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버이날 아침, 라디오를 듣는다. 평소보다 더 또박또박 사연을 읽고 있는, 선한 눈을 가진 한 남자는 ‘어른 고아’로 불리며 어버이날 즈음만 되면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산다고 한다. 그런 남자가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목울대를 삭히며 읽는 사연에는 새엄마가 등장한다. 남편이 딴 여자에게서 봐온 아이를 거두어야 했던 새엄마는 어린 것이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따뜻하게 보듬을 수도 없다. 아버지가 죽고 나자 막내딸은 더더욱 마음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어린이날이면 어둑해질 때까지 골목초입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사연의 주인공은 끝내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던 엄마 대신 새엄마의 병 수발을 10년간이나 들게 된다. 엄마를 모실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오빠언니들을 대신해 병 수발을 떠맡은 막내딸은 자신을 키워준 새엄마에 대한 의무감이라 여기며 그 일을 묵묵히 해낸다. 그리고 미운 오리새끼였던 막내딸은 새엄마의 마지막 길에서야 비로소 미안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소설가 양귀자는 꽤 유명한 밥집을 운영한다. ‘어머니가 차려주는 식탁’이라는 한정식집이라는데, 메뉴는 ‘어머니 정식’외에도 ‘이모 정식’ ‘고모 정식’ 등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 메뉴판을 보고 그랬단다. ‘새엄마 정식’은 없냐고. 그리고 퍽퍽 눈물을 쏟았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라디오 사연을 들으며 나는 ‘새엄마 정식’을 떠올렸다. 막내딸은 자신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는 차가운 새엄마가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나이 차가 많은 오빠언니들이 도시에 나가 공부를 하게 되자 막내딸은 새엄마와 단둘이 남겨졌을 터이고, 새엄마와 마주하게 된 밥상, 즉 ‘새엄마 정식’은 어땠을까? 눈칫밥을 먹느라 손가시가 일고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피었을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셔지지 않는 ‘허기진 밥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을 쏟은 중년의 남자가 말하는 ‘새엄마 정식’은 또 다를 것이다. 엄마 자리를 차지한 새엄마가 미워 온갖 악동 짓을 했을 그 남자는 새엄마가 정성껏 차려준 밥상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풍금이 있던 자리」의 큰오빠처럼 ‘그 여자’라 부르는 새엄마가 싸준 알록달록 꽃밭을 연상시키는 도시락을 학교에 들고 갔다가 고스란히 되가지고 왔지만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주먹밥을 만들어 밥이 손에 달라붙지 않도록 깻잎으로 하나씩 싼 도시락은 먹고 싶은 유혹을 도저히 물리치기 힘들 것 같아서 마루 끝에 팽개치고 달아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설움과 후회가 뒤섞인 새엄마 밥상은 ‘어머니 정식’보다 더 눈물을 쏟게 만드는 ‘새엄마 정식’이 된다.
지지난주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와 <똥파리>를 보면서 지나간 영화 <가족의 탄생>이 겹쳐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 속의 가족은 ‘완전한’ 가족이 아니라 ‘결핍된’ 가족이다. 아버지가 부재하거나 어머니가 부재한다. 아버지가 있어도 없느니만 못한 아버지이거나 어머니가 있어도 일생에 도움이 안 되고 걸림돌만 되는 지긋지긋한 어머니이다. 그러나 <가족의 탄생>에서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끼리 가족을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가족의 탄생>에서 경석에게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엄마와 이따금 찾아오는 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엄마가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사랑’을 강하게 부정하는 배 다른 누나 선경이 있다. 엄마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자신을 낳은 것이다. 또 다른 가정이 있는 아버지는 경석에게 있어 늘 목마름의 대상이 된다.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아버지를 둔 경석은 그래도 좀 나은 것인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이복자매인 명주와 명은에게도 아버지가 없다. 어린 명은은 가게 앞에서 하드바를 먹으며 언니 명주에게 묻는다. “언니랑 나랑 아버지가 다른 것 알아?” 그런데 제법 처녀티가 나는 명주는 별것 아니라는 반응이다. 자신의 아버지는 ‘죽었고’ 명은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 것’일 뿐이다. 아버지가 달라도 명주에게 있어 명은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 것이다. “명주야, 동생하나 만들어줄까?”라는 엄마의 들뜬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명주의 가슴 속에는 예쁜 동생이 하나 자라 잡았기 때문이다.
