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한일 근대사 이야기(5화)
- 졸저 <한일 근대인물 기행>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에서 발췌 –
ㅇ 아베 마사히로(1819~1857)와 홋타 마사요시(1810~1864) 1
페리 내항의 충격은 즉시 막부를 강타했다. 페리 철수 약 열흘 만에 대책에 부심하던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급사하고 이에사다가 뒤를 이었다. 13대 쇼군 이에사다는 병약하고 유난히 폐쇄적이어서 유모 외에는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정치는 로주들에게 맡겨졌고 수석로주 아베 마시히로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마쓰마에번 번주였던 아베는 척박한 번 상황으로 무역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고, 형편없는 번세에 25세부터 로주에 취임해 막부정치에 관여하다 보니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로주들의 의견을 잘 조율하는 스타일이었다.
페리가 다시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막부는 격론이 벌어졌다. 로주들은 “네덜란드인을 위한 나가사키항처럼 미국인을 위한 항구를 개항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배층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미토학의 본고장 미토번(현 이바라키현)의 전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미국에 굴복하는 것은 신국神國 일본의 수치다. 전쟁을 각오하고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대를 불문하고 국익을 따지는 현실파보다는 강경파 정치인이 일단 인기를 얻는 법… 절대다수의 무사들과 백성들은 그를 영웅시했다. 여론을 알고 있는 아베는 나리아키를 막부정치에 불러들여 그에게 국방고문역을 맡겼다. 이때부터 로주들과 나리아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해가 바뀌자 마자 1854년 1월 16일 페리 제독은 전년도보다 큰 규모인 7척의 군함을 끌고 와 한적한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해변가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막부는 스모를 보여주며 미국을 겁주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미국의 한 수행원은 “목적도 없이 밀어붙이고 고함치고 끌어당기고 밀고 돌아다니는 시합은 힘겨루기로는 매우 불충분한 경기다. 덩치가 그들의 반밖에 안 되는 미국 레슬러들도 그들을 웃음거리로만 생각할 게 뻔하다”고 일기에 적었다. 스모 관람 후 미국이 막부 관리들에게 보여준 것은 실물 1/4 크기의 증기기관차와 110m 길이의 원형 선로였다.
2개월이 넘는 협상 끝에 1854년 3월 31일 역사적인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막부는 일단 개항해 전쟁을 피하되, 시간을 벌어 서양을 이길 국방력을 키우자는 심산이었다.
역사적인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개국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통상조약은 아니지만 일본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이 조약을 모델로 거의 같은 내용으로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조약을 체결했는데, 최혜국 조항 등 일본에 불리한 조항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 후일 메이지 신정부가 오랫동안 불평등조약 개정이라는 숙제를 떠안게 된다.
자신의 주장과 달리 막부가 개항을 하자 강경파 나리아키는 막부의 조치에 반발해 국방고문역을 벗어 던지고 막부에서 물러 나왔다. 강경파라고 해도 나리아키는 개항을 무조건 반대하는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니었다. 대표적 난벽 번주로 알려진 나리아키는 서구의 정세와 문물에 익숙했다. 그는 개항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요구에 굴복해 개항당하는 것을 반대했다.
여론에 영향력이 큰 거물 나리아키를 막부 정치에 활용하려던 아베는 그가 콘트롤되지 않던 차에 정무에서 제외되자, 개항 이후의 국정 관리에 서양 물정과 막부 정치를 잘 아는 로주가 필요했다. 아베가 찾아낸 인물은 과거 로주를 역임했던 시모사사쿠라번(현 지바현 일부)의 난벽 번주 홋타 마사요시였다.
1855년 홋타 마사요시에게 외교통상 부문을 전담케 하고 자신의 수석로주 자리까지 넘겨주었으니 아베가 13년간의 로주를 마치고 38세의 나이로 죽기 2년 전이었다. 참으로 선견지명이 있는 지도자다.
개항 이후 아베와 홋타가 주요 다이묘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개혁정책을 추진하는데 이를 당시의 연호를 따서 안세이 개혁이라 한다. 주요 내용은 반사로를 설치해 서양식 대포를 제작하고, 해군 양성을 위한 해군전습소를 신설해 네덜란드 교관으로부터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우고, 훈련기관을 만들어 서양식 포술과 전술을 가르치고, 서양서적 번역기관을 개설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했다.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 초반 활약을 하는 가쓰 가이슈 등이 이때 발탁되었다.
나리아키나 홋타 모두 난벽 번주라 불렸다. ‘난벽蘭癖’이란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난학蘭學’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네덜란드(화란和蘭)에서 들어온 서양의 문물과 학문을 일본인들은 ‘난학蘭學(난가쿠)’이라고 했다. 난학은 일찍이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 드나들던 일본인들의 어학에서 시작되어, 8대 쇼군 요시무네가 일부 가신에게 네덜란드어를 직접 배우게 하면서 의학, 천문학, 지리학 등으로 점차 확산되어 18세기 후반에는 대세가 되었다.
난학이 발전하면서 서양의 물품들을 귀하게 여기며 수집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온도계, 색안경, 시계, 망원경, 지구의 등 처음 보는 신문물의 과학성과 정교함에 일본인들을 감탄했으며, 진귀한 서양 물품을 수집하는 데에 광적인 사람을 ‘난벽이 있다’고 했다. 따라서 난벽 번주를 모신 재정담당 가신들을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고가의 서양 물품을 사는데 번 재정이 많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난학의 발달로 네덜란드어를 잘하는 일본인이 제법 있었다. 페리 내항 시 영어-네덜란드어-일본의 2단계 통역이 행해진 이유다.(다음에 계속)
*사진 설명
아베 마사히로와 페리가 가져온 미니어쳐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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