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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8: 22-25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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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5월 24일 총력전도 주일을 앞두고 누가가 전한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본문을 기점으로 해서 주님의 모습이 새롭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지금껏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위대한 설교자로서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내십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다가 이제는 행동으로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8장 후반부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전능자이심을 삼중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연세력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제어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죽음까지 정복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연계, 영계, 인간계의 주권자이십니다.
그가 누구신지 밝히는 사건들을 누가는 여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가 뉘기에"라는 제자들의 의문을 8장 후반부는 밝히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9장 18절에서 제자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제자들을 준비시킵니다.
폭풍이 덮친 갈릴리 호수를 말씀으로 잠잠케 하신 이 기사는 복음서에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모두가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을 보면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우리로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신앙이 한 단계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된 것이 분명합니다.
신앙은 예기치 않게 당하는 풍랑 앞에 좌초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시련을 통해서 성숙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자세히 살피기 전에 우선 본문의 구성을 살펴봅시다.
네 절의 짧은 기록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엄청난 감격을 싣고 있습니다.
기록이 짧은 것은 사건이 하찮아서가 아닙니다.
이 경우 그들이 받은 충격이 엄청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긴 말이 필요없는 엄청난 충격을 재현시키기 위해 누가는 네 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2절은 상황 설정입니다.
23절은 문제제기입니다.
24, 25절 상반절은 그 문제 해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5절 하반절은 제자들에게 준 충격을 결론으로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우선 서막격인 사건의 상황부터 살펴봅시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22절)라고 사건의 상황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호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을 보면 하루 해가 기우는 저녁녘에 이 사건이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무척이나 바쁜 하루가 지나가고 이제 쉴 곳을 향해서 떠나는 듯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어느 때에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단지 그는 '하루는' 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께서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셨는지에 있습니다. 맹렬한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그의 능력과 권세를 보이는데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무척이나 바쁜 하루였습니다.
장시간 비유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설교가 끝난 뒤에도 제자들을 데리고 앉아 그 비유의 뜻을 풀어 주셨습니다.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는 밀려드는 사람을 피해서 배에 앉으사 백성들을 가르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왠 종일 가르치시는 일에 자신을 쏟아 부으셨기 때문에 그가 피곤하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갑니다.
그러다 보니 배를 타고 육지를 떠나기가 무섭게 잠이 드셨다는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삶을 사셨나 하는 것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편한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을 만큼 한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주님은 머리가 땅에 닿으면 이내 잠드는 분처럼 느껴집니다.
왠종일 자신을 열심히 쏟아 부었기에 눕기만 하면 잠이 쏟아져 부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배가 육지를 떠나자 마자 이내 잠드신 것으로 보입니다.
"호수 저 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더니 어느새 보니 잠들어 계십니다.
마가는 생각보다 상세하게 기록할 때도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 보다 짧게 기록되어 있어서 박진감있는 사건 전개를 하면서도 여기처럼 어떤 때는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게 기록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아주 간단하게 취급하는 기자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 기사를 기록한 것을 보면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서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말보다 행동에 감동한 마가이기에 이 사건을 상세히 다루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한 면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마가복음을 한번 읽어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막 4:35-38).
"그 날 저물 때에" 언제 그 일이 있었는 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배에 앉아서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에 앉아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고 말합니다.
"다른 배들도 함께 가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여기 보십시오.
마가는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주무셨는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 뒷편에서 목침같은 것을 베고 잠드신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치도록 삶을 열심히 사신 주님이십니다.
사람사이의 표현을 빌려서 말한다면 아주 피곤해서 '골아 떨어진' 상태입니다.
가르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기에 눕기가 무섭게 깊은 잠에 빠져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적나라한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풍랑이는 바다를 향해 말씀하시니 잠잠해졌습니다.
자연을 향해서 명하시매 그대로 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건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시에 철저히 인간이셨습니다.
휴식이 필요한 사람이심이 분명합니다.
그 날 해변에 몰려든 무리들로 부터 벗어날 필요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배를 가지고 따라오는 무리들을 잠시나마 잊고 쉬실 필요가 계신 분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예배당에 오면 졸게 되는 분 없습니까?
사람은 지치면 잠이 퍼 붙는게 정상적입니다.
그래서 토요일 밤에는 일찍 자라고 권하는 것 아닙니까?
주말명화 본다고 그렇게 늦게까지 있으면 주일 날 피곤해 질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아버지 집에 오기만 하면 잠이 오는 건 영적인 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여기 올때마다 잠이 퍼붙는다면 그건 영적인 문제지 더 이상 신체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텔레비젼 볼 때는 눈이 말뚱말뚱한데 말씀 들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고 하면 이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문제가 아주 심각한 상태에 와있다는 것이지요.
