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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변혁적리더쉽 | 카리스마 | 유사거래적리더쉽 | 자유방임적리더쉽 | |
김성중 | 링컨은 자신을 욕했던 사람들을 찬양하게만들고 링컨은 그들에게 존경과 신뢰감을 갖게 되는것에 대해서 변혁적 리더십을 알수 있다.예를 들어 그를 멍청이라 욕했던 스탠턴은 링컨이 암살당한뒤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이세계가 지금까지 본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여기 누워있구나"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링컨 대통령이 스탠턴 국방 장관과 함께 맥클레런 장군을 만나러 야전 사령부에 가서 기다렸습니다.사무실에서 기다려도 장군이 나타나지 않더니 그의 부하가 와서 장군은 너무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했습니다.화가난 스탠턴이 말했습니다."대통령 각하, 저런 무례한 놈은 처음 봤습니다. 당장 파면시킵시다." "아닙니다.맥클레런 장군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기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입니다.만일 장군 때문에 전쟁이 조금이라도 빨리 끝날 수만 있다면 나는 그의 말 고삐를 잡고 그의 군화도 닦아줄 수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대통령 자존심을 희생하면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볼수 있다. | 링컨은 자신의 정적을 국방부 장관에 올리는 대신 그에게 충성을 받는 것을 보아 거래적 리더십을 알수있다. | 링컨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은 과감하게 그일 잘 할수있는사람에게 넘기고 그에대한 결정을 하는 자유방임주의 리더십을 보였다. |
김기민 | 링컨은 끊임없이 설득하는 행동으로 노예해방을 이끌었다 | 링컨은 책임있는 자세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 링컨은 적치적 수완이 뛰어나 미국국민을 하나로 모았다 | 링컨은 민주적 지도자이다 |
송민우 | 대통령에 올라서 지금 같은 사회구조는 안되겠다는걸 인지하고 노예해방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 오바마는 자신을 욕하는 사람조차 나라에 도움이된다면 휘하에 거느리는 희생정신을 보여주기도하였다 |
링컨은 어릴적부터 여러가지 종류의 일을 해왔기때문에 거래적리더십 비용-효과에대해 잘알았을것이므로 충분히 정치에 있어서 활용하였다고 봄 |
자기주도적인 학습으로 변호사가 되었다. 는점에서 성실성을 찾아볼수있다. |
이병진 |
링컨과 그의 지지자들은 노예해방과 남북통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졌다. 링컨은 지지자들에 대해 노예제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하고 설득하여 그의 지지자들이 단순히 그가 제시한 목표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자들이 그들 스스로 노예해방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실감하게 하였다. |
링컨의 집안은 사회적으로 유명하지도 않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하다고 말할수없었지만 결국에는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오른 것은 그의 성실성 때문인 것같다.
