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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칩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마태 4,19)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인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며(마르 1,29-30), 예수님께서 성전 파괴를 예언하셨을 때에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며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마르 13,3-4).
<요한복음>에서는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번째의 제자가 되었으며(요한 1,35-40),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면서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요한 1,40-42).
또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드렸고(요한 6,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합니다(요한 12,20-22).
초기의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맨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프로포클레토스)으로 불립니다.
그는 흑해 주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인 ‘파트라이’에서 순교하였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 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그 나라의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모셔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라고 말씀하시자,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태 4,20).
그런데 ‘고기를 낚는 어부’와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살아있는 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인다면,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잡아들입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고기를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고기가 좋든 나쁘든, 곧 전교 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낚아 올립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신의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칩니다.
곧 자신의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가라는 데로 가고, 그물을 던지라는 쪽으로 던지며, 그분이 명령하는 방식으로 그물을 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해타산의 머뭇거림이 전혀 없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온전한 응답이 요구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먼저,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을 받았듯이,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 들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구도자요 인도자>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 사도는 형 베드로와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공관복음이건 요한복음이건 안드레아를 소개할 때 늘 ‘시몬(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라고 소개합니다.
저라면 나로서가 아니라 늘 누구의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짜증이 나게 하고 화가 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이 늘 같이 있고 또 공동체의 대표로 있으니 같이 날뛰거나 두드러지지 않으려고 곧 잠자코 있으려 무던히도 애써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만 보면 안드레아는 형의 피해자입니다.
실제로 안드레아는 나서지 않았고 잠자코 있던 제자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토라져 있거나 뒷짐만 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주님을 제일 먼저 따른 이는 베드로가 아니라 안드레아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드레아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서 세례자 요한과 함께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고 기다리던 무리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도 같은 무리 중 하나였는지 모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했을 때
주님을 따라간 제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안드레아였고, 그래서 안드레아가 베드로를 주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의 안드레아는 먼저 구도자였고 다음으로 인도자였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찾는 구도자였고, 메시아께 사람을 인도하는 인도자였으며, 우리 공동체로 말하면 앞에 나서는 회장이 아니라 뒤에서 사람들을 공동체로 끌어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신으로 자기를 자리매김하는 사람이 제가 보기에는 정말 내공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내공이란 어떤 것이고 무슨 뜻입니까?
내공이란 한자어로 內工이니 내적 장인이라는 뜻이고, 풀어 말하면 자기 내면을 갈고 닦아 내적으로 실력을 갖춘 대단한 경지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자기 안의 실력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음을 포함하니, 대단한 겸손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안드레아는 자기도 주님을 따라 행복한 사람이고, 남도 주님께 인도하여 남도 행복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주님께 인도하였고, 그리스인들이 주님을 찾아왔을 때도 주님께 인도했으며, 특히 오천 명 먹이는 빵의 기적 때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이런 안드레아가 내공이 부족하고 겸손에서는 거리가 먼 저를 아주 부끄럽게 하지만 그래서 제게는 귀감이 되는 사도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따름으로써 얻게 되리라>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모범적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향은 어떤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인 의지로 따름으로써 끝까지 가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순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행동의 변화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리재고, 저리재고 하지 말고 '곧바로' 버리고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주저한다면 그것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시 응답할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순명과 실행을 통해서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깨닫게 됩니다.
나의 힘을 빼는 것이 믿음이고, 그리하면 주님의 권능을 제대로 만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나를 믿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습니다.
믿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름으로 확고하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따를 수 있는 믿음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선택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나를 뽑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기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주님을 따름으로써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먼저 우리의 믿음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답니다.
예수님께서 크신 분이셨듯이 우리가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모범과 표양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과 줄다리기를 하지 말고 곧바로 따릅시다.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할 수 있기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용기 있고 사내답고 쿨한 성격의 안드레아 사도>
교구 구조 안에는 참사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구장님과 보좌주교님들, 그리고 신부님들 가운데 이런저런 분야에 전문성과 능력과 경험치를 지닌 분들이 몇 분 참여합니다.
그래서 교구 내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회의를 거듭합니다.
