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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돌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2:1-25 요절/ 출애굽기 2:24,25 | 2025. 3. 16 | |
출애굽기 제 2 강 |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우리는 인생의 무거운 짐에 눌려 고통 가운데 부르짖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절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소리,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를 잘 아시고 고통과 슬픔과 어두움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준비시키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간 인생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어떤 시련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자는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줍니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레위 남자와 레위 여자의 이름이 여기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6장에 기록된 족보에 의하면 그들의 이름은 아므람과 요게벳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딸 미리암과 아들 아론이 있었습니다. 당시 바로는 이스라엘 인구를 억제하고자 여러 가지 수단을 썼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들이 태어나거든 나일 강에 던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런 명령이 떨어진 시기에 태어난 아기의 운명은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레위 남자와 여자는 태어난 아기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의하면 스데반은 이 사건을 회상하며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에게는 자기 아기가 세상 어떤 아기보다 예쁘게 보일 겁니다. 하지만 그 레위 남자와 여자는 그 아이의 외모가 잘 생긴 것에 마음이 갈 뿐 아니라 그 아이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고 마음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석달 동안이나 숨겼습니다. 히브리 저자는 모세의 부모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히11:23).
아이의 몸집이 커져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그 부모는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아기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했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어찌하든지 살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갈대상자를 물살이 센 곳에 던지지 않고 물살이 약한 갈대 사이에 조심스럽게 두었습니다. 갈대 상자는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합니다. 노아의 방주나 갈대 상자는 방향키도 없고 엔진도 없습니다. 이는 그 운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부모는 아이를 살리고자 지혜를 발휘했고 최선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다고 인간 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두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부모뿐만 아니라 아기의 누이도 아이를 살리는 데 역할을 했습니다. 누이는 그 아기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습니다. ‘멀리’라는 표현은 발각되지 않도록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고, 심리적으로는 가까운 거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때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았습니다. 바로의 딸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자기 몸종인 시녀를 보내어 그것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상자를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울었습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나오는 뜨거운 마음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히브리 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기에 딸이 히브리 아이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공주는 그 아이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공주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공주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아이를 살리고자 결심했습니다. 그의 누이는 즉시 바로의 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그러자 공주는 그에게 가라고 했고, 이렇게 하여 아기의 어머니가 유모가 되어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신앙교육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자녀를 양육할 시간조차 얻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어머니는 양육비를 받으며 자기 아기를 돌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 문화권에서는 대개 세 살이 되면 젖을 끊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가 바로의 딸에게 다시 돌아가게 된 때는 서너 살 정도 되었던 때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공주는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였습니다.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입니다. 나일 강에 던져져 죽어야 할 아이가 어떻게 대제국 공주의 아들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한 민족을 구원하고 온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한 사람을 살리고 키우는 일입니다. 나 한 사람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세상은 나를 하찮게 여기고 없애버리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살리시고 나를 키워주십니다. 나를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고자 준비시키십니다. 한 사람을 돕고 키우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가족들을 살리고 캠퍼스를 살리는 일이요, 이 나라를 살리고 온 세상을 살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나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돕고 있는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치 않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세는 장성하여 동족을 위하여 무엇을 했습니까?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형제들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로 자랐기 때문에 많은 부와 권력과 쾌락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친모를 통해 자신의 혈통에 대해 알고 조상의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을 겁니다. 또한 태어났을 때 할례를 했기 때문에 할례를 하지 않는 애굽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애굽 사람인지, 이스라엘 사람인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동정심과 아픈 마음을 가지고 동족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 중 한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이는 행동은 감정에 치우쳐서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의하면 모세의 행동은 믿음의 결단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식했고, 애굽 왕궁에서의 삶을 덧없는 잠시 죄악의 낙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와 동일시하며, 상 주심을 바라보고 그런 행동을 했습니다.