같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것과는 달리 일명 배 다른, 혹은 씨 다른 형제자매의 아픔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가족의 탄생>에서 선경은 사랑에 목숨 걸었던 엄마답게 어린 동생을 남겨놓고 죽은 엄마를 대신해서 혼자 경석을 키우며 살아간다. 선경은 경석의 아버지를 알고 있지만 동생을 그 남자에게 보내지 않는다. 그것은 엄마 애인의 가정을 지켜주고 싶어서도 아니고,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엄마의 뒤치다꺼리를 위해서도 아니고, 엄마가 살아있을 때 야멸치게 굴었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도 아니다. 비록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지만, 그리고 동생의 아버지라는 작자가 살아있지만,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동생이 아직 너무 어리기에, 자신이 ‘보살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할 뿐이다.
<똥파리>에서 상훈은 돈이 생기거나 시간이 나면 어김없이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조카 형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남편에게 매를 맞던 이복누나가 이혼을 하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혼자 살아가는 모습이 더없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상훈은 아빠의 부재를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어린 조카가 동네 아이들에게 기죽어 지내는 것이 진짜 보기 싫다. 아이를 혼자 두고 일을 나가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누나의 처지가 괜히 짜증스럽다. 그래서 상훈은 되도록 누나와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수표가 뭔지도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는 형인에게 꿀밤을 먹여서라도 굳이 수표를 쥐어주고 온다. 그러나 누나가 아버지를 걱정하자 상훈은 폭발해 버린다. 자신의 어머니와 어린 누이가 어찌 죽었는데,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그런 아버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누나야? 우리 엄마 알아?!” 상훈은 이복누나와 자신과의 간극을 이 한마디로 일축해버린다. 그러나 상훈은 마치 자신의 인생처럼 한물간 삐삐가 편하지만 휴대전화 매장에서 일하는 누나를 찾아가 “현금 줄 테니까, 아무거나 하나 줘!”라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전화기를 찾으러 간 날, 먼저 집에 들어갔다는 누나 집 창문으로 들여다본 방안에는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조카 형인이 즐겁게 플스 게임을 하고 있다. 제법 행복한 가족 같은 그림이 나온다. 상훈은 아버지 자리에 자신이 앉아있다면, 과연 저런 그림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는지도 모른다.
누나는 욕을 달고 사는 상훈의 눈치를 보면서도 늘 밥은 먹었느냐고 다정스럽게 묻는다. 돈뭉치를 주는 상훈에게 “누나도 이젠 벌잖아.”라며 미안해한다. 만일 상훈이 자신의 친동생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버지의 칼에 찔려 죽은 어린 동생과 자신을 대신해 칼에 찔린 딸 때문에 넋을 놓고 차에 치여 죽은 엄마를 공유한 ‘완전한 남매’였다면 둘 사이가 이처럼 서먹서먹하지는 않았을까? 누나는 동생 눈치나 살피며 밥은 먹고 다니느냐 묻지 않고, 동생은 힘들게 살아가는 누나의 어깨를 감싸주며 직접 돈을 건넬 수 있었을까? 한마음으로 아버지를 마음껏 증오하고, 출소한 아버지가 굶어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을까? ‘결핍된 남매’이지만 그래도 누나는 언제나 상훈에게 “상훈아, 저녁 먹고 가.”라고 붙잡고, 상훈은 빈 젓가락질만 하는 누나에게 “뭐해? 고기 안 먹고!”라며 괜히 소리를 지른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명주와 명은 자매는 달라도 너무 다른 자매이다. 몸도 마음도 헤프고 자신의 속을 다 내보이는 명주와 달리 명은은 단단한 고치로 몇 겹이나 자신을 에워싸고 있다. 명은은 아버지 없이 자라게 될 아이의 상처는 생각지도 않고 마음대로 아이를 낳은 언니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명주는 언니 취급도 하지 않던 명은이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무작정 동행하자고 하자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피하려 한다. 그러자 명은은 대뜸 “니 아버지가 아니라서 그래?”라며 쏘아붙인다. 명은도 명주와의 여행이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명주가 자신의 아버지 얼굴을 알고 있기에 어쩔 수없이, 그러나 전혀 미안해한다거나 언니의 현재 상황 따위는 고려하지도 않은 채, 아주 당당하게 동행을 요구한다.
