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귀촌 할 때는 소박한 꿈이 있다. 복잡하고 공해 많은 도시보다,
서정적이고 흙 냄새나는 시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조용히 살고 싶어한다.
우리도 20여년 전, 퇴직 3년을 앞두고 터를 구하기 위해 주말마다 발품을 팔았다.
전국을 답사하다가 풍광이 아름다운 단양군 가곡면에 터를 구입해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건축업자의 과도한 욕심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몇 곳의 공사비를 미리 받아 제주도에 펜션 대물 공사를 시작했다.
거기에 공사비 받은 돈을 전부 투자했다.
우리는 공사비를 주고도 진척이 안되어 피를 말리는 고통을 겪었다.
공사 할 때 미리 현금을 주면 저렴한 가격에 자재를 구입해서 공사를 끝내겠다는 말에
공사비 90%를 줬다. 당시 속썩은 일을 기록하려면 지면이 모자란다.
생각하기도 싫고 기록에 남기고 싶지 않는 부분이다.
다른 집들은 소송하고 난리가 났어도, 그나마 우리는 미완성된 집으로 이사왔다.
책임자 두 명을 반 강제적으로 데리고 온 뒤 인부들까지 밥해먹여 가며 겨우겨우 한달만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펜션은 계획에도 없었는데 시골에 살면 적적한데 민박을 하면 소일거리도 되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말에 방 세 칸으로 시작했다.
그때는 못 할 게 없는 열정과 에너지를 가진 강철 체력의 소유자였다.
밤낮으로 정원 가꾸고, 농사짓고, 새로 지은 집에서 힘든 줄 모르고 펜션 사업을 했다.
하루는 닭장수 아저씨가 찾아 왔다.
친구, 친척, 사위 오면 한 마리씩 잡아주게 20마리만 달라고 했다.
닭장수는 손님들에게 삼계탕을 해서 팔려면 50마리 정도는 들여 놓아야 한다고 했다.
순진하게도 닭 파는 아저씨의 감언이설에 50마리를 들여놓았다.
20마리 넣을 닭장을 지어놓았는데, 50마리를 넣으니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남편은 다시 확장 공사를 해서 기르는데 비가 오면 악취로 득보다 실이 컸다.
손님들은 어디 축사가 있냐고 할 정도로 파리 때와 악취로 참을 수가 없었다.
앞산에 닭장을 크게 지어 다시 이주시켰다.
그후 산 짐승으로 닭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닭이 조금 크고 나니 닭사료를 이틀에 한포씩 먹었다. 풍기에서 홍삼 찌꺼기까지 얻어다 먹였다.
닭은 남에게 수고비를 주고 잡으니 삼계탕을 해서 팔아야 별로 남는 게 없었다.
튼실한 닭을 가마솥에 넣고 삼계탕 해놓으면 육질이 쫄깃쫄깃한게 맛이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그렇게 맛있는 삼계탕을 먹어보지를 못했다.
여름휴가 때 손님들에게 삼계탕까지 팔기 시작해서 정신없는 날들이었다.
배추 겉절이, 묵나물, 장아찌랑 정성껏 해주니 손님들이 가격을 올려 받으라고 뭐가 남겠냐고 걱정했다.
그때 거위만한 삼계탕을 내놓고 3만원만 받았다.
하루는 단양 군청 직원이 어디서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12명분 닭 3마리를 주문하고 며칠 뒤에 퇴근 후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갔다.
겁도 없이 주문을 받고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외부 손님은 처음 받았다.
남편은 젊었을 적 부부동반 모임이 있으면 친구 집 양계장에 가서
닭을 잡아 삼계탕, 닭개장까지 맛있게 끓여줬다.
언제부터인가 살생을 꺼려해서 이웃에서 수고비를 주고 닭을 잡아오고 했는데
그날따라 사정이 있어 못 잡는다고 해서 내가 손수 잡았다.
껍질이 너덜너덜한 게 거위만한 닭의 모양새가 요상해졌다.
퇴근 시간은 가까워 오는데 준비는 덜되고 그렇게 힘든 순간은 없었다.
겨우 상을 차렸다. 지금은 엘이디 등이 있어 눈이 부시도록 환하지만 그때는 희미한 불빛이었다.
너무 맛있다고 다음에 또 부탁하자는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절대 오지 말라고 했다.
음식점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외부 손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펜션 손님들이 아침을 부탁하면 냉장고를 뒤져서 고기, 생선은 기본이고 반찬을 13가지 정도에 5천원을 받았다.
그때는 보통 한끼 밥이 5천원이었다.
손님들이 흡족해 하면서 5천원짜리 밥은 아니라면서 1인에 만원씩을 주고 가려고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그 만큼 때 묻지 않고 순수했다.
성수기에 청소해야지, 이불 빨래해야지, 삼계탕 끓여 팔아야지, 초인적인 힘으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한 해 여름을 하고 나니 에너지가 소진되어 죽을 만큼 힘들어 음식 하는 것은 접었다.
펜션 사업 초창기에는 인원제한 없이 그저 가격이 저렴하면 사업이 잘 되는 줄 알았다.
농사까지 지으면서 말로 표현이 안될 만큼 고생했다.
나에게서 그런 넘치는 에너지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황혼이 된 요즘 생각하면 과연 그런 초인적인 체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하다.
때론 그 젊음이 그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