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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1:1-3 여호와여
본 시편에는 왕의 번창하고 행복한 상태에 대한 공적이요 엄숙한 감사가 있습니다.
이 시편의 주제는 앞과 동일합니다. 앞에서는 공동 기도 형식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같은 기도의 형식은 전체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들의 머리의 보존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갖도록 격려하는데 그 의의가 있었습니다.
왕의 안전과 번영이 마땅히 전 영역에 걸쳐서 공적이요 전반적인 기쁨을 낳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머리를 통해서 몸 전체를 안전하게 보존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의도는 신실한 자들로 하여금 이 왕국의 목적이시며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손수 지명한 그 머리 밑에서만 그들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 본문 1-2절은 "(1)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2)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 입니다.
1)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여러 승리와 기타 현저한 호의를 두고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감사를 돌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의도는 자기를 왕좌에 올려주신 분이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모든 복이 공적 안녕과 모든 신실한 자들의 혜택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데 있었습니다.
2) 본 시편 처음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 왕을 지켜 주시고 지명해 주셨다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본 시편은 앞 편과 마찬가지로 신실한 자들에게 다윗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선하심이 오래 지속되고 영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뜻에서 지어졌습니다.
그 백성들이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서 확고한 신뢰를 품고 그들의 왕에 대해서 좋은 소망을 품는 것은 필요하였습니다.
이 왕의 용안은 하나님의 자비와 화해의 용안에 대한 거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 21 편
'주는 왕을 지탱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실 것이다. 그 결과 주는 그 왕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다. 그리고 왕은 자신의 안전을 그 주님의 능력의 덕으로 돌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두고 크게 기뻐할 것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강력한 도움'이라는 말 대신 '힘'과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여기에는 왕을 방어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왕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존하고 방어할 정도로 막강하다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3) 둘째 절에는 이 기쁨의 원인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께서 이 왕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며 그 왕이 요구한 모든 것을 너그럽게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윗 왕의 모든 성공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과 다윗 왕의 모든 성공이 다윗 왕을 합법적으로 부르심에 대한 증거라는 사실을 신실한 백성들이 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4) 다윗은 이런 표현을 통해서 자기가 육신의 욕구에 따라 방탕하지 않았으며 세속적인 사람들과 같이 자기 욕구의 단순한 충동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세속 사람들은 생각 없이 한때는 이것에 다른 때는 저것에 마음을 쏟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인들은 마치 감각적인 정욕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들처럼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선하고 합법적인 것을 구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갈망하지 않도록 그의 감정들을 제어했습니다.
물론 인간이 타고난 연약성 때문에 그에게도 몇 가지 악이 있었으며 두 경우에 있어서는 수치스럽게 넘어지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국에 대한 일상 통치는 성령께서 주도하셨다는 점을 쉽게 파악합니다.
5) 예언의 영에 의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혜택을 위해서 통치하시며 우리의 구원만을 위해서 인도하시기를 바라시는 그리스도께 주로 눈을 두고 있었던 만큼 우리는 여기서 유익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이란 우리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거절할 것을 염려할 필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왕께서 우리 앞에 가시면서 교회를 위해 중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해 기도함으로서 우리는 주님의 본을 따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2. 본문 3절은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주께서 저를 복의 좋은 것으로 인도하시고 - 칼빈)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입니다.
1) 본 구절에서 동사의 시제가 바뀐다 해서 강론의 맥락 이 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이 문장을 미래 시제로 번역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히브리어에서는 한 시제를 다른 시제로 바꾸는 일이 아주 흔합니다.
시편 21 편
본 시편을 다윗이 이방민족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로 국한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여기서 언급된 면류관을 암몬 족속의 왕의 것으로 상상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판단으로는 그들이 성령께서 여기서 이 왕국의 영속적인 번창에 대해서 지시하고 있는 내용을 과소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다윗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는 자신의 후계자들을 여기에 포함시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계속되는 세대에 걸친 자신의 왕국을 지탱해 주시는 은혜의 지속적인 과정을 송축하고자 했습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삼하7:14) 라는 말씀은 한 사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확대돼야 마땅한 예언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성자께서 나타났을 때 성취되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이사야의 증거에 의해서 충분히 확립되고 있습니다(사9:6).
2)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라는 말씀의 의미는 자발적으로 복을 내려주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관용과 신속함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그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실 뿐 아니라 이 왕의 청원들을 미리 예상하시고 그에게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선한 것을 그에게 쌓아주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름다운 복" 이란 풍성하다거나 넉넉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혹자는 이 (토브) 라는 히브리어를 '선하심' 으로 번역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은혜' 또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들'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그 의미는 왕이 모든 면에서 행복한 생활에 필요한 것을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그 왕의 소원을 예상하고 모든 선한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3) 다윗이 '면류관' 을 일부러 말하는 것은 그것이 왕권의 상징이요 표시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으로 다윗은 하나님이 몸소 세운 왕의 수호자가 되실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는 이 왕관이 오랫동안 흙 속에 불명예스럽게 묻혀 있다가 다시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놓여질 것을 증거하는 만큼 우리는 이 노래를 통해서 경건한 자들의 마음이 다윗의 후계자들을 통해서 오직 그림자, 또는 희미한 형상으로 드리워졌던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치켜세워진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원성에 대한 가르침이 여기서 확립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호의나 투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그리스도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 주신 하나님에 의해 왕좌에 등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머리의 등극은 지체들의 등극을 포함합니다.
시편 21 편
시21:4-6 저가 생명을 구하매
이 시편은 20편과 호응(呼應)합니다. 20편에는 백성이 왕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그 백성들이 그 왕에게 이루어진 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여기 진술된 왕의 승리의 결과는 너무 위대하여 장차 오실 메시야 왕이신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질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왕의 승리로 인하여 받은 "영영한 장수"(4절)와 "존귀와 위엄"(5절) "지극한 복"(6절) "요동치 아니함"(7절) 등은 모두 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승리로 말미암아 얻으실 것에 해당한 말씀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과연 이와 같이 승리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마련된 모든 복을 받습니다.
1. 본문 4절은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입니다.
본 구절은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본 시편이 어느 한 사람에게 국한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물론 다윗의 생애가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연장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결과 다윗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다윗은 완전한 노인으로서 나이가 다 찼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생애는 여기서 여러 세기에 걸치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영영한 장수"에 비교하기에는 너무 짧았습니다.
설령 우리는 그 시간이 다윗의 통치의 맨 처음부터 바벨론 포로시기까지라 하더라도 이 날들의 길이는 다윗의 모든 후계자들을 통해서 다 채워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기서 영원하신 왕을 의미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미천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또 더 없이 괴로운 재난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절망이 넘실거리던 이 왕국의 초기와 후기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른 왕국들의 공통적인 운명에서 면제시켜 거의 하늘에까지 닿을 정도로 올려주심으로서 그 결과로 생긴 엄청난 영광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 왕국이 하늘에 해와 달이 비취는 한 계속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 나라에 대한 결코 평범한 찬사가 아닙니다(시72편).
그러므로 다윗은 "저가 생명을 구하매" 라는 표현으로 자기가 종종 처해 있던 괴로웠던 환경을 암암리에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주께서 거룩하게 기름 부으심으로서 왕국의 소망으로 그의 종을 부르셨던 그때 이래로 다윗의 처지는 그가 죽음에서 구출 받은 것을 독특한 복으로 여길 정도였다는 뜻입니다.
시편 21 편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생명을 위협하던 위험들로부터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또한 다윗의 나라가 후계자들을 통해서 수세기에 걸쳐서 지속될 것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거의 다 죽어가던 비참한 사람에게, 그가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숱한 위험 속에서 단지 생명만 부지시켜 주실 것을 간청하면서 벌벌 떨고 있을 때, 그의 생명뿐 아니라 그를 왕의 자리에 올려주고 이 왕국을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야기시켜 주는 측량할 수 없는 영예를 누리도록 하신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흑자는 그 구절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요구한 생명을 허락하시되 그의 날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해주셨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왕국의 연약하고 볼품 없던 시초와 하나님께서 그의 종의 후손이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달을 불러 증거하면서 그에게 베푸신 뜻밖의 존귀에 대한 대조를 주목합니다.
바로 이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예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멸시, 수치, 사망, 무덤 그리고 절망에서부터 성부에 의해서 하늘의 주권에까지 들어올려졌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오른편에 영원히 앉아 있으며 마침내 세상의 심판주가 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의 주권에까지 승귀되셨습니다.
2. 본문 5절은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입니다.
이 말들이 백성들에게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왕에게 베푸신 보호와 하나님께서 그 왕을 위해 역사 하셨던 구원들을 통해서 그들의 왕이 만약에 모든 사람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평화스럽게 통치했거나 인간의 재물과 인간의 힘의 방어를 받았거나 결국 자기 자신의 능력과 정책으로 계속 무적인 상태에 머물렀을 경우보다 더 유명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 왕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인도, 그리고 명령에 의해서 왕위에 올랐을 뿐이라는 것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업적을 스스로 높이며 자신들의 용맹성으로 명성을 얻는 것은 이방 왕들의 일로 제쳐놓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의 모든 승리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에 대해서 은혜롭게 호의를 베푸셨던 것에 대해서 더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이 왕을 위엄과 존귀로 장식함에서 충분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합니다
시편 21 편
3. 본문 6절은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입니다.
혹자는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자신의 복을 풍성하게 쏟으시려고 그를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으로 단순하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왕에게 모든 좋은 것이 얼마나 무궁무진하든지 그 왕을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본보기로 삼기 위한 것일는지도 모를 뜻이 담겨있습니다.
또는 기도에 있어서 간구하는 자가 어떠한 대우를 받기를 바라야 하는가에 대한 본보기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 그 왕의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밉살스런 사람을 저주하기 위해 이런 것을 말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이름을 무서운 저주를 하기 위해서 들먹였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가공할 복수가 아주 혹독하게 임했었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 이러한 것을 말하는데도 익숙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복 받기를 갈망하는 본보기로서 그들의 이름을 제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다윗에게 베풀어주신 동일한 호의를 그대에게 은혜롭게 내려달라고 어떤 사람이 간청하기 위해 말해야만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다른 해석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그 다른 해석이란 모든 종류의 선한 것이 넘쳐흐르는 왕이 하나님의 관용에 대한 뛰어난 모형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그 구절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에 대해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는 구절을 유의합니다.
백성들의 의도는 하나님이 그 왕을 자애로운 아버지의 눈길로 대하셨기에 그에게 선하게 역사 하셨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들은 이 기쁨의 본래 원인을 지적합니다.
그것은 왕 자신이 하나님의 호의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바로 그 사실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이야기 해 줍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4:6-8) 라는 말씀대로 주의 은혜로운 얼굴을 비춰주시고 선하심을 맛보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살피시고 우리의 부족을 채워주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체험하는 일이야말로 참되고 확고한 복입니다.
시편 21 편
시21:7-10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여기 기록된 왕은 앞으로도 많은 원수들을 진멸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8-13).
이 기록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완전히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의 결과로 세상 끝날까지 모든 원수들을 완전히 정복하십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더불어 싸우시는 그리스도의 영전(靈戰)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실상 끝까지 홀로 싸우십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외에는 마귀를 대적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만 승리를 거둡니다(요16:23, 계17:14).
1. 본문 7절은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입니다.
여기서 다시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확고부동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자랑합니다.
동시에 그 왕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는가를 소망과 신뢰에 의해서 표명합니다.
