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위기, 은폐된 객체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객체의 행위성과 평평한 존재의 위계
신유물론자의 작업에서는 객체에게도 '행위성'이 있어, 인간 '사회'와 '역사'는 주체만큼이나 객체에 의해서도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주체와 객체는 구별될 수 없이 항상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인간 자신 만큼이나 어쩌면 인간 이상으로 사물이, 연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반려동물 등등이 우리의 세상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인간과 동식물, 사물의 존재적 위계는 평평해진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 자체가 안갯속으로 사라진다. 일련의 사물 중심 철학이 최근 각광받는 까닭은 환경에 대한 반성적 사유와도 긴밀히 연관된다.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고찰하는 일은 우리로하여금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로부터 탈피하도록 돕는다. 근대적 세계관은 인간중심주의와 이분법으로 대변된다. 지구위기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성을 탈피하는 측면에서 객체 지향 존재론이 던지는 의미는 크지 않을 수 없다. 사소한 물건과 생명들, 자연간 복잡다단한 관계 맺기에 의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인간의 정체성을 다시 되돌아봄으로써 오만한 인간의 이성을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에 따라 소설에나 등장하던 불온한 상상들이 실체가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 앨런 튜링(1912∼1954)이 1948년과 1950년 논문을 통해 ‘기계는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을 때 세상은 그리 고심하지 않았다. 2014년, ‘튜링’의 첫 인공지능 챗봇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챗GPT 등 인간과의 대화에 능숙한 인공지능이 다수 개발되면서 기계 지능의 윤리에 관한 문제의식이 연일 화두다.
튜링은 인간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컴퓨터가 지능을 가졌다고 보아야 함을 주장했지만, 일각의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사고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의 유기적인 생각과 감정은 무엇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일까. 태어나 세상의 빛을 본 모두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에 걸쳐 적응하고 학습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기계가 수행하는 데이터 수집과 정말로 완벽하게 다른 일일까. 우리는 어쩌면 숨 쉬는 사물이 아닐까. 나의 몸이 생동하고 생각하는 까닭은 책상이나 의자보다 조금 더 견고한 알고리즘으로 형성된 기계여서가 아닐까. 너른 세상을 메운 수많은 존재 가운데 우리 인간만 진정 위대한 숨을 쉬고 있을까. 신유물론으로 통칭되는 일군의 사상들은 기존의 철학이 인간 주체를 중심에 두고 전개되어 왔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신유물론은 그간 인간 주체의 전유물로 여겨져왔던 요소들이 객체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테면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고, 낯설게 보고, 새롭게 보는 길을 가보자.
3. 물러나 있는 존재의 층위, 은폐된 객체
그러나 ‘객체’를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하먼의 철학은 다른 신유물론과 구별된다. 대부분의 신유물론은 인간중심적 관점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주체-객체는 구분할 수 없이 섞여 있는 혼합물이었다는 식으로 주체-객체 간의 이분법을 폐기하려고 하는데, 이와 다르게 하먼은 인간-비인간의 구분은 폐기하면서도 주체-객체의 구분은 그대로 가져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주체-의식 중심의 철학에 대한 반감의 표출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하먼은 ‘객체’가 철학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주체’에 대해서는 상세한 논의를 펼치지 않았다. 사실 하먼에게는 모든 것을 ‘객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객체는 공허한 개념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A’라면 굳이 A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객체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여전히 주체와 객체라는 근대 철학의 이분법을 그대로 가져와서, 여전히 둘 중 하나를(이번에는 반대로 객체를) 통해 다른 하나를 억압하거나 신성화하는 것은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해 하먼은 다소 불분명하게 객체를 정의하는 방식으로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먼의 관점에서 객체는 ‘물리적이지 않을 뿐더러 실재적이지도 않은 존재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다이아몬드, 밧줄, 중성자와 더불어, 군대, 괴물, 사각의 원, 실재적 국가와 허구적 국가의 연맹’ 등을 광범위하게 포괄한다. 이러한 정의에서는 그것이 실재하는지의 여부가 객체로서의 지위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더 혹은 덜 실재적이든 상관없이 그것은 동등하게 객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먼은 객체의 특성을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여기서 객체는 관계나 집합으로 소진되지 않는 동시에 근본적인 무엇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먼은 객체는 모든 관계로부터 물러나 있는 존재의 층위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모든 관계로부터 물러나 있는 객체를 감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객체는 모든 관계에서 물러나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감각 자극을 제공한다. 먼저, 우리의 경험적 측면, 곧 현상과 관련된 것으로서 '감각 객체'가 있다. 우리가 어떤 나무를 바라보는 일을 예로 들어보자. 나무는 그것을 감각하는 우리의 상황이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감각의 내용이 다양함에도 나무는 여전히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이 지향하는 객체는 경험의 다발이 아니다. 나무를 아무리 많이 감각한다고 해도, 우리는 나무의 모든 것을 감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먼은 감각 객체 자체는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향적 대상에 가질 수 있는 것은 경험으로 다 환원될 수 없는 감각 객체 자체가 아닌, 우연적인 성질들일 뿐이다. 반면 객체의 ‘형상’은 객체가 그 자신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형상적 성질은 경험 속에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형상적 성질은 ‘암시’를 통해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닿을 뿐이다. 그러므로 경험 속에서만 등장하는 ‘감각 객체’와는 다른 객체가 하먼의 체계 안에 존재하게 된다. 이 객체는 모든 경험에서 물러난 채로 존재한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나무를 지각하는 존재가 모두 사라진다면, 감각 객체로서의 나무도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감각하는 이들이 없어도 실재 객체로서의 나무는 계속 존재할 것이다.
주체-의식-인간 중심의 철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하먼의 기획은 철학을 '객체'를 중심으로 재편할 것을 요구하면서 어떤 하위 요소로도 환원되지 않는 근본적인 것으로서 객체를 재규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먼의 철학이 과연 주체-인간 중심의 철학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먼은 모든 것을 객체로 제시하는 듯하다. 그에게 있어 객체는 유니콘 같은 실재하지 않는 것도 포함되고, UN처럼 관계를 통해 구성된 것도 포함된다. 더 나아가 기존에는 주체로 언급되었던 감각하고 사유하는 존재 또한 객체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런 객체는 영원히 물러나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그런데 정말로 그것이 우리로부터 영원히 물러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먼은 경험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존재(해야만)하는 객체를 내세운다. 근대 철학이 타자로서의 객체(물자체)를 주체가 폭력적으로 파악해 나가는, 이성이 동일성을 확장해 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하먼은 이를 '객체'라는 말을 통해 논의하지 않고 넘어가고 있다. 그 결과 근대 철학의 이원론이 하먼으로 인해 철학으로 재도입된다. 하먼은 논의하지 않지만, 하먼의 세계 안에는 여전히 주체에서 객체로 이름표만 바꾼 ‘인간’이 있다. 인간 객체로서 하먼은 말한다. 객체는 영원히 물러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그것이 인간 중심주의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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