사람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지치면 쉴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쉴 필요가 있는 존재임을 알고 계십니다. 스스로 피곤함을 느끼셨고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소원이 무어냐 물으면 '실컷 자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도 어쩌면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버린 그 분이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신 그 분은 우리의 약함을 이해하시고 능히 어루만져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는 것이 고달플 때가 있습니까? 주님께로 나아가십시오.
고달픔을 느끼는 것이 죄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지치고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쉬어야만 합니다. 휴가는 그래서 필요한 것이지요. 한 주간에 하루 안식일은 그래서 주어지는 것 아닙니까? 햇빛이 비취다가 부드러운 달빛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지치는 것은 죄악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싫증을 느끼는 것은 죄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피곤할 때가 있었고 주무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총력전도주일이다 팀미팅이다 수년동안 계속하다 보면 피곤할 수 있습니다. 지칠 수 있습니다. 지치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싫증을 느낀다고 하면 그건 죄악입니다.
자, 그러면 제 1막, 사건의 발단을 살펴보십시다.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23절).
배는 육지를 떠나서 호수 가운데로 상당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광풍이 호수를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조그마한 배는 그냥 위기 일발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큰소리 치지만 그런 상황에 부딪힐 때면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드러납니다.
그래서 육지에서는 무신론자로 큰소리치는 사람도 배를 타서 풍랑을 만나면 유신론자가 된다고 그럽니다.
'하나님 살려 주셔요'라고 소리치니까요.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막 배가 물에 잠기는 상황을 이 표현은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배가 지금 거의 잠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상당수는 어부 출신입니다. 그 호수를 알았고 폭풍우를 경험해본 사람들입니다. 그냥 바람이 불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우리들과는 다릅니다. 온갖 방법을 사용해 보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누가가 기록한 상황 그대로였습니다.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위험은 점점 가중됩니다.
어쩌면 호수를 알고 폭풍의 위력을 알기에 질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날의 돌풍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신앙생활, 일 이년한 것도 아니고 교회문제하면 거기에 대해 좀 더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우리 가운데는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우리의 노력으로 수습할 수 있는 그런 상황만 전개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급박하고 절박한 상황도 전개될 수 있습니다. 돌발적인 위험은 개인의 삶이나 신앙 공동체의 길이나 국가 공동체의 항로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 2막,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다음 귀절을 한 번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있느냐 하시니". 얼마나 지치셨는지 바람이 불고 물결이 넘치는 배 뒤 편에 잠드신 채 그냥 계십니다. 지금 얼마나 주님을 깨우기까지 그 좁은 배에서 제자들이 야단법석을 떨었는지 상상만 해봐도 여러분, 그 상황이 아마 눈에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잠들어 계셨습니다. 마치 일부러 잠들어 있는 것처럼, 상황이 바람이 불고 물결이 튀는데도 그대로 일어나지도 않고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다급해진 제자들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며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덮친 위험은 실제적이었고 점점 가중되어왔습니다. 무서움에 다급해진 나머지 주님을 깨웁니다. 뭔가 주님께서 도와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예기치 않았던 돌풍, 그것은 그 날 갈릴리 호수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항로에 언제나 덮칠 수 있는 위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위기를 당하면 그것을 어떻게 대처합니까?
위기에는 누구한테 나아갑니까?
근심과 걱정에 사로 잡혀만 있습니까?
현재 당면한 위기에만 그냥 빠져서 한숨만 쉬고 주저 앉아 있습니까?
엄청난 문제만 보고 문제의 해결자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은 바라보고 있으십니까?
우리를 삼킬려고 하는 위험보다도 우리와 함께하신 그 분이 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비록 차분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제자들은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여기 소망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간절하고 절박한 호소를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두 번씩 부르므로 얼마나 정신없이 놀랐는지 우리로 하여금 엿보게 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같은 상황을 마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돌아보지 못하십니까?"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는 겁먹은 채로 '아이구 우리가 죽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각각 다른 기질의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같은 상황 속에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문제만 생기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화살을 쏘는 사람들도 있고 그냥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겁먹고 어쩔줄 모르고 움츠려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을 보면 살려달라는 요청이 생략되어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꾸짖는 말도 드러나게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 보지 아니하십니까"라고 나오니까 예수님도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라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가는 말이 부드러우면 오는 말도 부드럽다는 격언처럼 누가의 기록은 그냥 "주여 우리가 죽겠습니다"고 하니까 예수님도 "너희 믿음이 어디있느냐"로 받고 있습니다. 노골적인 질책이 거기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겁에 질린 호소 앞에 주님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는 것은 시적인,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시 106:9-10). 시편 기자는 출애굽 사건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여기도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중요한 것은 주님의 위력이십니다.
자연세력을 지배하시는 주님의 권위이십니다.
그 명령 앞에 바람과 물결이 곧 조용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재미있는 관찰을 한 것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바람부는 것이 뚝 그쳐도 동시에 파도가 잔잔해 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현상을 가지고 보면 바람불기는 그쳐도 풍랑은 계속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는 바람과 바다가 동시에 잔잔해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는 그냥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능자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자연의 모습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의 명령 앞에 바람과 물결이 곧 조용해졌습니다. 다시금 하늘의 별들이 수면에 반사되는 아름다운 호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향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있느냐?" 마치 '믿음은 그런 위기에 필요한 것 아니냐'고 묻는 것 같습니다.