우리는 전체문맥을 한 문장으로 읽어 여기에는 주동사가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왕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고 있는 만큼 이 세상의 왕국들을 뒤엎는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고 설명합니다.
그 뿐 아니라 신실한 자들이 그들의 왕에게 돌리는 모든 복은 전체 교회에 속합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맺어지고 있는 약속 또한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공통적인 것입니다
이 약속이 온 세상을 뒤흔드는 여러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를 평온하게 지켜줍니다.
세상이란 마치 바퀴가 돌 듯 돌기 마련입니다.
이런 원리에 따라 맨 꼭대기에 올려진 사람들이 순식간에 밑바닥으로 나동그라집니다.
그러나 유다 왕국과 그 왕국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왕국은 그런 흥망성쇠에서 제외될 것이 여기에 약속됩니다.
여기서 보증된 확고함과 부동성을 지닌 사람들만이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며 하나님의 지배에 의지하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맡깁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본 구절 안에는 이러한 소망이나 신뢰의 원인과 근거가 한꺼번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단 은혜롭게 호의로 받아들인 백성을 자비롭게 대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1 편
2. 본문 8절은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입니다.
지금까지는 이 왕국의 내적 행복이 묘사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연히 이 왕국의 원수들에 대항하는 막강한 힘의 축제가 이어집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그 왕이 모든 원수들에 대해서 승자로 선언된 사실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결코 쓸데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가 외적의 공격에 대해서까지 완전히 방비를 갖추지 않았다면 내적으로 번영을 누리며 평화, 재물, 모든 좋은 것이 풍요를 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 점은 특별히 이 세상에서 원수가 그칠 날이 없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항상 공공연한 전쟁에 의해서 공격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간혹 그리스도의 왕국에 휴식 기간이 부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단의 앞잡이들은 해악을 끼치려는 악의와 욕망을 조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단과 그의 앞잡이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전복시키려는 계책을 성취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모략과 노력을 잠시도 중단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지켜주기 위한 보호자로서 우리보다 앞서 간구하시는 우리의 왕께서 모든 것에 비하여 더 강력하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는 매우 만족스러운 사실입니다
여기서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으며 우리가 '발견하다'로 번역한 (마차)에는 종종 '충족하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반절에서는 '모두'(all)를 의미하는 (칼)이라는 단어와 '....대신에'(for), 또는 '...에 대하여'(against)의 뜻을 지닌 (라멧)라는 문자가 접두사로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반절에 나오는 "너를 미워하는 자를"이라는 상이점 때문에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의 주석을 '그분의 손은 모든 원수들을 찾아내실 수 있을 것이며 오른 손은 그대를 미워하는 자들을 색출할 것이다' 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점차로 등귀하고 있습니다.
곧 '그분의 손은 견디어 내실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오른 손은 모든 원수들을 붙잡을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이 파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해석이 정당합니다.
3. 본문 9절은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입니다.
시편기자 다윗은 여기서 무서운 종류의 복수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 기자가 모든 종류의 원수들을 전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거인들처럼 하나님의 독생자에게 대항하여 일어나는 하나님께 대한 악의적이고 광적인 멸시자들을 두고 언급하고 있다는 추측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시편 21 편
여기에 표현된 매우 잔인한 형벌은 그 대적자들의 사악성이 대단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혹 어떤 사람은 다윗이 암몬 족속에게 부과한 형벌의 종류를 암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기록은 성경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적대자들에게 마련되어 있는 무서운 파멸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대적자들은 교회에 대항하는 격분으로 날뛰며 잔인하게 세상에 불을 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적자들의 사악성이 절정에 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대적자들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불타는 용광로 속으로 처넣는다는 보상이 마련됩니다.
상반 절에서는 왕이 복수자로 불리어집니다.
중반 절에서는 이 직무가 하나님께 이양됩니다.
하반 절에서는 복수가 불로 돌려집니다.
이 세 가지는 아주 잘 조화를 이룹니다.
심판이 그리스도께 위임되어 원수들을 영원한 불 속에 곤두박질하게 내던지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복수가 얼마나 혹심하고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은 위험을 의식하지 못하고 교만하게 하나님의 모든 경고를 무시하는 자들의 무지를 일깨워주기 위해서입니다. 더우기 이것은 의인들을 위로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악인들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알고 있으며 우리의 신앙이 굳건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잔인성 밑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입니다.
"네가 노할 때에" 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가 십자가 밑에서 단련되고 겸손해지는 것을 기뻐하시는 한 우리는 그것을 참을성 있게 견뎌야 한다는 점을 권면해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장 자신의 능력을 보이셔서 악한 자들을 파멸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판의 시행을 위해 영원한 섭리 속에서 정해놓으시고 우리의 왕께서 무시무시한 능력으로 무장하고서 복수를 시행하러 오실 그 시간까지 우리의 소망을 연장하는 법을 배워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현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않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이나 우리들 어느 누구도 망각하고 계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위험에 대한 어떤 공포도 없이 온갖 종류의 죄악을 계속 범하면서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뻔뻔스러워 가는 자들의 광기를 비웃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 비웃음이 우리에게 위로를 거의 해주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사야가 선언하고 있듯이(34:8), '우리의 구속의 해'가 될 "여호와의 보수(報讐)의 날"이 오기까지 우리의 전쟁 상태의 시한을 채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편 21 편
하반절에서 옛적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셨던 것과 비슷한 파멸을 적그리스도들에게 선언하시고 있다고 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걸맞는 생각인 것같지 않습니다. 이 징벌은 모든 악인들을 징벌하는 것으로서 특히 하나님의 심판을 인상적으로 잊지 못하게 하는 본보기였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버림받은 자들에게 마련된 지옥의 영원한 불에 대한 지상의 눈에 보이는 형상이었다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기에 이 비유가 성경 여러 곳에서 자주 취급되고 있습니다.
4. 본문 10절은 "네가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가 악인들의 자손들에게까지 확대된다는 점을 들어 그 진노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부연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악한 첫 범죄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실 뿐 아니라 그 형벌이 그들의 자손들의 품에까지 넘쳐 흐르게 한다는 사실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징벌을 이처럼 삼 사대까지 내리시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무분별하게 무죄한 자들에게 죄책을 뒤집어씌우는 것으로 이야기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박탈해 버린 악인들의 후손이기에 저주를 받았고 그 후손들이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손들이므로 영원한 멸망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손들에게 가혹한 징벌을 시행하시는 것은 그들의 조상들에 대한 것 못지 않게 정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자손들에게 전하는 은혜를 보류하신다 해서 이것을 하나님의 잘못으로 돌리겠는가?
두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얼마나 자신에게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십니다.
첫째 하나님이 의인들의 자손들에게는 천대까지라도 자비를 확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버림받은 자들에게 내리는 진노를 삼사대 자손들까지만 내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1 편
시21:11-13 대저 저희는
본문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왕이 원수들을 쉽게 처치할 것을 진술합니다.
또 그 왕이 참되신 왕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결론적인 기도입니다.
1. 본문 11절은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입니다.
다윗은 악인들에게 내리리라 예언한 파멸을 그들이 받아 마땅했던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 악인들이 살아 있는 인간을 괴롭혔을 뿐 아니라 그 악인들이 교만의 격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 자신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려고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2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다윗에게 맡겨진 이스라엘 왕국에 횡포를 부리는 자는 하나님을 대항해 비열하고 사악한 싸움을 거는 자들이었습니다.
더우기 그리스도의 왕국을 전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직접 공격을 퍼부을 때 그것은 더욱더 하나님의 위엄을 모독하는 처사입니다.
성자의 손에 의해서만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펼치다'로 번역한 (나타)는 '제쳐놓다' 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더러있는 만큼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지 적합합니다.
첫째 의미를 따른다면 이 구절의 의미는 악인들이 마치 그들이 그물을 쳐놓은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들에게 굴복시키려고 애쓴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둘째 의미를 따른다면 방해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그들이 자신들의 악의를 제쳐놓았다가 그것이 그분의 능력에 대해 압박하게 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큰 구덩이를 파놓은 사람이 급류의 물길을 어느 정도 곁으로 흐르게 해 놓았다가 그것이 그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게 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다음에 다윗은 악인들이 저절로 실패하고 말 "계교를 품었으나" 라는 말을 선언합니다.
이 표현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싸움을 걸면서 그것이 아무리 담대하더라도 아무일도 이루지 못하는 경솔과 만용을 드러내고 마는 그 악한자들의 어리석은 오만을 꾸짖습니다
2. 본문 12절은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입니다.
시편 21 편
우리가 '과녁'으로 번역한 (셰컴)의 본래 의미에 '어깨'라는 것이 있다 해서 혹자는 이것을 '그들의 머리는 심한 타격을 받아서 부서질 것이며 그들의 몸이 구푸려지고 그들의 어깨가 튀어나오게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여기서 하나님 원수들의 굴복이 비유적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이 있는데 이것이 유대 주석가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지지를 받습니다.
이 해석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떤 구석에 가두어 그들이 해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이 견해를 택하는 것은 '셰컴' 이라는 히브리어가 종종 '구석', '지역' 또는 '장소'를 지칭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거룩한 기자 다윗은 곧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님에게 활이 갖추어져 있어서 그들의 얼굴에다 직접 화살을 쏠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만큼 우리는 다윗이 그의 비유를 계속하면서 그들이 흔히 표적을 세워놓는데 사용하는 과녁, 곧 흙으로 된 둔덕에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는 '주님 자신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화살을 쏠 과녁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라고 자연스럽게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이 염두에 두고 있는 중요한 의도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기에 불경건을 멸망시킬 때까지 우리가 인내할 것을 가르치는데 있습니다.
3. 본문 13절은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입니다.
본 시편은 마침내 지금 말씀되는 왕국이 하나님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반영되는 그 나라를 다시금 확신하는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물론 다윗의 왕국의 경우에 있어서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옛적에 다윗을 왕좌에 올려놓는데서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되는 내용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 되도록 임명되고 동시에 육신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신묘하신 능력으로 악인들을 공포에 사로잡히도록 마땅히 후려쳐야만 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는 더없이 다정한 위로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쁨을 얻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과 감사의 노래로 송축해야 합니다.
시22:1-2 내 하나님이여
다윗은 자신이 절망에 빠질 정도로 비참한 환경에 처한 사실을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혹심하게 당한 여러 재난을 열거한 다음에 깊은 시험에서 빠져나와서 용기백배하여 구원의 확신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은 자신의 신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데 다윗이 예언의 영으로 알게 된 것은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승귀되기 전에 놀랍고 비상한 방법으로 낮아지셔야만 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본 시편은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53:8)라고 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주고 있습니다.
이 시의 제목이 애매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처럼 하찮은 문제에서 고상한 신비를 꺼낸답시고 스스로 까닭 없이 고민하는 해석가들의 심중을 모르겠습니다.
후자는 (아앨렛)이라는 단어에 '새벽 별'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가 하면 이것이 '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암사슴'(hind)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본 시편이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는 점이 사도들의 증거에 의해서 명백하게 되고 있다해서 고대 주석가들은 '암사슴'이라는 단어에 신비적이고 풍유적인 의미를 덧붙임으로서 그것이 제사에 있어서 포함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지 않을 경우 그리스도께서 충분히 영화롭게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아엘렛 하샤하르)를 '그 날의 여명' 곧 새벽으로 번역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세밀한 구별에서 아무런 확고한 것을 찾을 수 없으므로 본 제목에 대한 간단하고 자연스런 견해를 취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어떤 평범한 노래의 시작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제목이 본 시편의 주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전체 구조의 맥락을 통해서 볼 때 다윗은 여기서 특별히 어느 한 박해를 두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울에게서 당한 모든 박해를 망라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 시편을 한가하게 자기 나라를 다스릴 때 지었는가, 아니면 자기가 고난을 받고 있을 때 지었는가 하는 문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여기서 고통, 역경, 그리고 슬픔을 당할 때 그의 마음을 꿰뚫었던 생각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시편 22 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앨렛샤할에 맞춘 노래
1. 본문 1절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입니다.