저희 수도회 안에도 비슷한 구조가 있습니다.
관구평의회입니다.
관구장님을 중심으로 그분에게 여러 측면에서 전문적인 도움을 드리기 위해 구성된 모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단 안에서도 그런 구조가 있었습니다.
일흔 두 제자단이 있었고, 열 두 제자단이 있었습니다.
열 두 제자단 안에서도 핵심 제자단이 있었으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가 거기에 포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존중해주셨습니다.
중대한 일이 있으면 그들만 따로 모아 의견을 들으셨습니다.
타볼산에 오르실 때도 그 세 사람만 따로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사항이 생깁니다.
최초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안드레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핵심 제자단에서 제외됩니다.
제가 안드레아였다면 끝도 없이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스승님께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지?
그래도 내가 명색이 첫 제자인데, 나를 쏙 빼놓고 야고보와 요한을 참사회에 넣는 법이 어디 있냐고?
그러나 안드레아는 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신 예수님 마음이지. 나는 그저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에만 충실하면 그만이지, 하고 크게 넘겼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 안드레아의 의미는 ‘사내다움’ 혹은 ‘용기’입니다.
용기 있게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셨던 안드레아, 사내답게 예수님을 따라나선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단순하고, 과격하고, 급하고, 다혈질적이었던 형 시몬에 비해 안드레아는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그리스 북부 지방의 에피루스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박해 때 아카이아에서 체포되어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로 X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로 X는 그리스도의 첫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안드레아에 관해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한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후 꽤 오랫동안 죽지 않고 매달려있었습니다.
이틀간 매달려있었는데, 그 순간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안드레아는 십자가 위에서도 복음 선포 활동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주변에 둘러서있는 군중들을 향해 설교를 계속했답니다.
이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적대자들은 안드레아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안드레아를 오랫동안 감쌌답니다.
그 강렬한 빛 한 가운데 안드레아는 숨을 거두었다는군요.
임종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람 낚는 어부로 살고자 노력했던 안드레아, 그리스도의 향기였던 안드레아 사도의 삶과 신앙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앙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남을 인도하려면, ‘내가 먼저’ 잘 걸어가고 있어야 합니다>
1)
“나를 따라오너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6)
신앙생활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직무나 직책을 맡는 것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그렇습니다.
자기가 종교를 선택한 것이고,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자기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런 생각은 어리석고 오만한 착각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페 1,4-5)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부르심’은 사랑이고, 은총입니다.
2)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너희는 지금까지는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도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들이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지, 사도로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에 부르심을 받을 때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도 많았고, 미숙한 점도 많았습니다.
그랬는데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깨달았고, 또 그들 자신들이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완성’을 향해서 나아갔고, 결국 ‘완성’에 도달했습니다.
따라서 ‘사람 낚는 어부’로서 사도들이 첫 번째로 낚아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야만 다른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사제들의 서품도 완성된 상태에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품성사는 ‘시작’일 뿐이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제의 삶’은 ‘사제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신품성사를 받는 그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으로 착각한다면, 세상에서 제일 교만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세례성사도 마찬가지인데, 세례성사는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고,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만일에 세례성사를 받자마자 신앙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고 착각한다면, 곧바로 교만과 위선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3)
요한복음에는 어부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요한 1,35-37)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 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요한 1,40-42)
요한복음의 이야기와 마태오복음의 이야기를 합하면, 예수님을 만나서 믿게 된 일이 먼저 있었고, 몇 달쯤 뒤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서게 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몇 달은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 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어부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받기를 바란 것은 첫 번째가 자기 자신의 구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 아니라...
그 직무를 받게 된 것은 제자가 된 다음의 일입니다.
사실 세례성사도 그렇고, 신품성사도 그렇고, 모든 성사는 일차 목적이 각자 자기 자신의 구원입니다.
‘나의 구원’을 생략하고서 ‘남의 구원’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따라라 - 예수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
"주님을 찬양하라, 모든 민족들아.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 하여라."
