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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광주 미포] 뒤돌아보는 고신역사70년, 고신교회의 지도자 송상석 목사
이상규 교수, 2022 미포 발제
미래교회포럼(대표 권오헌 목사) 2022년 2차 광주포럼이 “고신 70주년과 고신의 교회정치”라는 주제로 24일 광주은광교회당에서 열렸다.
2022 미포 2차 광주 포럼이 열리고 있는 광주은광교회 비전홀
첫 번째 발제자로 이상규 교수(고신대 명예교수)가 나서 “뒤돌아보는 고신역사70년 고신교회의 지도자 송상석 목사”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이상규 교수는 송상석 목사에 관한 연구가 부족한 현실을 설명하며 역사학자의 사명을 따라 본 연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상규 교수 발제 전문.
이상규(고신대 명예교수)
시작하면서
지난 70년간의 고신교회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 고신교회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세 인물은 박윤선(1905-1988), 송상석(1896-1980), 한상동(1901-1976) 목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사람의 역할에 대해 말할 때, 신학적인 면에서는 박윤선 박사가, 교회 행정면에서는 송상석 목사가, 영적인 면에서는 한상동 목사가 고신교회를 위해 기여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1) 이 세 사람은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며 일정한 역할을 분담하면서 고신교회 형성에 기여하였으나, 때로는 대립하였고, 대립하면서도 동역하였고, 동역하면서도 대립하며 내적 불일치를 노정하면서 고신교회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2) 그런데, 이 3사람 중에서 박윤선 목사나 한상동 목사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나 기림이 있었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편의 논문 혹은 인물기를 쓴바 있다.3) 그러나 송상석 목사는 오랫동안 고신 본령에서 무시되거나 경시되어 왔고,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로 간주되어 금기시되어 왔다. 필자가 처음으로 그에 대한 논설을 발표했을 때가 2006년 9월이었다.4) 그가 소천 된 지 26년이 지난 때였다. 그러다가 최근 필자의 편집으로 『송상석과 그의 시대』가 출판되어 그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시도되었다. 그렇다면 왜 필자는 그에 대해 기술하는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고신교회 형성에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기 때문이고, 그의 기여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잊혀진 인물을 소환하고 부당한 평가를 바로 잡는 것은 역사가의 사명이자 소임이기 때문에 필자는 ‘역사의(historic) 송상석’을 제시하고자 노력해 온 것이다. 역사는 감정의 산물이어서는 안 된다. 이럴 경우 객관성을 상실하고 의도된 왜곡에 노출되고 만다. 사실 추구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게 된다. 천자문(千字文)의 경구, “남을 험담하지 말고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罔談彼短靡恃己長)는 말씀은 의도적 비난이나 과도한 숭상은 한 사람의 인격의 척도이기도 하지만, 정직한 역사를 방해한다는 점을 교훈한다. 이 글에서는 송상석 목사의 생애와 목회, 그리고 고려신학교, 그리고 고신과의 관계, 그의 활동에 대해 정리하고 그가 남기 공헌이 무엇인가를 정리해 두고자 한다.
1. 가정배경, 학교교육
송상석 목사는 1896년 12월 20일 마산에서 미곡상을 하는 송국필(宋国弼, 1847-1905)과 손일남(孫一南)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나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집에서 한문을 공부하던 그는 1910년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를 제 6회로 졸업하고 마산간이농업학교에 진학하여 1916년 졸업하였다. 서울로 유학한 그는 현재 고려대학교가 된 보성학교 법과에 진학하여 2년간 수학했으나 가정 형편상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였다. 양산 통도사에 입산하여 불교를 탐색하기도 했고, 또 경찰에 투신하여 약 1년 6개월 간 근무한 바 있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의 방황의 날들이었다.
그러던 중 23세가 되던 1920년에는 통영군 언량면 욕지도의 사립 원량학교 교원으로 부임하였고, 학교인근의 욕지교회 강사영(姜仕榮) 영수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신자가 된 그는 즉각 술과 담배를 끊고 생활의 절제를 실천하였다. 그 후 호주선교부가 운영하던 통영의 진명여학교로 옮겨가 교사로 일하던 중 동료교사였던 김난출(金蘭出, 1904-1983)과 1925년 혼인했다. 부산 좌천동에서 1904년 6월 1일 출생한 김난출은 부산의 일신여학교 9회 졸업생으로 1921년 9월 이 학교를 졸업하고 진명여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김난출은 일신여학교 재학 중에는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5개월 간(1919. 3-9) 옥고를 치른 바 있어 후일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게 된다. 송상석 목사는 교사로 일하는 한편 경남 통영지방 YMCA운동에 투신하여 부산의 양성봉, 마산의 이영한 등과 교분을 나누며 청년운동에 참여하였다. 양성봉과 김난출은 다같이 부산진교회 출신으로 일생동안 좋은 관계를 지니고 살았음으로 송상석 목사와 양성봉 또한 YMCA운동으로 협력할 수 있었다.
2. 절제운동가로서의 활동
그러나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방해로 기독교 청년운동이 여의치 못하자 송상석 목사는 절제운동에 투신하기로 작정하고 황해도 황주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이동희(李東煕) 의사를 찾아갔다. 그의 소개로 짧은 기간 황주 양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된다. 2년 후에는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학교를 사직하고 서울 종로중앙(감리)교회 김창준(金昌俊, 1890-1959) 목사를 찾아갔다. 김창준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고, 이 교회에는 조병옥, 옥선진, 송흥국 등이 있었고, 류형기(柳瀅基, 1897-1989)는 이 교회 부목사였다. 송상석 목사는 이 교회 권사가 되었고, 김창준 목사의 후원으로 금주단연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몇 년간 서울에서 활동한 그는 성직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34년 3월 제29회로 졸업하였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들로는 나부열, 마포삼열, 이눌서, 업아력, 관안련 등이었고 호주 선교사 왕길지는 성경언어를 가르쳤다. 박윤선을 비롯한 고흥봉, 김일선, 김진수, 박창근, 유재기, 임학찬, 지수왕 등이 29회 동기생들이었다. 그가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재정적인 도움을 준 이가 황주의 이동희(李東煕) 의사였다.5) 그래서 송상석 목사는 이동희 의사와 함께 졸업장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가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1931년 12월 4일 평양신학교가 주최한 금주강연대회에서 2등 상을 수상하였고, 1932년 5월에는 평양신학교에서 ‘조선기독교절제운동회’를 조직하고 조만식, 채필근을 회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총무가 되었다. 이듬해인 1933년에는 「절제시보」(節制時報)라는 기관지를 창간하고 주간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미 신학생 시절에 절제운동가로 명성을 얻었다. 1920-30년대 절제운동은 한국기독교의 대표적인 사회운동이었고,6) 송상석 목사는 이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사회계몽과 사회 혁신 문화운동으로 이해되었던 절제운동은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송상석 목사는 절제운동을 복음화운동의 한 방식으로 이해했다.7) 그는 평양신학교 교수인 곽안련(C. A. Clark, 1878-1961), 1932년까지 조선주일학교 연합회 총무였던 허대전(J. G. Holdcroft), 허대전의 후임 주일학교 연합회 총무인 정인과(鄭仁果) 목사의 후원으로 주일학교 통일공과8)에 절제과목을 집필하기도 했다.
1934년에는 장,감 양 교파는 선교 50주년을 기념대회를 계기로 전국적인 절제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했는데 송상석 목사는 이 일을 주도했다. 1935년 10월 15일에는 ‘미성연자 끽연음주금지법 실시 촉성회’을 조직하였는데 윤치호 선생을 위원장으로 추대했고, 자신은 총무로 실무를 담당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38년에는 ‘미성년자 금주금연법’이 제정되었는데 이것은 송상석 목사가 이룬 가장 중요한 기여였다. 이 일을 추진하면서 결연한 의지의 표시로 송상석 목사는 왼손 4번째 손가락을 잘랐(斷指)다. 미성년자 금주금연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면서 송상석 총무는 ‘미성년자 흡연음주금지법실시운동’이라는 출판물을 제작 배포했는데, 일제(치안부)는 1930년(昭和 5년) 4월 28일 이 문서 배포를 금지하는 등 절제운동을 탄압했다
치안부가 발행한 ‘불허가 차압 및 소제 출판물 목록’(不許可 差押及消除出版物 目録)을 보면, 新農, 時鐘, 新小説, 勞動者ノ明日, 露西亜農民 등과 같이 ‘미성년자 흡연음주금지법실시운동’을 압수하거나 불태우는 불온문서로 지정했던 것이다. 문제 삼았던 기사요지는 “금주운동과 입법과 교육은 삼각관계를 이룬다. 조선의 금주교육은 어떻게 보든 음주교육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음주교육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보통학교 조선어 독본 3권을 보면 추석이라는 제목 속에 이러한 문구가 있다”라고하면서 조선어 독본이 사실상 음주 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런 사유로 배포가 금지되고 압수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추진하여 1938년에는 ‘미성년자 금주금연법’을 제정하게 된 것은 송상석 목사의 기여였다. 일제는 아편을 거리에서 판매하도록 허가하거나 미성년자의 음주 흡연을 허용했는데, 이는 일종의 우민 정책이었다. 그러나 송상석 목사는 이의 금지를 통해 국민건강은 물론 국민정신을 바로 잡고자 했다.
