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 동안 외 4편 / 이가원
내가 보는 것 중에
그들이 가장 느리다
콜리가 튀어 나가고
축구공 하나
산책로를 앞질러 굴러간다
그들은 천천히 걷는다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목줄은 느슨하고
햇빛이 옅다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공원의
둘레를 따라 걷는다
나의 개는 길 위에
겹겹의 길을 남기고
돌아오면
그들은 아직 산책로에 있다
눈먼 개와
줄을 잡고 가는 사람
걸어가는 동안 꽃이 피고
걸어가는 동안
계절이 앞질러 지나간다
한 발씩 눌러 딛는다
냄새와 바람으로
열리는 길
산책로를 끌고 가는
긴 발걸음이
한 점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남겨진 길을 따라 가장 느린
선 하나
남은 빛 속으로 들어간다
‘느림의 미학’으로 문단 두드린 이가원…21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 동양일보
걸어가는 동안 내가 보는 것 중에그들이 가장 느리다 콜리가 튀어 나가고 축구공 하나 산책로를 앞질러 굴러간다 그들은 천천히 걷는다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목줄은 느슨하고 햇빛이 옅다 아직 봄이 오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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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가 데려온 것들
4인용 식탁만 한
리트리버와 놀고 온 날
나의 작은 개는
현관에서부터 알아본다
외투를 따라 들어와
내 둘레를 몇 번이고 돌았다
소파에 걸쳐두면
외투는 바닥으로 끌어내려지고
낯선 개의 떨림과
햇볕에 묶여 있던
느린 숨
주머니마다
오후의 햇볕이 접혀 있다
외투가 만나고 온 것들에
작은 코를 묻는다
낡아가는 외투 깃을 따라
몸집 하나
식탁 옆으로 오고
외투가 데려온 것들로 거실이 좁아진다
선반 위에서
리드 줄을 꺼낸다
나의 작은 개가 달려오고
외투 속에서
크고 작은 몸집들이 따라 일어선다
아무 날이 아니어도
꽃집 앞에 파란 플라스틱 양동이가 나와 있다
그 안에는
한가득 장미가
장미는 송이가 작다
줄기가 젖어 있다
필요한 분 가져가세요
유리문에 붙은 백지가 바람에 들린다
사람들이 양동이 주위에 허리를 숙인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누군가 묻고
주인 남자가
화분들을 밖으로 옮긴다
양동이에서 하나둘
장미가 떠나고
장미는 모르는 손에 들려 가고
나도 따라서
한 송이를 집어든다
꽃이 필요한 사람이 된다
오늘은 아무 날이 아니지만
장미를 든 사람과
들지 않은 사람이 섞이는 오후
모르는 사람의 손에 들린 장미가
나를 앞질러 간다
파프리카를 사면 벌어질 수 있는 일
파프리카를 샀다
노랑과 빨강
크고 싱싱한 파프리카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반을 가른다
하얀 씨앗들 속에
둥그렇게
배를 따라
미세한 돌기들이 오물오물 움직이고 있다
오래전부터
파프리카의 내부인 것처럼
제 몸이 아닌 것처럼
형광등 아래
들켜버렸다
파프리카 반쪽을 어떻게 해야 하나
파프리카 반쪽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린 그렇게
가만히 있는다
얼굴
우리는 가벼워지려고 노력했다
일인용 병실은 넓었고
흰 커튼 사이로
휴일 오후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린 시절 이후
너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흰 피부와
턱 주위에 까칠하게 돋은 수염
너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우린 긴 의자에 앉아
희망을 얘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벽에 걸린 액자가
우리를 보고
너는 덤덤하게 천장을 보았다
가끔은 우리를 바라보고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네 침대 곁으로 다가갔을 때
너는 천천히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아무리 더듬어도
알맞은 표정을 꺼낼 수가 없었다
가끔 너를 생각한다
너는 잘 웃는 아이였고
흰 국화꽃에 둘러싸인
액자 속 사진
거기에는
아는 얼굴이 없다
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병실 문을 나서며
보았던 얼굴
벽을 향하던 너의 옆얼굴
‘제21회 지리산문학상’에 여진수 시인 - 경남도민일보
제21회 지리산문학상에 여진수(63) 시인이 선정됐다.지리산문학제운영위원회는 14일 지리산문학상 공모 결과 예심을 거쳐 모두 시인 7명이 최종심에 올랐으며 치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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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세계가 차곡차곡 담긴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는 일은 행복하다. 본심에 오른 아홉 묶음의 시들은 묘하게 향기를 뿜었고 마치 잘 익은 여름 과일들 같았다. 시를 많이 써왔던 연마의 시간의 끝에는 늘 그런 향내가 따라온다고 믿는다.
<걸어가는 동안> 외 4편을 수상작으로 뽑는다. 이 시들의 완성도보다는 이 시들의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덩치가 큰 이야기를 짧고 명료하게 풀어쓰려 노력했다는 점도 멋진 기술이라 생각했다. 읽는 이는 시와 시의 여백, 이야기와 이야기의 여백에 들어가 숨을 쉬고 상상을 하면 시는 더 확장되곤 하는데 시편의 열린 면면들이 앞으로 더 많은 모험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게 되었다.
<겨울을 핥는 법> 외 4편은 과감함이 돋보였다. 세련된 시의 구조에 높은 점수를 매기면서 마지막까지도 놓지 못하며 고민을 했다. 문제는 마지막 한 줄이었다. 마지막 한 행은 시의 기둥일 수도 있고 기량일 수도 있겠는데 씨름한 흔적은 보이나 마감재가 가벼운 느낌이었다.
<분홍귀나무> 외 4편은 분명 잘 쓰는 시인이다. 목소리가 좋았다. 하지만 그 곧이곧대로의 선명함이, 심리의 단호한 정리정돈이 읽는 이에게 여지를 주지 않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시가 융숭한 대접을 받는 이 감사한 시대에, 누구는 붙고 누구는 붙지 않는, 마치 게임 같기도 한 상賞이라는 제도는 분명 신인들을 모험하게 하는 동력의 역할을 한다.
많은 문학상의 심사위원들은 시를 잘 쓰고 잘 봐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연이라 생각해주길 바란다. 시의 인연을 맺은 이 엄청난 길 위에 만나는 또 하나의 연대인 것이다. 수많은 좋은 시를 세상 앞에다 모두 호명하지 못하는 송구함을 이 말씀으로 대신한다.
- 심사위원 김륭(시인), 이병률(시인, 심사평)
[출처] 제21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 이가원|작성자 ksujin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