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7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애굽
창 50:1~14
‘이집트’를 우리 성경으로 번역할 때 ‘애굽’으로 했습니다.
쉬운 성경이나 공동번역에서는 ‘애굽’을 ‘이집트’로 바꿔서 기록했습니다.
물론 제목은 “출애굽기” 그대로입니다. 제목을 바꾼다는 쉽지 않지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애굽”에 대해서 잘 기억해야 합니다.
애굽은 단지 한 나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그리고 세계 역사에 견주어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애굽을 잘 알 때 우리의 신앙이 더 굳건해집니다.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
이집트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입니다.
중국의 황하, 인도의 갠지스, 이란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집트 문명이지요!
4대 문명 지역은 모두 강을 끼고 있습니다. 강이 곧 문명의 젖줄인 셈이지요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으로 문명이 부흥했습니다.
기하학의 발달 ; 나일강은 평범한 강이 아닙니다.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상류에서 한꺼번에 많이 흘러내려 하류를 쓸어버립니다.
하류의 저지대를 휩쓸어서 논이고 밭이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홍수가 지나가고 나면 땅 주인들의 자기 땅의 경계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땅이더라?” 여기서 기하학이 발달합니다.
홍수로 쓸려간 허허벌판에서 내 땅의 경계를 다시 그릴 수 있는 학문이 기하학입니다.
홍수가 가져오는 기름진 토양 ; 해 마다 범람하여 강바닥의 흙을 위로 퍼 올립니다.
기하학으로 다시 토지 소유가 분명해지만 농사를 짓습니다. 해마다 대풍년을 이룹니다.
애굽은 본디 사막의 나라 아프리카에 속해 있습니다.
사막 지역에서 세계 4대 문명이 발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홍수 때문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인도, 황하 문명 지역은 사막이 아닙니다.
유독 이집트 문명 지역이 사막입니다. 그럼에도 홍수로 인해 풍요를 이루었습니다.
문명의 발상; 풍요가 지속 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 문명이 발달하게 되어있습니다.
문명이란 사람이 자연에 힘을 가해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메커니즘입니다.
문명은 인간 지혜의 총 결집체입니다.
문명은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이성이 더 많이 작용하여 만들어낸 소산물입니다.
문명에는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피와 땀이 더 많이 베어 있습니다.
문명과 종교; 문명이 발달한 곳에는 종교도 따라서 발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사는 곳이 문명지역입니다.
문명 지역일수록 불가사의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더 많이 터집니다. 그래서 종교가 발달합니다.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에는 반드시 종교가 더불어 발전했습니다.
특히 이집트 문명이 종교를 많이 발전시켰습니다.
홍수의 범람은 인간의 능력 범위 밖에 있습니다.
해마다 되풀이 되지만 인간이 제어하지 못합니다. 종교도 따라서 번성하게 됩니다.
<가나안 땅의 특색>
이집트 문명지역에 비해 그 옆에서 멀지 않은 가나안 땅은 광야 지역입니다.
일부 비옥한 곳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돌이 많은 광야지역입니다.
광야지역의 종교는 문명지역의 종교와 다릅니다.
문명 지역의 종교; 광야 지역은 풍요롭지 못합니다. 광야 지역일수록 참신을 찾게 됩니다.
문명 지역은 인간이 개발한 풍요를 지키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신을 만듭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낸 것을 자연이 해치지 않도록 돕는 신이 절실합니다.
광야 지역의 종교; 광야 지역은 인간의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돌뿐인 광야, 한낮에는 머리가 벗어지도록 뜨겁고, 밤에는 얼어 죽습니다.
여기서 살아남는 길은 진정한 신, 자연을 다스리는 신, 창조주를 만나는 길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문명이 만들어낸 신이 아니라, 참 신인 나 여호와가 섭리하는 땅으로 가라!”
거기가 가나안입니다. 할렐루야~
문명 지역 애굽과, 광야 지역 가나안! 이렇게 극과 극입니다.
<애굽 vs 가나안>
애굽은 문명의 땅이고 가나안은 광야의 땅입니다.
애굽에는 만들어진 신이 섭리하고, 가나안은 참 신이신 하나님이 섭리합니다.
어디에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선 먹기에는 애굽입니다.
애굽에는 풍요가 있습니다. 가나안은 굶주림이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가짜 신, 자기들이 만든 신을 섬깁니다. 가나안에는 참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번영은 있으나,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홀대받는 곳, 거기가 애굽입니다.
번영은 덜하나,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받는 곳, 거기가 가나안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삼은 ‘아브라함의 후예들’을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다 굶겨죽일 작정일까요? 아닙니다.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그들에게 참신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를 주고자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우리 귀에 익숙한 단어입니다.
광야 지역인 가나안에 젖과 꿀이 흐른다는 뜻입니다.
자연 이치에 따르면 맞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면 합당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 인간이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을 좌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은 ‘만나’로 먹이십니다.
가나안 땅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가나안에는 하나님의 양식 ‘만나’가 있습니다.
애굽 땅에는 풍년이 있고, 가나안에는 하나님의 양식이 있습니다.
① 가나안으로 인도된 아브라함!
흉년과 기근이 닥치면 애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두 번 갔습니다.
②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가나안에 살다가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③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
이번에는 70명 식솔을 모두 거느리고 아예 살기로 작정하고 갔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은 애굽과 가나안의 차이를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야곱의 귀소본능>
야곱은 촉이 있는 사람입니다.
