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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9일(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요한복음 11:17~3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본문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병든 오라버니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2~3km 떨어진 유대 땅 베다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빈민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난한 빈민촌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주변에 머물며 살았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자, 그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즉시로 유대 땅 베다니로 내려가지 않으시고,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깨우러 가노라(1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잠들어 쉬는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느니라”라고 밝히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오히려 자기들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유대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영적 무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해 베다니로 내려가자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자기들도 예수님과 함께 죽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자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열어주시고, 그들의 믿음을 바로 세우는 계기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유대 땅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기후는 고온다습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보통 그날 매장하거나 아무리 늦어도 삼일 이내에는 매장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종종 매장하지 않고 시체를 그대로 두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흘 동안 영혼이 시신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다시 소생할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나사로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이런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마르다는 마을로 나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자신의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죠. 그녀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마르다의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우리는 마르다의 믿음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 ‘현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의 믿음도 다른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현재 적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부활을 생각했습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마치 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고치실 수 있어. 하지만 지금 그 일을 하지는 않으실 거야. 예수님의 권세는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에게 그런 능력을 사용하실지 모르겠어.”(「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0년 2월호, 131쪽).
혹시 우리도 마르다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국제전도폭발훈련의 복음제시 내용을 보면, 믿음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과거에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믿듯이 예수님을 믿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많은 분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 과거에 살아계셨지만, 현재 나를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 줄 수 있는 분이라고는 믿지 않지요. 많은 분이 예수님을 이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현재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이 미래 적 종말 신앙에 갇혀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동일하게 역사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끝 날에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 일뿐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서도 그 일을 이루실 수 있다고 믿는 일입니다.
마르다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마르다의 신앙은 ‘믿는 신앙’이 아니라, ‘아는 신앙’에 그치고 있다고 봅니다.
마르다와 예수님이 나눈 대화를 살펴보면, 마르다는 시종일관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만약 마르다가 우리교회 예배에 참석했다면, 그녀는 사도신경을 아마 다음과 같이 고백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압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나는 성령을 알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압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이것을 진정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참된 신앙고백은 “내가 압니다.”가 아니라 “내가 믿습니다.”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마르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마르다와 대화를 마치신 예수님은 그 동생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29절).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예수님 앞에 나아온 마리아와 마르다는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만일 저와 여러분이라도 이러한 상황을 만나면 똑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다가 보인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작은 차이가 그들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작아 보이지만, 아주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어려움을 만나면 예수님께 불평할 수도 있고, 섭섭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요. 왜 이렇게 늦게 오셔서 병든 오빠를 죽게 내버려 두십니까?” 이런 섭섭한 마음이야 마리아와 마르다 둘 다 가졌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고, 마리아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발 앞에 엎드려 우는 마리아를 보셨고, 그녀를 따라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아니십니다(히 4:15). 예수께서는 자기 발 앞에 엎드려 탄식하며 눈물 흘리는 자의 눈물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함께 눈물 흘려 주십니다.
저는 최근에 한 위기 가정을 만나 그들을 돕는 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가정을 회복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가장 연약한 자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늑대들의 합창>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늑대들이 사는 툰드라 지대는 한 해의 대부분이 겨울이고, 기온은 영하 32도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늑대들이 먹잇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먹잇감 찾는 일을 계속 실패하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늑대 무리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두머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무리가 우두머리 늑대를 죽이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내분이 일어나면, 우두머리 늑대 한 마리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늑대 무리 전체가 굶어 죽게 됩니다. 사냥을 위해서는 개체 수가 다섯 마리에서 열 마리가 필요한데, 내분으로 늑대들이 흩어지면 사냥하지 못하므로 모두 굶어 죽게 됩니다.
이런 위기에 직면하면, 우두머리 늑대는 긴 울음소리를 서럽게 내기 시작합니다. 가족을 먹이지 못하는 미안함과 처량함이 묻어나는 울음입니다. 그러면 그를 따르는 늑대 무리가 그보다 약간 낮은 톤으로 따라서 운다고 합니다. 심지어 우두머리를 죽이려고 했던 무리까지 울음에 동참합니다.
그래서 툰드라 지역에 늑대들의 서럽고 긴 합창이 가득 차게 됩니다. 이렇게 한동안 늑대들이 울고 나면, 늑대 무리는 다시 하나가 됩니다. 지난 어려움과 갈등을 뒤로한 채 늑대들이 다시 뭉쳐 새롭게 사냥에 나설 결단력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혼자라고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안 보이는 것 같아도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여러분을 위해 울어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아픔을 아셨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출처: 궁인, 「세상 이론과 고정 관념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방식」(두란노, 202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2월호), 89쪽에서 재인용.
예수님은 마리아의 눈물을 보시고 그녀와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육중한 돌을 옮기라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나는 시신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예수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할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가 냄새나는 시신보다 더 지독한 것이겠습니까?
예수께서 무덤 앞에서 감사하셨던 이유는 자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 얼굴이 수건에 싸인 것을 보면 그는 죽었던 나사로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수건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낸 제자들이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과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25절과 26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과연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부활이십니다. 죽은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시신에서 냄새가 날 정도였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은 육체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육체의 부활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부활은 우리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부활은 ‘미래 적 종말론’을 상징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경험하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적이 없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을 믿고 영원히 누리는 영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얻게 되고, 현재 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누리는 영적 생명은 ‘현재 적 종말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누리게 되는 생명의 약속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육체의 부활과 영적 생명을 누가 주십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육체적 부활과 영적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27절에 나오는 마르다의 고백처럼, 우리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드리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불치병으로 죽게 된 여덟 살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의사와 어머니는 이 사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영리한 아들은 자기 죽음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죽음이 무엇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질문을 받은 어머니는 잠시 부엌에 가는 체하면서 아들에게 지혜로운 답을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아주 어렸을 때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면 아빠가 안아서 2층 침대에 눕혔지? 이제 네가 잠이 들면 하나님 아버지가 너를 안아서 하나님의 집에 옮겨 놓으시는 거란다.”
성경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힘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입니다.
-출처: 도원욱, 「예수 예수 믿는 것은」(두란노, 2017);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2년 3월호), 251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게 될 때, 여러분에게 일어날 변화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괴롭히는 지독한 문제 앞에서도 우리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힘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