이 첫 구절에는 언뜻 보기에 서로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항상 파고드는 아주 뛰어난 두 문장이 담깁니다.
시편기자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당하고 내던짐을 당한 것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절망에 빠진 자의 불평으로 들릴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에게는 자신을 위한 아무 도움이 없다는 점을 믿으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두번씩이나 자신의 하나님으로 부르면서 자신의 탄식을 하나님의 품에 내맡김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아주 뚜렷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의 표적을 거두실 때마다 그들이 어디로 눈을 돌리든 온통 질흙 같은 밤의 어두움뿐일 때, 그들은 이러한 내적 갈등으로 단련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편으로는 자신들과 씨름하면서 육신의 연약성을 발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버림받은 자들은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는 자들로서 그들의 혼란한 마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에 신앙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다윗이 시험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으로 말미암아 삼킨 바 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었다는 점을 우리는 다윗의 말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슬픔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라는 말을 일시에 쏟아 놓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저버리셨다는 모순된 생각을 완강하게 뿌리치지 않고서는 다윗이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치고 날마다 내면적으로 이런 체험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육신의 판단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고 포기하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고 다윗은 신앙에 의해서 감각과 이성의 눈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자들의 기도에는 서로 반대되는 생각이 뒤섞이고 엉키기 마련입니다.
육적인 감각과 이성은 그것들의 시야에 비치는 현재의 상태에 따라서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거나 나쁘신 분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22 편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슬픔 가운데 오래 잠기게 하신다면 그것으로 쇠약해지도록 두신다면 우리는 육신의 이해에 따라서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까마득히 망각해 버리셨다는 듯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한 혼란스러운 생각이 사람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다면 그것은 그를 깊은 불신에 빠뜨릴 것이며 처방책을 구하려 들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더 이상 기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신앙이 그러한 시험을 이겨내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면 사물의 외관만 보고 판단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거나 자기를 포기하고 만 것으로 생각하던 같은 처지의 사람도 그 약속의 거울을 통해서 멀리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된 두 감정 사이에서 신자들은 증오하게 됩니다.
신자들이 동요하게 될 때 한편으로는 사단이 그들 앞에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을 보여줌으로서 그 신자들을 절망에 빠지도록 합니다.
그리고 사단은 신자들의 신앙을 완전히 뒤집으려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이 그 신자들로 하여금 약속을 회상시킴으로서 하나님께서 다시 그 신자들에게 그 호의로우신 얼굴을 보여주실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여호와를 신뢰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하는 절규와 곧 이어지는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불평의 원인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격렬한 슬픔과 연약한 육신이 시편 기자인 다윗으로 하여금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몸이다' 라는 말을 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이 그처럼 극심하게 시련을 겪을 때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신앙이 다윗의 입 속에 바른 말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지금까지 자기를 버리신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하나님을 가리켜 담대하게 내 하나님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 다윗은 신앙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불평을 늘어놓기 전에 신앙에게 제일 높은 자리를 내주는 뜻에서 먼저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하나님으로 주장하며 그 하나님에게 도피처를 호소했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감정이란 일단 그 고삐가 풀리고 나면 쉽게 조정되지 않고 우리를 이성의 한계 밖으로 이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그것을 억제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슬픔을 토로하기 전에 먼저 신앙을 표시하고 경건한 기도를 통해서 그가 후에 가서 자신의 큰 재난을 두고 불평하는 것을 누그러뜨림으로서 자신의 신앙에 우선을 두는 최선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시편 22 편
다윗이 그저 이런 표현을 통해서 '주님 왜 당신은 나를 저버리셨습니까' 라는 말을 했다면 다윗의 그처럼 모진 원망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다윗의 마음 또한 큰 슬픔으로 인한 불만족 때문에 낙담하여 큰 위험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신앙의 성벽을 불평불만의 수준이상으로 끌어올림으로서 다윗의 모든 생각과 감정이 올바른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자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켜 두 번씩이나 "내 하나님" 으로 부르며 조금 뒤에 가서 동일한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합니다. 이것은 쓸데없는 반복이 아닙니다.
마치 주님께서 우리에 대한 모든 관심을 저버리셨다는 듯이 우리의 고통과 탄식을 보고도 못 본 체하실 때 이런 시험과의 투쟁이란 힘겹고 고통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신앙의 확증을 구하는 가운데 더 끈질기게 분발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처음 받아들일 때부터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숱한 재난을 겪고 많은 시달림으로 단련된 다음 비로소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윗이 그의 신앙이 요동하지 않을 정도로 용감무쌍한 투사였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신실한 자들은 자신들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바치려는 뜻에서 자신들의 육적인 감정을 억누르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래도 그들 속에는 항상 연약성이 남아있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창세기32장 24절에서 언급하는 경건한 야곱의 절뚝거림이 유래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상대로 씨름하면서 이겼습니다. 그래도 야곱으로서는 그 이후로 계속 자신의 죄악스런 결점의 흔적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자신들의 연약성에 대한 의식 때문에 절망에 잠기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들에게 인내할 것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이 동요되고 격렬한 폭풍우처럼 우리를 초조 속으로 휘몰고 들어갈 때마다 우리가 취할 최선의 방법은 그것에 대항하여 그것의 격정을 자제하도록 분투하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하는 데 있어서 물론 우리는 괴로움을 받기도 하고 심한 상처를 입기도 하겠지만 우리의 신앙은 그래도 계속 안전하게 남아 있게 되며 멸망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하소연을 통해서 다윗이 자기 신앙을 확증할 수 있었던 말을 공연히 두 번씩이나 반복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단순히 자기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 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이 더없이 큰 위기에 처한 것을 보시고도 다윗에게 그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격려하는 증거를 하나도 보여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22 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울 능력이 있다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 원수들의 먹이로 놓여 있는 것을 보심에도 불구하고 계속 우리를 상관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잠잠히 앉아 계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손을 뒤로 물리셨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겠는가?
그리고 "내 신음하는 소리를" 이라는 표현을 써서 시편 기자 다윗은 그가 가장 극심하게 고통과 괴로움을 받았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물론 다윗은 사소하거나 평범한 고통 때문에 야수처럼 이렇게 울부짖을 정도로 용기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처럼 온화하고 용기백배한 가운데 여러 재난을 견뎌낸 유명한 사람이 그러한 큰 소리를 낼 정도로 그 고통이 심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바치려 하던 순간에 바로 이 말씀을 외치셨습니다(마27:46).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 성자였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고 소리칠 정도로 큰 슬픔을 느꼈으며 큰 정신적 갈등에 사로잡히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숙고해야 됩니다.
이 두말 사이에 있는 명백한 모순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허물을 전가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모호한 말로 피해 버립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데서 느낀 그 어떤 감정보다는 자신의 고통을 목격한 일반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서 이 불평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심판이 죄인들을 후려치는 공포에서부터 그들이 완전히 면제되었던 것으로 상상한 그 점에 있어서 우리의 구속의 혜택을 매우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감소하지 않으려는 뜻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큰 슬픔을 당하게 된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24절에서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변자가 되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던 만큼 그리스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죄인으로 나타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에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공포와 두려움이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처럼 괴로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눈앞에 죄인 된 자들 모두가 직면하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22 편
그런데 그리스도의 첫 번 고통 중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라고 할 정도였으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천사까지 필요할 정도였다면(눅22:43, 4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고통의 순간에 하소연을 토로했던 그 말씀은 아주 깊은 고통을 나타냈던 것이라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비록 인간의 열정과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면 안되었지만 육신의 연약성 때문에 죄를 지으신 일이 결코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되겠습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본성이 모든 무절제로부터 그를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후에 그를 절름거리게 했을지도 모를 투쟁에서 상처를 조금도 받지 않고 사단의 모든 시험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절규를 발설하심으로서 물론 다윗이 여기서 자기 자신의 고통을 두고 몹시 애달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 시편이 예언의 영의 감동 아래 다윗 왕과 주님에 대해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해 주었다는데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습니다.
2. 본문 2절은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입니다.
본 구절에서 시편 기자 다윗은 자신의 불안과 피로를 증대시켰던 그의 장기간에 걸친 고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외침이 헛수고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더욱더 괴로운 시련이었습니다.
우리가 재난을 받을 때 유일한 해결책이 하나님을 부르는데 있는데도 우리의 기도에서 아무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다른 구제책이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다윗은 다음 절에서 "잠잠치 아니하오나"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달랠 만한 위로나 위안을 도무지 체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고통을 받고 있는 동안 내내 그의 마음이 너무도 불안하여 절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재난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지만 그것이 그의 신앙을 뒤엎거나 신앙의 단련을 중단시킬 수 없었다는 그의 신앙의 불변성이 바로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대한 참된 규칙은 아무 쓸데없이 허공을 치는 것 같은 사람이나 오랫동안 기도하면서도 헛수고만 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 임무를 그만두거나 중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아버지로서의 친절 가운데 베푸시는 혜택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에 그들이 어느 때 그들의 욕구나 기대에서 낙심할 경우 그들이 그들의 난국과 고통을 하나님께 알리고 이 모든 짐을 그의 품에 풀어놓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시편 22 편
시22:3-8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본문에서 다윗은 과거에 이스라엘의 열조(列祖)를 도와 주신 하나님이심을 생각하여 소망을 가집니다(3-5).
또 자기의 가련한 처지를 하나님 앞에 진술하면서 구원해 주시기를 애원합니다(6-11).
1. 본문 3절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입니다.
히브리어 본래 문장은 '그리고 당신께서는 거룩하십니다' 이지만 (와우)라는 접속사는 틀림없이 반의 불변사인 '그래도'(yet)로 번역되어야 옳습니다.
혹자는 여기에 다윗이 체험한 고통과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상태가 대조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 견해를 따를 수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선민에게 자신을 은혜로운 분으로 드러내 보여주셨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더 간단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어떠하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다윗은 여기 이 표현을 통해서 자기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함으로서 그의 불평을 악화시키고 있는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 말을 하나의 방패로 하나님 앞에 제시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변함없으신 구원자라는 이 진리를 하나님의 눈앞에 제시하는 방법을 통해서 자신이 받고 있는 시험을 물리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여기서 제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 구절이 다윗이 큰 슬픔에 대한 부가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다윗이 이 표현을 써서 거기서부터 자신의 불신에 대한 처방책을 찾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시험이었습니다.
