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께서는 꼭 기도할 것을 당부하신다. (기도하는법을가르쳐주십시오 p1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삶이 어려운 시련에 맞닥뜨릴 때 그것을 잘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기도를 당부하셨다. 또 어떤 문제들은 너무나 벅차고 힘겨워,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시기에, 이러한 약점, 나약함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기도를 하라고 명하셨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7~1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기 위하여 기도 안에 안주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생활 태도가 아니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자신을 개방하고 우리의 문제를 당신 앞에 가지고 나가, 나의 의견과 욕심을 접어 두고 하느님의 뜻을 기도 중에 찾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삶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고 기도 안으로 도피하여 심리적인 안식을 누리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신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 (명상의씨 토마스머튼 p146-149)
21. 마음의 흩어짐 : 기도와 사랑을 배우는 것은 기도를 할 수 없게 되고 그대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졌을 때다.
그대가 한 번도 마음의 흩어짐을 겪어 보지 못하였다면 그대는 기도할 줄을 모른다. 기도의 비결은 하느님께 대한 목마름, 하느님을 보고 싶어하는 목마름, 언어나 애정의 선(線)보다는 훨씬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목마름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기억과 상상이 자꾸만 쓸데없고 나쁜 생각과 영상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이 때로는, 그 마음이 맑은 개념과 빛나는 목적과 손쉬운 사랑의 정을 자유로이 헤엄쳐 다니는 사람보다 갈갈이 찢긴 마음의 깊은 데서부터 훨씬 잘 기도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마음이 흩어짐을 시원스럽게 가다듬지 못할 때 안달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첫째, 이는 기도의 생활에서 흔히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헛되고 거친 영상이 밀려드는 조수(潮水)의 물결에 무릎을 꿇고 잠겨야 하는 것은 명상 생활에서 표준이 되는 시련 중의 하나다. 그대가 만일 책을 써서라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움켜 쥐듯이, 그 글월을 꼭 붙잡고 이를 모면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특전(特典)도 있지만, 만일 그대의 기도를 단순한 영적 독서에까지 떨어지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대는 많은 열매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근기 있게 마음의 흩어짐에 저항하면서 그대의 무능, 무력함을 배우는 편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만일 그대의 책이 하나의 마취제밖에 되지 않는다면 묵상을 돕기는커녕 아마 망쳐 버릴 것이다.
마음이 흩어지는 까닭을 하나 들어 보면 이러하다. 지능과 기억과 상상이 묵상에서 하는 일은 그대의 의지를 그 대상 곧 하느님 앞에까지 이끌어 주는 것뿐이다. 이제 그대는
몇 해 동안 묵상을 실행해 왔으니, 기도하려고 맘을 가다듬기만 하면 금방 말없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한 가지 생각에다 그대의 의지를 가라앉히는 것쯤은 저절로 되다시피 하는 가장 쉬운 일이다. 따라서 지능이나 기억이나 상상은 참으로 스스로 할 일이 없다. 의지는 바쁘지만 이것들은 일이 떨어졌다. 그래서 얼마 지나면 그대의 무의식적 지능이 삐꺽 열리고 온갖 신비스런 형체들이 막 쏟아져 나와 눈앞에서 우쭐우쭐 춤추기 시작한다. 그대가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이따위 것들에는 조금도 마음 쓰지 않
을 것이다. 이따금 먼 배경에서 휘청거리는 이 활동 사진의 그림자가 그대를 괴롭힐지라도, 그대의 뜻은 꾸밈없는 바람으로 평화스럽게 하느님께로 향하고, 하느님 앞에서 꾸밈없는 마음을 가다듬고 있으라.
거룩한 사람들이 몹시 무서워하는 유의 마음의 흩어짐은 보통으로 그중 가장 해롭지 않은 것이다. 때로는 신심 있는 남녀들이 묵상 때에 자기네의 상상이 어쩔 수 없이 빚어 내는 나쁘고, 어떻게 보면, 바보스런 웃음 거리밖에 안 되는 환상에 '동의'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들이 괴로워하는 가장 큰 까닭은 그들의 필사적 노력이 이 영상(影)의 대열을 막기는커녕 도리어 신경 쇠약을 일으키기 때문에 처지를 백 배나 더 악화시킬 따름이다.
그들이 익살스런 맘씨를 가진 적이 있었다면, 지금 와서는 익살한테도 버림을 받을 만큼 신경질이 돼 버렸다. 하지만 익살은 아마 그런 때일수록 가장 도움이 되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데에는 진짜 위험이 없다. 정말 해로운 마음의 흩어짐은, 우리의 의지를 깊고 평화스런 하느님에 전념에서 마구 끌어내어, 날마다의 일과 중에 우리에게 관한 계획들을 세우는 일에 휩싸이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를 끌어 몰두케 하는 사태에 직면하여 있으며, 우리 묵상이 깨어져서 맘속으로의 편지쓰기나 설교나 연설이나 책이나 심하면 돈벌 궁리나 건강을 돌볼 생각에 떨어질 위험이 상당히 크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을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언제나 그의 지위가 무엇인가를 머리에 떠오르게 할 것이며, 바깥 일에
너무 휩싸이지 않도록 일깨워 주어야 할 것이, 그대가 만일 묵상 시간이 아닌 때에 일의 압력을 덜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에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그대의 마음에서 깨끗이 떨어 버리려 함은 쓸데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있어서 기도의 본질이 되는 것은 기도하려는 의지이며, 마음 둘 바는 오직 임을 찾아보고 사랑하려는 열망뿐이다. 그대가 임을 알고 사랑하기를 열망했으면 그대의 할 바를 벌써 다한 셈이다. 또한 임의 뜻과의 합일에 들어가기를 열망하지 않으면서, 임께 대하여 놀라는 생각들을 해내는 것보다, 임을 똑똑히 생각할 수는 없을지언정 임을 열망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