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정치체제의 개혁에 관한 몇 가지 지침과 스탈린·트로츠키·지노비예프·카메네프·부하린·피야타코프 등 6명의 당 지도자들에 대한 간략한 인물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레닌이 뇌졸중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시기에 씌어졌으며 스탈린의 공산당 서기장직 축출권고로 끝을 맺는다. 레닌은 유서를 통하여 당의 후계자 선택을 지도하려 했거나 권력을 찬탈하려는 혁명동지들의 움직임을 견제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당 지도자들 사이에 상호 불신을 일으켜 그들에 의한 권력승계 가능성을 배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제1편에서 레닌은 당 중앙위원회의 확대를 제안하고 중앙위원회 내 단합을 해치는 가장 심각한 요인으로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의 긴장관계를 지적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요시프 스탈린은 거대한 권력을 담당할 만큼 신중하지 못하고 가장 유능한 트로츠키는 너무 자신을 믿으며 행정기능 쪽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니콜라이 부하린은 변증법에 통달하지는 못했으나 가장 우수한 이론가로 인정받았다. 유서는 또한 1917년 10월, 혁명을 반대하여 폭동계획을 발표한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행동을 비판하지 말도록 충고했다.
제2편은 추신으로서, 스탈린이 그루지야의 반란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레닌의 아내 크루프스카야에게 독설을 퍼부은 직후 구술되었다.
레닌은 스탈린의 무례한 언사를 책망한 뒤 당대회가 그를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제안했다. 문서는 여러 장 복사되었고 레닌이 친히 뜯거나 그가 사망했을 경우 크루프스카야가 뜯어야 한다는 지시와 함께 밀봉되었다. 1924년 5월 제13차 당대회가 열리기 며칠전 크루프스카야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유서를 송부했고 그것이 당대회에 전달되는 것이 레닌의 뜻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스탈린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중앙위원회는 레닌의 유서를 전체대회에 제출하기보다 대의원 몇 명에게만 공개하기로 결정하고 유서의 인용·발표·복제를 금지했다. 스탈린 시대의 개막과 함께 레닌의 유서는 금지문서가 되었고 유서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은 연방 내에서 거의 3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유서의 존재는 곧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1925년 유서의 일부를 입수한 맥스 이스트먼은 〈레닌 사후의 러시아 Since Lenin Died〉에 이를 발표했고 1926년 10월 〈뉴욕 타임스 The New York Times〉는 크루프스카야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입수한 유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이무렵 크루프스카야는 스탈린 반대파에 가담하고 있었다. 억압조치로 소비에트 연방 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레닌의 유서는 요시프 스탈린의 정권장악을 저지할 수 없었다. 제20차 공산당대회(1956)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유서의 일부를 인용했는데, 스탈린의 무단통치를 비판하고 자신의 탈스탈린주의 운동에 레닌의 추인을 덧붙이기 위함이었다
퍼온글인데...브리태니커 사전에 있다고 다음 검색에 나오네요.
스탈린이 독일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이천만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승리하여 소련을 지켜낸 공이 있다하나 그또한 지휘상의 엄청난 오류와 실수를 저질렀음이 분명하고
베리야를 통한 비밀경찰로 소련의 내부를 공포정치로 몰아넣은 상황은 레닌의 평가에 벗어나지 않는다 봅니다.
혁명에 성공한 소련은 그로말미암아 내부적 혁명의 동력을 상실하고 미국과의 무리한 체제경쟁의
결과로 소련연방의 해체로 나오고말았지요.
주자파로 낙인찍혔던 덩샤오핑이 다시 집권한 이후 중국은 자본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
헷갈리는 상황으로 변했고 북한의 경우 195-60년대 김일성에의해 연안파와 소련파를
몰아낸 갑산파의 노선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지만서두요....
여담인데.... 볼셰비키의 자금마련을 위한 보급투쟁에서 스탈린은 무장강도로 은행까지
털었다고 하더군요...
스탈린이 뇌졸중에 빠지고 발견 된후에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게한 측근들에의해
치료불능에 빠지죠. 그에대한 반감이 측근들에게 조차 있었다는 증거인데
그와는 달리 북쪽의 어느나라의 지도자는 독재라 하지만 직필님 말씀대로 집단지도체제였기에
그러한 전횡이 통제되고 제어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일전에 말한대로 정도전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추정될뿐....
첫댓글 레닌의 유서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중앙위원회에서 자신의 과오와 문제를 시정하겠다는 맹세를 하고서야 겨우 서기장직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이후의 중앙위원들을 늘리고 권력을 분산시켜 자신으로 권력의 힘을 몰고 트로츠키등을 국외로추방후
살해한것등이 아마도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듯합니다.
역설적으로 스탈린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형 체재가 없었다면 세계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스탈린에 의해 채결된 독 소 불가침조약에 의해 구 소련은 군수공업화를 위한 시간을 벌수 있었고 이것은
불가침 조약은 히틀러에 의해 깨어졌지만 이러한 시간을 통해 구 소련은 국방공업을 발전시킬수 있었습니다
어쩌보면 스탈린이 국제정세를 정확히 뚫어보고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스탈린 독재에 의한 강력한 산업화는 최강 독일제국을 무너뜨린 결정적 원인이기도 합니다
2차대전에서 미 영 프 연합국의 역활이란 구 소련이 주력을 먼저 깨뜨리고 그 패잔병들을 정리한 정도랄까...
독일제국이 구 소련과 부딧히기 전에 영 프는 단 한번도 승전한적이 없습니다.
독소전이 2차대전의 중심이란말은 맞죠.노르망디 오마하해변에서의 수천명의 사상사가 하루에 나자 호들갑 떨던
미군들도 독일과 소련과의 전투내내 하루평균 수천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사실은 외면하죠
2차대전이 반발하기전에 영 프를 비롯한 유럽의 제국들은 구 소련의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에 대하여
굉장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구 소련은 유럽제국들의 침공을 늘 두려워 하였지요
다시말해서 독일제국이 아니더라도 유럽열강들은 사회주의 국가인 구 소련을 침공할 계획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자국의 혁명을 두려워 한 것이죠...
당시 유럽열강들은 사회적으로 자본주의 모순이 누적되어 (계급간 모순)폭팔 일보직전이었고
제국의 경영자들은 이 누적된 사회적 에너지를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순들은 필연적으로 제국열강간의 전쟁을 불러오고 1차대전을 패한 까닭에 막대한 패전 보상금과
식민지 쟁탈전에 뒤늦게 뛰어든 독일로서는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열강들을 쫒아갈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이는 곧 나찌즘 파시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히틀러란 괴물은 이러한 역사적 필연성속에서 태어난 시대의 산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