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2차 使行과 빈손 귀국
선종은 1090년(庚午) 음 7월 호부상서 이자의(李資儀)와 예부시랑 위계정(魏繼廷)을 정부 사은진봉사(賜恩進奉使)로 송나라에 보냈다. 이때의 사행은 그동안 송나라에서 보내준 각종 한약재와 한의사를 파견해 왕과 왕족들을 치료해준데 대한 사은과 고려 토산품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때 정사 이자의와 다른 수행원들은 귀국할 때 그곳의 진귀한 물건을 산더미처럼 구입해 돌아왔다. 그러나 부사 위계정만은 단한 가지 물건도 사지 않고 빈손으로 귀국했기 때문에 이전의 '불가상서'에 '청백리'가 더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사행 때 품계와 일부 사서의 기록에 문제가 있다. 첫째는 부사 위계정의 관직품계이다. 처음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의 관직이 예부시랑이었는데 3년 후에도 같은 품계인 것이다. 그동안 그의 관직은 1088년에 △어사중승 그 이후 △추밀승선과 '불가상서'라는 사자성어까지 세 단계나 올랐던 것을 감안하면 품계가 맞지 않다. 그리고 일부 사서에는 이때 송나라 황제로부터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과 '태평어람(太平御覽)' 1천권 등의 책을 희사 받아 가져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이들 책 가운데 '신의보구방'은 1101년(辛巳) 임의(任懿)와 백가신(白可臣)이 정부사로 가서 가져왔으며①, '태평어람'도 같은 해 왕하(王嘏)와 오연총(吳延寵)이 정부로 가서 황제로부터 무려 1천권에 이르는 책을 기증받아 가져왔다.② 당시 송나라 황제는 사은진봉사가 귀국하는 시점에 관반(館伴)으로 와서 송나라에서 없어진 '황제침경(黃帝鍼經)' 9권을 "고려에서 찾아 보내주라"고 부사 위계정에 부탁한바 있다. 그래서 그는 귀국한 이후 왕에게 말해서 황제가 부탁한 책을 구해 보내준 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①신의보구방 : 고려사 권 11 숙종 6년 5월 갑신
②태평어람 : 고려사 권11 숙종 6년 6월 丙申
《太平御覽》은 무슨 책인가?
1,000권이며, 이 책을 완성하는데 6년 9개월이 걸렸다. 〈역(易)〉 계사편에 기초하여, 전체를 천·시서·지(地)·황왕·편패·주군 등의 55문(門)으로 나누어, 모든 사류를 망라하고 있다. 각 문은 나아가 유(類)로 나뉘는데 모두 4,558류가 된다. 인용서는 1,660종에 달하며, 현재는 70-80%가량이 실전됐다.
자료의 보고로서 학문적으로 중요한 서적이다. 본래 인용서 전부가 송초에 없어서 전대에 만들어진 〈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예문류취(藝文類聚)〉·〈문사박요(文思博要)〉 등의 유서에서 인용한 것도 많다. 책명의 표기도 통일되지 않으며, 간혹 잘못된 경우도 있기에 이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송초엔〈태평광기(太平廣記)〉·〈문원영화(文苑英華)〉·〈책부원구(冊府元龜)〉가 편찬되었는데, 이를 '송4대서'라고 한다. 이방(李昉)은 태종의 칙명으로 977년에 착수해 983년 완성했다. 《태평총류(太平總類)》라 했으나 태종이 하루에 3권씩 읽어 1년 만에 모두 읽었다 해 《태평어람》이라 개칭했다.
송나라 이전의 잡서로부터 채록한 것이나, 많은 일서(逸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사이부(四夷部)란에는 신라와 고구려 등에 관한 기록이 보여 한국 역사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사이는 중국이 자신의 인접국을 오랑캐로 얕잡아 보는 東夷, 南蠻, 西戎, 北狄 등을 일컬었던 나라들이다.