따라서 계속 그것만 생각하는 가운데 그것을 조장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한결같은 증거를 숙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은혜로서 자기가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자신을 격려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의도는 항상 그의 백성을 자비롭게 대해 주시던 하나님께서 이제 와서 어떻게 주님 자신의 본성을 망각하신 것처럼 비참한 사람을 아무 도움이나 위로도 없이 내던지실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사단의 불같은 공격으로부터 그 자신을 방어할 방패를 취하는데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 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변함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22 편
또 주를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로 말하는 것은 주께서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계속 복을 베풀 정도로 넓은 관용을 보여주심으로서 그들에게 계속 찬송과 감사의 소재를 제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기필코 그의 찬양을 송축하는 면에 벙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다윗도 이 선택받은 백성들 가운데 속하고 있었으므로 훼방을 놓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장애물들을 모두 물리치고 그가 마침내 이 집단과 연합해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는 소망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2. 본문 4-5절은 "(4)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 다 (5)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 이다" 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여러 지파들의 찬양을 독차지하시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 이유란 하나님의 손길이 항상 그의 신실한 백성들을 보호해 주시려고 뻗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과거의 모든 본보기들을 수록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선택하신 백성은 누구도 저버리신 일이 결코 없는 만큼 앞으로 자기 또한 하나님의 손에 안전하게 구원이 보장된 자들 가운데 들 것이라는 점을 자신에게 격려하고 힘을 돋우며 충분하게 확신하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가 응답 받았던 자들의 자손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히데 여기에는 자신이 그들이 체험했던 동일한 은혜의 한 상속자라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그의 특별한 백성으로 입양함에 있어서 사용한 언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하나님의 교회 일원으로 포함시키듯이 우리 각자가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드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신 다양한 증거를 아는 것만으로는 별 의의가 없을 것입니다.
조상들이 '의뢰' 함으로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은 열조에게 생기를 북돋아주었던 동일한 소망을 다윗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주 겸손하게 암시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소망은 후에 우리를 위한 약속의 성취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의 종들에게 베푸신 복으로부터 격려를 받으려면 마땅히 하나님 말씀의 무상의 약속과 거기에 의존하는 신앙으로 자신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시편 22 편
이 확신은 맥빠지거나 죽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은 그와 동시에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라는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척하는 사람이 그가 재난을 당할 때 태평하고 무관심한 나머지 하나님의 도움을 탄원하지 않는 자는 괘씸하게 드러누워 있는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나무는 그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는 신앙에서 우러나와 신앙을 동반하는 기도가 아니고서는 그 어느 것도 올바른 것으로 취급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4절의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라는 말과 5절의 "주께 의뢰하여" 라는 말 사이에 공연히 '부르짖었다' 는 말을 넣은 것이 아닙니다.
3. 본문 6절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혹하게 대하셨다는 듯이 그에게 불평불만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두고 애곡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더 효과적으로 유도하는 뜻에서 자신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물론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마음을 좌절시키고 신앙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결과를 볼 경우 그보다는 다윗이 자신의 상태가 너무 비참했던 것으로 선언하는 것은 이것을 통해서 구제를 받으려는 소망을 다짐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곧 그처럼 가혹하게 고통을 받고 절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의 손길을 펴실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고통을 당하는 모두에게 그들이 당하는 고통이 평범하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동정을 베푸신다면 어떻게 모든 재난 가운데서 가장 깊은 심연에 빠져 있는 그의 종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큰 고통의 압박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생각하고 절망에 빠지기 보다는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스스로를 격려해야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가장 탁월한 종 다윗일지라도 가장 비천한 인간 가운데서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하게 단련하시고 낮추셨다면 우리가 낮추어진다 해서 이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해야겠는데 그분을 통해서 이것이 또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22 편
이것은 이사야가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라고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선지자의 이러한 예언을 통해서 다윗의 '벌레'라는 단어를 마치 그가 그리스도의 탄생에 있어서 숨겨진 무슨 독특한 신비를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 단어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쓸데없이 세밀한 구별을 충분히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선지자가 꾸밈없이 말하고 있는 의미는 그가 인간 이하의 천대를 받고 말하자면 산 자의 숫자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스스로 그런 수치를 당하셨다는 아니 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는 사실이 어느 면에서나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흐리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에 대한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은혜가 반사되어 나타나는 빛나는 거울입니다.
4. 7-8절은 "(7)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저가 자기 사유를 여호와께 부탁했구나 그가 저를 기뻐하시니 그더러 저를 구원하시라지 그더러 저를 구원하시라지 -칼빈)" 입니다
이것은 앞 문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장 비천한 사람들에게까지 말하자면 찌꺼기 같은 인간들에게까지 조소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말했던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우리에게 자기가 받았던 수치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곧 그들이 모독적인 말투로 만족하지 않아서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가로젓는 그들의 실제 행동으로서 오만불손을 드러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입술을 비쭉이고"로 번역하는 구절이 히브리어에서는 '그들이 입술을 열다'라고 되어 있다 해서 혹자는 이것을 '욕설을 퍼붓다'의 의미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견해를 적절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은 'with' 의 의미를 지니는 (베트)는 히브리어에서 흔히 그렇듯이 여기서도 있으나마나 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원어를 '그들이 입술을 비쭉이다'로 번역하는 편을 택했는데 이것은 공공연하고 모욕적으로 조롱하는 자들의 모습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모욕적인 언사, 곧 자신이 공공연하게 자기 아버지로 선언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돌아선 것으로 말하는 그들의 주장은 더욱더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다윗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정죄를 받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자신에게는 선한 양심의 증거가 있으므로 하늘에 게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수호자로 모시고 있으며 그분이 자기를 욕하는 자들에게 보복을 가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스스로 힘을 돋우고 위로했던 사람입니다.
시편 22 편
그런데 여기서는 그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헛된 교만으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자랑을 근거 없이 늘어놓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가 신뢰하는 그 사랑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인간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데 사용하는 가장 치명적인 화살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롱으로 바꿈으로서 우리의 마음에서 소망을 제거해 버리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원수들은 그의 기도가 허사였으며 그가 자랑하던 하나님의 사랑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간접적으로 다윗이 위선자였다고 비난하고 있으며 그가 거짓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했기에 아주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얼마나 가혹한 시험이었겠는가 하는 점은 각자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사용한 해결책을 통해서 자신의 이 확신이 진실했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자기 마음의 진실성에 대한 증인과 인준자로 삼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런 하소연을 가지고 감히 그분 앞에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위선자로 볼 대마다 우리 마음의 내면적인 진실성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답변하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만족합시다.
사단이 모진 모욕과 야비한 조롱을 통해서 우리 마음으로부터 신앙을 제거하려 할 때마다 하나님을 거기에 대한 증인으로 내세워 우리의 거룩한 닻으로 삼도록 합시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우리의 권리를 옹호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는 것을 즐거워 하실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탁하는 자가 헛된 확신에 부풀어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자들이 근거없는 망상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더 악한 신성모독으로 더럽혀지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동일한 무기로 공격을 받으셨다는 점을 생각할 때 사단이 주님의 지체인 참 신자들을 주님보다 더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들이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과 자신들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그들의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 사실을 숙고함으로서 자신들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맡기다'로 번역한 (골)이라는 동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함으로서 그들을 동요시키는 염려와 고통의 멍에에서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앙의 성격과 효험을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22 편
시22:9-11 오직 주께서
다윗은 계속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하나님께 진술하면서 구원해 주시기를 애원합니다.
1. 본문 9-10절은 "(9) 오직 주께서(분명히 주께서- 칼빈)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 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 셨사오니"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다시 사단의 음모를 저지하고 격퇴하기 위해 새 요새를 세웁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셨던 혜택을 간략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혜택을 통해서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라는 점을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보여주셨기에 현재는 사망의 흑암으로 압도되고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에 대한 소망을 얼마든지 바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또 신실한 자들이 공포와 고통에 처하게 될 때, 그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여러 증거를 모아서 그 증거들로 자신들의 신앙을 북돋우고 보강하는 지혜를 가르쳐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너그러우심을 나타내시는데 결코 지치는 법이 없으시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 제아무리 풍성하다 해도 하나님의 재물이 탕진되는 법은 없으므로 우리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를 아버지로 체험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령이 되어 죽을 때까지라도 우리에게 변함 없으신 분으로 나타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의 확정된 원칙으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다' 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유아들이 자연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어머니의 젖으로 양육 받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경이로우신 섭리가 밝게 빛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적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배은망덕이 우리의 눈에 우매의 휘장을 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어린아이가 태어날 적마다 경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수백 번 타락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하나님의 은밀하고 신비한 능력에 의해서 무덤 속에서 살아 있게 하시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편 22 편
그리고 그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뒤에도 무수한 불행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그 불행을 막을 조금의 힘조차 없는데도 자기를 도와달라는 어떤 손짓 하나도 할 수 없는데도 만일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품으로 그를 양육하고 보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단 하루라도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갓난 아이가 주를 '의지하게' 된다는 말씀은 아주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젖먹이들을 먹이시고 유모의 모든 임무로 돌보시지 않는다면 태어나는 그 순간에라도 그들을 순식간에 질식시키는 수백 번의 죽음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 하나님" 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짐승에게까지도 여기서 송축되고 있는 선하심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이 아버지 되심을 보여주는 것은 인류에게 대해서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장 젖먹이들에게 자신에 대한 지식을 부여하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의지하게 하신 분"으로 묘사된 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을 보살피신다는 점을 보여주심으로서 어떤 의미로는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시147:9)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자신의 은혜로 유아들이 아직 이성이 있기 이전에 그들의 모든 것을 예상해 주신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종들이 탄원하고 부르짖을 때 그들의 소망을 좌절시키지 않으실 것이라는 점이 확실해집니다.
이것이 다윗이 시편을 극복하기 위해서 분투했으며 노력한 요지입니다.
2. 본문 11절은 "나를 머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유도하는데 또 다른 논리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더없이 큰 고통에 심하게 눌려 있으며 포위를 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윗은 자기 눈앞에 성경이 어디에서나 증거 하듯이 하나님께서 비참한 자들을 도와주시고 우리가 더 큰 괴로움을 받을수록 그만큼 더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하신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망 그 자체도 다윗의 마음을 경건하고 열렬한 기도의 연단으로 다윗의 마음을 향상시키는 중재 역할을 한 셈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통에 대해서 가지는 감정도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도움을 허용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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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2:12-16 많은 황소가 나를
다윗은 핍박자들의 강한 힘 앞에서 자기는 말할 수 없이 한지에 떨어진 것을 애탄(哀歎)하면서 주님의 구원을 애걸합니다.
1. 12-13절은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자기 원수들의 잔인성과 야만적인 횡포를 두고 불평하면서 그 원수들을 먼저 황소들에게, 다음으로 사자들에게, 셋째로 개들에게 비교합니다.
황소가 화를 내기 시작하면 얼마나 격렬하고 무서운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자도 마찬가지로 잔인한 짐승으로서 인류에게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개들이 일단 성나기 시작하여 인간에게 덤벼들어 상처를 입히려 할 때, 그 격렬한 대담성 또한 다들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다윗은 '황소들'로 이야기하지 않고 "많은 황소들"(힘센 황소들-칼빈)로 이야기합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얼마나 피에 목마르고 잔인하던지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사나운 짐승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라빔)이라는 단어를 우리처럼 '힘센'으로 번역하지 않고 '많은'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무수한 원수들에게 공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본 구절의 둘째 절을 볼 경우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숫자가 아니라 힘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들을 '바산의 황소들'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그 소들이 살찌고 크며 힘센 소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산의 언덕은 기름지고 넓은 초장으로 유명했습니다.
2. 본문 14절은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입니다.
지금까지 다윗은 자신이 들짐승들에게 포위된 나머지 죽음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는 점, 곧 어느 순간에라도 삼켜질 위기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알려주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다윗은 자신의 내적인 고통을 두고 애곡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윗이 우매하거나 위험을 의식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뼈마디를 모두 풀어놓고 그의 마음을 물처럼 쏟게 만든 공포야말로 결코 평범한 것일 수 없었습니다.