앞에서 송상석 목사는 만국통일공과에 절제 공과를 게재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1937년의 경우, 매 학기 통일공과에 금주공과를 게재했는데, “금주문제에 대하여 경제, 과학, 사회, 도덕, 이 네 가지 문제가 음주와 어떠한 이해득실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9) 이때의 주일학교 공과를 보면, 제1,2학기는 마가복음 공부가 중심이지만, ‘제12과 몸을 건강하게 지킬 것’(절제공과, 3월 20일), ‘22과 개인의 능률을 보존함’(절제공과, 5월 29일) 등 두 편이 게재되었고, 제3학기 주제는 이스라엘 초기 인도자들의 성공과 실패이지만, ‘제33과 절제는 인격의 요소’(절제공과, 8월 14일), ‘제44과 개인 자유문제’(절제공과, 10월 30일) 등 두 편이 게재되었다.
절재운동과 더불어 이 시기 송상석은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화보’를 편찬했는데, 이 또한 중요한 기여였다. 알렌의 내한 50주년이 되는 1934년을 기점으로 한국 장로교회 역사와 사진, 각종 자료를 망라한 이 자료집의 가치를 고려해 볼 때 송상석 목사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절재운동회 총무를 겸하고 있으면서 약 1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편집하여 한국장로교회의 역사 자료집을 편찬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역사자료집 편찬에 관여하게 된 것은 그가 속한 평양노회의 지도자들인 곽안련 선교사, 남궁혁, 박형룡, 이인식 등 지도자들의 천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10) 이들은 송상석 목사의 역사의식과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화보집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편집자인 송상석 목사의 역사의식이 놀라울 뿐이다. 이 책 속에 수록된 한국장로교회 관련 사진과 해설, 교회사진과 장로교계 주요 인물 사진, 그리고 각종 자료와 통계는 한국교회사 연구에 유용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자료가 오늘의 교회사 연구를 풍성하게 하고 있다. 이 책 편찬에 대한 공로로 당시 총회장 이인식(李仁植) 목사 명의로 대형 자개농장을 수여받았다.
1935년부터는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마지막 10년은 민족운동사에서도 힘겨운 시기였다. 1938년 9월에는 장로교 총회마저 신사참배를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가결했을 만큼 일제의 탄압은 거센 풍랑이었다. 절제운동은 순수한 정신 계몽운동이었으나 일제는 민족운동으로 간주하여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938년을 전후하여 이 운동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이 운동도 잠정 중지되었고, 절제운동가 송상석 목사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3. 목사 안수, 이북에서의 목회활동
1934년 3월 신학교를 졸업할 당시 송상석 목사는 평서노회에 속한 황해도의 요촌(腰村)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으나 졸업 후 곧 평양노회의 대타령(大駝嶺)교회의 청빙을 받아 평양노회로 이적하였다. 평양노회 평양시찰에 속한 이 교회는 대동군 용산면 대타령리 산 40-1, 곧 대동강변 촌락에 위치한 교회로서 1912년 4월 1일 설립된 유서 깊은 교회였다.11) 대타령교회의 전임 교역자는 김승주 임시목사였는데, 그가 사임하게 되자 교회는 “신학교 졸업생 송상석 씨를 월봉 50원으로 대우하기로 하고” 그를 위임목사로 청빙하게 된 것이다.12) 1934년 4월 3일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서 회집한 제26회 평양노회는 송상석 목사를 비롯한 조택수, 차종식, 최창근의 목사 장립을 허락하였고, 6일 이들을 목사로 장립한 것이다.13) 그리고 4월 15일 주일 오후 2시에는 대타령교회에서 송상석 목사 위임식이 거행되었다.14) 이때부터 약 2년간 시무하게 되는데, 1935년 당시 이 교회의 세례교인은 60명이었으므로15) 전체교인은 150여 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는 평양 신광교회로 이동하여 1940년까지 시무했다. 1939년 6월에는 초량교회에 시무하던 이약신 목사가 신사참배 강요를 피해 평양으로 피신한 후 7월부터 신광교회에 부임하여16) 송상석 목사와 함께 동사목사로 있었다.17) 이약신 목사가 부임한 후 송상석 목사는 신광교회 예배는 참석하되 사실상 목회는 이약신 목사가 담당했다. 송상석 목사는 절제운동과 선교사들을 돕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송상석 목사는 “평양신광교회에 시무하면서 음성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지원하였고, 이약신 목사와 함께 신광교회 안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규합하였다.” 이 일로 송상석 목사는 평양감옥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18) 1941년의 일이었다. 이 일에 대하여 송상석 목사 본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후 동경교외에서 살고 있는 박 박사 댁을 후일 방문하고 한국교계 실정을 보고한 바 있었다. 그 후 본인은 신사참배문제로 투옥 6개월 만에 출옥되자 평양에서 일본경찰에 추방을 당하여 황해도 황주에서 과수원과 목장을 하고 있었고 박형용 박사는 뜻한 바 있어 만주 봉천(満洲 奉天)으로 건너가 동북신학교 교장으로 시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월은 흘러 하나님이 8.15 해방을 주셨다.”19)
송상석 목사가 투옥되어 있을 때, 당시 다섯 살이었던 아들 송병일은 감옥으로 면회 갔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그 때 일을 필자에게 설명해 준 바 있다.
출옥한 그는 신사참배 강요라는 거센 파고를 피해 목사직을 인퇴(引退)하고 황해도 황주 동천리(東天里)에 은둔하며 지냈다. 당시 외부적 요인으로 이런 인퇴의 길을 선택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경직 목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20) 그런데, 송상석 목사 가족이 황주로 이사 간 때를 4남 송병일은 1941년 말 혹은 1942년 초로 기억하고 있다. 이곳은 북한 지역에서 사과농사로 널리 알려진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농장을 운영하게 된 것은 선교사들, 특히 곽안련 선교사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전운이 감돌자 주한 선교사들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1939년부터 한국을 떠나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떠난 때가 1940년이었다. 이때 곽안련 선교사는 송상석 목사에게 자금을 맡겨 농장을 경영하도록 도왔고 이 일을 통해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돕도록 했던 것이다. 곽안련 선교사는 평양신학교 당시 은사였을 뿐만 아니라 송상석 목사에게 특별한 호의를 가진 선교사였다. 그의 도움으로 야산과 사과밭, 그리고 홀스타인 목장과 양돈 사업을 할 수 있었고, 비밀 자금을 조성하여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도울 수 있었다. 이 일을 숨기기 위해 평양의 부유한 인물이자 산정현교회 장로였던 양재연 장로, 김모(성명 미상) 장로로부터 자금을 융자받은 것으로 꾸몄다. 양재연 장로는 규모가 큰 젖소 목장을 경영하던 사업가였고, 김 장로는 큰 성냥공장을 경영하던 사업가였다. 해방 후 양재연 장로 가족은 월남하였는데, 부인 박덕술은 부산에서 전도사로 일하면서 장기려 박사와 더불어 부산 산정현교회를 설립했다.21) 김 장로 또한 월남하였는데, 6.25 동란 중 부산으로 피난 와 송상석 목사가 담임하던 항도교회 사택에서 약 5개월 간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고 송상석 목사의 4남 송병일은 증언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송상석 목사는 해방이 되기까지 황주에서 사과 과수원과 젖소를 키우며 동토(凍土)의 세월을 보냈다. 이때 도움을 준 또 한 사람이 황주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이동희 의사였다. 그는 그 이전에도 송상석 목사의 든든한 후원자였는데 평양신학교 수학 당시 학비를 지원해 주었고 송상석 목사의 절제운동에 동참하여 황해도 금주금연회 임원으로 활동했다. 이동희 의사의 사위가 테너 이인범 선생이다. 이약신 목사가 만주로 피신하는 길에 은밀히 이곳 농장을 마지막 방문했을 때가 1945년 8월10일 경이었다.22) 한국교회 현실에 대한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교류하였다. 송상석 목사는 해방 될 때까지 이곳에서 인퇴(引退)의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송상석 목사는 황주에서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사동(寺洞) 교회를 개척하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공산당 정권이 등장하여 교회는 다시 탄압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송상석 목사는 북한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남하하기로 작정했다. 정리하면 송상석 목사는 1940년부터 해방되기까지 황해도 황주의 동천리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송상석 목사가 고등계 형사로 근무했다는 근거 없는 비난을 하는 것은 의도적인 모함이자 범죄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필요하다면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진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사실(fact)이 어떠한가를 규명하는 일을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송상석 목사가 남하를 결정한 것은 북한에서 신앙생활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결정에 이른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1946년 3월 1일 3.1절 행사가 평양역 광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평양숭의전문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김일성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7명의 주도적인 가담자 중 한 사람이 송상석 목사의 장남 송병규(宋秉奎)였다. 여럿은 체포되어 시베리아강제수용소로 보내졌으나 송병규는 신속히 해주로 도피했다. 송상석 목사의 장남 송병규가 수류탄 투척 사건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송상석 목사의 4남 송병일의 증언에 따른 것이지만, 이 사건에 대한 북한측의 사료가 공개되면 사건 가담자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송상석 목사 가족은 이런 일로 더 이상 북한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족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월남의 길을 가게 되는데, 송상석 목사와 평양 정의여중생이던 장녀 영숙, 초등학생인 3남 병민은 1946년 4월 초에 배를 전세 내어 살림살이와 서적 그리고 그간 수집했던 각종사료들을 싣고 월남하게 된다. 체포를 피한 장남 송병규는 어머니 김난출, 4남 병일, 막내인 5남 병복과 함께 5월말에 해주를 거쳐 월남하게 된다. 월남한 이들은 서울의 송상석 목사 누이 집에서 재회하였다.23)
북한탈출에 성공한 송상석 목사는 처음에는 YMCA 총무였던 변성옥(邊成玉)의 후원으로 이북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절제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그것이 해방된 조국에서 시급한 과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런 중에 거제도 옥포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고 거제도로 이동하게 된다. 이런 목회지에서의 초빙 과정에서 마산 문창교회의 이약신 목사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송상석 목사의 경남으로의 이주는 이미 알고 있던 경남교계 지도자들과 더불어 교회 쇄신운동에 가담하는 계기가 된다.