'필요한 때에 활용할 수 없다면 믿음의 위력이 어디 있느냐?. '어려울 때에 활용할 수 없다면 그 믿음이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어려울 때 활용할 수 없는 믿음 같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청명한 날씨에만 주님을 따르고 폭풍우치는 날씨에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면 과연 믿음의 유익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은 구제 금융의 위기를 만난 오늘 우리에게 진가를 발휘할 때입니다.
그러면 제 3막, 사건의 종결 부분으로 가 봅시다.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결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앞에서는 풍랑과 광풍으로 인해서 기겁했지만 여기는 주님의 위엄 앞에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겼습니다.
바다가 한 순간에 조용해졌을 때에 거룩한 두려움이 제자들을 덮쳤던 것입니다.
그 심한 바람과 파도소리로 죽겠다고 두려워하다가 이제는 그 두려움은 말끔히 지나갔는데 고요와 함께 엄습해오는 새로운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 잡았습니다.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결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일 순간에 그 풍랑을 잠재우는 위력 앞에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전능자의 임재하심 앞에 그들이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현장은 그건 박수칠 수 있는 그런 현장이 아닙니다. 앉은뱅이가 지팡이를 던지고 일어나면 거기에는 박수를 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오셔서 당신의 위엄을 나타내는 현장은 그렇게 천박한 자리가 아닙니다. 모두 다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곳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지금껏 주님의 기적을 보아왔지만 이 순간의 두려움과 감동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누구신지 전능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 사건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결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누가는 여기에 질문만 던지고 대답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아니 대답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는 자라고 하면 이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성경을 몰라도 자연을 아는 자라고 하면 사람의 명령에 자연의 세력이 굴복했다고 하면 그는 이상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결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대답이 생략된 이 질문 앞에 여러분은 서야만 합니다.
생략된 대답을 여러분 각자의 입으로 해야만 합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결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여러분은 그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는 자연의 주이십니다. 그는 세상의 어떤 세력도 굴복시키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돌발적인 위기가 여러분의 항로에 닥쳐도 그 분이 누구신지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엄습하는 어려움이 아무리 커도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의 능력이 더 큼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파멸의 세력을 한 마디로 굴복시키시는 전능하신 분이 여러분의 구주이십니다.
인생으로서 그는 잠드셨지만, 그 와중에서도 피곤해서 깨어나지 못하셨지만, 그는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항로를 명하신 분이 주님이셨습니다.
"이 호수를 건너 저 편으로 가자"고 하신 분이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그 호수를 건너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하고자 의도하고 계셨습니다.
그 호수 건너편에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절박한 인생이 있다는 것을 그는 내어다 보시고 거라사인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혀 우발적인, 돌발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어떤 사건도 돌발적인 사건일 수는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항상 계획하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닥치는 어떤 위기도 우연이 아닙니다. 한치도 오차없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납니다.
위기에 어떻게 반응하시렵니까?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소리치기만 할것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신지 바라볼 수있는, 정말 그 분께 나아갈 수 있는 그것이 신앙입니다.
어떤 광풍도 주님을 태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듯이 어떤 핍박도 주님이 머리이신 교회를 꺼꾸러 뜨릴 수 없습니다. 모든 지옥권세가 계속 그 위력을 나타내어도 가장 연약한 한 성도라도 삼킬 수 없습니다.
막연한 내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여러분 혹시 두려워하시는 분 없습니까?
아니 지금 당면한 두려움 앞에 좌절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분은 우주보다 크십니다.
피흘려 값주고 사신 당신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저들이 모의해서 기름부음 받은자와 하나님을 대적하자고 나서지만 하늘에 계신 자가 다만 웃을 뿐입니다.
광풍 앞에 일엽편주같은 여러분의 삶의 근거이지만 결코 침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 배의 선장이시기에 어떤 세력도 그 배를 침몰시킬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주님의 위대함을 이전보다 더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성도에게 위기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깨닫게 하는 기회일 뿐입니다.
바람과 물결까지 굴복하는 그 위대하심을 새삼 접하게 되는 기회일 뿐입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결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이 질문 앞에 여러분 스스로 이제 대답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영광의 찬송을 그 분 앞에 드리십시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시여 주와 같이 능한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시 89:8-9). 시편 89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하는 위기 앞에 설 때에 새롭게 주님의 위대하심을 배우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항로에 함께 계시는 그 분은 온 우주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군왕도 어떤 통치자도 바다의 물결을 명령으로 잠재울 수 없습니다.
광풍을 일 순간에 멈추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대권입니다.
여러분의 인생항로에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는 분은 온 우주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높이 계신 주님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