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진은영
나는 할머니와 살았고 어릴 적부터 늙어 있었어
5월까지 해어진 빨간 내복을 입고 다녔거든요
슬픔이 나의 명랑한 이목구비를 깨끗이 닦아줬어요
할머니의 술병들이 자라고 아버지의 빛도 자라고 부서진 세간들도 자라고 나도 자랐어요.*
키 큰 소녀가 되었어요
어둠 속 커다란 침대에 혼자 누워서 사랑이 빛처럼 내 방 문틈으로 기어들기를 기다렸어요
거짓말, 프루스트를 읽고 나서 하게 된 거짓말
혼자 쓰는 방은 없었어요 동생 셋이 나란히 잠들어 있는 구들 위에서
가게 간판 불빛으로 환한 창문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밤이슬처럼 증발하기를 꿈꿨어요
대학에 들어갔어요 죽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배꽃나무가 문상객처럼 이어지는 언덕길을 설레며 걸었어요
익사체로 발견된 청년 편집장의 얼굴이 돌바닥에 붙은 똑같은 사진들 속에서 따라왔어요
우리는 웃었는데, 바람이 비질할 때마다 꽃들에게서 울음소리가 먼지처럼 일어났어요.
사랑에 빠졌어요. 우리가 서로의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따뜻하게 느꼈고 당신은 차갑다고 느꼈습니다.
눈보라가 이불, 이불, 살아 있는 이불들처럼 우리를 따라왔어요 하얗게 덮어줬어요.
잠시 세상에서 우리를 지워줬어요.
혼자 남았어요.
“혼자일 땐 늘 과음을 하고 과로를 하죠” 누군가 말했는데 마음에 들었어요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는 못했어요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면 죽은 척했어요
살아 있는 척했어요
살아 있는 척했어요
구석에서 말라가며 쉰 냄새를 풍기는 걸레처럼
내 영혼 속에 죽은 친구들과 함께, 내가 남아 있었어요.
그때 노래가, 절망의 맨홀 뚜껑을 열고
아래로, 배관공처럼 내려왔어요.
함께 내려온 빛의 사다리를 따라 무의미의 날벌레들이 잠시 흩어졌어요
알 수 없는 이야기의 물방울들이 겨울날의 미친 분수대처럼 구멍에서 일제히 솟아올랐어요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단편 「사랑」에 나오는 한 문장을 변주함.
ㅡ계간 《문학과 사회》(2025,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