(시편 117,1-2)
오늘은 11월 위령성월 마지막 날이자 연중 34주간 마지막날이고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이며, 오늘 저녁 성무일도부터는 희망과 기쁨으로 가슴 설레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새삼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연민과 질투, 모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러나 질투와 맞서지 말고 질투하는 이들을 연민하라.”
<다산>
“훌륭한 장사꾼은 재물을 깊이 감춰 없는 것처럼 하고, 군자는 덕을 갖춰도 겉모습은 모자라 보인다.”
<사기>
새삼 겸손과 연민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겠습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형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어부로 살았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대체로 벳사이다에서 태어나 카파르나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안드레아 사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사내다움’ 또는 ‘용기’를 뜻하며, 형 베드로와는 달리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 뒤에는 그리스 지방으로 전교여행을 떠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서 제자인 스타키스를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하며, 그래서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안드레아를 초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봅니다.
형 베드로는 로마의 초대 총대주교, 동생 안드레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초대 총대주교가 되니 이 또한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어부, 생선장수, 밧줄 만드는 사람, 그리고 그리스와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며 키예프에 가서 선교했다는 전승 때문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러시아의 최고 훈장 이름이 사도 성 안드레아 훈장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가 순교한 곳은 그리스 아카이아 지역의 파트라이라고 하며,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합니다.
안드레아가 X자형 십자가를 선택한 이유는 그리스어로 X자는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글자였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아는 형장에 끌려갔을 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기쁨에 넘쳐 기도합니다.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 해다오.”
바로 오늘 아침 성무일도 시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입니다.
그래서 안드레아 사도를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에는 십자가를 든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사도가 활동한 지역은 아니지만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스코틀랜드의 국기도 파란 바탕에 흰색의 X자형 십자가를 사용합니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이 성 파트리치오의 축일인 3월17일에 축제를 벌이는 것처럼,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성 안드레아의 축일인 11월 30일에 축제를 벌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의 X자형 십자가의 순교로 끝나는 생애가 감동적입니다.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순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이요 첫눈에 이들의 내적 갈망을 알아채신 주님임이 분명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버림, 떠남, 따름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서로가 첫눈에 반했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가정법의 물음은 부질없는 공허한 질문이니 하느님의 섭리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소 역시 가정법의 질문은 부질없는 질문이니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연의 부르심이 아니라 필연의 부르심입니다.
곧 이어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역시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한번의 부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를 평생 히루하루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부르시니 우리 삶의 여정은 성소의 여정, 부르심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결같이 시종여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버림, 떠남, 따름의 여정'에, 순교적 선교의 삶에 충실하다 먼 이국땅에서 X자형으로 순교한 사도의 생애가 가슴 먹먹한 감동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 선포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결코 듣지 못하면 믿을 수 없고, 선포가 없으면 결코 들을 수 없고, 사람들이 파견되지 않으면 선포도 없다고 강조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옛 사도들과 선교사들처럼 날마다 선교사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선교사들에 대한 하느님의 기쁨과 감동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다음 말마디가 우리의 선교열정을 북돋웁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로마 10,15;이사 52,7)
선교없는 교회는 죽음 교회요 존재 이유의 상실입니다.
새삼 선교는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요 우리의 본질적 사명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 자체가,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주님 사랑을 알리는 선교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오늘 따라 미사 시 주님의 강복 후 마지막 파견 말씀이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의 참 좋은 응답이, 하느님을 참으로 기쁘게 하는 일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모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오늘 복음의 부르심 기사는 참 담백합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간결한 언어로 이어집니다.
부르시는 분이나 부르심 받는 이들의 심리 묘사도 부연 설명도 없이 착착 진행됩니다.
너무 간결해 건조해 보이지만 덕분에 모호함 없이 명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마태 4,18)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혼자셨네요.
오늘은 특히 호숫가를 지나시는 예수님이 홀로이셨음이 눈에, 그리고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고 성령에 이끌려 들어간 광야에서 목숨을 건 단식 여정을 거치신 뒤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셨지요.
그렇게 얼마간 그분은 혼자셨을 겁니다.
성 삼위 하느님과 일치 안에 계시는 그분께는 홀로이심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인성을 입으셨으나 홀로 충만하고 완전하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그 충만한 사랑을 나누고,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서 함께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오늘이 그 역사적 순간이지요.