4. 교회 쇄신운동과 고려신학교
거제도 옥포교회는 1896년 10월 호주선교사 아담슨(Andrew Adamson)으로 전도로 설립된 교회인데, 송상석 목사는, 진종학 권남선 진병효 박영기 전도사에 이어 제5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1946년 5월 이후부터 1948년 11월 말까지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된다. 이 교회는 현재 경남 거제시 옥포성안로 49에 위치한 교회로서 기독교장로회에 속해 있다. 송상석 목사가 부임할 당시 교회의 중심인물이 진정율(陳正律, 1890-1958) 장로였다. 이 교회에 시무하는 동안 송상석 목사는 경남 일우에서 전개된 교회재건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약신과는 오랜 친구이자 평양신광교회에서 함께 동역했고 그 이후에도 일경의 눈을 피해 은밀히 교류했던 일생의 동료였다. 박윤선과는 함께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34년 함께 졸업한 동기생이었으므로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한상동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32회로 1937년 졸업한 후배였으나 같은 경남 출신 목회자로 서로 알고 있었다. 만일 송상석 목사가 고등계형사였고 해방 직전까지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일을 했다면 박윤선 이약신 한상동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그를 교회 재건쇄신운동의 동료로 수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싸웠던 이들이 그를 받아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송상석 본인 또한 그런 자리에 감히 동참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때는 진해의 신학강좌에 이어 고려신학교가 설립되는 시기였다. 송상석 목사는 처음부터 교회 쇄신운동에 관여하였고, 고려신학교 설립운동에 동참하여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 개교식에 참석했다. 또 그는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초빙된 박형룡 박사를 만주에서 모시고 오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후일 고려신학교 교수가 되는) 이상근 목사가 헌납한 10만원의 자금24)을 가지고 두 차례의 시도 끝에 사선을 넘어 만주로 갔다. 당시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고, 공산주의 정권이 활동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만주로 들어가 그를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하는 일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송상석 목사는 이 일을 자청하였고, 사선을 넘어 만주로 들어가 박형룡과 그 가족을 모시고 1947년 9월 말 귀국했다.25) 송상석 목사가, 박형룡 박사를 모시고 서울로 가게 되었다는 점을 한상동 목사에게 전보로 알린 날은 9월 26일이었다. 이때의 일에 대하여 송상석 목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신학교 창설에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권위 있는 정통신학을 세우는 데는 권위 있는 지도자 한 분이 필요하였고 한국을 정통신학을 계승하는 데는 평양신학교 시대의 교수였던 박형룡 박사가 더욱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 박사는 그 당시 만주 봉천에 있어 ... 박 박사를 초빙해 오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교통 문제뿐만 아니라 공산군들의 총탄이 더욱 무서웠던 것이다. 당시 고려파 간부들이 갖가지 방안을 모색해 보았으나 옛 속담과 같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갈 쥐생원이 누가 될 것인가에 있었다. ... 그 당시 필자인 본인은 고려신학교 상무 이사직을 맡고 있었던 관계로 누구보다 책임을 더 느끼게 되어 거제도 대금산 바위 굴 속에 들어가 3일 간의 금식기도에서 모종의 비상사태까지 각오한 바 있어 위기에 둘러싸인 만주 봉천으로 향발하는 모험을 결심했던 것이다. 1947년 4월 가족을 외딴 섬에 떼어두고 부산과 서울 등지에서 만주 봉천행 차편을 백방으로 찾아본 결과 철도이나 육로는 공산당 수중에 들어 있었고 해로로는 대련항(大連港)과 영구만(営口湾)만이 유일하게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통로로 결정, 부산에서 청죽을 싣고 대련으로 떠나는 배는 주일에 출항하는 까닭에 포기하고 서울 한강 입구에서, 신의주에서 압록강 하류에 떨어져 있는 포구에서 대련항에 상륙 통과하는 것도 포기하고, 김포 갯변에서 영구행 홍삼을 밀수하는 발동선을 선택하였다. 그해 5월 초순에 홍삼 밀수선(약 20본 되는 발동선)에 편승하여 황해를 건너 삼주야만인 오후 3시 경에 영구만에 들어서자 양편 해안에서 총탄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간담이 떨어져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배 밑바닥에 엎드려 기도할 뿐이었다. 그러자 무장선을 탄 중국 군대가 몰려들어 수색을 하였다. 알아본즉 연안공산군이 영구를 점령하였다가 지난밤에 퇴각한 까닭에 혹시나 탐색대가 아닌가 하고 총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이 군대들은 홍삼 몇 뿌리로 잘 무마가 된 듯하다. 영구시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봉천성에 들어가 박 박사와 그 가족을 만나게 되자 필자인 본인은 시저가 폼페이성을 침공 입성한 기쁨 못지아니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타고 간 발동선(홍삼 밀수선)으로 박 박사의 가족을 속히 모시고 귀국해야 하는데 장개석 정부군과 공산군의 전세는 엎치락 뒤치락 하는 바람에 귀향길에 납치당할 우려도 있고, 또 중국인들이 홍삼장삿군들을 등쳐먹기 위하여 출항허가를 질질 끌면서 안 내주는 바람에 6개월이란 시일을 흘러 보내고 1947년 9월 20일 출항허가를 받아 같은 해 10월 일에 인천항에 귀항 상륙하게 되었고, 같은 해 10월 12일26)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박 박사님을 이와같은 공산군의 함정에서 구출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한 사람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한국에 칼빈 개혁주의 신학(正統新学)의 초석을 다져놓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줄 안다.”27)
송상석 목사가 만주로 가기 위해 서울에 들렀을 때 “서울 조선신학교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 일동”이 박형룡에게 보내는 서한을 전달받고 이 편지도 전달했다. 이 편지 또한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조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귀국한 박형룡은 10월 2일 기차편으로 부산으로 내려와 1947년 10월 14일 화요일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박윤선과 한부선의 교수취임식을 겸한 예식이었는데, 10시 30분에 시작된 이날 행사는 오후 2시까지 이어졌다.28)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거행된 박형룡 교장 취임식에서 송상석 목사는 한명동, 박윤선, 한부선, 주남선, 송상석, 한상동 순으로 단상에 좌정하였고, 이후 고려신학교의 행로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한다. 그는 문필력, 행정적인 감각, 한국교회적 상황을 헤아리는 안목을 지닌 분으로써 이때부터 송상석 목사는 박윤선, 한상동 등과 함께 고신 교단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5. 목회활동과 고신교회
옥포교회에서 약 2년간(1946. 5-1948. 12) 시무한 송상석 목사는 1948년 12월 27일에는 이약신, 황철도 목사의 뒤를 이어 마산문창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한상동 목사가 약 6개월간 시무한 바 있는 문산 문창교회는 역사가 오랜 마산의 중심교회였다. 한상동 목사 이후 부임한 김동선(金東鮮) 목사는 해방이 되자 교회를 사임했다. 친일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1945년 8월 26일 임시제직회를 소집하여 사임서를 제출했다. 일제하의 굴욕에 대한 자숙의 의미로 사임하게 된 것이다. 후임으로 이약신 목사가 10월부터 시무했다. 한 때 이 교회 장로이기도 했던 이약신 목사의 시무기간도 길지 못했다. 그는 1946년 8월 사임하고 황철도 전도사가 담임교역자가 되었다. 황철도 전도사는 1946년 5월 19일 조사로 부임하여 일하던 중 이약신 목사가 사임하게 되자 담임 전도사로 시무하게 된 것이다. 이 기간 중 황철도는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고, 곧 진주교회로 이동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송상석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고, 1948년 12월 말 위임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약 2년간 시무한 그는 1950년 12월 13일에는 이약신 목사 후임으로 부산항도교회에 부임하여 1년 3개월 간 시무하고 1952년 3월 사임하였다.29) 이어 마산문창교회와 밀양 가술교회 임시목사로 전임하였고,30) 그해 9월에는 마산문창교회는 사임하고 오직 가술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31) 그러다가 1953년 12월 29일 다시 문창교회 청빙을 받고 부임하여 22년간 시무하고 1975년 7월 은퇴와 동시에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즉 송상석 목사는 1948년 12월 27일 이 교회에 부임하여 짧은 기간 항도교회와 가술교회에서 시무한 바 있으나 이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경남노회, 혹은 경남법통노회 목사로 일하면서 경남노회를 대표하며 고신교단의 중심에 서게 된다.