모세는 이튿날 다시 나갔는데 이번에는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말하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히브리 사람은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고 반발합니다. 그러면서 그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자기도 죽일거냐고 합니다. 이 사람은 전 날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는 현장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왕궁에서 자란 모세를 그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인 죄가 탄로 난 것을 알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결국 바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모세를 죽이고자 지명수배를 내렸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정체성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고,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애굽 왕자가 아닌 히브리인으로 살고자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하지만 동족으로부터 배신과 거절을 당하자 그의 정체성은 흔들렸습니다. 그는 그 많은 스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깨어지고 새롭게 빚어지기 위해서 그에게는 광야훈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만이 영적 지도자로 부름 받고 출애굽 역사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어느 날 우물가에서 양들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목자들이 쫓아내는 것을 보고 일어나 그 딸들을 도와줍니다. 제사장 르우엘의 딸들은 아버지에게 모세가 그들을 도와준 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애굽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르우엘은 모세에게 감사하고 그를 환대해 주었습니다. 모세는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했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고 양치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게르솜은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가족들 안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애굽인인가? 히브리인인가? 미디안인인가?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정처 없는 나그네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정체성을 찾은 사람은 천성을 향해 가는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됩니다. 광야생활은 버려진 시간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40년은 출애굽 역사를 위해 모세를 준비시키시는 시간이었습니다. 혈기가 빠지고 옛 자아가 죽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간입니다. 모세는 처가살이와 양치는 생활을 통해 겸손 훈련, 섬기는 훈련, 인내 훈련 등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자인가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도시를 떠나 자연 친화적인 환경 속에서 살면서 하늘과 땅, 아름다운 자연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시간들도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해 밤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던 날들, 가난으로 인해 배고프고 서러웠던 날들, 병으로 누워 있던 시절,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술 마시고 방황하던 학창시절 등 지워버리고 싶은 날들까지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캄캄한 터널을 지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보호하셨습니다. 많은 인생 문제를 통하여 나의 옛 자아를 깨뜨리시고 생명과 빛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생활한지 40년이 지났습니다. 모세의 생명을 끈질기게 노렸던 애굽 왕의 죽음은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그 왕의 죽음 후에도 이스라엘은 고된 노동으로 탄식하고 부르짖었습니다. 당장은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 소리를 누가 들으셨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우리는 ‘나의 고통 소리를 누가 들을까? 아무도 없어, 부모도, 가족들도, 친구도, 교수도 내 고통 소리를 듣지 않아’ 하며 낙심에 빠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중노동으로 인해 ‘너무 힘들다, 뼈마디가 쑤시고 아프다’하며, 고통 소리를 내뱉어보지만 감독들도 듣지 않고 곁에 있는 동료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힘이 빠졌습니다. 오랫동안 중노동 하는데도 아무런 변화도 없고 상황이 좋아진다는 어떤 조짐도 없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는가,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으셨고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소리만 들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르짖음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기억했다는 것은 잊어버렸던 사실을 회상해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일을 마침내 실행에 옮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계셨고, 마침내 성취하고자 결심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로 이어졌습니다. 3대 조상과 맺은 언약에 기초하여 하나님께서 출애굽 역사,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찰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방관하거나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엄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끊임없이 그 백성을 돌보시고 보호하십니다.
네 번째 동사인 기억하다는 히브리어로 야다입니다. 이는 부부가 아는 것처럼 속속들이 경험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몸소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고통하고 계셨습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서로 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나의 문제를 아시고 상처를 아시고 고통과 슬픔을 아시고 나의 앞길을 아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누가 나를 알아주면 힘이 나고 행복지수가 높아집니다. 목자님이 나를 알아주면 양은 정말 기쁘고 행복합니다. 부모님이 나를 알아주면 자녀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신바람이 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습니다. 세상이 나를 몰라주어도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돌보시고, 아신다’ 이 네 개 동사의 주어는 모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 소리, 기도 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는 절박한 문제를 들고나가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하지만 속히 응답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불신하고 기도를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침묵의 때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고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응답이 있기까지 끈질기게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이 쓰실만한 영적 그릇이 되도록 준비시켜야 합니다.
봄 학기에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캠퍼스에 올라가 기도하며 전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 한 사람이 광야훈련을 통해 겸손의 사람, 순종의 사람, 온유의 사람으로 빚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