얼른 보면 대범하지 못하고, 꾀죄죄하고 이기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을 향한 안테나를 가장 길게 뽑고 사는 인물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후손이 애굽에 눌러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왜냐? 거기에 문명은 있지만, 참 신 하나님의 섭리가 부족합니다.
거기에 풍요는 있지만, 하나님보다는 만들어진 신을 섬기는 곳입니다.
거기에 비해, 가나안은 당장은 어렵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살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갈구하기에 알맞은 곳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가 천국 백성이 됩니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 당신의 현 위치는 어디입니까?>
기독교 신앙에서, 어떤 이의 신앙 상태를 애굽과 가나안 사이의 한 지점으로 구분합니다.
☞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① 애굽 땅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까? ~ 당신은 크리스찬이 아니라 세상 사람입니다.
애굽에는 풍요는 있지만, 당신은 애굽 왕 바로의 노예입니다.
‘애굽 왕 바로’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사탄의 대명사입니다.
애굽에서 삶은 풍요로울 수 있지만, 거기는 사탄의 노예로 사는 땅입니다.
② 애굽을 벗어나기는 했습니까? ~ 당신은 구도자입니다. 크리스찬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사탄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직시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은 거지요!
그래서 애굽을 벗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모세의 인도로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아직 홍해를 건너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왕 바로에게 쫓기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 믿겠다고 교회에는 나오지만, 사탄의 강력한 추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찬으로 거듭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당신이 혹시 이 단계에 있지는 않습니까?
③ 홍해를 건넜습니까? ~ 홍해를 건너는 순간, 바로 왕의 추격을 뿌리친 겁니다.
애굽을 탈출하여 애굽의 바로 왕의 추격을 받았으나 추격을 따돌리기는 했습니다.
신앙의 길을 향한 진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
홍해를 건넜으면 이제 바라는 곳은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을 가는 길에 또 다른 황무지 광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곳에서 40년을 방황했습니다.
④ 당신은 광야에서 방황중입니까? ~ 쟁기를 잡고 뒤를 바라보는 자입니다.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홍해도 건넜지만 아직 믿음이 덜 들었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과거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이를테면 예수 안 믿을 때의 생활에 향수를 느끼고 되돌아가고자 할 때가 있습니다.
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당도하셨나요? ~ 크리스찬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살아가는 땅, 가나안에 오신 걸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샬롬~
가나안에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살아가는 성도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안심하면 안 됩니다. 가나안에는 일곱 잡 족속이 있습니다.
이들을 다 물리쳐야 합니다.
모세의 바통을 이어받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잡 족속 정복에 나섭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정복, 완성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신앙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렇게 다양하게 성도의 신앙 상태를 체크하는 일이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이렇게 분류해 보는 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모세는 요단강을 못 건넜지만, 예수님을 예표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 신앙은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애굽의 의미>
애굽이 왜 하필 불신앙을 대표하는 나라가 되었는가? ~ 의미가 심상치 않습니다.
(1~3절)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장례 절차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장례절차는 세계에서 가장 길고 유명합니다.
장례 절차가 까다롭고, 기간이 길고, 시체를 미이라로 만듭니다.
이렇게 하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요? ~ 이는 “죽은 자를 위하는 절차”입니다.
애굽의 문화는 전반적으로 산자보다는 죽은 자를 위하는 문화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인가요, 죽은 자의 하나님인가요?~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산 자를 위한 신앙입니다.
육신이 죽어 땅에 묻힌 자의 영혼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립니다. 살아 있습니다.
지옥은 죽음, 무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기독교 문화는 그래서 산 자를 지향합니다. 놀랍게도 애굽의 문명은 죽은 자를 지향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척점에 애굽이 있습니다.
애굽에는 스핑크스와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왕들의 무덤입니다.
죽은 자의 무덤 중 제일 큰 무덤이 스핑크스, 피라미드입니다.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를 만드는데 살아 있는 이들이 평생을, 대대로 희생합니다.
☞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하여 노동하는 세상, 거기가 애굽입니다.
애굽에는 오벨리스크가 또 유명합니다. 사각기둥으로 위로 가면서 좁아지는 탑입니다.
애굽 백성이 주먹 만한 돌을 저마다 가지고 달라붙어서 거대한 화강석을 쪼아 만듭니다.
하나 만드는데, 수십 년이 걸립니다. 만들다 죽어 나가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오벨리스크 역시 죽은 이집트 왕의 치적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겁니다.
애굽은 이렇게 철저하게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희생하는 나라”입니다.
애굽의 종교는 기독교의 대척점에 있습니다. 기독교에 맞서있습니다. 묘합니다. 애굽!
애굽의 신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항합니다.
그런데 애굽의 종교행습이 놀랍게도 가톨릭에 베어들었습니다.
가톨릭 사제들의 모자, 복식, 미사 방식, 마리아 숭배 등등이 애굽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바티칸 성당 앞 광장에 애굽에서 가져다 세워놓은 오벨리스크가 있습니다.
그게 왜 거기 있어야 하는가? 거기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리여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습니다. 참 희한한 노릇입니다.
<맺음>
애굽을 보면서 우리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애굽의 죽은 자를 위한 행습을 보면서 우리는 산 자를 위한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바른 방향으로 흐르지 못하는 현상을 자각해야 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성경에 전적으로 부합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