송상석 목사가 거제도 옥포교회, 부산 항도교회, 창원시 대산면 가술교회 그리고 마산 문창교회에서 사역하는 기간은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그 이후 고려신학교 문제는 경남노회와 남부총회의 논란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고려신학교의 설립의 정당성과 신학입장을 대변한 이는 박윤선이었다. 그는 ‘고려신학교’ 혹은 ‘고려신학교 학우회’ 이름으로 출간된 4권의 소책자를 통해 고려신학교가 지향하는 신학을 변증하고자 했다. 이 시기 고려신학교를 반대한 이들은 고려신학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특히 박형룡이 한상동과의 의견 차이로 교장으로 취임한지 5개월이 못되어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갔을 때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神聖派)들에 대한 비난은 심화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반대자들과 싸웠던 대표적인 논객은 송상석 목사였다. 그는 논쟁의 와중에서 무엇이 핵심적인 사안이며, 무엇인 지엽적인 문제인가를 정확하게 분석했다. 실제로 이 당시로 볼 때 고신의 울타리에는 송상석에 필적할만한 문필력을 지닌 이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앞으로 이 점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정리하겠지만 고신에서 발표된 많은 문서들이 송상석 목사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문서가 총로회 발회식 선언문이었다. 고려신학교 관계자들, 곧 경남법통노회가 총회로부터 축출되어 별도의 치리회로 출범하고 총로회 발회를 공표하게 되었을 때, 발회문 초안 기초위원은 송상석 이학인 장석인 전성도 황철도 등 5인이었고 위원장은 송상석 목사가었다.32) 위원을 임명했을 때가 1952년 9월 11일이었고 그 다음날인 12일 송상석 목사는 선언문 초안을 보고하였고 약간의 수정을 거쳐 발회식 때 발표하기로 가결했다.33) 초안 기초위원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약간의 첨삭이 있었겠지만 이 문서의 구성, 전개, 대의(大意)는 송상석 목사의 것이었다.34)
송상석 목사가 기초한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서가 1960년 12월 13일 고신이 승동측과 합동할 당시 ‘취지 및 선서문’이다. 당시 고신과 승동측의 합동안,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및 규칙 수정안 작성에도 관여하였지만 고신과 승동측의 합동의 정신을 밝히는 ‘취지 및 선서문’을 기초한 것이다.35) 당시 송상석 목사는 고신측 총회장이기도 했다. 이때의 문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록, 11-2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971), 17-21쪽에 게재되어 있다. 그 외에도 고신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변호하는 여러 문서나 석명서를 초안하거나 기초했다.36)
이런 교단의 문서 활동과 관련하여 고신교회가 조직된 이후 첫 10년간의 문서를 수합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록, 1-1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961)을 출판한 일은 후대의 역사연구를 위한 송상석 목사의 소중한 기여였다. 당시 그는 총회 출판부장이었다.
6. 1960년대 이후 송상석, 한상동
1960년대 고신교단은 또 한 차례 혼란에 휩싸였다. 중요한 사안이 박윤선 박사의 고신 철수, 승동측과의 합동, 고려신학교의 복교, 그리고 환원이었다. 이 시기를 거쳐 가면서 송상석 목사는 박윤선 교장과 소송건과 관련하여 이견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1960년대 발에는 교권과 관련하여 한상동과 대립하게 된다. 송상석 목사와 한상동과의 대립보다는 송상석 목사와 박윤선과의 견해차가 보다 신학적이었다. 이 점은 송상석 목사를 축으로 한 경남노회와 한상동을 축으로 한 부산노회간의 대립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서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대립이라는 의미가 강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송상석 목사가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하고 약 3년이 경과한 1951년부터 1970년까지 송상석 목사는 교회 재산과 관련하여 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총회파와 법통파로 나누어진 대립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법정투쟁이었다. 송상석 목사는 총회파의 백리언(그리고 백승희), 김석찬 목사와 대결하면서 지루한 싸움을 전개한다. 박윤선 교장은 “신덕(信徳)으로 일관하여 진리 문제 이외엔 덕을 손상치 않기 위하여 남들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취지의 송사불가론을 앞세웠으나,37) 송상석 목사는 건덕의 문제와 예배당 명도건은 별개의 문제로 인식하여 송사정당론을 주창했다. 박윤선을 비롯하여 한부선, 이인재, 백영희 등은 교회 쟁탈전을 비난했으나, 박손혁, 황철도는 송상석 목사의 입장을 지지했다. 송상석 목사는 교회 재산은 ‘교인 총유의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런 그의 이론은 대법원 판례에 영향을 주어 오랫동안 교회 재산권 분규의 판례가 되었다. 송사건과 관련하여 박윤선, 한상동, 송상석 목사의 견해차는 교단 내외로부터 대립과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다가 송상석 목사가 1970년 9월 상남동에 제일문창교회를 설립함으로써 지리 한 싸움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런 문제와 함께 함께 1960년 7월 박윤선은 주일 성수를 범했다는 비난을 안고 고려신학교장 직에서 해임되었고, 그해 10월 고려신학교에서 철수하게 된다. 그가 1946년 이후 14년간 장년의 나이를 지나며 바쳤던 열정과 218편의 논문38)을 쓰며 흘렸던 땀을 뒤로하고 고신의 울타리를 떠나게 된 것은 비극이었다. 성실한 지성과 함께 신령한 경건을 추구했던 그가 주일을 성수하지 않는 ‘불경건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듣게 된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고려신학교 교장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사회 또한 주저 없이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는 자신을 향한 공격의 화살에는 뭔가 숨은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심전에 묻어두고 고신의 울타리를 떠났다. 박윤선의 고신 철수로 박윤선, 송상석, 한상동의 3인 체제는 균열을 가져왔고, 박윤선이 고신을 떠난 이후 송상석 목사와 한상동 사이에도 위태로운 곡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1969년 이후 현실로 나타났다.
1960년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는 박윤선의 철수로 심한 내흥을 겪게 되었고, 연동측과 분리한 승동측 또한 교세 감소 등 상실을 다른 무엇으로 상쇄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고신과 승동측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신과 승동측은 교단 통합을 발의하게 되었고 이 일은 성급하게 추진되었다. 1960년 9월 이후 불과 3개월간의 논의를 거쳐 1960년 12월 13일 역사적인 통합을 이루어 ‘합동교단’이 탄생했다.
한상동 목사가 승동측과의 합동을 추진했을 때 송상석 목사는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후에는 한상동 목사의 추진에 찬동하여 협력하였다. 한상동 목사가 합동을 성급하게 추진한 배경이 무엇인가는 사실 중요한 질문이다. 그가 합동을 서둘렀던 내면적인 이유를 고신교단 내부의 세력판도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남영환의 견해는 설득력이 있다.39) 박윤선이 떠난 이후 교단 내부에서 송상석 목사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황철도 목사와 매우 근친했다. 1959년 9월 부산 남교회당에서 소집된 제9회 총회에서 송상석 목사는 황철도 목사가 총회장에 선출되도록 강력하게 지지했고, 결국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일로 황철도와 송상석 목사는 매우 가까웠고, 이 두 사람이 교단을 이끌어 갔다. 이 점에 대해 한상동은 긴장했다. 이런 판국에서 한상동은 합동을 서둘렀다. 한상동 목사가 합동을 무리하게 추진한 배경에 대해 송상석 목사는 자신이 황철도 목사와 가까웠고 경남노회 중심으로 교단을 이끌어가는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 당시 한상동 목사는 교단 합동에 따라 고려신학교의 완전 통합을 생각했다. 교단이 통합되면 당연히 신학교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고려신학교는 폐교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송상석 목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송상석 목사는 그것마저도 없으면 힘의 발판을 상실하게 됨으로 디딤돌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의 ‘단일화’라는 말보다 ‘일원화’라는 용어를 채용토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신과 승동측을 통합하는 합동총회가 열리는 당일 오후 서울 흥천교회에서 모인 합동추진위원회(1960. 12. 13)에서 “신학교는 총회직영의 단일신학교로 하고...”로 성안된 것을 송상석 목사의 예지로 “신학교는 총회 직영으로 일원화하고”로 수정 채용한 것이다.40) 송상석 목사는 그 후에 전개될 갈등을 예견이나 한 것처럼 ‘일원화’라는 용어를 통해 고려신학교의 존속의 길을 열어두었던 것이다.