시편 22 편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요동치 않는 바위처럼 고통의 파도에 시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도움을 받지 않았던들 육신의 연약성 때문에 결코 이겨낼 수 없었던 쓰라린 고통과 시험으로 내적인 괴로움을 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통이 어떻게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는가는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실제 인간이었기에 우리 육신의 여러 연약성을 참으로 담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직 한가지 예외가 있었다면 그것은 죄가 그에게는 전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완전히 순결하다 해서 인간적 감정들을 멸절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 순결성은 이 인간적인 감정들이 지나쳐서 죄악스럽게 되는 일이 없도록 그것들을 조절해 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슬픔이 커서 그가 아무리 괴로운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평온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그를 약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내부에 소란스럽고 무질서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감정의 격정에 이리저리 끌리지 않을 정도로 그것을 억제할 수 없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상황이 다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윗의 본을 받아 용기를 내야만 합니다.
연약성 때문에, 거의 죽게 되었을지라도 은혜롭게 우리의 힘과 활기를 소생시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우리의 신음소리를 하나님께로 향해야만 합니다
3. 본문 15절은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입니다.
이것은 의사들이 말하는 필수적인 수분에 의해서 생기는 힘을 뜻합니다.
다음 중반절에서 덧붙이는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라는 구절도 같은 뜻입니다.
과도한 슬픔은 생명력 넘치는 활기를 소모시킬 뿐 아니라 우리 몸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수분까지 말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라는 말로서 다윗은 자신이 죽음을 선고받았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자신에게서 생명에 대한 모든 소망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후1:9)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자신에 대해서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자신에게서 떠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무서운 죽음을 당하심으로 그의 몸에서 피를 쏟게 만들고 말았으며 주를 지옥으로 내려가시게 하여 죄인들의 몫인 하나님의 진노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시편 22 편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셨다(emptying)는 것은 결코 일상적인 어법으로는 제대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망을 두고 말하는데 있어서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이 사망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곧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들이 흙으로 돌아가 파멸 받을 것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이야기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이 흑암에 휩싸이며 압박을 받을 때마다 그들의 이 단련에는 약간의 불신이 뒤따르므로 그들은 흑암에서 일어나 새생명의 빛으로 급히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두 요소가 경이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앎으로서 생기는 공포감과 모든 정신적 감정을 안정시키는 신앙에서 나오는 인내심, 이 둘이 경이적으로 연합되어 있어서 계속 하나님의 권위에 완전하고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됩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이와 비슷한 능력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 주위에 사망밖에 없는 것을 보고 당분간 크게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우리는 점차로 용기를 회복하는 가운데 죽은 자들을 살리는 소망을 가짐으로 격려를 받아야만 될 것입니다.
4. 본문 16절은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입니다.
우리가 '찔렀나이다' 로 번역한 원어 (카아리)를 직역하면 '사자와 같이' 입니다.
오늘날 모든 히브리어 성경이 예외없이 이 독법을 택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들 모두가 지지하는 이 독법에서 이탈하는 것을 삼가고 싶지만 본 강론의 요지 때문에, 그리고 유대인들이 본 구절을 잘못 곡해하고 있다는 추측에 대한 강력한 근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칠십 인역에서는 번역자들이 히브리 원문을 (카아루)로 읽었는데 곧 지금 (요드)로 되어 있는 것을 (와우)로 읽은 셈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원문을 '그들이 찔렀다'로 번역하게 되면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의도적으로 바뀌어지는 것으로 떠들어대지만 이 주장에는 아무런 진실성이 없습니다.
매우 하찮은 문제를 가지고 그처럼 주제넘게 따질 필요가 무엇인가?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로부터 그의 문장(紋章, escutcheons)을 빼앗고, 주님의 메시아와 구속주로서의 신분을 박탈하려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가장 간절한 소원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주장에 거짓이 들어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의 주장대로 이 독법을 택한다면 그 의미가 아주 희미하게 되어버립니다.
먼저 그것은 불완전한 표현이 되고 말 것이며 이 표현을 마무리짓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대로 '포위하다 또는 에워싸다' 라는 단어를 보충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22 편
그러나 '손과 발을 포위한다' 는 것이 무슨 말인가?
포위한다는 표현은 인간의 신체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두고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 이론이 모순된다는 점이 발각되자 그들의 통상적인 방법대로 그들은 더없이 우스꽝스럽고 허황된 수단을 쓰고 있는데 곧 사자가 길에서 사람을 만날 경우, 덮치기 전에 꼬리로 동그라미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지지하기 위한 논거에 쩔쩔맨다는 점이 명백합니다.
다윗은 앞 절에서 사자의 비유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여기서 다시 반복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노릇입니다.
주석가들 가운데는 이 명사에 유사성을 의미하는 'as'의 뜻이 있는 (카프)가 접두어로 따를 경우에는 이 구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점과 다른 부분을 흔히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의 주장을 용서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고 더없이 고집을 피우며 독선적인 자들을 설득하라고 수고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의도는 다만 이곳에서 생기는 독법상의 차이를 가지고 그들이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가 하는 점을 간략하게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에 의하면 어느 사람도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었다는 점을 들어 반박하고 있는데 이것은 역사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폭로할 뿐입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정복한 여러 지역에 자신들의 습관과 방식을 많이 도입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혹 그들은 다윗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이 없다고 반론하더라도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상태를 두고 애도하면서 비유를 사용해서 자신의 손과 발이 못으로 꿰뚫린 채 십자가에 달린 사람처럼 자기 원수들에게 고통을 받았다는 점을 밝힙니다.
조금 뒤에 가면 이와 비슷한 비유법이 또 나옵니다.
시편 22 편
시22:17-21 내가 내 모은 뼈를
다윗은 계속해서 핍박자들의 강한 힘 앞에서 자기는 말할 수 없이 한지에 떨어진 것을 애탄(哀歎)하면서 주님의 구원을 애걸합니다.
1. 본문 17-18절은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입니다.
'뼈'를 의미하는 (아츠모트) 는 '힘'을 뜻하는 다른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종종 우리에게 자신들의 방어를 통해서 힘을 주는 친구들이나 어떤 주장을 옹호하는 지자나 힘이 되는 논거와 이유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이 의미를 붙여서 '내가 스스로 변호하는데 있어서 나의 모든 논리를 동원해도 아무 혜택을 입지 못할 것은 내 원수들이 공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우리를 파멸하기로 확고하게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라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것을 '설령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모든 도움을 다 합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도 설명합니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지지를 받는 해석이 더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 해석이란, 곧 다윗의 몸이 얼마나 쇠약했던지 그 뼈가 온 몸 구석구석에서부터 불거진 것으로 보일 정도라는 것을 하소연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윗은 곧이어 자기 원수들이 자신이 그처럼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서 즐거워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두 소절은 아름답게 연관되어 있는 셈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의 잔인성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그들은 비참한 사람이 슬픔으로 허약해 가는 것을 아니 다 죽어 가는 꼴을 보고도 즐거워할 정도였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어지는 의복에 관한 내용은 비유적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재산이 원수들의 먹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은 정복자들이 피정복자들을 약탈하고 각자의 몫을 정하려고 제비를 뽑으면서 노략물을 나눠가지는 데서 볼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자신이 장신구, 부 그리고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자신의 의복에 비유하면서 다윗은 원수들이 그것을 빼앗아간 뒤에 이것을 마치 노략물을 다루듯이 그들끼리 나눴으며 그러면서 자기를 조롱했다는 점을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시편 22 편
이 조롱이 그들의 행동의 극악성을 돋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그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승승장구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본 시편에 예언의 영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더욱더 확실하게 가르쳐주려는 뜻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다윗에게서 그림자로 드리워졌던 모든 것이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 성취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태는(8:16, 17) 중풍병자, 눈먼 자, 절름거리는 자들이 그들의 병을 고침받은 것으로 말하면서 이것이 이루어진 것은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사실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영적 의사의 신분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데 있어서 아주 느리고 더딥니다.
따라서 우리의 더딘 이해력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분이 우리의 의식이 곧 느낄 수 있도록 제시되고 있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못됩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더딘 이해력을 깨우치려는 뜻에서입니다.
2. 19-21절은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 열거한 모든 내용을 마음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극에 달했으며 그에게 구원을 바라도록 북돋아주는 소망이 조금도 없어 보였는데도 그가 자신의 고통을 참고 견딜 뿐 아니라 절망의 심연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단계에까지 올라섰다는 것은 그의 신앙의 능력에 대한 경이적인 본보기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역경에 처할 때 아무렇게나 탄식을 내뱉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자신의 탄식을 쏟아놓으면서 그것이 공연하거나 효과를 갖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특별히 주목해야겠습니다.
다윗이 덧붙이는 기도는 그가 바란 결말에 대해서 소망을 품고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힘'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명칭을 통해서 다윗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더욱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의심스런 태도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눈이 파악하지 못한 도움을 스스로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시편 22 편
'칼', '개의 세력', '사자 입', '들소 뿔'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다윗은 자신이 당장 사망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으며 그 방법 또한 여러 가지였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이처럼 사망의 포위를 받았을 때 내적으로 완전히 기진맥진했지만 그래도 계속 하나님에 대해서 강력하게 의지하였으며 생명의 영이 항상 그의 마음 속에서 왕성하게 넘쳐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유일한 영혼' 또는 '유일한 생명'을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보는데 이 견해는 적합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보다도 그 의미는 그런 무수한 죽음 가운데서도 다윗이 온 세상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35편17절에서 "유일한 것"(유일한 영혼 -칼빈) 은 어떤 도움이나 구원을 받지 못하고 홀로 있는 사람에 대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 점은 시편 25편 16절에서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거기서 다윗은 자신을 괴롭고 외로운 사람으로 부르면서 그에게는 친구들이 하나도 없게 되었으며 온 세상이 자신을 버린 것으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21절 하반절에 "내게 응낙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런 히브리식 표현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고 모호하게 들릴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의미가 전혀 애매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원인이 결과대신에 나오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신 결과이거나 효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이 어떻게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사망에서 구원하셨는가?
우리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가 사망의 희생물이 되는 것을 막으셨을 경우, 보다더 큰 구원을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중병을 치료받는 것보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 훨씬 더 큰 구원이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마침내 그리스도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시편 22 편
시22:22-24 내가 주의 이름을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간구 한 후에 이제 찬송합니다.
먼저 다윗은 형제, 곧 회중 가운데서 찬송합니다.
1. 본문 22절은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구출 받고 나면 배은망덕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약속함으로서 앞서 언급한 내용, 곧 자기가 시험에 빠지더라도 그것을 물리칠 용기가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을 확증합니다.
만약에 그가 먼저 구출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품고 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다윗이 당장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만반의 준비가 다된 것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본 시편이 다윗이 바랐던 것을 실제로 얻은 다음에 작성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가 다음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그가 심한 고통을 받고 있던 기간에 그의 마음을 꿰뚫었던 묵상과 반성을 이루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다윗이 약속하고 있는 것이 결코 평범한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감사의 증거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의 성소에 나와서 거기서 그들이 받은 은혜를 엄숙하게 증거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공적으로 엄숙하게 감사를 드리는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존귀히 여기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함으로서 그들이 서로 동일한 방법으로 서로를 격려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의 경이적인 능력은 다윗의 보호에 있어서 한가지 기적이 아니라 수많은 기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엄숙한 서원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과 신실성을 공적으로 증거할 의무를 스스로 부과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입니다.