'그들은 어부였다.'
(마태 4,18)
예수님께서 어망을 던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십니다.
어부들입니다.
다른 이들, 좀 더 학식 있는 세도가의 전도 유망한 젊은이를 원하셨다면 성전이나 회당 근처에 가셨겠지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현장에서 땀흘려 노동하며 일상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특별할 것 없이 일상 안에 움직이는 우리를 '보시고'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19)
예수님은 상대방의 일상성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정하고 존중하십니다.
어부들에게 '힘들게 그러고 살지 말고 다른 일을 하자'고 꾀시는 게 아니라, 어부로서의 자질과 경험을 살려 진짜 어부로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미신 겁니다.
언젠가 낚시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낚시는 운에 달렸는지 기술에 달렸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내심, '물고기가 와야 미끼를 무는 거니까 순전히 운에 달린 게 아닐까' 선입견을 가지고 물은 건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운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기술이라고요.
다가감, 집중력, 인내, 아주 미세한 움직임도 알아차리는 섬세함과 민감함, 최적의 순간을 포착해 낚아챔, 밀고 당김, 힘 조절...
어부의 일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모든 일과 노동에는 나름대로의 영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걸 발견하면 일상이 새롭고 경이로운 영성의 장이 되고, 간과하고 무시하면 지루하고 피곤한 소모적 일터일 뿐이겠지요.
'그물, 배, 아버지'
(마태 4,20.22)
부르심을 받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곧바로 버린 목록입니다.
'그물'은 생계 유지의 직접적 도구이고, '배'는 그보다 좀 더 규모 있고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운송 수단도 되는데, 둘 다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기를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자산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혈연으로 묶인 일차적 가족관계입니다.
이 모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세상 원리와 혈연에 집착하는 삶을 초월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지상 원리에 자신을 묶기보다 천상 원리에 속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고요.
당시 한창 노동 중이던 그들이 그 순간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소홀히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해방자 메시아의 출현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열망하고 꿈꾸면서 일상에 충실히 몸담고 있던 중이었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본질인 선교 사명의 원리를 들려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 10,17)
먼저 말씀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하느님의 뜻을 말씀과 행동으로 전하십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듣는 이의 귀뿐만 아니라 마음도 울립니다.
가르침과 기적뿐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까지도 선포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로마 10,15)
이 선포를 들은 이는 믿게 됩니다.
말씀이신 성자와 그분이 이루신 하느님 나라를 믿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친히 희생되신 구원자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아들인 말씀이 목 끝까지 차올라 이를 선포하러 달려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 존재로 들은 말씀이 그의 심장에서 타오르기 때문에 그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 10,10)
그의 믿음과 고백이 울려퍼지면, 들은 누군가의 귀와 마음에서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가 충실히 채워오던 일상의 자리에서 그 선포를 껴안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고백하러 또 달려나갈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의 고리는 파견과 선포와 믿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일상을 채워가는 가운데 믿고 듣고 파견되고 고백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세례와 함께 성령의 인장을 받은 우리는 존재 전체로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정체성과 실존을 무시하지 않고 함께 끌어안으셨기에, 우리는 온 존재로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우리의 선포는 온 존재로 이루어집니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화답송)
그러니 말주변이 없다고 숫기가 없다고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빛, 미소, 손짓, 말투, 움직임, 관심, 기도, 눈물과 한숨에서도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주님의 충실한 제자이고 사도인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누구인가? '>
동창 신부와 공항엘 가는 길이었습니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려고 트렁크 문을 열었는데 안 열렸습니다.
열쇠로 트렁크 문을 열어 보려 해도 안 열렸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원인을 알았습니다.
자동차의 기어가 주행 상태에서는 트렁크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자동차의 기어를 주차로 해야만 트렁크는 열렸습니다.
자동차의 안전을 위해서 주행 중에는 트렁크가 열리지 않도록 해 놓았습니다.
은행의 계좌도 그렇습니다.
본인이 입금했어도 비밀번호를 모르면 찾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가야 할 하느님 나라도 그럴 겁니다.
