世俗諦세속제를 꽤 뚫고 眞實諦진실제를 만나게 된다. 이는 더할 수 없는 축복이다.
연기암에 닿아 제일 뒤쪽 후미진 곳까지 오르니 관음전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관세음보살께 참배하고 내려와 절 입구에 있는 <흰 구름 머무는 카페>에서 차담을 나누다. 이렇게 시간은 가고, 돌다리에서 합장하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지다.
밤에 호연거사에게서 명상센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렇게 하자고 결정했다. 日日是好日, 나날이 좋은 날이다.
첫댓글 동안거 수행일기, 늘 기다려지는 글 입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하고 솔직한 표현에 공감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국불교의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예리하게 지적하였습니다. 또 재가불자들로서는 알 수 없는 스님들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 있었습니다. 사실 재가자들은 스님들 이야기를 좋아 합니다. 재가자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 가는 스님들세계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이지요.
글을 읽고한편으로염려 되고 또 한편으로 가느다란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시대가 변했다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승가에서 구시대적 방식을 고수한다면 희망이없겠지요. 그러나 의식있는 스님들과 재가자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이 결국 한국불교를 바꾸어 갈 것 입니다. 앞으로 한세대 후에 한국 불교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 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것에 희망을 걸어 봅니다.
감사합니다.~^^
스님_()_()_()_ ^^
늦은 밤 홀로 앉아 진정 불교를 아는가? 부처님을 아는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스님의 물음 앞에 오늘 하루를 그냥 보내고 있는 부끄러운 저를 되돌아 보게 됩니다.
일정하게 짜여진 직장 생활에서 방학을 하고 며칠은 방일하게 그냥 쉬고 나니 많은 시간들을 어떻게 채워야 하나 고민이 들면서 이것 저것 기웃거렸습니다.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기도 부족한 시간이라고 하신 것처럼
하루의 시간을 싸띠의 과녁에 맞추는 노력으로 지내야겠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오직 사무량심으로 포용하고 자비관을 닦으라, 안으로 자기를 향해서는 반야검을 들이대고,
바깥으로 중생을 향해 서는 자비를 비추라. 외유내강이다..... 스님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