'형제에게' 란 이스라엘 백성들을 뜻하며 다윗이 그들에게 이 호칭을 사용한 것은 그와 그들이 한 혈통에서 나왔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이 동일하게 가지는 신앙이 마치 신성한 맺음처럼 영적 결속을 통해 그들을 서로 연합시켜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2 편
사도는(히2:12) 이 구절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면서 그 말씀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자신의 형제로 인정하시고 우리에게 그처럼 영예로운 자격을 하사하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일할 본성의 참여자가 되셨으며 육신의 참된 교재를 통해서 하나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차례 반복했듯이 또 그 점이 본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쉽게 인증되고 있듯이 다윗의 그림자적인 신분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실체로 제시됩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여기서 '형제'라는 명칭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그와의 형제적인 결연 관계의 권리를 우리에게 확증해 주었다는 점을 추론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모든 인류에게 속하지만 그것에 대한 참된 향유는 본래 순수한 자들에게만 속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입으로 손수 이 명칭을 제자들에게 국한하시면서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악인들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몸소 맺어주신 그 골육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취소시키고 있으며 자신들의 잘못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신들을 철저한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다윗이 '형제들'이라는 말 속에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들을 포함시키면서도 곧이어(23절) 그의 강론을 하나님의 참 예배자들에게 국한시키듯이, 그리스도께서도 한편으로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리시고 입양의 복을 모든 민족에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 모두에게 자신을 형제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래도 참 신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형제의 범위에 넣지 않습니다.
2. 본문 23절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 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입니다.
여기서 다시 다윗은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공적이요, 엄숙한 감사의 열매를 보다더 뚜렷하게 표현하면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이러한 단련에 참여함으로서 그의 본을 통해 교회를 격려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줍니다.
다윗은 자기가 공적 집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목적이 자기 형제들에게 동일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데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시편 22 편
그러나 위선자들은 흔히 자신들을 교회로 불쑥 내미는 판국이요, 또 주님의 창고 바닥에는 알곡과 쭉정이가 뒤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특별히 경건한 자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불순하고 악한 사람들도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찬양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하는 일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훼손시킬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한 목소리로 거룩한 선율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화음의 핵심은 순수하고 진지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경외의 감정에 사로잡혀 예배하는 자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송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조금 뒤에 가서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동일한 부름과 관련됩니다.
분명히 다윗은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무슨 장애물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수많은 사람이 가짜요, 타락한 자들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만큼 다윗은 그들로부터 참되고 진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구분하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앙과 내적인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제대로 송축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권면을 통해서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찬양과 경외를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다윗이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로 말하는 것은 위선자들이 이 면에서 가장하는 그럴듯한 얼굴 표정은 기껏해야 순전한 조롱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두려움은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제 5편에서 언급되듯이, 그들을 참으로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끄는 그러한 두려움입니다.
혹자는 다윗이 이미 하나님을 찬양한 자들을 칭찬하고 다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권면하는 것을 이상히 여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계속 이 단련에 대한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쉽게 설명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상대로 이야기하면서 다윗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겸손하게 엎드러질 것을 권하는 것이 결코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시편 22 편
3. 본문 24절은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입니다.
서로의 선을 두고 서로 격려하며 각자의 안녕을 두고 함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할 교제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1:11)라고 가르쳐주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 말은 또 다른 중요한 목적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동일한 자비를 베풀어주신 다는 사실을 소망하도록 격려해 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고통을 받을 때 주께서 그들을 제아무리 오랫동안 고통스런 상태에 두신다 하더라도 참을성 있게 견뎌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극심한 단련을 받고 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마침내는 도움을 베푸신다는 점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시편 22 편
시22:25-29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다윗은 이제 찬송을 확대합니다.
곧 대회와 온 세계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본문 25절은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입니다.
우리는 다른 번역도 반대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표현은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찬양의 노래에 대한 소재를 얻겠다는 의미로 요청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올 것이다' 또는 '흘러나올 것이다'라는 단어를 보충해서 '나의 찬양이 주께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또는 '흘러나올 것입니다' 로 번역합니다.
다윗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 덕분이라는 점을 증거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척하면서 자신들의 칭찬을 떠벌이거나 친구들의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하나님을 뒷전으로 물려놓는 사람들이 만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조금 전에 다루었던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그의 감사의 증거들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표시 가운데 율법이 규정하는 신앙심이 엄숙하게 실행될 것이라는 점을 덧붙입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와 임박한 위험에 당면할 경우에 하나님의 옛날 백성들 간에는 화목제를 드려 서원하는 것이 일반 관습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랐던 것을 얻은 다음에 그들은 서원을 이행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이 성도들의 반열에 속했던 한 사람이었던 만큼 당시 교회의 일반적이요 납득이 갔던 규례를 스스로 확증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이행하기로 약속하는 서원들은 그가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서 약속했던 것임을 암시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귀하고 즐거운 마음, 곧 확신에 가득찬 마음으로 이것을 수행하려는 것입니다.
시편 22 편
그런데 다윗으로서는 이 엄숙한 신앙 행위를 차별없이 모든 회중 앞에서 이행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것을 증거하려고 참석하는 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참 예배자들이기를 바란다는 점을 다시 고백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청결하게 할 능력이 우리 손에 없다 하더러도 교회의 순결을 사모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교황주의자들이 자기들의 거짓되고 기만적인 서원을 지지하기 위해 이 구절을 왜곡시킴으로서 보여주는 그들의 짓이 너무 우매하고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반박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달랠 것으로 생각하는 이 어리석은 바보짓과 종교와 하나님의 경외에 대한 참된 의미를 조상들에게 제시했을 때 하나님께서 손수 그의 율법에서 명령하신 이 거룩한 감사의 증거 사이에 무슨 유사성이 있는가?
무슨 염치로 그들의 어리석고 창피한 미신을 모든 제사 중에 가장 귀중한 제사, 곧 감사의 제사와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성경도 증언하고 있듯이 하나님 예배의 핵심부분은 그분만이 모든 선한 것에 주체라는 점을 참 신자들이 공적으로 엄숙하게 고백하는데 있습니다.
2. 본문 26절은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습관, 곧 제사에 대한 잔치를 언급합니다.
다윗이 이 잔치를 약속하는 것은 그의 자비를 시행하고 입증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제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동정심과 자비가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없을 경우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모든 의식, 그들의 모든 허식과 장엄함은 연기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단지 육신의 양육을 위해서 가련하고 배고픈 자들에게 무엇을 베풀기로 약속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으로서는 그들이 이 잔치에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이 위로를 받을 때 기쁨이 그들의 마음을 회복시켜서 새로운 활기를 넘치게 되리라는 점입니다.
시편 22 편
그들은 그런 잔치를 통해서 - 마치 거울을 통해서 보듯이 - 하나님의 선하심이 고난을 받는 모든 자들에게 계시되며 그것이 온갖 재난을 통해서 일어나는 그들의 슬픔을 훌륭한 위로로 달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하는 점을 덧붙입니다.
그들이 맛본 풍요한 식사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야 옳았지만 특별히 여기서 의도되는 것은 이 제사의 목적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이 점은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라는 대목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식사 한끼가 그들의 마음을 영원히 살게 하는데 충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보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느낀 소망이었습니다.
모든 신실한 자들이 이 한 사람의 구원을 특별히 자신들을 위한 구원으로 여기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순수한 예배자들이 화목제를 통해서 자신들의 소망을 단련한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이 화목제를 통해서 송축되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위선자들은 텅비고 생명이 없는 의식을 거듭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만큼 다윗은 이 의식의 올바른 수행을 참되고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국한시킵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순수한 신앙심의 확실한 표시입니다.
율법 시대의 조상들이 그들의 거룩한 잔치를 통해서 영적인 생명이 새롭게 되고 힘을 얻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의 성만찬에서도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참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찾기만 한다면 이 덕이 더욱더 풍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3. 본문 27-28절은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 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입니다.
본 구절은 확실히 다윗이 자기 자신의 신분에서 멈추지 않고 모형으로서의 자신을 통해서 약속의 메시아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당시에도 다윗이 하나님의 왕으로 세워진 것은 백성들이 한 지도자 밑에서 연합하여 행복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름이 이웃 민족들에서 위대하고 명성이 나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차지한 영토라야 온 세상에 비교할 때 어느 정도였던가?
시편 22 편
더욱이 다윗이 정복했던 이방민족들이 다윗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진실되게 기뻐하도록 개종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정복을 당한 이방민족들이 지상의 한 왕에게 정복당함으로서 강요된 노예적인 복종은 그들의 비참한 방랑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돌아서게 하는 참 신앙의 자발적인 순종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다윗은 이방민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게 된 다음에 하나님께 돌아올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평범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거룩한 잔치의 교제와 그들을 하나로 묶어 이야기함으로서 명백히 그들을 교회의 지체로 접붙이고 있습니다.
혹자는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를 이방인들이 신앙의 빛이 회복되는 때에 한동안 망각하고 있던 하나님을 기억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우리가 보기에 너무 정묘해서 그 의미와는 동떨어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회심 또는 귀환이 그들이 사악한 배교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과거에 소외되었다는 의미를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이 기억은 단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놀라운 기적으로 일깨움을 받은 이방인들이 변절하였던 참된 신앙을 다시 받아들인 것으로 단순하게 의미합니다.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 대한 참 예배는 그분께 대한 지식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다윗의 이 말은 겸허한 경배로 하나님 앞에 스스로 굴복하게 되는 자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묵상하여 은혜를 받게 되면 그들이 더 이상 그분께 교만하고 주제넘게 대항하여 말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의미는 다음 절에서 이어지는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라는 이유에 의해서 보다 더 자세하게 확증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과 생명의 언약을 맺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그들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손길로 지배하시는 하나님께 이방인들이 부득이 영광을 돌려야만 된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하찮고 만족스럽지 못한 해석으로 배척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총괄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좌정할 하나님의 보좌가 세워진 것으로 말하는 다른 많은 예언과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가 한 구석도 예외없이 온 세상에 미치게 된다 하더라도 그분께서 무지의 흑암을 일소하고 말씀의 빛을 널리 퍼뜨리신 다음, 그의 보좌에 분명하게 나타나실 그때에 참으로 주님의 권위를 행사하신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해야 합니다.
시편 22 편
선지자 이사야는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사2:4) 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정복될 수 없던 자들이 복음 전파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순종하기 전에는 세상을 굴복시킨 일이 없는 만큼 우리는 이 회심이 오직 그리스도의 섭리와 통치 밑에서만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는 점을 결론합니다.
혹 온 세상이 아직 회개하지 않았다는 반론을 제기한다면 그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복음 전파에 의해 모든 곳에서 갑자기 알려지게 된 이 괄목할 만한 시기와 그가 자신에 대한 지식을 유대 지역에 국한시켰던 옛 세대와 비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놀라운 속도로 동에서 서에 이르기까지 마치 번개처럼 침투하셨던 것은 세상의 모든 이방인들을 교회로 이끄시려는 뜻에서였습니다.
4. 본문 29절은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입니다.
다윗이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위해서만 정한 것으로 보였던 잔치에 이 지상의 풍비한 자들이 손님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모순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겸손한 자들에게 우선적인 자리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의 예에는 이 겸손한 자에게 주로 위로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으로 부여하고 번창하는 사람들도 그 잔치에 초대받을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동일한 은혜에의 참여에서 제외된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물론 그들은 현재 재난의 압력에 못이겨 슬픔에 대한 위로를 찾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열락에 도취되는 것을 막고 그들의 기쁨을 하늘에 쌓아두도록 자극하는 대비책이 필요합니다.
