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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1(주일) 욥기 6:14~30 ‘진정한 위로’
우리는 위로받기를 원하나 상처를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가까운 사람이기에 더 상처받고 아파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심하면 그와 단절하기도 합니다. 상처받은 자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위로 역시 쉽지는 않습니다. 욥의 고난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 가장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고난입니다.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게 되고 아내는 남편을 질책하며 떠나고 온 몸에는 병이 들었습니다.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오지만, 그들의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욥에게 고통과 상처를 줍니다. 오늘은 욥기 6:14~30절 본문을 통해 ‘진정한 위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1. 개울과 같이 변덕스러운 위로(15절)
욥은 친구들의 위로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다고 말하며(15절), 진정한 위로의 부족을 비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친구들의 태도에 대한 불만을 넘어, 거짓된 위로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개울은 계절과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가뭄에는 말라버리고, 요즘과 같은 폭우에는 범람하기도 합니다. 이는 변덕스럽고 신뢰할 수 없는 위로를 상징합니다. 개울과 같은 사람은 오늘은 위로를 아끼지 않지만, 내일은 잊어버리고, 심지어 비난하는 자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개울물은 갈증을 해소하기에 부족합니다. 오히려 일시적인 시원함만 주고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는 깊은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상처가 치유되고 희망이 생기게 됩니다. 단순한 말이나 행동으로는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없습니다. 개울과 같이 변덕스러운 위로는 오히려 상처를 더 크게 만들고, 절망감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의 경험에서 진정한 위로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지체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베풀기 위해서는 깊은 공감과 이해, 그리고 꾸준한 동행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도 개울과 같은 변덕스러운 위로에 속지 않고, 진정한 위로를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적용) 힘든 사람을 위로할 때 나는 상황에 따라 말하는 변덕스러운 위로자입니까? 깊은 공감과 이해에 바탕을 둔 진정한 위로자입니까?
2. 유익이 되지 못하는 텅빈 위로(21~23절)
욥은 친구들의 위로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그의 말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표현을 넘어, 유익이 되지 못하는 텅빈 강정과 같은 위로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심각한 상황을 보고 지레 겁을 냅니다. 욥에게 가해진 하나님의 형벌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욥의 질병이 전염되진 않을 지, 또는 욥이 자신들에게 재물을 달라거나 원수를 갚아달라고 할까봐 겁이 난 것입니다(22,23절).
친구들은 욥의 중심을 보기보다 그의 바뀐 상황만을 보고 욥을 정죄했습니다. ‘너의 고난은 너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어서 하나님께 너희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라!’ 욥에 대한 그들의 우정,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 판단과 신앙은 개울에 빠져버렸고, 개울이 말라버릴 때 함께 증발하여 사라져버렸습니다. 결국 친구들은 욥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텅빈 말은 욥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처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욥의 친구들처럼 욥과 그의 고난을 보며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겪는 자들과 함께 아파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고 공감하시는 분이십니다(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장 15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는 대제사장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연약함"은 육체적, 영적, 정서적 약점을 모두 포함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다양한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통과 시련을 겪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체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체휼’은 ‘공감하고 동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우리가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죄를 제외한 모든 시험을 겪으셨지만, 결코 죄를 지으시지 않으셨음을 명시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시련을 이해하시고 공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함께해주시는 분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약점으로 인해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믿어주시고 용기를 북돋아주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은혜와 용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를 선사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고통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시는 것을 기억합시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고난을 함께 나누고 아파해주시는 분입니다(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마태복음 28장 20절은 우리의 고난 속에 함께하시고 함께 아파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우리 곁에 계시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주십니다.
"세상 끝까지 항상"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약속’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으며, 우리가 처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녀의 아픔을 함께하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우리의 고난을 보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성장시키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성장시키고 영적으로 강하게 만들려 하십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늘 돌보아주시고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한 고난에 대한 깊은 아픔’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로 인해 세상에 고난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은 아픔을 느끼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영원한 평안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나 혼자가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시며 우리의 아픔을 함께 느끼시며 나누어주신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약속을 보여주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용기를 얻고 희망을 가지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적용) 지금 내가 함께 아파하며 같이 있어주어야 할 지체는 누구입니까?
3. 정죄로 인해 고통을 주는 위로(24~30절)
욥은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근거없이 하는 옳은 말이 사람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아느냐고 책망합니다(24절). 고난을 죄의 결과라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할 뿐입니다.