후일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함으로 고신교단의 환원을 이끌어 왔다. 환원할 때도 송상석 목사는 이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일단 합동했다면 합동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환원해야 할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송상석 목사는 자신의 생각을 접고 이번에도 한상동 목사를 도와 환원에 동참했다. 한상동 목사가 환원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물론 합동원칙의 위반 등을 이유로 제시하지만 그 외에도 내면의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떻든 송상석 목사는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았으나 한상동 목사를 도와 환원을 추진했고, 한상동 목사의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으로 야기된 문제에 대하여 한상동 목사를 변호하기까지 했다.41)
환원이 추진되고 있을 때 이근삼보다는 오병세가, 오병세보다는 홍반식이 덜 적극적이었다. 이근삼 교수는 곧 환원에 동참하였고, 얼마 후 오병세 교수도 동참했으나 홍반식 교수는 환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때 송상석 목사는 1963년 2월 18일 홍반식 교수를 모시고 가덕도 소양복육원으로 가 2박 3일을 유하면서 홍반식 교수의 환원 동참을 설득했다. 당시만 해도 전화나 통신 교통이 어려웠으므로 송상석 목사는 의도적으로 환원에 동참하지 않는 홍반식 교수를 외딴 섬으로 인도하여 설득하게 된 것이다. 송상석 목사와 소양보육원의 지득용 장로는 같은 노회원으로 깊은 신뢰관계였기에 홍반식 교수를 설득하기 위해 협력한 것이다. 송상석 목사는 후에 부산 광복동의 관해여관에 오병세, 이근삼, 홍반식, 그리고 지득용 장로가 만나 환원건을 종결짓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홍반식 교수도 환원에 동참하게 되고, 그해 2월 25일 이근삼, 오병세, 홍반식 세 교수의 공동 성명서를 작성하게 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송상석 목사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42)
7. 1970년대의 고신교회와 송상석 목사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박윤선, 송상석, 한상동은 일정한 역할을 분담하면서 고신의 역사를 엮어갔으나 박윤선의 철수 이후 송상석 목사와 한상동은 지도력에 있어서 긴장관계에 놓이게 된다. 두 당사자보다는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해 그 긴장이 심화되었다. 이 긴장은 1969년 이후 이사장과 고신 교수들, 경남노회와 부산노회 등으로 도식화되기도 하지만, 1970년대 초 고신교회에는 또 다시 법정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이유나 정당성의 문제는 차치하고 박윤선 없는 고신에서 소송불가론은 힘을 잃었다. 일부의 소송 반대론자들이 있었으나 교권적 대세에 밀려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1960년대에는 이른바 ‘사조(私造)이사회’ 사건으로 내홍을 겪었는데 이 때의 긴장은 고신교회 지도자들 간의 불신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68년의 고려신학교 교수 음주사건 처리 과정에서도 이런 불신은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 사건 저변에는 “송 목사가 배경이 된 경남노회측과 한상동 목사를 수장으로 하는 신학교 측 사이에 첨예한 대립과 심한 불신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라고 허순길은 지적하고 있다.43) 두 지도자의 대립이 송상석 목사의 양해 아래 한상동 목사가 1969년 3월 27일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완화되는 듯 했으나 곧 다시 재현되었다. 그것이 1973년 초 법정 소송이라는 극단으로 발전하고 결국 교회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논자에 의해 깊이 숙고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필자 또한 이 건과 관련하여 긴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44)
여기서는 송상석 목사와 관련하여 간단히 정리해 두고자 한다. 불행한 대립과 분열로 치닫게 되는 사건의 발단은 1972년 9월에 모인 제22회 총회였다. 총회는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이사를 개편했다. 15명의 이사를 선출하였고,45) 1968년 9월부터 이사로 선임되어 4년이 경과한 송상석 목사 대신 김희도 목사가 새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송상석 이사장은 자신의 이사장 임기가 잔여하다고 주장하고 인수인계를 거부했다. 문제는 총회가 정한 임기와 문교부에 등록된 임기가 달랐다는 점이다. 송상석 이사장의 경우 문교부가 인정한 정관에 의하면 1971년 9월 30일 이사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임기는 1975년 9월 29일까지였다. 따라서 자신이 합법적인 이사장이라고 주장했다. 이사장 임기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자 송상석 목사는 1972년 11월 3일자로 문교부에 ‘이사장 임기에 관한 질의’를 했고, 문교부는 “귀 법인 이사장의 임기를 71.9.30-75.9.29까지로 결정하고 취임을 승인한 바 있으므로 동 이사장의 임기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귀 질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곤란하여 반려하오니 양지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답변했다.46) 송상석 목사는 감독기관인 문교부로부터 임기보장을 받은 셈이다. 따라서 그가 물러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 김희도 이사장은 12월 20일자로 총회장에게 다음과 같은 이사장 사임서를 제출했다. “사임서, 본인은 거(去) 22회 총회시 고려재단 및 학교법인 이사장 임직에 대하여 본 교단 평화를 위하여 이사장직을 사면하나이다.” 김희도 목사는 덕성을 지닌 목회자로서 교단 평화를 위해 사임을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만류로 김희도 목사는 이를 번복하였다. 결국 교회법이 인준한 김희도 측과 국가법이 인정한 송상석 측은 대립하게 되었다. 송상석 이사장은 문교부 공문에 근거하여 1973년 1월 2일 법인 산하 기관에 “송상석 목사의 이사장직이 계속되니 사무 처리에 참고하라”는 공문을 하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노회 측은 송상석 목사에게 이사장 사임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김희도 이사장을 지지했다. 송상석 목사 편에서 볼 때 의도적으로 이사장을 교체하려는 것으로 인식했다. 당시 고려신학대학 학장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화란 캄펜신학교 교수회의 초청을 받고 1972년 3월 화란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정홍권 교수의 수고로 급하게 제작된 것이 「고신학보」(1972. 3)라는 홍보물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화란에 약 두 달간 체류하였고, 화란 31조파 교회에 미화 25만불에 해당하는 약 90만 길더의 고려신학대학 교사 신축 기금을 요청하였다. 화란교회는 이를 수용하고 전 교회가 헌금하여 이를 후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금을 어느 개인에게로가 아니라 이사장 명의로 송금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장이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이것이 부산노회측이 이사장 교체가 불가피했다고 보는 속사정이었다고 류윤욱 목사는 이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송상석 목사측이 이사회록을 위조하여 이사승인 신청서를 당국에 제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한상동 목사측의 사조이사회 사건의 재현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어떻게 해서든 송상석 목사를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기회를 엿보던 이들은 1973년 6월 9일 김희도 목사 명의로 송상석 목사를 사문서 위조혐의로 부산지방 검찰청에 고발했다. 이로부터 12일 후에는 송상석 목사의 이사장직무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이것이 고신교회를 지리한 전투장으로 만들어갔던 정치싸움의 시작이었다.
부산노회와 경남노회 대립은 다시 재현하였다. 이때의 소송은 1950년대의 법정고소와는 다른 것이었다. 1950년대 말의 소송은 교회당 확보를 위한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었으나, 이때의 소송은 교권싸움이었고, 전자는 다른 교단과의 싸움이었으나 이때의 싸움은 형제와의 내분이었다. 전자는 민사소송이었으나 이번에는 형사 소송이었다.
경남노회와 부산노회를 배경으로 송상석, 한상동 두 지도자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고려신학대학 교수회 이름으로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문제”라는 제목의 논문이 1973년 6월 13일 발표되었다. 집필자는 오병세 교수였다. 이 논문에서, 로마서 13장과 고린도전서 6장, 그리고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전통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성도간의 사회법정 소송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바울은 오직 광적인 소송을 금지했을 뿐이고, 공의를 세우려고 하는 한 법의 보호를 거절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소송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 이 논지는 고린도전서 6장에 대한 박윤선의 해석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이 논문은 송상석 목사 고소의 정당성을 신학적으로 확인받으려는 의도에서 작성되었고, 이를 각 총대들에게 발송한 것은 그해 총회에서 고소불가론을 잠재우기 위한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신학대학 교수회 명의의 논문이 은밀하게 배포되고 있을 때, 서울에서 경향교회를 개척하고 있던 석원태 목사는 “고려파가 서 있는 역사적 입장과 소송건”(1973. 9)이라는 소론을 발표하고 소송불가론을 주장하며 송상석 목사에 대한 고소건은 취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7)
그렇다면 고소문제에 대해 고신 총회는 어떤 결정을 했는가? 1973년 9월 20일 고신교회 제23회 총회가 마산의 제일문창교회에서 소집되었다. 그러나 총회는 송상석 목사에 대한 형사소송건으로 논란이 일어났고 회의 진행이 어렵게 되자 총회장은 비상 정회를 선언했다. 그해 12월 17일 속회된 총회에서도 불신법정 고소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결국 회의는 불신법정 소송은 불가하다고 결의했다. 그런데 1974년 9월 19일 부산남교회당에서 소집된 제24회 총회에서는 이 건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는다는 이전의 결의를 무시하고 재론했다. 그리고 “소송하지 않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를 “소송을 남용하지 않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로 수정 결의했다.48) 이전 해의 소송 불가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의는 파장을 몰고 와 경남법통노회 총대 20명은 이 결의에 불복하고 퇴장했고, 경동노회도 이 결의가 시정될 때까지 조건부로 행정 보류를 선언하고 퇴장했다.49) 2년 후인 제26회 총회(1976)에서는 이전의 결의를 약간 수정하여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송하지 아니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로 재결의 했다. 그러나 ‘부득이한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에 대한 명시적 지침이 없으므로 소송 불가론의 입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1974년 9월에 모인 제24회 총회에서 경북노회장 한학수 목사는 ‘송상석 목사 처리건’을 상정했고, 총회는 특별재판국을 설치했다. 국원은 민영완(국장) 신현국(서기), 강호준 심군식 박은팔 목사와 김기복 변종수 손기흥 조인태 장로 등 9명이었다. 이들은 3개월이 지난 1974년 12월 4일 ‘목사면직’이라는 최종판결을 내렸다. 기소위원은 전성도와 한학수 목사였다. 당시 75세였던 송상석 목사에게 교회 치리회의 가장 무거운 형벌을 내린 것이다.
