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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주일에 성령강림주일을 지켰다.
약속된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재했다.
그곳에 모여있던 각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임한 성령강림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성령 임재사건이다.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본문이다.
우리에게도 오늘 이 시간뿐 아니라 매주 마다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오늘 본문도 아주 의미가 있는 본문이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재한 사건을 소개하기 때문이다(45)
최초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재했다.
영적으로 아주 의미가 있는 본문이다.
결국, 사도행전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성령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았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였다"(공동번역본)
베드로 설교 전문이 34-43절까지에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하였느니라"
그리고 44-48절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청중들의 반응을 소개한다.
그의 설교 첫 문장을 보라.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첫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
책을 펼치면 맨 앞에 서론이 나온다.
서론 부분에 그 책의 내용 전부가 요약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다독자들은 서론 부분을 반드시 읽는다.
서론만 읽고도 책 전체 내용을 파악할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은 구약성경의 책 제목을 해당 성경책의 첫 구절로 명명했다.
창세기? <베레시트> "태초에"(1:1)
출애굽기? <슈모트> "이름들"(1:1)
레위기? <웨이크라> "그가 부르시고"(1:1)
<모두 발언>이라는 용어가 있다.
회의나 연설을 시작할 때 대담자가 처음으로 하는 발언을 의미한다.
<모두 발언>속에 대담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모두 들어있다.
이렇게 첫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
베드로의 설교도 마찬가지다.
첫 문장에 베드로 설교내용이 모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4절을 한 번 더 다같이 읽자.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공동번역본)
베드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였다.
베드로 설교의 핵심어가? "차별"
<차별>? 둘 이상의 대상에 차이를 두어서 구별하는 행위.
인종 차별? 인종간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
일부의 백인들은 피부색에 따라 사람 간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차별한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유대 민족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민족을 이방인들이라 칭하며, 이들을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간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9-23)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자기 환상을 보여주신다(10-11)
보자기 안에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음식들을 섭취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이 이방인의 음식이라고 판단하고 먹는 것을 거절했다.
베드로는 자신들이 섭취할 수 있는 음식만을 거룩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베드로도 유대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베드로가 어떤 인물인가?
예수님 승천 후 영적 세계의 일인자가 아닌가?
초대교회 리더였다.
하지만 그도 유대인이라는 한계속에 머물렀다.
벗어나지 못했다.
일종의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제약이나 제한을 말한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이런 한계들이 있다.
몇달전에 이런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에 있던 신학교에서 발생했던 에피소드이다.
신학교 교장이 박형용 박사라는 분이셨다. 아주 유명한 신학자이다.
그 신학교 재학생중에 일본군 장교도 있었다고 한다.
졸업식날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ging grace)을 부르던 중에, 일본인 장교 출신 신학생이 박형용 박사에게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왜 신학교에서 적성국의 찬송가를 부르느냐"고 따졌다.
이 찬송의 작사가는 영국인 죤 뉴턴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일본과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일본인 장교는 예수를 믿었지만 일본 국적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의도적으로 대통령의 영부인에게 접근하여 정치적 이슈를 일으킨 좌파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목사, 광화문 집회 이후 정치적 야욕을 숨기지 않는 우파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목사등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흔히 볼수 있다.
이들 역시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보자기 환상이후 베드로는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가이샤라에 있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다.
베드로는 욥바에 거주 중이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거주 중이다.
가이사랴는 일종의 신도시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신도시 같은 도시였다.
서울 과밀화를 해소하기 위해 계획된 도시가 세종신도시이다.
정부산하 여러 기관들이 이곳으로 이전했다.
로마제국도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서 가이사랴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이곳에 로마정부에서 파견한 고위 공무원들이 거주한다.
총독의 집무실도 이곳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총독을 보호하기 위해 천명으로 구성된 군부대 5개가 주둔 중이다.
그중에 한 부대가 이달리야부대였다(10:1)
이 부대는 이름대로 로마인들로만 구성되었다.
이달리야 부대 소속 장교가 바로 이방인 고넬료였다.