옳은 말을 한다고 다 맞는 말은 아닙니다. 사탄도 얼마든지 옳은 말을 합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탄이 인용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사탄도 성경을 인용해서 말합니다. 그렇다고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며 말한 것이 맞는 말은 아닙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 즉 옳은 말을 가지고 예수님을 죄로 유혹하는데 이용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아무리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해도 그 말씀을 가지고 다른 누군가(교인들)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결코 옳은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욥기에 나타난 욥의 친구들의 논쟁적인 주장은 거의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맥을 정확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욥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황에 맞지도 않는 말씀들을 우리들이 잘못 끌어다 쓸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정죄는 욥의 상처를 더욱 악화시키고, 그의 고통을 증폭시킬 뿐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친구들의 정죄는 욥에게 절망감을 주고, 삶의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욥의 친구들은 그를 비난하고 공격하면서 그와의 관계를 악화시킵니다. 진정한 위로는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위로자가 되려면 정죄와 책망의 말보다는 친절한 말을 해야 합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 16:24) 이 말씀은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사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꿀송이 같은 선한 말’에서 꿀송이 처럼 달콤한 말은 쓴 마음을 달래주고 위로를 선사합니다. 마치 고단한 여정을 하는 사람에게 달콤한 과일이 되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꿀송이 같이 선한 말은 상처받은 마음에 영양을 공급하고 치유를 촉진합니다. 상처입은 자에게 긍정적이고 격려하는 말은 희망이 불러 일으키고 다시 일어설 힘을 줍니다. 여기서 ‘선한 말’은 은혜롭고 매력적이며, 아름다운 말, 즉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적용) 나는 말씀으로 먼저 상황 파악을 한 뒤에 위로합니까? 옳은 소리만 합니까?
[큐티인묵상간증] [진정한 위로자, 이상욱]
어린 시절 소심하고 겁이 많던 저는 교우관계가 어려웠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따돌림을 당하는 일을 계기로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되었고, 특히 친구들에게 인정받고자 애쓰며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착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내 감정을 숨기다 보니 겉으로는 관계가 원만해 보여도 어느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진 못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학할 대학을 정해야 하는 시기에 진로를 정하지 못해 삼수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스트레스가 심해져 감상샘 안병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반복되는 대입 낙방과 육체의 질병으로 낙심이 된 저는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금세 말라버리는 개울처럼 신실하지 못했습니다(15절). 그들은 제게 “교회에 다니는 데 왜 대학도 떨어지고 몸도 아프냐? 넌 일이 잘 안풀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 일로 마음이 상한 저는 한동안 친구들을 만나지 않고 힘든 상황을 주신 하나님만 원망했습니다.
그러다 저는 청년부 소그룹 리더의 권면으로 공동체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안에 두려움만 가득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반복되는 낙방과 질병이 내 안의 두려움의 죄성에서 비롯된 형벌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요일 4:18). 이렇게 말씀으로 제 삶이 해석되자 따돌림당한 사건이 내 죄를 보기 위해 있어야 할 일이었다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도 들어가고 육체의 질병도 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어도 여전히 믿음이 약하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자는 오직 예수님뿐임을 기억하며 “사람의 인정은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고백하며 가겠습니다(21절). 앞으로도 사람의 인정을 갈구하는 마음을 경계하고,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적용하기) 큐티한 내용을 일주일에 한번 이상 청년부 소그룹 SNS 대화방에 올리겠습니다. 인정중독으로 힘들어 하는 지체들에게 말씀으로 위로를 전하고 권면하겠습니다.
결 론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은 사람의 위로를 구하며 자기 의를 드러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최덕신 님이 부른 ‘동참’ 이라는 복음성가 가사입니다.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너 고통당할 때 너 고통당할 때 주님이 너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고
너 짐지고 갈 때 너 짐지고 갈 때 주님이 너의 짐을 가볍게 하시며
너 슬플 때에 너 슬플 때에 주님이 위로의 눈길로 너와 동행하신다
너 외로울 때에 너 외로울 때에 너 어찌 홀로 있다 하는가
너 괴로울 때에 너 괴로울 때에 너 어찌 혼자 있다 하는가
너의 모든 것을 동참하시는 주님을 너 바라보라
너 고통당할 때 너 고통당할 때 주님이 너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고
너 짐지고 갈 때 너 짐지고 갈 때 주님이 너의 짐을 가볍게 하시며
너 슬플 때에 너 슬플 때에 주님이 위로의 눈길로 너와 동행하신다
너 외로울 때에 너 외로울 때에 너 어찌 홀로 있다 하는가
너 괴로울 때에 너 괴로울 때에 너 어찌 혼자 있다 하는가
너의 모든 것을 동참하시는 주님을 너 바라보라
너 외로울 때에 너 외로울 때에 너 어찌 홀로 있다 하는가
너 괴로울 때에 너 괴로울 때에 너 어찌 혼자 있다 하는가
너의 모든 것을 동참하시는 주님을 너 바라보라
너의 모든 것을 동참하시는 주님을 너 바라보라
너의 모든 것을 동참하시는 주님을 너 바~라~보~라~~♡
어떤 고난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주어지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진정한 위로자가 되기 위해서 현실적인 적용입니다. 1) 경청하기: 고난당하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고통을 공감합니다. 2) 동행하기: 혼자서 고난을 겪지 않도록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3) 도움주기: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고 필요한 것을 제공해줍니다. 4) 기도하기: 함께 기도하며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바라기는 고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 진정한 주의 위로를 전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