이런 명은의 태도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언니가 사생아를 낳았기 때문인가? 아빠가 없다고 놀림 받는 조카 승아를 보며 명은은 대놓고 명주를 경멸한다. 명은은 자신의 잣대로 보면 눈치라고는 없는 데다 한없이 모자라고 헤픈 언니라서, 이제는 성공한 자신과 격이 맞지 않는 가족이라서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지긋지긋한 것일까? 명은은 <똥파리>의 상훈과 마찬가지로 할 수만 있다면 핏줄의 인연을 끊고 싶었을 것이다. 명은은 대학을 서울로 간 후 고향집에 발길을 뚝 끊었던 것처럼,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인사하는 것이 피곤하고 귀찮은 일이라서 명절에도 고향에 오지 않았던 것처럼, 아버지 없는 자신을 낳은 엄마도, 엄마의 인생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언니도, 자신의 유년처럼 아버지가 없는 상처를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가야할 어린 조카도, 그리고 ‘그냥’ 싫기만 한 이모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명은은 혼자만의 일방적인 기다림에 지쳐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더욱 깊어진다. 엄마의 부음소식을 듣고 고향을 찾은 명은은 주소가 적힌 편지봉투를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명은은 어느 여름날, 책상 밑에 떨어져있는 그 편지를 발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버린 아버지 앞에 당신이 버린 자식이 이렇게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살아왔다. 명주 말대로 지금 아버지를 만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포옹할 것도 아니고 함께 살 생각은 더더구나 없는데, ‘어쩐지’ 꺼려하는 언니와의 동행을 감행하면서까지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지독한/혹독한 복수인가?
명은의 가슴 깊은 곳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 그리움은 명은의 키를 웃자라 조금만 건드려도 몸을 움츠리게 되는 여리디 여린 맨살이 되어 단단한 껍데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민달팽이’ 명은은 껍데기 속에 몸을 숨기는 ‘집달팽이’가 되어야 했다. 명은은 아버지가 없다고 놀리는 아이들과 싸워 안경이 깨졌던 유년의 자신처럼 안경다리가 부러져서 돌아온 승아의 안경을 새로 맞춰 주는 것으로 그 아픔을 함께 하려한다. 명은은 나이트클럽 광고지를 나눠주는 아버지와 마주치는 것이 싫어서 오던 길을 되돌아서 가는 승아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승아에게 이런 아픔을 겪게 만든 언니에게 “마음에 난 상처는 상처 아니야?”라며 악다구니를 해댄다. 그러나 세상을 더 겪은 명주는 “부모 잘못 만난 죄? 그런 거 없어. 그냥 사는 거야. 승아도 너도... 나도...”라며 그 언젠가 아버지가 다른 것을 아느냐는 명은의 물음에 하드바를 먹으며 심상하게 대꾸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똥파리>에서 상훈은 “핏줄? 손모가지 끊어서 이 피 다 마셔버리게 할 테니까...”라며 치를 떨 정도로, 자신의 피를 몽땅 뽑아서라도 핏줄을 끊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가 손목을 긋자 칼에 찔린 누이를 업고 필사적으로 뛴 것처럼 축 늘어진 아버지를 업고 뛰며 “살아야 돼. 살아야 돼. 힘들어 죽고 싶어도 넌 살아야 돼!”라며 절박하게 외친다. 그리고 병원에서 팔을 걷고 “내 피 수혈해. 내가 아들이야!” 라며 의사의 멱살을 잡는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자신의 피를 넣으라고 울부짖는다. 그러나 상훈은 친구 만식이 자신은 고아라서 그런 아버지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하자 고아가 낫다고 단정적으로 말해버린다.
<가족의 탄생>에서의 선경은 사랑을 찾아 이 남자 저 남자와 관계를 맺는 엄마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는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딸에게 있어 엄마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닮아가는 존재이다. 혼자서 밥을 먹는 선경은 엄마가 만들어다 준 총각김치를 한 입 가득 베어 무는 것으로 자꾸만 희미해져가는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곤 한다. 마치 밥상 맞은편에 밥숟갈에 반찬을 얹어주는 엄마가 있기라도 하듯 멍한 시선을 고정시킨 선경이 혼자 밥을 먹는 장면은 그래서 더 애달프다.