그들도 여러 가지 고통을 면할 수는 없으므로 자신들의 풍요 때문에 마음을 이 땅에 고정시킨다면 그 풍요는 하나의 저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의도는 이것입니다.
이 제사가 건장하고 튼튼하며 풍요한 환경에 처해 있는 자들과 바짝 마르고 가난하며 음식이 없어서 거의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전자는 그들의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갖고 후자는 그들의 처지가 낮다 하더라도 영적인 기쁨을 통해서 자신들의 마음을 모든 좋은 것의 주인공되시는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시편 22 편
이것은 야고보가 양쪽 계층 사람들에게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약1:9,10) 라는 말로 권고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 시대에 배부른 자와 주린 자,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 행복한 자와 가련한 자를 함께 결합하셨다면 오늘날 복음 시대에 있어서는 이것이 더욱 더 활발하게 이뤄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부요한 자들은 지상의 풍요 이외의 다른 곳에서 그들에게 음식이 제공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현재의 생활을 위해 베푸신 외적인 좋은 것을 사용하되 그들이 영적 음식을 지겨워하거나 그 음식을 싫어하면서 돌아서는 일이 없도록 온건한 마음으로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오물 속에서 딩구는 한 그들은 이 음식을 결코 거룩한 열성으로 사모하지 않을 것이요, 설령 그것이 자기들의 손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맛보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풍비한 자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 바로 그분에게서 배부름과 양육을 받으려면 먼저 그들이 바짝 마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다윗은 기아 상태에 있는 자들이 가난 때문에 그 잔치에 오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그들에게 확고하고 담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죽은 자들까지 잔치에 초청하는 것은 제아무리 멸시를 받는 자들과 이 세상보기에 다 썩어가면서 냄새를 피우는 시체와 같은 자들이라도 격려와 용기를 얻어 주님의 거룩한 식탁에 앉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시편 기자는 본 구절의 마지막에 복수를 단수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의미를 모호하게 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의미는 틀림없이 이미 흙으로 변해 버린 것으로 보이는 자들, 곧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의 회복이 절망적인 자들까지도 자기와 함께 동일한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2 편
시22:30-31 후손이 그를
본문에서 다윗은 신자들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대대에 구주를 전파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일의 주체가 주님이신 사실이 선포됩니다.
1. 본문 30절은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그들의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한 민족으로 주께 등록될 것이며 - 칼빈)" 입니다.
다윗은 이 은혜의 위대성을 더욱더 크게 강조하는 뜻에서 이 은혜가 후손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을 밝혀줍니다.
다윗은 이 은혜가 어떻게 영속될 것인가 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곧 자기가 언급하고 있는 세상의 회심이 당분간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수 세대에 걸쳐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금 결론 내리는 것은 여기서 송축되는 것이 이방민족에게 일시적이며 순간적인 뜬소문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영광의 묘사가 아니라 마지막 시간까지 그 광채로 세상을 밝게 할 그런 표명이라는 결론을 얻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영속성이 여기서 풍성하게 입증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영속성이 계속적인 세대에 걸쳐서 동일한 과정을 통해 항상 번창하거나 지속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말살되는 것을 원치 않기에 진심으로 그를 섬길 자들을 항상 조금씩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예배를 보존하기로 된 이 후손이 썩어지지 않는 씨의 열매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수단으로만 자신의 교회를 낳으시고 증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께 하나의 민족으로 등록된다'(칼빈 사역) 는 표현은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르)를 '세대의 연속'으로 보고 이 소절을 '그들이 세세토록 주님께 등록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단어를 '민족'(generation), 곧 라틴어에서 natio 가 가지는 "민족"이라는 의미로 봅니다.
이 두 의미는 어느 것이나 다 의미가 통하며 거의 동일한 의미로 귀결되기에 우리는 신자들의 취사 선택에 맡기고자 합니다.
시편 22 편
하지만 우리는 이 단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업으로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과 특수한 민족이 지칭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택하고 싶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하는 '여호와' 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고 '아도나이' 가 사용되는 만큼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자기들의 이름을 대는 모든 자들을 자기 아버지 하나님 편에 등록하도록 그에게 교회에 대한 권위가 분명히 부여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의 견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의 선택받은 자들 모두를 아들의 보호와 후견에 일임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양무리에 속하는 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2. 본문 31절은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입니다.
시편기자는 여기서 우리가 앞에 밝히 내용, 곧 조상들이 마치 손에서 손으로 넘겨주듯 이 복에 대한 지식을 자신들의 후손에게 전수해 줄 것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항상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부가적인 사실, 곧 교회가 멸망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전파에 의해서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부지런하고 면밀한 전파가 여기서 우리에게 명령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떠나게 된 뒤에도 이 진리가 계속되게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입니다.
성령께서는 수세대에 걸쳐 항상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모든 신실한 자들에게 부지런히 자신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을 당면한 임무로 규정하고 있는 만큼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영원한 침묵 속에 묻어버리는 자들의 태만, 곧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말하는 것을 게을리 함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전멸하는데 속수무책인 자들이 받아 마땅한 이 죄가 더없이 비열한 행위로 정죄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공의'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존함에 있어서 보여 주시는 신실성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에 대한 기억할 만한 예를 다윗의 구원 사건에서 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악한 자의 폭력과 폭행을 막아주는데서 자신이 의롭다는 점을 입증하셨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복지와 하나님 자신의 의에 대한 찬양을 서로 연관시키고 있는 점을 볼 때 우리의 복지가 얼마나 하나님께 귀한 것인가 를 배울 수 있습니다.
시편 22 편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소망을 좌절시키거나 우리를 위험가운데 버려 두지 않고 안전하게 방어하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통해서 뚜렷하게 드러난다면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망각하실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우리를 포기할 것으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 찬양에 대한 송축이 우리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어느 한 개인에게 베풀어진 특정한 도움이 아니라 인류의 구속 때문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령은 다윗의 입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해 공포할 것을 우리에게 일임하십니다.
본 시편의 마지막에 가서 주석가들 중에는 (키 : 왜냐하면)라는 단어를 관계 대명사 (아세르 ; which) 로 보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그가 '주께서 행하신 의'로 말했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왜냐하면' 으로 읽는 것이 문장을 더 완전하게 하며 그 의미는 '그들이 와서 하나님의 의를 선언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에 대한 증거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신실한 수호자라는 점을 결과와 행동 자체를 통해서 증거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식이 됩니다.
시23:1-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본 시편에는 기도도 섞여있지 않고 비참한 처지를 하소연함으로서 구원받으려는 목적도 없으며 단지 감사가 담겨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이 다윗이 자기 나라를 평화롭게 소유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또 다윗이 바랄수 있던 모든 즐거움을 누리고 살때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크게 번영하고 있는 동안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들에게 행운이 따르는 것같이 보일 때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신의 쾌락에 푹 빠져버리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자신이 누리는 모든 복의 주인공으로 여기며 즐거워합니다.
다윗은 지금 살아가는 평온한 상태와 모든 불편함과 고통스러움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하나님의 선하심 덕분으로 돌립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로 자기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복되게 하실 것이고 또 영원하리라는 점을 믿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신앙이 다윗으로 하여금 순수한 예배에 전념하도록 합니다.
다윗의 시
1. 본문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베푸시며 아버지의 달콤함으로 우리를 부드럽게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화와 안락을 즐길 때 쉽게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번영은 많은 사람들을 취하게 하여 모든 한계를 벗어나 오만함을 낳습니다.
그들은 교만하게도 되고 또 하나님께 대항하게 되고 마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것을 풍성히 즐기는 사람 중에 자신을 절제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분수에 맞게 겸손과 절제를 행사하며 사는 사람들은 백에 한 명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하여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는 본을 더욱 더 유의해야겠습니다.
다윗은 최고의 권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다윗은 온 사방에 재물과 명예의 광채로 휩싸여 있습니다.
다윗은 현세의 좋은 것을 최대한으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점을 증거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혜택을 상기하면서 이것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오르는 사다리로 삼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다윗은 자신의 육신의 방종에 재갈을 물리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자극해서 더없이 진지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기타 다른 경건을 행사합니다.
시편 23 편
이것은 본 시편의 마지막 부분인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다윗이 사방에서 박수갈채를 받던 시기에 작성된 18편에서도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름으로 자기가 도달했던 마음의 겸손과 단순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다윗은 하나님의 찬양을 송축하면서 자신의 감사를 공공연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이 목자의 비유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자신에게 행하신 배려를 칭송합니다.
다윗의 말에는 목자가 자기에게 맡겨진 양을 보살피는 것 못지 않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살펴 주셨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자주 이 명칭을 자신에게 사용하시며 목자의 신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다정한 사랑의 표시로서 결코 초라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소박한 표현법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처럼 낮추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우리에게 독특하고 강렬한 애정을 품고 계신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처럼 온유하고 친근하게 우리를 초청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수호아래 안전하고 평화롭게 쉬기 위해 하나님께 나가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명심할 점은 하나님은 누구든지 자신들의 연약성과 빈곤을 절감한 나머지 자신들의 보호의 필요성을 느끼며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우리 안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려고 굴복하는 자들에 대해서만 목자라는 사실입니다.
권력과 재물에 뛰어난 다윗이었지만 자신이 가련한 양이라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으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연약성은 만약에 우리들이 이 목자의 보호아래서 살지 않을 경우 더욱더 비참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우리 가운데서 이 필요성으로부터 자신을 제외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뻗쳐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가 그분의 그늘밑에서 살며 그분의 섭리가 우리의 안녕을 주시하고 경계하는 여기에 우리의 복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에게 세상적으로 좋은 것이 모두 풍성하게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양의 숫자로 여겨주시지 않는 한 우리가 참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어야겠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섭리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확신하는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정중하게 목자의 임무를 다 돌리게 됩니다.
외형적으로 좋은 것을 제아무리 풍성하게 누리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자가 아니라면 그 사람들은 빈털터리요, 기아 상태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책임 아래 두기로 한 자들이야말로 모든 좋은 것에 대한 부족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입니다.
시편 23 편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이시기에 자신에게 아무런 부족함이 있든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2. 본문 2절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도다"
입니다.
초장에 대한 히브리어는 '초원' 또는 '풀밭'인데 '풀이 많고 기름진 땅'이라는 뜻입니다.
혹자는 '초장' 으로 번역한 (네옷)을 목자들의 '오막살이' 나 '숙소'로 번역합니다.
이 의미를 택한다면 이 시편기자의 의미는 양의 우리가 풍성한 초장에 마련되어 있어서 거기서 그 양들이 태양의 열기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추운 지역에서도 너무 뜨거운 열이 종종 양떼를 괴롭히는 일이 있는데 하물며 이 양들이 더운 유대나라의 여름철 열기를 양의 우리가 없이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라바츠 ; 드러눕다, 푹쉬다)라는 동사 역시 동일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천천히 흐르는 물을 표현하기 위해 "쉴만한 물"(잔잔한 물-칼빈)이라는 구절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물살이 빠른 냇가란 양들이 물 마시기에 불편할 뿐 아니라 대부분 해롭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서 다윗은 첫 절의 마지막 소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풍성하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주셨는가 하는 점을 말하면서도 다윗은 자기가 맨 처음에 사용한 비유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늘의 목자께서는 다윗을 하나님 자신의 배려하에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아무것도 빼놓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가 현재 누리고 있는 현재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의 크나큰 풍성함을 풀이 무성한 초장과 천천히 흐르는 시냇물에 비교하고 있거나 이러한 복과 혜택을 양의 우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실 물이 없었거나 그 양을 시원하게 하며 기운을 차리게 할 양 우리의 그늘이 또한 마련되지 않았던들 풀이 무성한 초장에서 풀을 뜯으며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3절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입니다.