자기가 맡은 일에는 어떻게든 해결하려고하는 책임감까지 동반된 링컨이었기 때문에 그의 성실성은 오늘 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오르내리게 되었다. |
‘거래적 리더십’을 갖고 있는 지도자는 조직의 나아갈 방향과 정책이 결정되면 이를 추진력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은 미래를 내다보고 조직의 방향을 제시한다거나 혹은 정책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변혁적 리더십보다는 적은 특성을 갖고 있다. Burns에 의하면 거래적 리더십은 리더와 추종자간에 근본적으로 상호이익 관계라는 거래에 기반을 둔다. 즉, 지도자가 추종자와 심리적 만족과 이득을 교환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런 거래적 리더십과 반대로 링컨은 사회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국민의식을 고취시키려는 것을 물론 국가가 지향하는 큰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국민들의 에너지를 최대한도 끌어 내릴 수 있게 하였다.국가통합을 위해 남북전쟁을 불사했던 링컨이 이러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링컨은 거래적 리더십보단 변혁적리더십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첫 취임식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이 취임식 당시 사용했던 성격 위에 손을 얹고 취임사를 하고 2007년 민주당 대선 후보 출마연설에서도 “링컨이 가졌던 공통의 희망과 꿈이 여저히 살아있는 옛 청사 앞에서 출마를 선언하는 이유는 보다 희망찬 미국을 건설 하기 위한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보아 링컨의 준거적 권력을 볼수 있다. |
이효진 | 링컨은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을 배우고 연마해서 완벽하게 몸에 익혔다. 그는 정치 세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 설득력을 선거구민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열변을 토했을 때 그의 발언은 듣는 사람 모두의 심금을 울렸다. | 1861년 워싱턴으로 향하기 위해서 스프링필드를 떠날 때는 천 명이 넘는 군중이 철도역에 모여서 그를 감동케 했다. 링컨은 감격한 나머지 유명한 '고별 연설'을 즉석에서 했다. 민중이 본능적으로 그의 주변에 모여들고, 그가 다가가면 사람들이 흥분해서 그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을 만큼 전해진다. 그가 죽은 후에 끝도 없이 이어진 조문 행렬은 그의 절대적인 인기를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 처음에 링컨은 노예제 폐지정책을 채택하는 데 주저했다. 그는 400만에 이르는 흑인들이 해방되어 국가의 정치·사회 생활에 들어올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염두에 두었으며, 무엇보다 폐지론을 내세울 경우 경계주(境界洲:남부 노예주 중 연방탈퇴보다는 타협으로 기운 주)들이 남부연합에 합류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럼에도 노예제 반대 감정이 높아졌을 때 그는 자신이 작성한 노예해방령을 들고 나왔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각 주는 노예소유주에게 보상을 하고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연방정부는 노예해방에 드는 재정적 부담을 주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해방은 점진적으로 행해지며 해방된 노예는 해외로 집단 이주시킬 것이라는 점도 덧붙여졌다. 연방의회는 링컨의 안을 실행에 옮기는 데 드는 비용을 표결에 붙이고자 했으나 경계주들은 모두 이 안을 거부했으며, 흑인 지도자들도 자신의 동료들이 해외로 보내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 링컨은 변호사 생활 초기에 설득 기술을 배웠다. 그의 정치적 성공 요인이 설득력에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각료들에게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있을 때에는 혼자서 의사결정을 하지 않고, 모든 부처가 참석한 가운데 논의해야 하며, 해당부처의 책임자와 협의하지 않은 채 그 부처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
홍은경 | 노예해방자로 알려진 링컨이 노예해방을 한 이유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링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예해방을 선언했다고 생각한 존 윌크스 부스는 결국 링컨을 암살하였습니다. | 링컨은 자신이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임을 증명하겠다는 야망을 일찍부터 품고 있었습니다. 거듭되는 낙선 후 정치가로 활동하고, 시골뜨기 출신의 변호사가 지명을 얻은 정치인으로 도약한 것은 스티븐 더글러스와 벌인 논쟁 덕분이었습니다. 더글러스와의 논쟁 중에 링컨은 선거에서 패했지만 인상적인 연설과 토론, 그리고 확고한 신념으로 많은 사람을 매료시컀고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국민은 링컨은 선택했습니다. | 링컨은 대통령으로 재직한 4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백악관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보냈습니다. 링컨의 아들 윌리가 죽었던 1962년 2월과 그 자신이 가벼운 천연두에 걸렸던 1863년 12월에서 그 이듬해 1월까지를 제외하고 링컨은 거의 백악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전선을 두루 돌면서 전황을 살폈고, 병원이든 개인집이든 가리지 않고 부상병들을 찾아 위문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부하들과 의사소통하며 교류하는 리더였습니다. | 링컨에 대해서 많은 조사를 하고, 책도 읽었지만 링컨은 손을 떼고 일을 두고보자라는 성격의 리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링컨은 언제나 부하들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도와주어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링컨에게서 자유방임적리더십은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