욥바와 가이사랴는 약 50Km 정도 떨어져 있다.
성인 걸음으로 이틀정도 걸린다.
베드로가 꼬박 이틀을 걸어 고넬료의 집에서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를 대면했다(24-25, 33)
이들의 첫 만남이 소개된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25)
지배국의 장교가 식민지 국가의 종교인에게 무릎을 꿇는다.
아주 파격적인 자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지금 우리는 주께서 선생님께 지시하신 모든 말씀을 들으려고 다같이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33, 이상 공동번역본)
고넬료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24)
이런 분위기속에서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통해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베드로는 가이사랴에서 깨어진다.
가이사랴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가졌던 모든 생각이 깨어진다.
그의 차별의식이 가이사랴에서 깨어졌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도 성령임재사건을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가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신다(44)
이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이 임했다.
얼마 전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그 성령이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임했다.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깜짝 놀랐다(45)
유대인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주변 사람들이 놀란다.
유대인들이 성령 받을 때도 주변 사람들이 놀랐다(2:6-7)
지금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으니 옆에 있던 유대인들이 또 놀랐다.
우리가 성령 받으면 제일 먼저 가족들이 놀란다.
그리고 성도들이, 친척들이, 친구들이 차례로 놀라게 된다.
우리도 가족과 이웃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보자.
지난 주에는 유대인에게 임한 성령강림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이방인에게 임한 성령강림을 살펴보았다.
약속된 성령은 이방인에게도 유대인에게도 동일하게 임했다.
성령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성도도 차별의식을 버려야 한다. 성차별, 인종차별, 나이차별의식등을 버려야 한다.
수도권과 지방의 차별, 학력차별과 교육차별등 모든 차별은 이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차별의식을 가졌지만 고넬료를 통해 그의 차별의식이 깨어진다.
유대인 베드로는 가이사랴에서 깨어졌다.
이방인 고넬료도 가이사랴에서 깨어졌다.
"깨어진다"? "자세를 교정한다"는 의미.
프로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지면 제일 먼저 자세교정을 한다. 야구선수 골프선수등..
그리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원할때에도 자세교정을 한다. 2할대 타자에서 3할대타자로 성장하기 위해서.
투수들은 투구폼을, 타자들은 타격폼을 각각 교정한다.
우리도 그렇다.
부도로 인해 가정에 경제적 위기가 닥치면 가족들이 자세를 교정해야한다.
가계지출을 줄이고, 작은 집으로 옮긴다.
그리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삶을 추구하고자 할때에도 자세를 교정한다.
큰 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서, 좋은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해서 현재의 지출규모를 줄인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별 문제 없이 잘 살고 있고 평안하지만 좀 더 차원 높은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영적인 교정이 필요하다.
기존의 생활패턴이나 인간관계나 고정관념이 깨어져야 한다.
인간관계를 예로 든다.
공부를 잘 할려면 공부 잘하는 친구들하고 친해져야 한다.
자기하고 비슷한 성적의 친구들하고 놀면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맨날 모여서 공부잘하는 아이들 뒷담화나 하며 허송세월 보내게 된다.
지금 여러분들은 어떤 수준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가?
늘 똑같은 직장 동료들과 술 마시고 쇼핑하고 여가를 즐기는가?
이렇게 살면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달리 살려면 기존의 인간관계가 깨어져야 한다. 만나는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
그러면 삶이 달라지고 수준이 달라진다.
이렇게 우리가 깨어지면 성령이 이런 분들에게 임한다.
깨어져야 성령이 임한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고쳐서 사용하시기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방인 고넬료를 고쳐서 사용하시려고 성령을 주셨다.
세상에서는 사람을 고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들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사람을 고쳐서 사용하신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깨어져야 한다. 인간관계, 재정지출, 가치관등이 깨어져야 한다.
미준교회가 우리 모두를 깨뜨리는 한국의 가이사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미준교회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차별의식이 깨어지기를 바란다.
우리가 깨어지면 우리에게 성령이 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