훌륭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또 그 양들이 병약할 때 그 양들은 간호하고 보호할 의무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것이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대우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우리가 번역한 '영혼의 소생'이나 문자적 번역인 '영혼의 회심'이나 모두 '새롭게 한다' 또는 '회복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시편 23 편
이것은 제 19편 7절에 이미 언급된 대로입니다.
'의의 길' 은 쉽고 평탄한 길입니다.
다윗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너그럽게 자기에게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고통에서 보호하셨다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의 능력으로 붙드시고 힘을 주며 또한 소생시켜서 그들에게 해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치워주시므로 그들이 평탄하고 곧은 길로 평안히 다닐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도 그들에게 부족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자신의 가치나 공로로 돌리지 않기 위해 다윗은 이러한 큰 관용의 원인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신에게 이 모든 것을 베푸신다고 선언합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양으로 선택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그의 모든 목자의 임무를 수행하시는 것은 제 65편에서 알 수 있듯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는 주권적인 선하심으로부터 나오는 복입니다.
4. 본문 4절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입니다.
비록 참 신자들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안전하게 거하더라도 숱한 위험에 직면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가 공통적으로 당하는 모든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그들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가 를 더 잘 느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기서 자신에게 무슨 역경이 닥친다 해도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따라서 다윗은 지속적인 쾌락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할지도 모를 여러 가지 재난을 용감하게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을 무장합니다.
다윗은 그의 비유를 계속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참 신자들을 다스리실 때 베푸시는 보살핌을 목자의 막대기와 지팡이에 비교함으로 다윗이 이것을 자신의 생명 보호에 완전히 충족한 것으로 알고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양이 어두운 골짜기를 방황해도 목자가 있으면 들짐승의 공격이나 기타 다른 해를 면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다윗은 여기서 자신이 어떤 위험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목자 같은 보살핌 아래 있기에 충분한 방어와 보호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번영을 누릴 때에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한번도 망각한 일이 없고 후에 자기에게 올지도 모를 역경을 곰곰이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편 23 편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로 단련하심을 기뻐하실 때 우리가 그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육적 안전을 입고 아무 괴로움을 받지 않은 채 깊이 잠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매의 잠과 신앙이 낳는 포근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경을 통해서 믿음을 단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공격당할지도 모를 모든 두려움을 저항함에서 불굴의 정신으로 무장한 자가 아니고는 아무도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 아무 두려움이 없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목자가 자기를 어디로 인도하든 두려움 없이 따라갈 정도로 두려움을 극복하겠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다윗은 먼저 "내가 ......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고 말하고 곧이어 이유를 덧붙이면서 자기가 목자의 지팡이를 바라보고 거기에 자신의 눈을 고정시킴으로서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처방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인정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으로서는 자신이 공포로 불안해 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위로가 필요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다윗이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를 역경을 곰곰이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의 보호에 자신을 던지는 방법을 통해서만 두려움과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좀 모호하기는 하지만 다윗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는 말씀을 앞에서 언급한 이유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두려움으로 괴로워했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윗이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바랄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평범하고도 공통적인 재난에 하나님의 보호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사망의 흑암으로 괴롭히고 어지럽게 하는 그런 재난들입니다.
유대 문법학자들은 우리가 '사망의 그늘'(칼빈)로 번역한 (찰마벳)을 복합어, 곧 '치명적인 그늘' 로 봅니다.
다윗은 여기서 어둡고 후미진 곳, 또 야수들의 동굴을 비유로 말하는데 우리는 이런 것에 접근할 경우 처음부터 사망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갑자기 사로잡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시대에 살던 조상들에게 보다더 뚜렷하게 자신의 독생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우리의 목자로 제시하셨기에 우리가 눈을 들어 하나님의 보살핌을 바라보고 거기에 눈을 고정시킨 가운데 모든 공포와 당황을 짓밟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보살핌을 충분히 존귀하게 여기는 셈이 못됩니다.
시편 23 편
시23:5-6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본 시편은 성도가 목자(牧者)이신 여호와께 받는 만족한 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1절).
1. 인도함을 받습니다(2절). 2. 영혼이 소생됩니다(3절 상반).
3. 성화(聖化)를 얻습니다(3절 하반). 4. 위험 가운데서 건짐이 됩니다(4절).
5. 원수 앞에서도 주님의 높여 주시는 은혜를 얻습니다(5절).
6. 평생토록 주님의 사랑을 받다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6절).
1. 본문 5절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은 미래 시제로 되어 있는 데 여기는 계속적인 행동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가 지금까지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혜택에 대해서 밝힌 점을 여기서는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 반복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관용에서 삶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된다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라는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마치 어떤 아버지가 그 손을 내밀어 자기 아이에게 음식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고통이나 어려움 없이 자신에게 생계를 제공해 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윗은 악의에 찬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시기하며 자신의 파멸을 바라고 있고 어쩌면 자기에게서 하나님의 복을 탈취하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계속 자신에게 후하게 나타나시며 선을 베풀어주신다는 깊은 생각에서 이 혜택을 이끌어냅니다.
'기름' 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습관과 관련됩니다.
우리가 알기로 고대에는 큰 잔치 때에 향유가 사용되었으며 자기 손님에게 이 향을 발라주지 않게 되면 그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 풍성한 '기름'의 저장과 넘치는 '잔'이 단순한 일상생활의 공통적인 필수품에 대한 공급이 아니라 그 이상의 풍성함을 지칭하는 것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기름과 잔이라는 것이 성경 역사가들의 기록처럼 다윗이 풍성하게 공급받았던 왕실의 부를 칭송하는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윗이 받았던 것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시는 혜택에 의해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야말로 자신이 택하시고 부르신 모든 백성에게 친절하고 후덕하신 아버지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함과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스스로 갖어야 합니다.
시편 23 편
이 은혜가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풀어질수록 더욱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빵 한 덩어리를 가지고도 거기서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자가 배은망덕한 사람이 된다면 자신들이 소유하는 하나님의 선한 것을 더없이 풍성하게 만끽하면서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맛보지 못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은 얼마나 더 참기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본을 통해 부요한 자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권하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더 감사를 돌리면 하나님은 자기자녀들을 진수성찬으로 먹이신다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풍요로운 자들도 마치 그들이 이 생의 많고 좋은 것들을 기뻐하되 다만 그 기쁨에 제한을 두고 삼가 할 정도로 절제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적부터 극단적으로 흐르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적인 면에서 자신의 백성에게 풍요하게 대하시는 경우에 그것은 그의 백성들 속에서 이런 극단으로 향하는 병을 조장하게 하려고 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빌4:12)야 한다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주신 주님의 규율에 참여해야 마땅합니다.
극한 빈곤 중에도 낙심하는 일이 없으려면 우리는 인내의 부축을 받을 필요 있습니다.
또 그와 반대로 너무나 큰 풍요에도 정도 이상으로 우리 마음이 부풀게 되는 일이 없으려면 우리는 절제의 재갈 물리는 일을 통해서 제지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그의 백성을 부요하게 하실 때 동시에 절제의 영을 통해서 육신의 방종한 욕망을 견제하심으로 그들이 자발적으로 절제의 규율을 따르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사실은 부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적은 몫을 주신 때보다 그 부자들이 소유한 풍요를 더 자유롭게 즐기는 것이 불법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더우기 왕들은 관능적인 쾌락에 녹아버리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평민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을 때나 혹은 자기 아버지의 오두막에 살았을 때보다 분명히 더 많은 것을 사용했을 터이고 그 사용은 전적으로 정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으로서는 자기 몸을 채우고 살찌우는 것을 낙으로 삼지 않도록 자신의 진수성찬을 두고 자신을 제어했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다윗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마련하신 식탁과 그와 동시에 돼지들을 위한 여물통을 구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비록 자신의 토지, 공물 그리고 그 나라의 다른 수입을 가지고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마치 그분의 손으로 날마다 자기에게 음식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3 편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재물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을 자신의 가장되시는 분으로 우러러 보되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고에서 음식을 가져다가 적당한 때에 자신에게 분배하시는 분으로 여겼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2. 본문 6절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입니다.
1) 본문 초두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복을 열거하고 난 후 여기서는 그 지극하신 분이 주시는 복이 자기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리라는 의심 없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영원히 자기에게 따를 것이라는 이 확신은 그 지극하고 영원한 복이 하나님께서 참 신자들이 복을 음미하지도 않고 무분별하게 탐식하는 일이 없도록 이 복을 조절하는데 사용하는 약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은 앞에서 사망의 흑암 속에서라도 자신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섭리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로 자기가 외적인 것에 의존하거나 육신의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잰 것이 아니라 지상의 온갖 방면으로부터 도움이 끊겨진 순간에도 자신의 믿음이 계속 하나님의 말씀 안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거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비록 체험에 따라서 좋은 소망을 품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의지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장래 문제를 두고 확증하는데서 사용하시는 약속이었습니다.
혹 누가 인간이 이 불확실하고 변하는 세상에서 자신에게 계속적인 번영을 약속하는 것을 주제넘은 일로 반대한다면 우리는 다윗이 이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께 어떤 법칙을 부과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조건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을 바랐으며 다윗은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다윗은 '내 잔이 언제나 넘칠 것이다' 또는 '내 머리에 항상 기름이 발라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결코 줄어드는 일이 없으신 만큼 하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호의롭게 나오실 사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2) 본문 후반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입니다.
이 결론의 문장을 통해서 다윗은 자신의 생각을 지상의 쾌락이나 안락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정한 목표는 하늘에 고정되어 있으며 여기에 도달하는 것이 모든 일에 있어서 다윗의 큰 목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시편 23 편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단지 삶 그 자체를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외와 섬기는 일에 우리 자신을 단련하고 참 경건의 모든 면에서 날마다 진전을 보기 위해 살고 있다는 말씀이나 다름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고량진미로 배를 채우는데서 낙을 찾는 악인들과는 엄격히 구별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 말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사는 것이 다윗에게는 얼마나 중요하든지 육신의 모든 안락조차도 그것들이 자기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귀한 것으로 여겼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모든 복을 곰곰이 생각한 목적이 자신이 주의 집에서 살기 위함이었다고 간단하게 확증합니다.
결국 다윗이 이 신령한 복의 즐거움을 박탈당했다면 다른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으리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사실은 '내가 하나님의 양무리에 속하지 않는 한 나는 지상적인 낙을 전혀 기쁨으로 여기지 않겠노라' 는 말씀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시편 144편 15절에서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한 그대로입니다.
다윗이 빈번하게 성전을 출입하는 것을 그처럼 간절히 사모했던 것은 거기서 동료 예배자들과 함께 제사를 드리며 신앙의 다른 단련을 통해서 하늘의 생활에 대한 묵상을 증대하려는 뜻에서가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의 마음이 그가 누린 현세의 번영의 도움을 받아 영원한 기업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 다른 행복을 스스로에게 제안하는 자들이 야만적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