⑦ 道宗, 賀天安節 표전 작성
위계정은 과거에 급제한 이후 초급관리 시절부터 왕의 조서나 국서를 초안하는 사신(詞臣)으로 일했다. 좌보궐이나 지제고(知制誥)와 추밀원(樞密院) 등의 관직들은 이 같이 글을 쓰는 일과 밀법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다만 공이 저작한「하천안절(賀天安節)」표전(表箋)의 경우는 제작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요(遼)나라 도종(道宗)의 생일을 축하하는 국서인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그의 재위기간이 1085년(乙丑)부터 1094년(甲戌)까지 9년간이니 고려로서는 선종(宣宗) 재위기간으로 볼 수 있다. 표전이 실린 <동문선(東文選)>이나 <장흥 위씨족보>에는 요와 송의 구별이 없어 혼동을 주고 있다. 공이 남긴 유고로는 송나라에 가서 지은 한시와 다음의 <하천안절 표전>이 있을 뿐이다.
■ [賀天安節] 表箋③
<원문>
鳳簫鸞笙。協寒若之休徵。龍渥彪祥。屬誕彌之慶節。愷懌之甚。遐邇不殊。中賀。伏惟皇帝。端穆凝尊。溫文啓哲。垂衣裳而理天下。大致混同。象日月以授人時。永無差忒。逮復舜生之旦。盛陳塗會之儀。川岳効珍。蠻夷納欵。臣逖居桑野。叨襲茅封。周室侯班。展覲未肩於八百。羲皇曆數。馳誠但祝於萬年。
③동문선(제31권) : ≪동문선≫은 대제학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양성지(梁誠之) 등을 포함한 찬집관(纂集官) 23인이 작업에 참여했다. 이 책 이외에 또 신용개(申用漑) 등과 송상기(宋相琦)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 등 3종이 있는데, 서거정의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의 것은 신찬 ≪동문선≫으로 구별해 부르기도 한다.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한, 편찬 당시의 인물까지 약 500인에 달하는 작가의 작품 4,302편을 수록했다. 목록 상권 첫머리에 서거정의 서문과 양성지의 <진동문선전 進東文選箋>이 실려 있다. 서거정은 작품의 취사선택의 기준을 제시해서 ‘사리(詞理)가 순정(醇正)하고 치교(治敎)에 도움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해설>
봉소(鳳簫)가 음률을 조절하니 추위가 순조로움이[寒若] 아름다운 징조에 맞고, 용악(龍渥,聖恩)의 상서를 빛내는 성체(聖體)를 탄생한 경절을 맞이함에 즐겁고 기쁨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다름이 없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께서 단정 목목(穆穆)하게 존엄하고 온화하며 문아(文雅)하고 밝으셔, 의상을 드리운 채 천하를 다스려 크게 통일을 이루고, 일월을 관상(觀象)하여 역서(曆書)를 반포하니 어긋남이 없나이다.
이제 순(舜)임금이 탄생하신 날에 즈음하여 도산(塗山)의 모임이나 우(禹)가 만국의 제후를 도산에서 모이게 해서 같은 성전(盛典)을 거행하오니, 산천이 진기(珍奇)한 것을 바치고 만이(蠻夷)가 정성을 바치나이다.
신이 멀리 상야(桑野)④에 살며 외람되게 모봉(茅封)⑤을 세습하므로 주실(周室) 제후들의 입근(入覲)하는 반열에 어깨를 나란히 못하나, 희황(羲皇) 역수(曆數)에 만년수(萬年壽)를 봉축(奉祝)하여 정성을 전하나이다.
이상의 글은 모두 115자에 불과한 문장이다. 이 글자로 황제의 비위를 맞춰 조공국의 예의를 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의 글 솜씨는 이 짧은 문장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 주>
④상야(桑野) : 중국전설에 동쪽 바다의 해 뜨는 곳에 있다는 신성한 나무 즉, 부상(扶桑)을 이르는 말이다.
⑤모봉(茅封) : 제후를 봉하여 줄 때에 띠[茅]에다 흙을 싸서 준다.
덕분에 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
하천안절표문은 명문중 명문입니다. 충렬공의 학식의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