나의 경험, 나의 능력, 나의 직책, 나의 외모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은 11월 30일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으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묵상하며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너희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걸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함께 해 주었다.
너희 중에 가장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베드로 사도의 동생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름이 ‘반석’이라면 안드레아 사도의 이름은 ‘남자다움, 용기’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안드레아 축일을 지내면서 제가 아는 안드레아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 분은 평신도로서 복음화 학교를 통해 많은 사람을 신앙의 뜨거움으로 인도하였던 정치우 안드레아 선생님입니다.
저는 1991년에 복음화 학교와 인연을 맺었으니 33년이 되었습니다.
2002년에서 2005년 그리고 2011년에서 2018년까지 10년 동안 담당 신부로 함께 하였습니다.
복음화 학교는 1단계부터 5단계의 과정이 있습니다.
매월 기도회 미사와 후원회 미사가 있습니다.
단계를 마치면 피정과 미사가 있습니다.
저는 미사에 함께 하였고, 성지순례를 같이 다녀왔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각 단계는 모두 평신도 강사들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졸업생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사람은 강사로서의 교육을 다시 받습니다.
자신이 들었던 복음의 기쁨을 학생들에게 전하는 강사가 됩니다.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강사들은 세상을 향해 던졌던 그물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됩니다.
평생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정 치우 안드레아 선생님께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한 분은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입니다.
저는 2002년부터 2005년 그리고 2013년부터 2018년까지 8년 동안 교구청에 근무하면서 추기경님을 모셨습니다.
안드레아 추기경님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리면서 제가 곁에서 본 추기경님의 모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추기경님은 소탈하십니다.
격식과 절차를 굳이 따지지 않으십니다.
마치 동네에 사시는 인자하신 어르신 같습니다.
소탈하신 만큼 함께 있는 신부들에게도 많은 걸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사제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지지해 주십니다.
추기경님은 조금 느리신 것 같지만 꾸준히 일을 하십니다.
산행을 하실 때도 천천히 오르시지만 한 번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느린 거북이가 빠른 토끼를 앞설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함 때문이었듯이, 한국교회의 어르신이 되신 것도 추기경님의 꾸준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은 기록의 달인이십니다.
저는 잊고 있었던 일들도 추기경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십니다.
저와 면담하셨을 때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적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앞선다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주셨고, 나는 어떻게 응답하였는가?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를 묵상한다면 11월의 마지막을 피정하는 기분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진짜 행복>
미국의 사회심리학과 교수인 코리 키스는 자기 수업인 ‘행복의 사회학’ 첫 시간에 학생들은 무엇을 가장 추구하는지 묻습니다.
대부분 행복을 이야기했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첫 번째 과제를 줍니다.
“오늘 오후에 밖에 나가서 행복해지는 일을 해 보세요.
그리고 그 행복이 한 시간, 더 나아가 오후 내내 이어지는지 알아보세요.”
다음날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과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오후 내내 행복감을 유지한 학생이 있었을까요?
그저 기분 좋은 하루였을 뿐, 한 시간 이상 행복을 느꼈다고 말한 학생은 없었습니다.
저 역시 이 점을 떠올려 봅니다.
행복을 한 시간 이상 쭉 느끼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하루 24시간 내내 행복하기만 하다면 이런 사람이 더 문제 아닐까요?
행복은 ‘나’의 전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가지고 있는 많은 감정 중에서 하나일 따름이었습니다.
한 가지 감정에만 쌓여 있다면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행복을 위해서 분노, 공포, 혐오, 놀람,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도 있어야 했습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다른 부정적 감정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고통과 시련 없이 행복만 쏙 뽑아서 간직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그렇게 된다면 더 큰 아픔이 자기에게 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행복만 주시지 않은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 때로는 어렵고 힘든 시간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100% 행복만을 원하고 있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형과 함께 호수에서 어망을 던지고 있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는 말씀에 곧바로 그물을 던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곧바로 따랐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이 결코 행복만 있지 않았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은 이렇게 고통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름이 진짜 행복이 되어 기쁜 소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름으로 100% 행복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진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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