그러나 선경은 죽음의 문턱에서 찾아온 엄마를 내쫓는다. 그리고 쫓겨난 엄마가 미처 가져가지 못한 가방 속에 가득 들어있는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하나하나씩 꺼내보면서 마음껏 운다. 정이 많아서 헤픈 사랑을 했던 엄마였지만 엄마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했음을 깨닫는다. 엄마와의 사이에게 생긴 아이는 엄마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버젓한 가정의 가장노릇을 하고 있는 엄마의 애인 집에 찾아간 선경은 다짜고짜 “정말 우리 엄마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그 남자의 아내와 두 아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였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일말의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던 엄마의 애인이자 그 집의 가장은 선경의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 남자의 가정은 균열이 생겼지만 일시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선경은 결국 엄마가 남기고 떠난 어린 동생을 자신이 직접 키우는 것으로 엄마의 사랑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똥파리>에서 연희의 아버지 또한 딸에게 칼을 들고 설치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월남전 참전 후 돌아온 아버지는 정신이 이상해졌다. 엄마는 무능한 아버지를 구박하고 아버지는 의처증으로 어머니를 때리기 시작한다. 용역깡패들이 포장마차를 부수는 것을 막다가 죽은 엄마를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것으로 알고 있는 아버지는 딸 앞에서 차마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쏟아낸다.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아버지는 바람난 아내 대신 저녁을 차려주는 딸을 대견해 하다가도 또 정신이 나가면 밥에다 독약을 넣었다며 억지를 부리고 밥상을 엎어버린다. 깔끔하게 다려진 제복을 입고 훈장을 받았을 아버지는 작고 초라한 모습이 되어 텔레비전 속의 만화 캐릭터에 넋을 놓고 앉아 있다. 연희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 때문에 집을 떠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집을 나가 버리면 아버지의 밥은 누가 챙겨줄 것이며 점점 눈에 독기를 더해가는 동생 영재는 누가 말릴 것인가? 교복을 입은 연희는 찬거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서 저녁을 짓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연희에게도 가족은 선경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보살펴야 할 ‘약한 존재’인 것이다.
<똥파리>에서 아빠가 없는 형인에게 있어 삼촌은 아빠이다. 아빠가 사준 게임기를 자랑하는 아이들에게 기가 죽어있을 때 슈퍼맨처럼 나타나서 아빠인척 능청스럽게 연기를 해주는 것도 삼촌이고 플스 게임기를 사주는 것도 삼촌이다. 일 나간 엄마 대신 찾아와서 놀아주는 것도 삼촌이고 다정한 연희누나를 데려온 것도 또한 삼촌이다. 그런데 그런 삼촌이 힘없고 약한 할아버지를 때린다. 할아버지를 때리는 삼촌은 자신과 레슬링을 하던 삼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를 때리는 삼촌은 눈에서 불길이 일고 성난 짐승처럼 씩씩거린다. 자신을 찾아온 삼촌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래도 형인은 삼촌이 밉다. 착한 할아버지를 때리는 삼촌이 밉다. 왜냐하면 아빠도 엄마를 그렇게 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롱잔치에서 형인이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것은 늘 애타게 찾는 엄마도, 착한 할아버지도, 다정한 친구가 돼주는 연희 누나도 아닌 바로 상훈이 삼촌이다. 형인은 그냥 말보다는 욕을 더 많이 하고, 수표를 안받는다고 꿀밤을 먹이며, 돈을 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는 삼촌을 기다린다. 끝내 삼촌이 오지 않자 실망한 빛을 감추지 못하던 형인은 엄마와 할아버지, 연희 누나와 또 한 명의 아저씨가 오열하는 병원에서 숨죽여 운다. 형인은 지금이라도 하얀 시트를 덮고 침대에 누운 삼촌이 벌떡 일어나 장난을 칠 것만 같다.
오빠가 죽은 후에 올케와 시누이, 그리고 입양된 아이가 함께 사는 한 가족의 실화를 듣게 된 후 시나리오를 구상했다는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미라와 무신, 그리고 채현이 이룬 ‘아름다운 가족’이다. 두 엄마를 둔 채현의 가족사는 분식가게를 하며 살아가는 미라에게 5년 동안 연락이 없던 남동생 형철이 스무 살이나 나이가 많은 여자 무신을 데리고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부평초처럼 부유하던 형철은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누나에게 무신과 그녀 전남편의 딸까지 떨어뜨려 놓고 자신은 또 홀연히 사라진다. 자신들의 관계를 엮어준 형철이 떠난 집에서 미라와 무신은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또다시 버려질까봐 두려워하던 아이도 천진난만하게 뛰어논다. 이렇게 새롭게 탄생한 가족에게 또다시 집으로 찾아든 형철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미라는 잊혀질만하면 찾아드는 핏줄인 형철보다 맨살을 부비며 살아온 세월 속에서 어느새 든든한 버팀목이 된 무신과 그리고 무신과 함께 키워낸 사랑스러운 딸, 채현을 더 가족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세 영화에서 가족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에게 짐만 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삶을 이어가게 하는 ‘거룩한 원동력’이 된다. 지긋지긋해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그리고 벗어나지 못하는/않는 것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중간 중간에 오버랩 되는 내 가족의 이야기를 가만히 가슴에 묻어두는 것으로, ‘가족’이라는 문신을 더 깊이/깊게 새기게 되었다. 가족은 다름 아닌, 찬란한 슬픔이자 ‘찬란한 문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