송상석 목사에 대한 극단적인 치리는 반발을 불러왔다. 경남노회는 재판국 지시를 거부하고(1974.12.26) 특별재판국의 위법성을 주장했다. 곧 행정보류를 하게 되자 총회는 경남노회 행정의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총회의 지시에 순응하는 이들을 규합하여 이른바 ‘정화노회’를 조직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노회의 하찬권 목사는 『기독신자 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 연구』(1973. 3)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불신법정 소송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경기노회의 성도간의 불신법정소송에 대한 연구위원회(위원장 하찬권, 위원 박성호 석원태 정승벽 김만우) 또한 “성도 간의 불신법정 소송에 대한 연구위원 보고”(1975. 9)를 통해 불신법정 소송이 비 성경적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1975년 9월에 소집된 제25회 총회가 경남노회 총대를 거부하자 이들은 9월 26일 행정보류 결의문을 내고 총회를 떠났다. 고신 교회의 분열의 시작이었다. 경남노회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약 70여 교회가 가담하여 소위 반고소(反告訴) 고신교회로 출발했다. 석원태 목사를 비롯한 경기노회 일부도 합류했다. 이들은 ‘반고소’라는 이름으로 분열하였지만 ‘고소문제’가 분열의 진정한 동기라고 말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분열된 반고소측은 서울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별도의 신학교육을 실시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시작했으나 얼마 후에는 자체 분열되어 경기노회측과 경남노회측으로 재 분열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총회의 정치적 대립의 와중에서 송상석 목사는 40여 년간의 목회 여정을 마감하고 1975년 7월 3일 은퇴하였고, 제일문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해방 전에는 절제운동가로, 그리고 목회자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교회 쇄신운동에 가담하여 고신 형성기에서부터 목회자로서, 교회행정가로서, 그리고 문필활동으로 활동한 그는 현역에서 물러난 것이다. 그는 문창교회와 제일문창교회에서 28년간 봉직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에서 전후 21회 노회장으로 봉사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10회(1960), 13회(1963), 17회(1967), 20회(1970) 등 4회에 걸쳐 총회장으로 활동했고, 학교법인 고려학원 설립 이사장으로 봉사했다. 그런 75세의 송상석 목사에 대한 치리회의 행사는 과도한 것이었다. 필자는 최근 송상석 목사 재판과 관련된 특별재판국의 활동, 회의록, 판결 관계 문서, 당시의 신문 보도 기사 등을 거의 완벽하게 수집했고 이를 출판하거나 연구자들에게 공개할 것이므로 재판의 공정성 여부는 독자들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송상석 목사는 83년의 생애를 마감하고 1980년 12월 20일 어두운 계곡에서 세상을 떠났다.
8. 그 이후
여기서 한 가지 정리해 둘 것은 그가 일제하에서 고투하며 추진했던 절제운동을 해방 이후에도 계속 추진했는가 하는 점이다.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를 역임하고 시온성교회 담임목사로 일했던 이성구 박사는 고신교회에는 개혁주의 신학(박윤선), 신사참배거부운동(한상동) 전통과 더불어 절제운동(송상석)이라는 중요한 전통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50)
“우리는 고신이 시작한 진리운동을 매우 좁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신사참배 회개운동을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역사 가운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이라는 정통신앙운동과 함께 절제운동이라는 신앙의 생활화를 추구하는 고신운동을 만들어 낸 인물이 우리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송상석 목사의 존재에 대한 바른 평가가 절실한 시점이다.”
고신교회는 절제운동이 전통을 계승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의 변화된 상황에서 송상석 목사는 고려신학교 중심의 인물로 교회 재건과 건설에 참여하였고, 절제운동에는 더 이상 관심을 쏟지 못했다. 일제하에서 그가 견지했던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신의 전통으로 계승되지 못한 점은 이성구 박사의 지적처럼 매우 아쉬운 일이다. 만일 그가 추진했던 금주 단연, 미성년음주흡연금지법의 제정 등과 같은 사회계몽운동을 해방 이후 고신교회가 계승했다면 교신교회는 교회정화만이 아니라 사회정화라는 양면의 쇄신운동을 통해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금주단연운동 등 절제운동 전통은 송상석 목사 개인의 활동이었을 뿐 고신교회의 전통으로 수렴되지 못했다. 그러나 송상석 목사는 1979년 『한국절제교육연구사료집』이라는 방대한 절제운동 사료집을 출간했다. 그가 1930년대부터 투신했던 한국에서의 절제운동의 시원과 발전,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후일 이 점에 대한 연구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송상석 목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27년이 지난 후 송상석 목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다. 그에게 가해졌던 일들에 대한 반성과 함께 해벌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때 마산의 제일문창교회는 송상석 목사 기념관 개관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송상석 목사의 사면 청원에 앞장섰던 이가 고 곽삼찬 목사였다. 송상석 목사는 고인이 되었지만 생시의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그 가족들이 겪었던 아픔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시도였다. 그래서 경남(법통)노회서 분립된 마산노회는 2007년 10월 15일 개최된 정기노회에서 고 송상석 목사 복권을 제58회 총회(2008)에 청원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노회장은 서마산교회 황삼수 목사였다. 이 청원에 따라 2008년 2월 14일 회집된 총회운영위원회는 총회 임원회의 보고를 받고 제32회 총회(1982)의 영입정신에 의거하여 고 송상석 목사를 해벌키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51) 총회운영위원회의 결정은 2008년 9월 22일 천안신학대학원 강당에서 개최된 제58회 총회에 보고되었다.52) 그래서 총회는 사면을 결의한 것이다.
송상석 목사는 역사자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영수증 한 장 버리지 않고 수집했던 분으로 알려져 있다. 아쉬운 것은 기록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송상석 목사가 수집했던 방대한 교회사 자료들이 기독교문사를 통해 한국기독교박물관으로 넘어 간 일이다. 약 1톤 트럭 분량이었다고 알려진 그 자료들을 고신대학이나 신학대학원 도서관에서 접수하여 보관되고 관리될 수 있었다면 우리들의 연구가 더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그 분이 수집한 역사기록들을 우리가 가져 오지 못한 것은 교단 내부의 대립이 빚은 결과였다고 한다.
이제 송상석 목사에 대해서도 새롭게 평가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연구의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편집하여 출판할 계획이지만 그가 남긴 여러 기록들은 후일을 위한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송상석 목사의 부인 김난출(1904-1983) 여사는 부산의 일신여학교 출신으로 일신여학교의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이 일로 2015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인 1921년 3월에는 일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진주 함안 등지에서 유치원 교사로 활동했다. 1922년부터 통영의 진명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24년 송상석 청년과 혼인했다. 이후 남편을 따라 황해도 경상남도, 평양 등지에서 YMCA운동, 금주금연 운동, 목회활동을 도왔고, 1946년 3월까지 황해도 황주에서 살다가 월남했다. 이후 목회자의 아내로 일생을 살았다. 해방 후 경남여전도회연합회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소천한지 3년이 지난 1983년 7월 15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2015년 8월 15일,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게 된 것이다.53) 시상식은 행정자치부에서 개최되었고, 고인의 막내 딸 송은숙 여사가 대신 수상했다.송상석 목사는 슬하에 5남2녀, 곧 7남매를 두었다.54)
9. 송상석 목사가 남긴 것
송상석 목사가 기여한 점 혹은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과 공헌은 무엇일까? 위에서 지적한 바처럼 그의 삶의 여정에서 남긴 유산들은 해방 전과 해방 후, 곧 고신이전 과 고신 가담 이후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목회 활동과 노회나 총회 등에서 봉사한 활동을 제외하였다.
1) 절재운동을 통한 국민정신 계몽
해방 이전 그가 남긴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은 1930년대초부터 절제운동을 전개하여 금주단연운동을 실시하였고, 절제시보의 창간과 절제공과를 제작하여 국민정신을 계몽하였고, 특히 1935년 10월 15일에는 윤치호를 위원장으로 미성년자음주금지법실시촉성회를 조직하여 1938년 ‘미성년자 금주금연법’을 제정하게 만든 일이었다.
2)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화보’ 편찬을 통한 사료의 수집과 역사편찬
절제운동과 더불어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화보』 편찬은 그의 중요한 기여였다. 이 역사편찬은 한국장로교회 50주년을 기념하는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역사 기록으로서 문헌사적 가치가 적지 않다. 제작될 당시 보다 오늘 한국교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송상석 목사는 이 자료집 발간을 위해 1년간 자료를 수집하였고 편집 작업을 거쳐 1934년 출간되었다. 이 책 속에 수록된 교회 관련 사진과 해설, 장로교계 주요 인물 사진, 그리고 각종 자료와 통계는 한국교회사 연구에 유용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고신교회의 역사 편찬
송상석 목사는 1962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50년 약사』를 편찬했다. 이대영 이인직 송상석 공동편집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사실상 송상석 목사가 편집 작업을 주도했다. 송상석 외 두 사람은 그들의 이력이 보여주듯이 역사 편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이 약사에 소개된 사진이나 기록 문체를 보면 송상석 목사가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송상석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회록, 1회-10회』(1961)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회록, 11회-20회』(1972)를 편찬했다. 이 두 총회록은 고신 초기의 총회록으로서 소실되기 쉬운 문서를 수합하여 책으로 엮어 후대의 사료가 되게 했다. 당시 열악한 재정 형편 때문에 출판비를 자신이 모금하였고 자신이 대표로 있던 칼빈문화사 이름으로 출판했다.
또 고신교단 화보집 『우리 교단의 어제와 오늘』(1972)을 발간했다. 교단 창립 20주년 기념 화보집인 이 책은 교단 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140쪽의 이 화보집은 각 노회별 교회 사진과 교회 상황, 교회 지도자들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 교단 역사 연구의 기초 자료가 된다.
4) 고신교회의 행정, 법규 등 교단의 체계 확립
송상석 목사는 교단 내적으로는 행정 체계, 각종 법규의 제정 등에 기여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한 경험과 절제운동과 관련하여 행정 당국과의 교섭 등을 경험으로 신생교단인 고신교단의 행정 체계를 수립하고 각정 법규 제정 등에 기여하여 오늘의 고신교단 형성에 기여하였다. 고신교단의 첫 총회규칙, 헌법 제정 과저엥 있어서 송상석 목사의 기여가 절대적이었다.55)
또 그는 교단지, 1955년 6월 8일 자로 「기독교보」를 창간하여 교단의 내적 일치와 외적 선포 등등을 통해 교단의 정체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1956년 9월 20일 제32호를 끝으로 종간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5) 고신교회의 정당성 제시와 변증56)
송상석 목사는 외적으로는 고신교회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활동했다. 그는 고신교회의 행정적 법적 정당성을 제시하고 고신의 신학과 신앙, 정통성을 변증하는 여러 문서를 작성하는 등 고신을 대표하는 논객으로 활동했다. 그는 “장로교회의 한국 유래와 고신파 진리운동의 발전 경위” (파수군 100, 102호)라는 논문을 통해 고신교회의 역사와 법적 정통성을 제시하고 있고,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가 발회한 후 발표된 ‘총로회 발회문’을 기초했다. 그 이후 총로회 당시 총회장 이약신 이름으로 발표된 고신교회를 변호하고 변증하는 여러 문서는 사실상 송상석 목사가 기초하거나 작성한 문서들이었다. 특히 그는 1960년 승동측과 합동할 당시의 합동선언문은 송상석 목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6) 고신교회 산하 교회의 재산 관리
송상석 목사가 교회당 명도 소송에 응소한 일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교단의 재산을 지키거나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바로 이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한상동 목사마져도 박윤선의 소송불가론을 적극 지지하지 못한 것이다. 송상석 목사는 문창교회에서의 경험 때문에 경남법통노회 소속 다른 교회재산도 총회파 경남노회 유지재단에 편입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경남법통노회에 속한 지역교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재산관계 등기 서류철을 작성하게 했다. 당시 자동차가 없었으나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먼 길을 왕래하며 개 교회가 ‘결의서’57)와 ‘건물소유증명원’을 작성케 하여 소곡 교회의 재산을 지킨 것이다. 당시 송상석 목사가 발로 띄며 적성하게 된 ‘결의서’와 ‘건물소유증명원은 A4. 크기 740쪽에 달한다. 이 문서는 마산의 제이문창교회에 보관되어 있다. 이 문서를 보면 경남법통노회에 소속한 개별 교회의 재산을 지키려는 송상석 목사의 간절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미주
1) 송상석,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71. 오병세 박사와의 대화(2006. 7. 31. 천안고려신학대학원 회의실).
2) 박윤선 송상석 한상동은 1946년 9월 고려신학교 설립을 전후하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으나 1950년대 박윤선과 송상석은 불신법정 소송건과 관련하여 극단적인 대립을 하였고, 결국 박윤선은 고신에서 철수하게 된다. 1970년대는 송상석과 한상동으로 대표되는 경난법통노회와 부산노회는 사생결단의 대립을 가져와 교단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3) 필자의 박윤선에 대한 주요 논문으로는, 이상규, “학문의 초석, 박윤선: 개혁주의 신학을 석명(釈明)한 신학자,” 「대학교육」 110(교육부, 2001. 3/4), 64-68, “교회사적 관점에서 본 박윤선의 설교,” 『정암 박윤선의 설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2006), 33-77. “정암 박윤선의 목회관” 「신학정론」 31/2(2013. 11), 11-58 등이 있다. 한상동에 관한 논설로는, 1997년 11월 17일 고신대학교에서 행한 제1회 한상동기념강좌에서 행한 강연, “한상동 목사의 신학과 교회건설”을 비롯하여, 고신대학교 학보에 발표한 “한상동 목사와 고려신학교의 설립,” 한상동 목사의 30주기를 맞아 2006년 1월 6일 고신대학교 주최 기념모임에서 발표한 “한상동목사와 고려신학교,” 『한국에서의 칼빈니스트』 에 발표한 “칼빈주의를 신봉한 한상동 목사,” 부산 사하구청이 발견한 『사하구의 인물』에 발표한 “부산의 교회 지도자 한상동 목사,” 『한국교회를 빛낸 칼빈주의자들』에 발표한 “한상동목사의 생애와 신학” 등과 단행본으로 출판된 이상규 최수경 편, 『한상동 목사 그의 생애와 신앙』 (글마당, 2000), 이상규 외, 『한상동 목사의 삶과 신학』 (고신대학교 출판부, 2006), 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SFC, 2006), 이상규, 『부산경남 기독교회의 선구자들』 (고신대학교 출판부, 2012) 등이 있다.
4) 필자는 「월간 고신」 2006년 9월호, 32-35쪽에 “고신 60년, 잊혀진 인물 송상석 목사”라는 짧은 논설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고신교회 간행물에 게재된 송상석 목사에 대한 최초의 논설이었다. 또 필자의 『한상동과 그의 시대』 (SFC, 2006)의 “고신교회와 송상석 목사”에서 보다 자세하게 소개하였고, 보다 발전된 약전이 필자의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에 소개한 바 있다.
5) 성악가 이인범(李仁範)은 이동희의 사위였다. 이인범의 동생 이인근과 송상석 목사의 장남 송병규는 서울 음대 성악과 동기로서 같이 납북되었다.
6) 윤은순, “1920· 30년대 한국기독교의 절제운동: 금주금연운동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16(2002. 2), 181.
7) 송상석편, “복음운동과 절제운동,” 『한국절제교육연구사료집』, 48-50 참고.
8) 통일공과는 1872년 만국주일통일공과 위원회에서 처음으로 공과대요(大要)를 편술하였고, 그 후 1915년 만국주일학교 공과 위원회에서 개정통일공과를 발행하기로 하였는데, 통일공과는 통일된 체제와 문제와 요절과 일반적으로 신앙중심의 해석을 주안점으로 하는 이름 그대로 장로교 세계의 통일된 주일학교 교제를 의미한다. 여기서 주일학교란 특히 성인들을 위한 장년주일학교가 중심이었다.
9)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편찬, 『장년 만국통일주일공과』 (경성: 조선예수교서회, 1938), 1.
10)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로회 제26회 회록, 9.
11)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로회 제26회 회록, 9, 90.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북한문제연구소, 『해방전 북한교회 총람』 (남북한선교통일위원회 북한 문제연구소, 1991), 51.
12)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로회 제26회 회록, 50. 이 정도의 예우는 평양노회 산하 교회 중 서문밖교회(임종순 목사), 산정현교회(송창근 목사), 남문밖교회(이창호 목사) 다음으로 우량한 대우였고, 연화동교회(김우석 목사)와 동일한 대우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로회 제26회 회록, 72.
13)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로회 제26회 회록, 25, 30.
14)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로회 제26회 회록, 39, 41.
15)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로회 제28회 회록, 76.
16) 이효제, 『아버지 이약신 목사』(서울: 정우사, 2006), 149, 153.
17)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9권, 708. 필자는 2006년에 출판했던 『한상동과 그의 시대』 142-3쪽 각주 124에서 “송상석 목사가 사무하던 중 이약신 목사가 동사목사로 부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가능성은 낮다. 신광교회는 두 사람의 목사를 필요로 할 만큼 교인수가 많은 교회가 아니었다. ... 따라서 이약신 목사가 동사목사로 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라고 기록했으나 이는 필자의 오류이기에 여기서 바로 잡는다. 이약신 목사는 평양 신광교회 동사 목사였고, 그가 그리로 간 것은 목회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 신사참배 거부로 피신한 것이었고, 송상석 목사는 어려운 처지의 이약신 목사를 동사목사라는 이름으로 동역하게 한 것이다. 또 필자는, 『한상동과 그의 시대』 143쪽 각주 124항 후반부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1938년 12월 경남도경에 구인되어 갔던 이약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대신 초량교회를 사임하기로 하여 1939년 2월 사임한 상태에서 임지가 없었고, 기왕의 친분관계가 있던 송상석 목사의 신광교회 동사목사로 부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기술했는데, 이것은 사실이었다.
18)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9권, 708. 필자는 『한상동과 그의 시대』 143쪽에서, “‘어떤 기록에는, ... 송상석 목사는 이약신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 치럿다.”)라고쓰고 있으나 적어도 옥고를 치렀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라고 썼으나 이 또한 필자의 오류였기에 바로 잡는다. 필자가 말한 ‘어떤 기록...’은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9권, 708쪽의 기록을 지칭했는데, 이 기록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되었음으로 여기서 바로 잡는다.
19) 송상석, “고인(故人)을 애도(哀悼)하면서- 박형용(朴亨龍) 목사님과 나,” 「크리스찬 신문」 1978년 11월 18일 자.
20) 한경직, 『나의 감사, 한경직 구술 자서전』 (서울: 두란노, 2010), 265-270, 280-282. 안명준 외, 『한국교회를 빛낸 칼빈주의자들』(용인: 킹덤북스, 2020), 1403.
21) 양재연 장로의 아들은 양우석, 바울, 다니엘인데, 우석은 유네스코 사무총장이었던 조민하 박사의 비서였고 송상석 목사의 장남 송병규의 친구였다. 송병일은 양우석으로부터 유학수속의 도움을 입어 미국으로 유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22) 이효재, 159 참고. 이약신 목사가 황주에 왔다가 떠난 날이 13일 혹은 14일이었는데, 김난출 여사는 “몇일 만 더 계셨으면 황주에서 해방을 맞았을 것인데”라고 회고한 일을 4남 병일은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23) 어렵게 월남했던 장남 병규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했는데, 재학 중 학도호국단장을 하면서 학내의 좌익들을 척결하여 음대학장이던 현재명 교수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고 가족들은 증언하고 있다.
24) 이 돈은 김승곤 목사의 장인 이종석 장로(부산 남교회, 후일 서대신제일교회로 이동하였다. 이 교회가 현재는 신평로교회로 개칭되었다)가 자신의 주택을 팔아 마련한 자금이라고 한다. 김남식 박사와의 대화(2019. 12. 13).
25) 만주의 박형룡을 모시고 올 때의 상황을 송상석 목사는 “마치 브레셋 군대와 충돌하면서 사선을 넘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서 생수를 길러오던 용사(삼하23;13-17)의 심정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70.
26) 송상석 목사는 취임일을 10월 12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27) 송상석, “박형룡 목사님과 나,” 『크리스찬 신문』 876(1978. 12.2), 4.
28) 이상에 대한 주요 정보는 한부선의 편지에 근거함. 『한부선 서간집3』, 83 99, 136, 348-9.
29) 『항도교회 50년사』, 93.
30)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제56회 촬요.
31)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법통) 제57회 촬요.
3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록,1-1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961), 4.
33)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록,1-1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961), 5.
34)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록,1-1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961), 4. 발회문은 하루만에 작성된 것이었다. 이 문서에서 송상석 목사는 교회쇄신의 시작은 회개임을 말하면서 장로교 정통교리의 확립과 신신학의 무용론을 언급하였다. 또 총회측의 교권적 횡포에 대해 언급하고 총로회 구성의 불가피성과 그 목적을 천명하였다. 특히 이 발회식 선포문 속에 ‘개혁주의’라는 말이 3번이나 언급된 것은 고신교회가 지향하는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신운동은 단순히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는 교회정화운동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개혁주의 신학운동임을 피력한 것이다. 이 글 속에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한국장로교회적 상황을 헤아려보는 안목과 총로회 조직의 신학적 의의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35)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록,11-2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971), 17.
36) 예컨대, 김희도 목사가 질의한 헌법정치에 대한 질의에 대하여 송상석 목사가 석명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록,1-10회』, 80-84 등.
37) 「파수군」 61(1957. 3), 6.
38) 「파수군」에 기고한 원고는 총 218편에 달한다.
39) 이상규,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서울: 생명의 양식, 2016), 366.
40)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회의록」(1952-1960), 294.
41) 송상석, 『법정소송과 종교 재판』, 72ff.
42) 이점에 대한 주요 정보는 소양보육원 지득용 장로의 증언에 기초하였음.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기록은, 이상규,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199-209를 참고할 것.
43) 허순길, 186.
44) 이상규, “고신교회의 법정소송문제,” 『고신교회, II』 미래포럼 편집 (서울: 미포, 2014), 224-247.
45) 선임된 이사는 김희도(이사장) 권성문(서기) 김경래 주영문(회개) 김주오 박찬규 박현찬 서영태 이기진 조규태 최만술 최영구 현기택 등이었다.
46) 송상석, 109.
47) 신재철은 자신의 『불의한자 앞에서 소송하느냐』(2014. 2), 232-35에서 석원태는 진정한 의미의 소송 반대론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48) 제24회 총회록, 23. 이때 결의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23회 총회결의(회의록 31페이지) 98항 ‘성도와 성도 간의 소송문제에 있어 이의 신학적 해석이냐 성경적이냐 아니냐에 대한 주장은 투표로 결정짓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성질이므로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성도 간의 소송행위가 결과적으로 그 원인 여하에 고사하고 신앙적이 아니며 건덕상 소망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여 아니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 이 기본정신에 따라 금번 소송사건에 관련된 인사는 교단의 평화와 단결을 위하여 또한 건덕을 위하여 총회 앞에서 유감의 뜻을 표하기로 하고 이를 사랑의 박수로 환영함으로써 이 문제와 노회장 회의가 총회에 보고한 관련건을 일괄하여 재론하지 않기로 결의 동의 한다.’를 ‘사회 법정에서의 성도 간의 소송행위가 결과적으로 부덕스러울 수 있으므로 소송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라고 수정하자는 동의가 성립되어 가부로 투표로 하기로 하고 투표하니 가 72표 부 7표 기권 1표로 동의가 가결되다. 본건에 대하여 경남노회 총대 정재영 외 20명이 본 건에 한하여(생략) 결의를 거부하고 항의서를 제출하고 총퇴장하다.”
49) 그러나 이때의 경동노회의 행정보류 선언이 총회록에 누락되어 있어 경동노회 제25회 정기노회에 이 점이 보고되었고, 노회는 이 보고를 채택 확정했다고 한다. 류윤욱, 98. 참고 경동노회, 『경동노회40년사』(2003), 99.
50) 이성구, “고신교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고신교회,1』 (서울: 미포, 2014), 33.
51) 「기독교보」 2008. 2. 23일 자 참고.
52) 『제58회 총회 회록』, 113.
53) 표창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99550호. 표창장 고 김난출, 위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이에 표창합니다. 2015년 8월 15일. 대통령 박근혜. 이 증을 대통령 표창부에 기재합니다. 행정자치부 장관 정종섭.”
54) 장남 송병규(1927-1950년 납북)는 서울음대 성악과 출신으로 오페라 가수였다. 그는 서울음대 피아노과 졸업생인 서인진(1926-2014)과 혼인하였다. 그의 아들이 송성민(1949- )인데, 미국 매릴랜드대학교에서 유학하던 중 만난 같은 학교의 유학생 오영옥(1947- )과 혼인하였고 슬하에 정수(부인 진정훈), 진우(부인 박정화), 진서(1980- )가 있다. 차남 송병영(1929-1942)은 13세 때 사망하였고, 장녀 송영숙(1931- )은 평양 정의여중, 이화여고를 거쳐 중앙대학교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사회사업가 한정교 목사의 아들 한남석(1926-1996)과 혼인했다. 한남석은 부산대학교 상경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화공보부 국장, 공보관장, 그리고 부산, 대구 방송국장을 역임했고 애린 유스호스텔 사장을 역임했다. 이들의 장녀 한은수(1954- )는 이화여대 미술학과와 시카고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한밭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의 배우자 이흔 박사(1951- )는 서울대학교와 USC켈리포니아와 노스 웨스턴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카이스트생명공학과 교수로 활동했고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한남석의 아들 한찬수(1962- )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로드 아일랜드대학교에서 유학한 유지연(1968- )과 혼인하였는데, La Pariahs Co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삼남 송병민(1932-2009)은 연세대학교 법대 출신으로 이화여대 가정과 출신인 김형미(1942- )와 혼인하였고 새나라신문사 경리부장으로 근무하였다. 슬하에 남매, 송성웅과 송명옥을 두고 있다. 4남 송병일(1936- )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농림부식물방역관으로 근무하던 중 미국으로 유학하여 링컨대학교(Lincoln University)를 졸업했다. 임미미(1944- )와 혼인하였는데, 그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San Francisco U.S. Fidelity Group 에 근무 중인 여성이었다. 4남 송병일은 LA 등지에서 한인교회를 섬겼고, 사업가로 활동하고 은퇴하여 LA에 거주하고 있다. 아들 송성훈(1972-)은 산타클라라 대학교를 졸업하고 Blue Shield of California 회개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5남 송병복 박사(1939- )는 중등학교 교사인 이외선(1949- )과 혼인했는데, 미국에서 미주예수교장로회 목회자로 활동했다. 슬하에 성원과 성주를 두고 있다. 차녀 송은숙(1947- )은 연세대학교 음대 기악과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출신인 치과의사 김충건 박사(1942-1995)와 혼인하였다. 슬하에 형준과 희원을 두고 있다.
55) 나삼진, “송상석 목사의 사역과 공헌에 대한 서지학적 분석,” 『송상석과 그의 시대』, 243.
56) 나삼진, “송상석 목사의 사역과 공헌에 대한 서지학적 분석,250-255에 보다 상세한 기록이 있음.
57) 이 때의 결의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결의서, 우리 교회는 1949년 3월 8일 마산서 모인 경남노회 제 51회 노회를 계승하는 경남법통노회 산하에 있음을 재성명하는 동시에 본 교회가 소유한 재산 일절(동산 부동산)은 좌기 사람들을 대표 소유자로 정하여 소유신고와 소유증명이나 소유등기 할 것을 동의함. 1951년 월 일, 경상남도 시(군) 가(면) 동(리) 번지 ..... 교회 신도일동.”
출처 : 코람데오 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